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888화
"망할!"
엘리사가 거칠게 숨을 토해내며 팔을 휘둘렀다.
그녀는 유령선 두 척을 컨트롤하면서, 동시에 비공정에 갑판 위로 올라오는 언데드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화력전이라면 키젠 전체에서도 손꼽히는 네크로맨서답게, 가히 전투원 몇십 명의 역할을 홀로 수행하는 모습이었다.
"장차 셀린 가의 가주가 될 사람이자, 왕국의 재상까지 오를 나 엘리사가 타고 있는 배를!"
그녀가 허우적거리며 팔을 뻗었다.
"해적 따위에게 빼앗겨 버리면 내 정치적 체면과 입지는 무너진다아아아아!"
퍼어어엉!
퍼어엉!
유령포대가 연신 불을 뿜으며 사슬을 딛고 다가오는 언데드들을 몰아냈다. 그러나 저 언데드 함선은 칠흑의 한계도 없는 건지 끝도 없이 칠흑 사슬을 펼쳐서 비공정에 연결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키야아아아아아악!
하늘을 날아다니는, 저 괴상한 뼈만 남은 생선에 타고 있는 해적들이 문제였다.
일종의 비행 기병 같은 느낌이었는데, 비공정 근처를 빙빙 돌면서 사람들을 공격하다가 함 내로 파고들려 했다.
단순 화력은 자신 있지만 명중률은 떨어지는 그녀의 흑마법 특성상, 상대하기가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은 뭐 하는......! 꺄훙?"
갑자기 선체가 삐거덕거리며 크게 기울어졌다.
중심을 잃은 엘리사가 기울어진 갑판에서 굴러떨어져 나무 벽에 머리를 박고 말았다. 쿵- 하는 소리가 꽤 크게 울려 퍼졌다.
"아, 진짜!"
정수리 한쪽이 부어오른 그녀가 울상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슨 상황인가 확인해 보니, 유령선을 공격하던 언데드 함선이 갑자기 포문을 돌려 비공정을 직접 공격하고 있었다. 갑판 곳곳에 폭연이 뿌옇게 일어났다.
"비공정이 포격에 맞고 있잖아! 배 운전 똑바로 안 하냐고!"
"엘리사 님!"
엘리사의 명령으로 함 내를 지키고 있던 한 네크로맨서가 뛰어 들어왔다. 볼품없이 바닥에 퍼질러 있던 엘리사가 얼른 태연한 척 자세를 고쳐 앉아 귀밑머리를 넘겼다.
"함선 내부에도 언데드들이 들어 왔습니다! 함장이 함실에서 도망치려다가 쓰러져 정신을 잃은 것 같습니다!"
"뭐요?"
그녀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니, 밖은 나 혼자 막을 테니까 안에만 잘 지키라고 했는데! 그거 하나 못 해서- 아악!"
콩!
일어나던 그녀가 벽에 붙어 있던 나무 간판에 머리를 부딪히고 말았다.
잠시 엘리사가 머리를 부여잡은 채 쪼그려 앉아 말 없는 고통을 인내하는 시간이 있었다.
보고하러 온 네크로맨서는 진땀을 흘리며 못 본 척해주었다.
'우수한 사람인지 아닌지 모르겠군.'
조금 뒤에 정신을 차린 엘리사가 이번엔 간판이 없는 방향으로 일어났다.
"그럼 달리 비공정을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없어요?"
저 망할 칠흑 사슬 때문에 도망칠 수는 없겠지만, 최소한 포문의 방향에 비공정이 들어오면 선체를 움직여 포격 방향에서 벗어나는 운전은 해야 했다.
하지만 그녀의 물음을 들은 네크로맨서는 고개를 저었다.
"함장과 부함장뿐인데, 아시다시피 두 사람 다......."
"아우! 그럼 어떻게든 함장을 지켰어야죠! 돈 받고 일하는 용병이면서 어쩜 이렇게 무능하......!"
그녀가 뭐라 잔소리를 하는 사이 또 포격이 쏟아졌고, 비공정이 기울어졌다. 엘리사가 '꺄후훙?' 소리를 내더니 바닥에 철퍼덕 엎어졌다.
영 체면을 세우기 어려웠다.
"젠장!"
이마가 빨개진 그녀가 코에서 쌍코피를 줄줄 흘리며 고개를 쳐들었다. 네크로맨서가 흠칫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어떻게든 할 테니 일단 가서 홀이나 막아! 저기 사람들 비명 안 들려요?"
