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896화
판타서스 원정대는 부지런히 나아갔다.
파도를 타고 평지를 지나, 산맥에서부터는 일일이 몬스터들을 뚫고 나가야 했다.
산맥 몬스터들의 움직임도 정상적이지 않았다. 사냥도 하지 않고 기본적인 생리 활동도 전무했다. 하나같이 정신이 팔린 것처럼 굴다가, 원정대를 발견하니 입에 거품을 물고 달려들 뿐이었다.
-전부 용언의 명령에 지배당한 게로군.
원정대에서 가장 연장자인 검사 노인이 그렇게 말했다.
몬스터들은 가끔 성 밖의 농가에 내려오거나, 산을 올라오는 모험가 및 상단을 공격하는 게 보통이었으나, 지금은 오로지 인간에 대한 적대감만 남았다.
리버론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든 게 드래곤과 관련되어 있었다.
-빡세다, 빡세.
-이러다 산의 몬스터를 전부 상대해야 할 것 같은데.
지금부터는 지구력 싸움이었다. 원정대 전원이 목숨을 걸고 쏟아지는 몬스터 무리를 돌파했다.
시몬도 본 아머나 좀비의 시체폭발, 오버로드 위주로 싸우며 칠흑을 온존했다. 이 앞에 어떤 싸움이 기다리고 있을지 몰랐으니 최대한 힘을 아끼라고 판타서스가 일러두었다.
그렇게 한숨도 자지 못하고 수십 시간 동안 꼬박 산맥을 오르고 달린 끝에.
"여기로군."
그들은 드래곤이 살고 있다는 회색 산 위를 오르고 있었다.
나무나 풀은 거의 보이지 않았고, 전부 잿더미나 화산 부산물이었다. 신발로 바닥을 슥슥 긁어보면 고약한 먼지가 뿌옇게 피어올랐다. 뒤에 등반하는 원정대원들이 콜록거리며 기침을 해댔다.
식물도, 몬스터도, 어떤 생명도 살 수 없는 잿더미의 산.
일행들은 그 위를 힘겹게 오르고 있었다.
"힘내세요."
"고, 고마워."
바위 위로 올라간 시몬이 에이젤의 손을 잡아주었다. 바람의 힘을 받고 있는지 그의 몸이 쑥 들렸다.
펄럭 펄럭-
긴 망토를 휘날리며 가장 선두에 선 판타서스가 전방을 굽어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도착한 것 같군."
"네?"
원정대원들의 시선이 향했다.
잿더미 산의 정상 앞.
하늘이 자주색이었다. 그 위로 조금 더 고개를 들면 더 높은 곳에 푸른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저 범위 모두가 결계입니다. 상당한 수준이군요."
시몬의 팀원인 중절모 신사가 말했다.
"어, 저기."
이 원정대의 유일한 여성 대원이 앞을 가리켰다.
"사람이 있어요!"
이 산은 분화구 산이다.
그리고 분화구로 가는 길에 다섯 명의 사람이 바위나 바닥에 태연히 앉아 있었다. 이런 곳에 사람이 살고 있다니, 뭔가 이상했다.
"다들 물러서시오. 그냥 사람이 아니오."
판타서스가 팔을 뻗으며 경고했다.
"저건 드래곤들이오."
"!"
모두의 눈이 급격히 커졌다. 시몬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저 사람들 전부 다?'
결계를 지키듯 앉아 있던 그들도 원정대를 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초록색이나 파란색 등 다채로운 머리색에, 인간은 물론이고 엘프, 고블린 같은 다양한 종족들의 구성이었다.
하지만 하나같이 범상치 않은 아우라를 풍겨대고 있었다.
"미천한 존재들이 기어코 여기까지 왔는가."
저벅 저벅.
그중에서 녹색 머리카락의 인간 남성이 앞으로 걸어왔다.
날카로운 눈매에 긴 턱선, 몸에는 호화로운 긴 로브를 둘렀으며, 손에는 장갑을 끼고 있었다.
"물러가라. 너희들 같은 미물이 와서는 안 되는 곳이다."
