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891화
재상과의 이야기는 무사히 끝났다.
얼마나 뼛속부터 엄격하고 프라이드가 높은 사람인지 상대하는 게 무척 피곤했다.
시몬은 통신 수정구의 연결이 끊기자마자 침대에 상체를 눕히며 참았던 숨을 토해냈다.
"제, 제법인데."
여전히 여운이 남아 있는지, 엘리사가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말했다.
"우리 아버지랑 그렇게 대화가 되는 사람은 처음 봐, 키젠에 있어야 할 이유를 이번 사태에 엮어서 풀어나간 것도 대단했고."
잠시 말을 멈춘 그녀가 시몬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너도 혹시 정치교육 같은 거 받았냐?"
"전혀."
시몬이 피곤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냥 배짱 좀 부렸을 뿐이야."
"흠- 음음, 암튼 인정."
그녀가 새침하게 시선을 피하며 입술을 삐쭉였다.
"네게 정치니 대의니 운운했던 거, 부끄럽네. 넌 누구보다 정치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
'내가?'
전혀 아닌데.
뭔가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어쨌거나 고마워. 이번에 도와준 일, 절대 잊지 않을게. 미래 셀린가 가문의 가주에게 빚 하나 져놨다고 생각해!"
"그거 영광이네."
"다, 당연하지!"
그녀가 제 가슴을 탕탕 치며 콧대를 높였다.
"세상 사람들이 셀린가에 말을 붙일 기회가 쉬운 줄 아니? 애초에 우리가 학교 동기가 아니었음 일어나지도 않았을 일이야!"
시몬은 그저 웃으며 창밖을 보았다.
햇빛이 쨍쨍한 아침이었다.
두 사람 다 잠시 숨을 고르며 편안한 정적 속에서 생각에 잠겼다.
"오늘 오후엔 새로운 텔레포트 마법진에 도착하겠네."
창밖을 보던 엘리사가 말했다. 마침 그 생각을 하고 있던 시몬이 말을 받았다.
"엘리사, 넌 이제 어디로 갈 거야? 에크레시 해적단 일은 해결됐잖아."
"그래도 갤리번에 가려고. 해적들이 에크레시만 있는 것도 아니잖아. 또 에크레시가 결사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 찾아보기도 해야 하니까."
"그렇네."
엘리사가 갤리번에서 그 상관관계를 찾아준다면, 이번 사태 해결에 지분이 있는 시몬도 자연히 임무평가의 성과로 연결되는 셈이었다.
엘리사가 시몬을 보았다.
"근데 혹시 싸우면서 뭐라도 짐작 가는 거 없었냐? 힌트가 있다면 조사에 도움이 될 것 같은데."
"짐작이라."
시몬이 자신의 오른쪽 눈 위에 손가락을 올렸다.
"눈이 이상했어."
"응?"
"에크레시 선장도 그렇고, 비공정에서 붙잡았던 그 청소부도 그렇고."
한쪽 안구가 일그러진 삼각형으로 바뀌어 있던 모습.
그 눈을 보는 순간 소름이 돋았던 게 아직도 기억에 선명했다.
엘리사는 시몬이 말한 이야기를 빠짐없이 노트했다.
똑똑.
그때 방문의 노크 소리가 들렸다. 시몬이 일어나서 문을 열어주니 에르제베트와 갑옷에 들어간 피어가 서 있었다.
"시몬, 밖에 키젠에서 온 하수인이 와 있사와요!"
-뺭뺭!
밑에서 기어 온 라미아가 강아지처럼 소리 냈다. 시몬은 피식 웃으며 라미아를 품에 안고 걸음을 옮겼다.
* * *
키젠의 하수인에게 현재 상황을 모두 보고했다.
전에 붙잡았던 비공정의 위치를 노출했던 청소부도 하수인에게 무사히 인계했다.
함장과 승객들은 몇 번이고 허리 숙여 감사의 인사를 표했다.
-저희 승객들의 목숨을 구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키젠 체제에 대해 의문을 품고 있었는데, 제 착각이었네요.
-부디 여정에 행운이 가득히 하시길.
얼굴이 익은 승객들과 악수를 하고 안부도 주고받았다. 부자들은 자꾸만 폴렌티아 가문으로 귀중품 따위의 선물을 보내려고 하기에 시몬이 거절했다.
