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870화
-캬르르르.
-께르륵!
그리모와르가 만든 책의 미로는 난공불락이었다.
마치 책장에서 책이 뽑히듯, 몬스터들이 책장 사이사이에서 튀어나왔다. 코볼트 같은 흔한 몬스터부터, 대륙에서는 발견되지 않은 미지의 몬스터들까지.
시몬과 카쟌은 이 어지러운 책의 미로에서 몬스터들을 하나하나 쓰러트리며 전진하고 있었다.
"하아압!"
시몬은 파멸의 대검을 휘둘러 거대한 지네 몬스터를 갈라냈다. 녹색 핏줄기가 쏟아져 얼굴에 몇 방을 튀었다.
고약한 냄새에 인상을 찡그리는 것도 잠시, 더 앞에서 싸우고 있던 카쟌이 외쳤다.
"위를 조심해라, 시몬!"
시몬이 고개를 들자 책장에서 거대한 책들이 낙석처럼 우수수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시몬이 급히 뒤쪽으로 몸을 굴렀다.
쿠쿠쿠쿵!
콰콰쾅!
산사태를 방불케 하는 광경. 시몬을 쫓아오던 몬스터들이 모조리 책에 깔려 압사했다.
시몬은 숨을 헐떡이며 소매로 입가를 훔쳤다.
"하아, 후욱."
"컨디션이 그리 좋아 보이지 않는군."
시몬은 부정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발락을 상대할 때 걸린 독 때문인 것 같았다.
저항계를 펼치긴 했지만 발락의 독에 100% 면역이 이루어지는 건 아니었다. 무엇보다 암서에 맞아서 온몸이 몇 번이고 죽음까지 갔던 게 문제였다.
데스나이트의 '비아 돌로로사(Via Dolorosa)'를 이용해서 버티긴 했지만, 몸의 피로는 쌓였고 면역체계도 무너졌다.
지금 이렇게라도 몸을 움직일 수 있는 건 거의 피어 덕분이었다.
[크흐흐! 힘들면 쉬어라, 소년! 내가 몸을 움직이겠다!]
"쉰다고 몸이 나아질 것 같진 않아요, 피어."
시몬이 다시 바닥에 꽂아 넣은 파멸의 대검을 붙잡았다.
"빨리 이 임무를 끝내고, 여기서 빠져나가 치료를 받는 게 최선이에요."
[그렇긴 하다만, 이 미로는 너무 방대하군!]
시몬과 카쟌은 미로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안 해본 게 없었다. 파멸의 대검으로 책장을 통째로 베어보려고도 했지만 책장이 너무 크고 깊어서 실패했다.
위로 올라가는 것도 여의치 않았다. 그들이 올라가는 만큼 책장도 끝없이 높아졌으니까. 마치 살아 있는 벽 같았다.
"전형적인 시간끌기용 트릭이다."
으적!
카쟌이 다가오는 몬스터 하나를 주먹으로 박살 내며 말했다.
"이대로 미로를 헤매다간 늦는다. 여기가 로크섬의 이면세계라고 한다면, 혹시 그리모와르가 있을 만한 곳으로 추정되는 장소가 있나?"
"네."
시몬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우리 학교 도서관이겠죠. 거기가 그리모와르의 근거지일 거예요."
키젠의 중앙 도서관은 그리모와르가 가장 오랫동안 아지트로 사용했던 장소다. 무엇보다 시몬은 그녀의 초대를 받아 도서관의 이면세계에 갔을 때, 몇몇 흑마법 장비들을 본 적이 있다.
폭주한 발락의 상태가 좋지 않았다. 그리모와르가 발락을 어떻게든 할 생각이라면 당연히 장비나 기구가 많이 있는 도서관에 있을 확률이 높았다.
[크흐흐! 하지만 아마 도서관까지 쭉 이런 미로가 펼쳐져 있겠지!]
피어가 말했다. 시몬도 동의하듯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로크섬은 꽤 방대한 크기의 섬이고, 발락과 결투했던 경기장과 중앙 도서관까지는 거리가 제법 됐다.
"중앙 도서관에서 바로 이 공간으로 넘어왔다면 좋았을 텐데요."
* * *
같은 시각.
바로 그 중앙 도서관으로 향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학생회 멤버들과 로레인, 세르네는 레오나드의 안내에 따라 최단 거리로 이동했고, 얼마 걸리지 않아 도서관에 도착했다.
방금 키젠 전역에 피난 대피령이 떨어졌기에 도서관에는 아무도 없었다.
"네에?"
놀란 메이린이 목소리를 높였다.
"이번 사태의 범인이 그리모와르 선배님이라구요?"
"쉿, 목소리가 커."
레오나드가 입술에 손을 올렸다. 로레인도 의문스러운 듯 팔짱을 꼈다.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시죠?"
"내 눈으로 봤으니까."
레오나드는 자신이 겪었던 일들을 설명했다.
처음에 레오나드는 그리모와르를 끌어들일 생각으로 그녀와 시몬의 만남을 주선했다.
그녀는 교내에서 발락을 견제할 수 있는 유일한 강자였으니까.