"예, 옛!"
네크로맨서가 후다닥 뛰어갔다. 형편없고 무능한 용병들이라고 생각하며 엘리사가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침 포격이 끝나고 해적 언데드들이 갑판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엘리사!"
바로 그때.
언데드 함선에서 싸우던 시몬이 본 아머를 입고 비공정으로 내려왔다. 놀란 엘리사가 헐레벌떡 뛰어 들어왔다.
"뭐야 너! 언데드 함선에서 싸운다면서 왜 다시 이리로 내려와?"
"비공정이 계속 공격당하니까 잠깐 상황을 보려고."
시몬이 그렇게 말하며 엘리사의 얼굴을 가리켰다.
"너 코피 나."
"나, 나도 알아! 그보다......!"
엘리사가 함장이 기절해 버렸다는 자초지종을 설명했고, 시몬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네가 운전하면 안 돼?"
"어엉?"
"비공정이나 유령선이나 운행법은 비슷할 것 같은데."
멍해 있던 엘리사가 갑자기 턱을 짚으며 고민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음. 하긴, 생각해 보니까 내 유령선을 조종하던 유령을 조타석에 깃들게 하면 어떻게든......."
"그럼 그렇게 부탁해. 그동안-"
시몬이 앞으로 걸어나갔다.
"갑판 방어는 내가 맡을게."
"아, 알았어!"
엘리사가 후다닥 함 내로 뛰어갔다. 이내 그녀가 사라지고, 주위의 다른 네크로맨서들이 없는 걸 확인한 시몬이 제 얼굴을 붙잡았다.
뚜두둑-
얼굴을 덮고 있던 거미줄이 뜯겨 나오며 에르제베트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느새 갑판 주위로 해적 언데드들이 우르르 몰려들고 있었다.
[그럼.]
에르제베트가 손끝을 세워서 허공을 살짝 눌렀다.
[군단의 힘을 너무 쓰면 들킬 테니, 가볍게만 도와줘 볼까요?]
스릉-
그녀가 허공을 꾸우욱 누르자, 은빛 실선이 빛에 반사되며 흔들렸다.
이내 실선들이 연쇄반응을 일으키듯 허공에 번뜩였고, 그것을 모르는 해적 언데드들이 입을 벌리며 에르제베트에게 뛰어올랐다.
그 결과는 참혹했다.
촤아아아아아악!
쩌어어억!
언데드들의 매끈하게 갈라진 육편이 사방으로 나뒹굴었다. 피가 튀고 팔다리가 날아다녔다.
에르제베트는 태연한 표정으로 걸음을 옮기며 갑판 위의 언데드들을 절단하고 다녔다.
* * *
[크하하하하!]
한편, 비공정의 기관실 내부에서는 피어가 돌아다니고 있었다.
갑옷에 들어간 그가 거대한 대검을 젓가락처럼 휘둘러대고 있었는데 흉포한 언데드들이 속수무책으로 갈라졌다.
피어에게 구출된 기관실 직원은, 자리에 주저앉은 채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시대에 안 맞게 웬 기사 코스프레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시대의 기사가 돌아오더라도 저자만큼 강하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삐유웅! 삐융!
피어의 어깨에 올라가 있던 라미아도 짜리몽땅한 팔을 휘저으며 응원하는 중이었다. 그때 라미아의 이마에 파직거리는 스파크가 튀기 시작했다.
[이런!]
피어의 고개가 돌아갔다.
라미아의 칠흑을 막아주던 아티팩트가 한계에 다다랐는지 깨지려 하고 있었고, 그 타이밍에 맞춰 라미아가 공중으로 떠올랐다.
-삐유우웅!
콰르르르르릉!
수분으로 이루어진 물벼락이 라미아의 몸에서 방출돼서 수십 갈래로 날아갔다.
가히 어마어마한 화력. 물벼락이 일어나고 전방에 가득했던 언데드들이 가루가 되어 사라져 버렸다. 곳곳에서 쿠쿵! 하고 벽이나 천장이 박살 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배가 부서지겠군! 흥분을 가라앉혀라 라미아!]
-뺘앙!
라미아는 힘을 한 발 쏜 뒤에 만족한 듯 느물거리며 피어에게 몸을 기댔다. 피어가 등을 돌렸다.
[방금 본 건 잊어라. 혹시나 발설하면-]
피어가 그렇게 말하며 뒤를 돌아보니 그 기관실 직원은 입에 거품을 문 채 기절해 있었다. 옆머리가 살짝 날아간 걸 보니 물벼락에 맞을 뻔한 모양.
