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893화
생지옥으로 변한 리버론에 각자의 목적으로 모여든 네크로맨서 용병들.
그리고 판타서스는 '원정대'를 조직하기로 했다.
그는 키젠 측의 의뢰를 받아 '결사 제거 및 안정화' 임무를 수행하는 중이었다. 대의나 명성은 물론, 키젠으로부터 막대한 자금을 운용 받기로 했으니 원정대를 꾸릴 자격이 충분했다.
그동안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고 여러 모험을 통해 실력을 증명한 네크로맨서라는 점도, 용병이라는 떠돌이 늑대들을 이끌기에 주요한 요소였다.
"후임도 원정대에 들어와 주겠다니, 이거 한시름 놨군!"
한편 시몬은 판타서스와 함께 길을 걷고 있었다.
에이젤은 중간에 다른 일 때문에 빠져나갔다. 정보 수집을 위해 따로 움직인다는 것 같았다.
"당연히 도와드려야죠. 저도 이번 사태 때문에 여기 온 건데요."
"결사에게 무엇을 빼앗는지 평가하는 임무평가라고 했나! 음! 부총장께서 상당히 고단수를 두셨군!"
호탕하게 웃는 판타서스의 모습은 여전했다.
어쩐지 전보다 더 어른스러운 느낌이 들기도 했다.
"기왕 이렇게 됐으니 자네가 원정대 면접도 도와줄 수 있겠나? 키젠 학생회장이 합류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더더욱 이슈가 될 걸세!"
"어...... 제가 껴도 괜찮을까요?"
"자네만큼 뛰어나고 주도적인 삶을 사는 네크로맨서라면 충분히 자격이 있지! 음!"
텅! 텅!
시몬의 어깨를 연신 두들긴 그가, 갑자기 고개를 불쑥 들이밀며 웃었다.
"역시 이 몸의 눈이 틀리지 않았군! 발락을 쓰러트리고 기어이 정식 학생회장이 되다니 말이야!"
"주위 사람들의 도움을 받은 덕이죠."
"겸손하기까지 하군! 훌륭하네!"
두 사람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목적지에 도착했다.
성곽과 해자로 둘러싸인 군사기지였는데, 병사들이 앞을 지키고 있었다.
병사 두 명이 창으로 입구를 가로막으며 물었다.
"무슨 용무로 오셨습니까."
"네크로맨서 판타서스 휴 이켈과, 키젠의 학생회장 시몬 폴렌티아요."
판타서스가 가슴을 펴고 말했다.
"지금 당장 영주님을 만나 뵈어야겠소!"
아무런 약속도 없이 당당히 대영주와의 면담을 요구하는 판타서스의 모습.
대영주가 보고 싶다고 해서 쉬이 볼 수 있는 인물은 아니겠지만, 그라면 가능할 것 같았다.
경비병들은 자기들끼리 잠시 숙덕거리더니 말했다.
"영주님은 지금 성의 지하에 계십니다."
그 말을 들은 판타서스의 표정이 굳었다.
"그 무너진 영주성을 말하는 것이오?"
* * *
리버론이 이 지역의 중심지 구실을 하는 대영지인 만큼, 영지 내에는 일국의 국왕이 기거할 법한 호화로운 '영주성'이 있었다.
그러나 시몬이 경비병의 안내를 따라 목도한 영주성의 상태는 끔찍했다.
크고 둥근 영주성의 지붕은 완전히 무너져 있었으며, 벽이나 바닥이 대부분 전소된 폐허였다. 군데군데 검게 타들어 간 시체들은 산 채로 불타 죽은 고통을 표현하듯, 이리저리 뒤틀린 채 곳곳에 쓰러져 있었다.
판타서스가 인상을 굳혔다.
"이런 곳에 영주님을 모신단 말이오? 아까 그 군사기지나 저택으로 거처를 옮기는 걸 권하오만."
"......영주님의 뜻입니다."
경비병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절대로 뜻을 꺾지 않으십니다."
영주 본인이 여기서 살겠다는데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시몬과 판타서스는 계단을 걸어 내려가 불탄 폐허가 된 영주성의 지하로 들어갔다.
지하 쪽은 하늘에서 내려온 브레스의 피해는 적었지만, 끔찍하기는 매한가지였다.
전투의 흔적이 여실했다. 곳곳에 몬스터들의 시체가 가득했으며, 맞서 싸우던 하인들과 병사들의 시체가 강을 이루고 있었다.