딱 봐도 적대적인 분위기를 물씬 풍겼다. 시몬은 시작부터 대화가 난항을 겪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내가 이야기해 보겠소."
원정대원들에게 그렇게 말한 판타서스가 앞으로 나왔다.
"나는 판타서스 휴 이켈! 이 원정대의 대장이자, 리버론의 비극을 목도한 자요! 키젠의 의뢰를 받고 이곳에 왔소!"
키젠이라는 말에 녹색 머리 남자의 눈썹이 꿈틀했다.
"인간의 도시 리버론은 그대들 중 누군가의 공격을 받아 불바다가 되어가고 있소. 많은 인간들이 죽고 다쳤으며, 지금도 고통에 신음하고 있소."
"그런가?"
녹색 머리카락의 남자가 남 말하듯 대꾸했다.
"그거 유감이겠군."
원정대원 몇 명이 빠드득 이를 갈며 무기에 손을 올렸다. 뒤에 서 있던 에이젤과 시몬이 무기를 뽑지 않도록 제지했다.
"물러가라, 미물들아."
녹색 머리의 남자가 싸늘히 내뱉었다.
"더 이상 여기서 너희들이 얻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그게 지금 댁들이 할 소리야?"
결국 화가 터졌다.
눈이 뻘게진 여성대원이 앞으로 튀어나오며 외쳐댔다. 다른 원정대원들이 말리듯 막아섰지만 그녀가 갈라진 목소리로 외쳤다.
"나는 한순간에 남편을 잃었어! 아무런 전조도 없이 갑자기 일어난 화재에! 집이 무너지는 바람에 죽었다고! 어떻게 그렇게 무책임할 수 있어? 당신들이 리버론에서 어떤 참극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기나 해?"
그녀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전부 다 당신들이 죽였어! 당신들이 초래한 비극이야! 아무런 죄없이 열심히 살아가던 우리한테 대체 왜 이러는데?"
녹색 머리 남자의 표정이 싸늘하게 변했다.
"너희 필멸자들은 태어난 순간부터 죽을 운명이지 않나. 어차피 죽을 목숨, 언제 어떻게 죽든 그게 우리와 무슨 상관이지?"
"당신-! @$@^&!"
끔찍한 욕설을 퍼붓던 그녀의 목소리가 중간에 흩어져 사라졌다. 에이젤이 매질이 되는 공기를 조종해서 소리가 흩뿌려지도록 조절한 것이다. 다른 대원들은 그녀를 필사적으로 뜯어말렸다.
"그럼 관심이 있게끔 이야기해 드려야지."
이번에는 시몬의 팀원인 중절모 신사가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가 시가를 입에 물고 연기를 내뿜었다.
중절모 아래로 세월의 흔적으로 피어난 주름살들이 구겨졌다.
"인간의 군대가 이리로 오고 있소. 앞으로 이틀 뒤에는 도착하겠지. 전쟁이 일어날 거요."
"전쟁?"
쿠르르르르르르!
주위의 대기가 떨리기 시작했다.
녹색 머리카락의 남자의 피부가 비늘로 뒤덮여 가고, 인간의 이목구비가 거대한 파충류의 머리처럼 길어졌다.
펄럭-!
두 날개가 태양을 순간적으로 가리듯 펼쳐지고, 이내 전신이 완전한 매끈한 녹색의 비늘로 뒤덮인다. 순식간에 그린 드래곤의 모습으로 변한 그가 입을 벌리고 포효했다.
[우리의 보호 아래에서 하루하루 살아가던 자들이, 기어코 은혜도 모르고 이빨을 드러내는가!]
쩌렁쩌렁!
고농도의 드래곤 피어가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원정대원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대로 바닥에 무릎을 꿇고 쓰러지거나 헛구역질을 하는 자들이 속출했다.
[올 테면 얼마든지 와라! 몇천몇만이 와도 전부 불태워 주겠다!]
"드래곤들이 이번 전쟁은 이길지는 몰라도, 그 뒤가 문제예요."
보다 못한 시몬이 앞으로 나왔다.