피어가 크흐흐! 웃으며 파멸의 대검을 고쳐 쥐고 천장을 보았다.
[자, 이제 이 정도 난관쯤이야 혼자서도 해결할 수 있겠지. 소년!]
* * *
언데드 함선 갑판.
이곳에서는 치열한 전투가 펼쳐지고 있었다. 언데드가 된 무수한 해적들이 무기를 들고 달려들었지만 에메랄드색 관을 쓰고 걸어가는 시몬의 주위는 친위대들이 빈틈없이 지키고 있었다.
[이 배는 나의 육체다!]
쿠쿠쿵!
해적 선장 에크레시가 팔을 세우자, 나무판자를 뚫고 언데드 촉수가 튀어나왔다.
[이곳에서 나를 이길 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시몬은 가볍게 허리를 젖혀 촉수를 피한 뒤, 손끝을 세웠다. 바닥에서 일어난 오버로드의 금속 칼날들이 촉수들을 모조리 베어버렸다.
에크레시의 표정이 살짝 굳었지만 금방 다음 공격을 준비했다.
허공에 연달아 마법진을 펼친 뒤, 주위의 오크통들을 걷어차 엎질렀다. 오크통 안에서 온갖 종류의 액체들이 쏟아져나오더니 시몬의 주위로 요동쳤다.
<프레스테르(Prester)>
에크레시가 주문을 외우자, 검은 액체가 시몬을 중심으로 휘몰아쳤다. 뒤이어 에크레시가 성냥에 불을 붙인 채 던졌다.
화르르르르르륵!
순식간에 검은 파도에 불이 붙으며 불의 폭풍으로 변했다. 후끈한 열감과 열기에 언데드들이 움츠리며 물러났다.
그러나.
화아아악!
갑자기 화염이 걷히며, 그 안에서 새로운 슈트를 입은 시몬이 모습을 드러냈다.
커다란 용의 투구를 쓰고, 자줏빛이 은은하게 감도는 본 아머를 걸친 시몬의 모습. 그의 주위에는 비늘을 연상케 하는 보호벽이 빈틈없이 펼쳐져 있었다.
<시몬 오리지널 - 드래고니안>
<봉마 결계>
[끈질기긴! 놈을 죽여라!]
-끼이이이이이이!
화염이 걷히자 언데드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시몬이 허리에 손을 올리더니 자줏빛으로 파직거리는 혼돈 줄기들을 뽑아 연달아 던졌다. 그것은 하늘에서 알 수 없는 궤적을 그리다가 배의 전역에 떨어졌다.
<카오스 스팅어>
쿠르르르릉!
콰라라라랑!
줄기에 직접 맞은 언데드는 즉사, 거기에 혼돈의 효과가 넓고 크게 퍼져나가며 다른 해적 언데드들에게 닿았다. 언데드들이 갑판에서 비틀거리며 쓰러지거나, 혼란에 빠져 머리를 바닥에 처박았다.
순식간에 주위를 무력화시킨 시몬이 곧장 바닥을 박차고 돌진했다.
[바다에는 내 적수가 없었거늘! 재미있구나!]
에크레시도 괴팍하게 입을 벌리며 전신에 칠흑을 휘감았다. 그의 몸에 문신이 일렁이며 효과가 발휘되었다.
신체를 강화시키는 금기의 흑마법.
꾸우우우웅!
이내 두 남자가 동시에 내지른 주먹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이어서 서로에게 더더욱 거리를 좁히며 육탄전으로 넘어갔다.
마투는 가히 호각. 서로의 팔다리가 격렬하게 얽히고 부딪힐 때마다 광풍이 몰아쳤다.
[크하아아압!]
에크레시가 곰처럼 휘두른 팔을, 드래고니안 슈트를 입은 시몬이 손바닥을 펼쳐 받아냈다. 에크레시가 팔을 회수하며 다시 공격하려고 했지만, 붙잡힌 팔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잡아서 어쩌겠다는!]
그때 시몬만 드래고니안 슈트에서 불쑥 빠져나왔다. 그대로 시몬의 주먹이 에크레시의 복부를 다져대기 시작했다.
두두두두두두두!
맹렬한 연타에 에크레시의 얼굴과 몸이 일방적으로 얻어맞았다. 에크레시가 오른팔을 빼내려고 했지만 드래고니안 슈트가 붙잡은 채 버티고 있었다.