시몬은 고약한 냄새에 인상을 찌푸렸다.
"이쪽입니다."
두 사람은 삼엄한 경비를 통과해 지하 3층까지 내려왔다.
축축하고 곰팡이 냄새가 가득한 이곳.
창고로도 쓸 법한 공간에 값비싼 붉은 카펫이 깔려 있고, 크고 호화로운 의자가 위치해 있었다.
그 위에 앉아 있는 건 꽤 젊은 나이의 남자였는데, 퀭한 눈에 수염 난 얼굴의 그가 뭔가를 쓰다듬고 있었다.
알고 보니 시체의 두개골이었다. 시몬은 그 두개골 위에 왕관 같은 게 올라가 있는 걸 확인했다.
"아버지, 잠깐만."
그렇게 중얼거린 그가 두개골에 가볍게 입을 맞춘 뒤 고개를 들었다.
"어서 와요, 판타서스. 그리고 키젠의 학생회장. 이야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시몬과 판타서스가 각각 가슴에 손을 올리며 예를 다했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시몬의 눈동자가 살며시 떠졌다.
'이 사람이 리버론의 영주.'
겉보기에는 전쟁의 피로로 꾀죄죄할 뿐 멀쩡해 보이는 인상이었지만, 결핍과 불안이 실린 가느다란 목소리는 마치 시한폭탄처럼 느껴진다. 정서적으로 위태로워 보인다.
"아, 판타서스! 내 아버지를 죽인 드래곤의 목을 가져오셨습니까?"
그렇게 묻는 젊은 영주의 눈이 초롱초롱했다. 판타서스가 고개를 내저었다.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영주님. 드래곤을 죽이면, 인류와 드래곤 간의 큰 전쟁이 일어날 겁니다."
"아, 전쟁이요. 전쟁! 그렇군요!"
영주가 과장된 동작으로 손짓하며 한쪽 눈을 살짝 윙크했다.
"리버론은 지금도 전쟁 중입니다! 많은 사람이 죽었죠. 여기서 전쟁을 또 해봐야 더 나빠질 것도 없지 않겠습니까? 고작 전쟁이 두렵다는 이유로 제 간절한 부탁을 외면하시는 겁니까? 영웅 판타서스!"
"리버론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대륙 전체가 화마로 불탈 겁니다."
판타서스가 냉정하게 말을 이었다.
"그것이 대륙을 혼란으로 물들이고 있는 '결사'가 원하는 바임을 왜 모르십니까."
"결사요? 음, 결사."
젊은 영주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흔들었다. 손끝으로는 희끄무레한 턱수염을 긁적이던 그가 맑은 눈동자에 광기를 가득 머금은 채 말했다.
"그게 우리랑 무슨 상관이죠?"
"......예?"
"댁들 키젠은 너무 많은 걸 보고 재고 걱정하려고 해서 문제입니다. 지금 당장, 눈앞에 있는 현실들을 나열해 보자구요 우리."
그가 손가락을 세워 천장을 가리켰다.
"4주 전, '첫 번째 화마'가 내려오고 성의 지붕이 무너져서 영주인 제 아버지가 즉사했습니다."
"......."
"전신이 깔려 으스러지는 바람에 목만 간신히 건졌죠. 제 아버지뿐만 아니라 무수한 시민들이 산채로 불타 죽었습니다. 이 지역에서 가장 번화했던 도시가, 우리 가문이 평생을 일구어왔던 모든 것이 한순간에 폐허가 됐습니다."
그의 손가락이 꿈틀대듯 움직였다.
"지금 이 순간에도 '미친용'은 우리에게 지옥불을 뿜어내고, 몬스터들에게 도시를 파괴하라 명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당하고만 있죠. 왜? 드래곤이니까. 잘못해서 드래곤을 죽이기라도 하면 드래곤 세계 전체를 적으로 돌릴 수 있으니까. 더 큰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르니까."
쾅!
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애원하듯 소리쳤다.
"그게 대체 나랑 무슨 상관이라는 겁니까! 당신은 근래 이름 높은 영웅 판타서스 아닙니까! 수많은 지역들을 구해냈지 않습니까! 그럼 우리도 구해주십쇼! 예? 왜 우리한테만 이러는 겁니까! 왜 우리는 세계를 위한 희생양으로 방치하는 겁니까!"