그렇게 이들과 헤어지고 걸음을 옮겼다.
다만 목적지가 아닌, 가까운 선착장에서 내렸기에 아직 목적지인 텔레포트 마법진으로 이동하려면 시간이 조금 걸렸다.
근방까지 하수인들이 타고 온 마차로 이동했다가, 칠흑이 회복된 엘리사가 유령선을 띄워서 함께 산을 넘었다.
그렇게 오후에 무사히 텔레포트 마법진에 도착.
이별의 시간이 다가왔다.
"먼저 갈게, 엘리사."
"어, 응."
시몬이 텔레포트 마법진 위에 올라섰다. 엘리사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인상을 굳혔다.
"근데 너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생각해 봐. 진짜 리버론에 갈 거야?"
현역 네크로맨서들도 기피할 만큼 위험지역이다. 텔레포트 마법진을 준비하던 하수인도 한마디 했다.
"마침 리버론도 전보다 상황이 조금 더 심각해졌다는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본부에서도 되도록 그쪽은 피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정보가 실시간으로 갱신되는 모양이었다.
시몬이 하수인을 보며 말했다.
"텔레포트는 가능하죠?"
"아, 예. 대영지인 만큼 가능은 합니다만......."
"그럼 괜찮아요, 가주세요."
엘리사가 '저 고집' 하고 중얼거리며 고개를 휘휘 저었다. 하수인도 더 말하지 않고 텔레포트 마법진을 작동시켰다.
"그럼 출발하시겠습니다."
엘리사가 팔짱을 꼈다.
"2주 뒤에 우리가 살아 있다면, 학교에서 봐 시몬."
시몬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학교에서 보자."
곧 눈부신 빛무리와 함께, 시몬의 발밑이 두둥실 떠올랐다.
* * *
이제 텔레포트 마법이 끝나는 게 느껴진다.
붕 떠오르는 감각이 가시고, 후덥지근한 공기와 열감을 느끼며 시몬은 천천히 눈을 떴다.
그리고 도착하자마자 목도했다.
"?!"
하늘 전체를 뒤덮은 시뻘건 항성을.
그것은 하늘을 벌겋게 불태우며 이쪽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사고와 육체가 얼어붙는다.
눈을 뜨자마자 펼쳐진 비현실에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꿈인가? 아직 텔레포트 마법진이 진행 중인 건가?
[소년!]
사념을 통해 머릿속으로 직접 울려 퍼지는 피어의 목소리가 간신히 뇌를 깨운다. 발끝에 힘이 들어가며 간신히 뒤로 한걸음 물러선다.
뒤에서는 사람들의 비명과 아우성이 울려 퍼지고 있다.
아이들의 울음소리, 죽음을 앞둔 절망의 외침이 교차한다.
난데없이 하늘을 뒤덮은 불덩이가 떨어지는 곳.
이곳이 볼드윈 왕국 북부의 핵심, 50만 인구가 사는 웅장한 대영지.
리버론이다.
'움직여!'
시몬의 눈과 다리에 힘이 들어간다.
'제발 움직여!'
호흡이 차오르고 뇌가 깨어난다.
난데없이 내려오는 저 불의 재해에 맞서서, 시몬이 뭘 해야 할지 고민하는 그때.
쩌정!
다행히 현장에 있는 누군가가 먼저 움직여 주고 있었다.
내려오는 불의 항성 중앙에 빛이 번쩍였다. 그 빛을 중심으로 하늘에 투명한 유리막이 펼쳐졌다.
불의 재앙이 투명한 막과 같이 깨져나가며, 하나의 덩어리가 무수한 잔해들로 갈라져 도시에 떨어지기 시작했다.
'제대로 막은 게 아니야!'
세상에 불의 비가 내렸다.
화력을 보면 저 잔해도 충분히 위험했다. 시몬이 앞으로 뛰어나가며 아공간을 열었다.
"모두 나와!"
아공간에서 스켈레톤들이 즉각 빛살처럼 뛰쳐나왔다. 시몬의 눈동자가 전후좌우로 정신없이 움직였다.
불의 잔해가 떨어지려는 위치.
그리고 이대로 떨어지면 위험한 사람들의 위치.