[크웁!]
에크레시가 거칠게 발차기를 날려 시몬을 물러나게 한 뒤, 반대쪽 팔로 드래고니안의 팔을 내리쳤다.
와르르르 무너지던 드래고니안 슈트 조각들이 즉각 다시 시몬에 몸이 착착 달라붙었다.
[학생회장이라더니 싸우는 방법은 아는구나! 간만의 호적수다!]
터업!
흥분한 에크레시가 입고 있던 옷을 붙잡더니 힘껏 찢었다.
지켜보던 시몬의 두 눈이 커졌다. 심장이 있어야 할 공간이 텅 비어 있었다.
[하지만 네가 이곳에 들어온 순간부터, 내 승리는 확정되어 있었다. 말하지 않았나.]
그가 자신의 전신을 이용해 저주마법진을 펼쳤다.
[이 배는 나의 몸이라고!]
<말레디코(Maledíco)>
단일 기술 중에서는 꽤 높은 수준의 고위 탈진 저주.
시몬이 즉각 드래고니안의 비늘을 주위로 펼쳤다.
<봉마 결계>
시몬은 봉마 결계로 자신을 보호했다고 생각했으나.
"?!"
갑자기 다리에 힘이 꺾이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시몬의 이마에 식은땀이 흘렀다.
'봉마 결계를 펼쳤는데, 어째서 저주에?'
말레디코는 단일 저주인데, 날아오거나 사출되지 않았다.
시몬의 눈이 굴러갔고, 그제서야 이 배의 전체의 색이 변한 걸 느꼈다.
'역시 배 전체에 걸리는 범위형 저주인가!'
[이 배 안에서 나는 최강이다.]
그가 두 팔을 펼쳤다.
[아까의 유령선처럼 멀리서 포격으로 싸웠어야지! 네크로맨서가 섣불리 남의 영역에 들이닥치는 것부터가 경험 부족이라는 이야기다!]
<위크니스(Weakness)>
<헬프레스(helpless)>
<패럴라이즈(Paralyze)>
에크레시가 연달아 저주를 자신의 몸에 걸었다. 그러자 그 저주는 배 전체에 퍼져 나가고, 그 위에 올라탄 시몬에게 계속해서 영향을 주고 있었다.
저주가 거듭될수록 시몬의 몸에 점점 힘이 빠져나갔다.
"이런 금지된 비술은 처음이네."
시몬이 감탄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역시 학교 밖에서의 경험도 중요한 것 같아. 배우거나 당한 적이 없으니까."
[경험? 이 상황에서도 여유를 부리나!]
그런 모습이 거슬리는 듯 에크레시가 인상을 썼다.
시몬이 빙긋 웃었다.
'에르제, 엘리사랑 다른 네크로맨서들은?'
그녀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명령대로 모두 홀에 들어가도록 했사와요. 거미줄 결계로 빈틈없이 덮었답니다.]
'그럼 됐어.'
에르제베트의 결계가 완성되었으니 이제 들킬 이유가 없었다.
시몬이 갑자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쪽의 반칙을 쓰면, 이쪽도 반칙을 쓰려고."
[뭐라?]
다중 저주에 걸린 상태.
거기에 끊임없이 몰려드는 해적 언데드들 사이에서, 시몬은 눈을 감고 스위치를 켰다.
'나는 뭐든지 할 수 있다.'
화아아아아아아아악!
시몬을 중심으로 순백의 빛이 점멸했다. 언데드들이 눈부신 섬광에 비명을 지르며 물러났다. 에크레시가 인상을 확 썼다.
[말도 안 되는!]
네크로맨서의 몸에 경건한 신성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고고한 성인처럼 차분한 걸음걸이로 걸어온 시몬이 제 가슴에 손을 올렸다.
"큐어(Cure)."
그의 몸에 정화마법이 연달아 펼쳐지며 스스로 저주에서 벗어났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쏴아아아아아아-
해적선 곳곳에 황금빛 밀들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수확의 정수의 힘으로 발현된 힘이었다. 순식간에 어둡고 침침한 해적선에 금빛 밀밭이 펼쳐졌다.
칠흑과 군단만 있는 게 아니었다.
학교 밖으로 나온 이상, 신성 또한 시몬의 힘.
"자."
시몬이 경건한 목소리로 말했다.
"엑소시즘."
하늘에서부터 신성의 벼락이 떨어져 해적선의 언데드들에 작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