하지만 정작 시몬과 함께 그녀를 만난 자리에서, 레오나드는 그녀의 영역에서 쫓겨났고 시몬과 그리모와르 단둘이 담판을 짓게 되었다.
그리고 밖으로 빠져나온 시몬에게 자초지종을 물어보니, 시몬은 무척 미안해하는 얼굴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선배님. 안에서 무슨 이야기가 있었는지는 말씀드릴 수 없어요.
-아니, 왜?
-그게 그리모와르 선배가 우리를 돕는 유일한 조건이었거든요.
결과적으로는 그리모와르의 협력을 얻어내긴 했지만, 그때부터 레오나드는 그리모와르가 미심쩍다고 생각했다.
1학년 시절부터 같은 반이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고, 말수는 적지만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갑자기 그녀에게 뭔가 다른 꿍꿍이가 있을 수도 있단 의심이 불쑥 들었다.
그리고 바로 오늘, 시몬과 발락의 명예로운 결투를 앞둔 순간.
레오나드는 그리모와르가 갑자기 경기장 밖으로 몰래 빠져나가는 걸 발견했다. 레오나드는 조용히 그녀의 뒤를 밟았고, 이내 그녀가 하수인들을 피해 발락과 시몬이 있는 학생 대기실로 가려고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뭔가 수작이 있을지도 모른다. 레오나드는 그녀를 뒤쫓았다.
하지만 그리모와르는 은밀기동이 특기인 네크로맨서였고, 평범한 소환술사인 레오나드는 경비 하수인들을 따돌리는 데 조금 더 시간이 걸렸다.
빙 돌아서 그리모와르를 쫓아가고 있는데, 이번에는 난데없이 땀에 푹 젖은 채 달려오는 카쟌과 마주쳤다.
-오, 카쟌! 오랜만.......
-그리모와르를 봤나.
대뜸 그렇게 묻는 카쟌은 무척 심기가 날카로워 보였다.
-방금 학생 대기실 쪽으로 가는 것 같은데.
-제길.
카쟌이 이를 갈며 몸을 날렸다.
-당장 여기서 빠져나가라, 레오나드. 여긴 위험하다.
-뭐? 잠깐만! 뭐라도 설명을 해주고......!
카쟌은 더는 조심스럽게 움직일 여유도 없다는 듯 유리창을 와장창 박살 내며 뛰어나가 버렸다.
레오나드도 뒤쫓으려 했지만, 유리창 깨지는 소리를 들은 하수인들이 레오나드를 발견하고 '저기 있다!' 하고 쫓아왔다.
결국 카쟌 대신 그가 쫓기는 꼴이 됐다.
"와, 진짜!"
거기까지 들은 딕이 짝! 하고 손뼉을 쳤다.
"카쟌은 늘 그런 식이에요! 내가 1학년 때 룸메이트여서 아는데, 자기 일만 중요하지 절대 남한테 무슨 일인지 이야기를 안 해준다니까요! 어쩐지 동병상련이 느껴지는......."
그렇게 내뱉은 직후, 잔뜩 집중해서 듣고 있던 여학생들이 닥치라는 듯 싸늘한 눈으로 딕을 노려보았다.
시몬의 안위가 걸린 일이라 그런지 그녀들은 모두 무척 예민해 있었다.
딕은 바로 찌그러졌다.
"계속하세요, 선배님."
메이린이 거의 명령조로 말했다.
레오나드는 가볍게 헛기침하며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그래서 어떻게 어떻게 다시 경비들을 따돌려 대기실 쪽으로 들어왔는데, 멀리서 카쟌의 비명 비슷한 소릴 들었어."
소녀들의 표정이 긴장감으로 물들었다.
"그리모와르에게 당한 건가? 늦게나마 그쪽으로 가봤지만 카쟌과 그리모와르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지. 잠시 후에 시몬과 발락이 경기장으로 나가고 있었고, 나는 시몬에게 상황을 설명하려다 뒤따라온 하수인들에게 붙잡혀서 대기실에 머무르게 됐어."
물론 레오라드면 힘으로 하수인들을 제압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렇게 해버리면 일이 너무 커져 버리기에 일단은 상황을 기다리기로 했다.
그런데 대기실의 창문으로 보니 경기가 무척 살벌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발락의 맹독 때문에 1차 관중석 결계가 박살 나고, 외부에서 내부를 볼 수 없게 되었다. 심지어 발락의 라이프 게이지가 0이 되었는데 심판은 무슨 일인지 경기를 중단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스으.
지금까지 보이지 않던 그리모와르가 갑자기, 시몬과 발락이 싸우고 있는 경기장에 제 발로 걸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뭔가 일이 벌어지고 있다. 말려야 한다. 결국 레오나드는 소환수를 꺼내 문을 박살 내고 지키고 있던 하수인들을 억지로 제압한 뒤 뛰어나갔다.
그러나 경기장에는 이미 아무도 없었다.
"여기까지가 내가 본 상황이야."
"......."
레오나드의 말에 주위가 무거워졌다.