2층집 가족 세 명, 길거리에 쓰러진 남자 한 명, 하늘을 보고 기절한 아주머니 하나, 시장가에 숨어 있는 꼬마 하나.
시몬의 손이 망설임 없이 움직였다. 뼈들이 쏜살같이 날아가더니 사람들의 몸에 착착 달라붙으며 그들을 위험장소에서 끄집어냈다.
'크으읍!'
시몬이 두 팔을 거칠게 잡아당기자, 도시의 사방팔방에서 사람들이 날아와 화염이 떨어지지 않을 분수대 쪽으로 강제 피난시켰다.
'아직 더 구할 수 있어! 구할 수 있을 때까지......!'
시몬이 팔이 휘두르자 뼈들이 재차 날아갔다. 그러나.
화르르르륵!
꽈아아아앙!
퍼어어엉!
두 번째 사람들을 포착하기도 전에 불의 잔해가 내려앉기 시작했다. 집들이 폭삭 주저앉고 불타올랐다. 정원에 불이 붙으며 세상이 온통 화염으로 뒤덮인다.
'크으으윽!'
피부가 아릿할 만큼 후끈한 열풍을 견디며 시몬이 다시 본 아머를 보냈다.
불타고 무너질 것 같은 주거지 곳곳에서 사람을 본 아머로 끄집어내 분수대로 옮긴다. 이런 와중에도 불은 계속해서 떨어지고 있다. 구조된 사람들은 잔뜩 움츠린 채 서로를 끌어안고 있었다.
'도착하자마자 이게 다 뭔데?'
정신이 하나도 없었지만 몸이 알아서 움직였다. 근방에 사람들을 대부분 구해낼 즈음에, 불꽃의 잔해가 다 내려온 건지 먹먹한 하늘이 보인다.
'하아, 하아.'
하지만 아직 끝이 아니었다. 숨을 헐떡이던 시몬이 고개를 돌려보니, 앞에서 새까만 무언가가 도시의 성벽을 넘어 이리로 걸어오고 있었다.
'안 돼.'
이번엔 몬스터들이었다.
그것도 도시 근처에서는 보기 힘든, 깊은 숲이나 산 위에서나 사는 산악 몬스터들.
이들이 함성을 지르며 인간의 영역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방금의 화염으로 이 영지의 방어체계는 십중팔구 무너졌을 터, 이대로 공격당하면 끝장이었다.
시몬이 이를 악물고 몬스터들이 몰려오는 쪽으로 달려갔다.
"다들 돌아와!"
촤르르르르르!
촤르르르륵!
도시 곳곳에 있던 뼈들이 쏟아져 들어와 스켈레톤의 형태로 돌아와 시몬과 함께 달렸다.
"거기!"
그때 마침 도시를 달리는 한 중년 네크로맨서가 보였다. 그 또한 머리 위에 하늘을 나는 비행형 언데드 두 기가 뒤따르고 있었다.
"처음 보는 얼굴인데 누구요?"
"키젠에서 왔습니다!"
"아, 그거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 마음 같아선 인사라도 하고 싶지만......."
그가 훌쩍 뛰어올랐다. 불에 타서 전소된 건물이 그가 있던 자리에 떨어지고 있었다.
"그럴 틈이 없구만! 사람들을 대피시켜 주시고, 가능하다면 몬스터의 진군만 늦춰주시오!"
"네!"
시몬이 달려갔다. 곳곳에서 건물이 불에 타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아!"
그때 무너져 내리는 건물 옆으로 한 노인이 절뚝거리며 걷고 있었다. 시몬이 그리로 몸을 날려 노파를 구했다.
쿠쿠쿠쿠쿠궁!
바닥에 불에 휘말린 건물이 무너져 내렸다. 노인이 켈룩켈룩 기침을 해댔다.
"괜찮으세요?"
"다 죽을 거여."
노인이 제 손바닥을 얼굴에 문질렀다.
"드래곤이 노했어! 다 죽을 게란 말이요!"
'어?'
시몬의 눈이 예리하게 빛났다.
드래곤이라는 말이 처음으로 나왔다.
'역시 뭔가 벌어지고 있단 소린데.'
시몬은 근처에 도망치는 청년들에게 노인을 부축하도록 부탁하고는 다시 몬스터 무리를 향해 뛰어갔다.
-케르르르르르륵!