그가 머리를 쥐어뜯으며 절규하듯 울부짖었다.
"우리도 구해달라고!!"
판타서스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시몬은 그 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보았다.
고통받아 절규하는 대영주와, 더 큰 전쟁을 막으려는 영웅.
시몬은 어느 쪽의 입장도 이해할 수 있었다.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십시오. 내일 원정대를 꾸릴 겁니다."
판타서스의 말에, 영주가 털썩 힘없이 자리에 앉았다.
"미친용을 없애러 가주는 겁니까?"
"......전쟁을 막으러 가는 겁니다, 영주님."
판타서스가 솔직하게 답했다.
"아마 다른 드래곤들도 상황을 주시하고 있겠죠. 그들과 협상해 보겠습니다."
흐흐흐흐흐.
영주가 음울하게 웃었다.
"협상이라, 결국 그 미친용을 죽일 생각은 없어 보이는 것 같은데요."
"......."
"미안하지만 이제는 전쟁을 막을 수 없습니다, 판타서스. 왕국에서 군대가 내려올 겁니다."
시몬과 판타서스의 눈이 동시에 커졌다.
대륙 전체가 결사 때문에 혼란에 빠진 지금, 군까지 움직일 여력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군대라니?
"우리 가문이 가진 이 지방의 모든 권리를 왕국에 반납하는 조건으로, 꽤 규모 있는 군대가 움직여 미친용을 죽이러 올 겁니다."
"어째서 그리하셨습니까!"
결국 판타서스의 분노가 터지고 말았다.
"군대로는 드래곤을 잡을 수 없습니다! 아까운 젊은이들의 목숨만 희생될 겁니다!"
"그러니까- 그게. 내. 알 바냐고요."
이미 모든 걸 내팽개치고 포기한 영주가 자조 섞인 미소를 지었다.
죽은 아버지의 두개골을 어루만지는 그의 모습에는 더 이상 미래에 대한 일말의 의욕도 보이지 않았다.
영주성의 천장이 무너지고 가문의 비극이 찾아온 순간, 그는 과거에 붙들리고 종속당한 인간이 되어버렸다.
현재와 미래는 아무래도 좋은 것이다.
"왕국군이 도착하기 전까지 앞으로 4일 남았습니다."
그가 네 손가락을 펼쳤다.
"그전까지 원정대든 뭐든 해보십시오. 왕국군이 도착하면 전쟁을 피할 수 없을 겁니다. 그들이 미친용을 죽여주며 더할 나위 없고, 전멸당한다면 수천 명이 죽은 대사태이니 무조건 전쟁. 죽음의 마녀와 키젠도 움직이지 않을 수 없겠죠. 그게 협약이니까요."
"......."
"발버둥 쳐보세요, 판타서스. 그리고."
영주의 시선이 돌아갔다.
"키젠의 학생회장."
"......."
하하하하하하!
자조 섞인 영주의 웃음소리가 공허하게 영주성 지하에 울려 퍼졌다.
* * *
"이렇게까지 미쳐 있는 줄은 몰랐군!"
영주성에서 빠져나오는 길, 판타서스가 격분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대로는 상황이 최악으로 치달을 뿐일세! 원정대 구성을 서둘러야겠어."
"동감입니다, 선배님."
시몬도 고개를 끄덕였다. 판타서스가 그의 어깨를 짚었다.
"우선 나는 다방면으로 움직여 군대의 진전을 지연시키고 전쟁을 막을 방도를 찾아보겠네. 자네는 내일 아침 바로 에이젤 후임과 함께 원정대 면접을 진행하게나!"
판타서스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원정대 면접일을 당겼다.
그런데.
"둘이서요?"
대장인 판타서스 없는 면접이라니. 당황한 시몬이 말을 이었다.
"...원정대에 참가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선배님의 명성을 보고 오는 걸 텐데, 괜찮을까요?"
"하하하하! 물론일세! 내 안목으로 자네를 회장직에 추천했으니, 회장직이 된 자네도 틀림없이 사람 보는 안목이 있을 게야!"
'그게 무슨 논리예요.'
시몬은 당혹스러웠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판타서스는 호탕하게 웃어넘겼다.
"너무 걱정하지 말게나! 자네보다 한 학년 위였던 에이젤도 있으니 알아서 잘해줄 걸세! 자네는 그의 보필만 해줘도 충분하네!"