다들 이 상황을 각자의 추측대로 생각해 보는 것 같았다. 그러다 제일 먼저 운을 뗀 건 카미바레즈였다.
"그럼 그리모와르 선배님의 목적은 뭘까요?"
"나도 그걸 잘 모르겠네."
레오나드가 팔짱을 꼈다.
"확실한 건 그때 발락이 시몬을 죽이려고 했단 사실이야. 이전의 에이젤과의 승부에서도 시몬을 죽이려고 했지."
"자, 그럼 두 가지 추측을 해볼 수 있겠네요."
진중하게 듣고 있던 메이린이 손가락 두 개를 펼쳤다.
"첫째, 그리모와르가 시몬을 구하고 발락을 막기 위해, 혹은 싸움을 말리기 위해 두 사람을 자신의 공간으로 끌어들였다. 둘째는-"
"처음부터 공범일 가능성."
세르네가 툭 내뱉었다. 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향했다.
"발락이 시몬을 죽이려고 한 걸 그 여자도 알고 있었겠죠? 하지만 대놓고 경기장 한복판에서 학생을 죽일 수는 없으니까, 이면 세계에서 아무도 모르게 처리하려 했을 수도 있겠네요."
"아니, 그게 무슨 소용인데! 바보야!"
메이린이 미간을 좁히며 소리쳤다.
"결국 시몬이 실종된 채 밖으로 나오면, 추궁당하는 건 그 두 사람일 텐데!"
"이제 곧 졸업이기도 하고, 키젠에 더는 볼일이 없을지도? 혹은 다른 목적이 있을 수도 있고."
"나도 다른 목적이라는 데 무게를 두고 싶어."
이번엔 로레인이 말했다. 그녀가 교복 스커트를 붙잡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엇보다 카쟌도 같이 사라졌다는 게 이상해. 카쟌은 뭔가를 알고 있었고, 그리모와르도 카쟌이 방해된다고 판단했으니 자신의 영역으로 데려간 게 아닐까?"
"자, 자. 레이디 여러분, 열 오르기 전에 정리 좀 하겠습니다."
짝. 짝.
딕이 손뼉을 치며 모두의 시선을 집중시켰다.
"그리모와르의 목적은 솔직히 '지금 단계에는 알 수 없다'. 이게 맞아. 하지만 그게 뭐가 중요해? 우리는 목적이 뭐든 간에 그리모와르를 쫓아야 해."
딕이 다시 레오나드를 보았다.
"그래서, 굳이 대피령이 내려진 지금 중앙 도서관까지 우리를 데려온 이유가 궁금한데요. 레오나드 선배님."
"나는."
레오나드가 목 뒤로 손을 움직이더니 이내 목걸이 하나를 그들에게 보였다.
"그리모와르의 이면세계로 갈 수 있는 방법을 알아."
"!"
이내 일행들 모두 중앙 도서관의 끄트머리에 도착했다. 그리고 레오나드의 설명대로 한 명씩 한 명씩 손을 잡고 일렬로 쭉 섰다.
"그럼 간다."
레오나드가 진지한 얼굴이 되어 후배들을 돌아보았다.
"절대로 손을 놓치지 마. 바로 이탈당할 수 있으니까."
모두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일행들과 레오나드는 서로 손을 붙잡은 채 아무도 없는 도서관을 천천히 빙빙 돌기 시작했다.
* * *
"......."
같은 시각.
그리모와르는 무척 분주했다. 공중에 떠오른 발락을 향해 온갖 포션을 붓고 복부에는 피로 그린 거대한 마법진을 그려두었다.
'암서가 완전히 폭주하기 전에 뽑아내야 해.'
그녀가 땀을 닦으며 발락을 응시했다.
"조금만 더 버텨요. 발락."
우우우우우우웅-!
바로 그때.
허공이 일그러지며 시뻘건 포탈이 일어났다. 이내 그 안에서 눈 하나가 펼쳐졌다.
[무슨 일인가, 그리모와르.]
그녀가 몸을 돌려 그쪽으로 다가갔다.
이내 발락을 보고 입을 달싹이다가 가볍게 한숨을 쉰 뒤 말했다.
"어르신이 원하는 아이를 내 영역에 구속했다. 맹렬히 저항하는 것 같은데 지원이 필요하다."
포탈의 붉은 눈이 일그러졌다.
[곧 킬로바니안을 보내겠다.]
그녀가 눈을 부릅떴다.
"뭐? 킬로바니안을? 그렇게 할 것까진......!"
[뭔가 문제라도 있나.]
그녀가 발락을 바라보았다가 이내 눈을 한번 감고 말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우우우우우우!
포털이 아우성치기 시작했다.
그녀는 잔뜩 긴장한 얼굴로 침을 꿀꺽 삼키며 뒷걸음질 쳤다.
그리고.
터벅. 터벅.
누군가 포탈에서 걸어 나오고 있었다.
'최악이야.'
그녀가 손바닥을 펼쳤다.
정말로 최악의 상황에서는 싸워야 할지도 모른다. 그녀는 조용히 흑마법을 준비하며 포탈을 주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