-그어어어!
시몬의 눈이 일그러졌다. 오크를 비롯해 오우거나 트롤까지 끝도 보이지 않을 만큼 많았다.
'확실해, 전부 산 깊은 곳에 사는 몬스터들이야.'
짙은 녹색의 피부색. 대부분 깊은 산맥에 살아서 인간의 영역까지는 내려올 일이 거의 없는 몬스터였다. 그리고 이들은 도시에 대한 파괴 행위를 저지르고 있었다.
굶주려서 인간을 잡아먹으려는 하는 행위가 아니라. 집을 부수거나 구조물을 박살 내고 있다. 몬스터의 생리를 안다면 저런 행동은 어색하다.
'어떻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시몬이 새까맣게 몰려드는 몬스터의 군세 앞에 버티고 섰다.
'싸우겠어.'
시몬의 친위대 마법이 발동한다. 그의 등 뒤에서 서 있는 스켈레톤들이 모두 에메랄드빛 검과 망토로 무장했다.
그야말로 대군을 막는 결사대를 방불케 하는 모습.
이내 시몬이 공격명령을 내리려는 찰나.
-조심하게.
귓가에 한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리고 갑자기 발밑이 축축해졌다.
'물?'
쏴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갑자기 도시 한복판에 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이내 대량의 파도가 골목 곳곳에서 쏟아져나와 도시를 침공한 몬스터들을 쓸어냈다.
'칠흑 수류계 마법!'
흥분해서 폭주한 몬스터들이 앞으로 나가려 했지만, 거센 물살을 이기지 못하고 뒤로 벌러덩 쓰러졌다. 물살은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계속해서 몰아치며 모든 몬스터들을 휘감거나 뒤로 밀어냈다.
'누구지?'
수백 톤의 물을 자유자재로 조종하고 있다.
상당한 실력 수준의 네크로맨서가 이곳에 있는 게 틀림없다.
쿠르르르르르르르르르!
이번에는 하늘이 움직이고 있다.
시몬이 고개를 들자, 도시의 대류가 흔들리며 하늘에 거대한 태풍이 일어났다. 방금의 그 수류계 못지않은 수준의 방대한 흑마법이었다.
도시를 휩쓸던 검은 물들도 일제히 공중으로 올라갔다. 마치 도시 곳곳에서 용오름이 일어나는 모습.
도시 위의 공기는 물을 머금고 점점 더 회전하며 거대한 태풍으로 발전했고, 곧바로 몬스터가 있는 방향으로 폭우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쏴아아아아아아아-!
가히 자연현상을 방불케 하는 광경.
진군하던 몬스터들이 하나둘 픽픽 쓰러지기 시작했다.
가까이 있던 시몬도 비를 맞았다. 시몬은 천천히 팔을 들어 올려 손바닥에 고인 빗물을 보았다.
그냥 비가 아니다.
'이 기술은......!'
비에 맞은 몬스터들 모두 잠들어 있었다.
"하하하하하! 이게 누구신가!"
시몬의 고개가 얼른 돌아갔다.
거대한 망토를 어깨에 두른 덩치의 남자가 이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오고 있었다.
"파......!"
저 방대한 체격, 저 굵은 목소리, 시몬은 단번에 누군지 알아볼 수 있었다.
"판타서스 선배님?"
"하하하하하하! 시몬 후임! 역시 자네도 여기로 왔나!"
시몬은 어안이 벙벙했다.
이 사람이 왜 여기에?
그때 판타서스가 입을 쭉 찢으며 하늘을 향해 외쳤다.
"여기 좀 보시게나! 반가운 얼굴이 있군!"
그러자 쏟아지는 폭우로 인한 뿌연 안개 속에서 누군가 툭 내려왔다.
보통보다 조금 작은 키에 왜소한 몸집, 로브를 걸쳤고 한 손에는 우산을 든 채 비를 막고 있었다.
"...오랜만이야."
그 목소리를 들은 시몬은 소름이 끼치는 걸 느꼈다.
이내 그가 물에 젖은 후드를 벗으며 얼굴을 드러냈다. 미소년처럼 둥글고 잘생긴 얼굴에, 소심하게 내리깔린 눈썹은 여전했다.
"......에이젤 선배님까지?!"
전대 학생회장들이 이곳.
리버론에 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