시몬이 머리를 긁적였다.
"그렇게 되면 좋겠는데요."
* * *
다음 날 아침이 밝았다.
판타서스가 미리 계획해 둔 대로, 리버론의 '용병 사무실'을 빌려서 원정대 면접을 진행하기로 했다. 시몬은 말끔하게 관리한 학생회장 코트를 어깨에 걸치고 창밖을 보았다.
'줄이 엄청 기네.'
지원자들이 상당히 많았다.
목숨을 걸고 영지 밖으로 나가야 하는 만큼, 판타서스가 모집금을 꽤 두둑하게 걸었다. 그 부분에 혹한 많은 네크로맨서들이 참여의사를 밝힌 것이다.
'음, 이 정도로 많이 올 줄은 몰랐는데.'
교복 넥타이를 고쳐 맨 시몬이 거울을 보았다. 누군가를 평가하고 뽑는 일은 처음이라 긴장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에이젤 선배님은?'
같이 면접을 보기로 한 에이젤이 숙소에 보이지 않았다. 시몬이 주위를 휙휙 둘러보며 에이젤을 찾았다.
"에이젤 선배님!"
당장 20분 뒤가 면접인데 면접관이 없으면 어쩐단 말인가. 주위를 찾아보던 시몬이 용병대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 에이젤을 봤는지 물어보았다.
-에이젤 님인지는 모르겠지만, 후드를 눌러쓴 사람이 야외 화장실 쪽으로 가는 모습을 보긴 했는데요.......
시몬은 곧장 그쪽으로 달려갔다.
문을 덜컹 열자 화장실 방에서 한 쪽문만 잠겨 있는 모습이 보였다.
"에이젤 선배님! 거기 계시죠?"
그 한마디에 안에서 뭔가 난리법석인 소리가 들렸다. 시몬이 한숨을 한번 쉬고는 그쪽으로 다가갔다.
"판타서스 선배님 말씀 들으셨잖아요. 오늘 같이 원정대 면접관을 맡기로......."
휘이이이이잉-!
갑작스러운 돌풍이 불어닥치며 시몬의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그가 '윽' 하고 두 팔을 들어 얼굴을 가렸고, 잠시 뒤 바람이 그쳤다.
시몬은 화장실에 인기척이 사라졌다는 걸 깨닫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저벅 저벅.
로브를 눌러쓴 덩치 큰 사내가 옆으로 걸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시몬은 조용히 미소 지은 뒤, 그쪽으로 다가가 그의 어깨를 붙잡아 눌렀다.
"에이젤 선배님!"
바로 바람 빠진 풍선처럼 키가 쪼그라들며 에이젤이 고개를 홱 돌렸다.
"시, 시몬!"
후드가 걷히며, 미소년 느낌의 앳된 얼굴이 드러났다. 하지만 눈썹은 겁먹은 강아지처럼 축 내려가 있고, 동공에는 두려움이 가득했다.
"나 갑자기 배가......."
"방금 화장실에 계셨잖아요."
"갑자기 숙소에 두고 온 게......."
"사람을 보내서 가져다 달라고 할게요."
크읍.
에이젤이 울상을 지으며 침을 삼켰다.
"아, 알잖아! 나 사람들 앞에 나서는 건 자신 없는 거! 나는 쫌 빼줘!"
시몬이 쓰게 웃었다.
'......이 사람, 전혀 성장하지 않았어.'
후배의 시선을 느꼈는지 에이젤의 얼굴이 새빨갛게 변했다.
"이, 이렇게 원래 모습으로 돌아다니는 게 나로서는 최대한의 변화야! 사람 성격은 원래 쉽게 안 바뀐다니까!"
에이젤은 늘 완벽하려던 가짜 모습을 내려놓고, 자신을 있는 그대로 남들 앞에서 드러낼 줄 알게 되었다.
그건 확실히 괄목할 만한 변화라고 시몬도 인정했다. 하지만 선천적으로 소심한 성격만큼은 아직 바뀌지 않은 모양이었다.
'실력은 그렇게 뛰어나시면서.'
시몬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사무실 직원이 소리쳤다.
"학생회장님! 이제 곧 면접 시작합니다!"
"네, 갈게요!"
시몬이 에이젤을 바라보았다.
한창 바쁠 판타서스에게 더 걱정을 늘리고 싶지는 않았다. 어떻게든 그를 데려가야 했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선배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