"수천의 인간이 죽게 되면 암흑연합과 키젠, 그리고 네프티스 님도 움직일 수밖에 없어요. 단순한 군대와의 전쟁이 아니라, 인류와 드래곤의 종족전쟁으로 발전할 겁니다."
[바라는 바다.]
드래곤의 세로동공이 번뜩였다.
[너희 인간들은 너무 엇나갔다. 마법사라는 족속들이 있을 때가 차라리 나았지, 네크로맨서라고 했나. 죽음의 힘을 다루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끝도 없이 기어오르는구나! 심지어 우리 동족의 시체를 얻기 위해 어린 드래곤을 노리기까지 한다던데.]
그 말에는 다른 네 명의 드래곤들도 살벌한 눈빛이 되어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냈다.
[차라리 잘됐다. 이 땅에서 너희 인간들을 모조리 말살하고 대륙을 새로이 정화하겠다!]
시몬은 속으로 탄식했다.
말이 안 통한다.
도저히 대화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서로가 가지고 있는 상식과 생각이 다르고, 서로가 서로에게 쌓인 감정과 증오가 너무 크다.
"더는 못 들어주겠습니다. 이렇게 된 이상 싸우죠, 대장."
원정대원 중 하나가 격분한 얼굴로 마법진을 펼쳤다.
판타서스가 말했다.
"몇 번이고 강조했을 텐데. 우리는 전쟁을 막으러 왔네."
"저들을 전부 이 자리에서 없애고 땅에 파묻으면, 다른 드래곤에게 알려지지도 않을 테고 종족전쟁이 일어날 일도 없을 거 아닙니까."
그렇게 말한 그의 눈이 뻘겋게 충혈되었다.
"죄 없는 사람들을 죽여놓고 뭐? 저 정신 나간 생물들과 같은 공간에서 숨을 쉬는 것조차 열이 뻗친단 말입니다!"
다른 원정대원들도 동의하듯 무기를 붙잡았다.
이성적인 판단이 불가능해지고 감정만이 앞선다.
분위기가 극도로 험악해지고, 일촉즉발의 분위기가 흐르는 그때.
"물러서세요."
새로운 인물이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천을 몸에 두른 파란색 머리카락의 엘프 여인이었다.
머리카락은 바닥에 깔릴 만큼 길었지만, 때 묻지 않았다. 천 아래로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았으며 맨다리에 맨발이었다.
"당신이 나서봐야 피차 오해가 가중될 뿐이에요."
그녀의 말에, 금방이라도 달려들 것 같던 그린 드래곤의 눈꼬리가 희미하게 떨렸다. 놀랍게도 저 성격 나쁜 드래곤이 한풀 꺾이는 모습이다.
[나는 블루 드래곤 유르이스.]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고통받은 인간들을 위해, 드래곤 세계를 대신하여 사과드립니다.]
"!"
원정대원들의 입이 하나같이 벌어졌다.
고집불통에 콧대 높은 드래곤이, 미물이라고 깎아내리던 인간들에게 고개를 숙이는 건 처음 보는 진귀한 광경이었다.
[어찌 그러는가 유르이스!]
당연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는지 그린 드래곤이 즉각 제지했다.
[저들은 필멸자다! 어차피 죽을 놈들이 조금 빨리 죽었다고 해서 왜 우리가......!]
그 말에 고개를 숙이고 있던 유르이스가 살벌한 눈빛으로 그린 드래곤을 노려보았다. 그린 드래곤이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이제야 말이 통하는 자가 나온 건 기쁘다만, 사과 한마디 들었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오."
중절모 신사가 차가운 음성으로 말했다.
시몬이 다시 싸움을 걸려는 그를 말렸고, 유르이스는 꿈틀한 그린 드래곤을 제지시켰다.
이내 시몬이 말했다.
"대화를 하죠. 우선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을 들어야겠습니다."
"예."
유르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푸르스름한 동공이 시몬을 선명히 응시했다.
"전부 설명드리겠습니다."
* * *
유르이스의 설명에 따르면, 이번 사태의 장본인은 '커록커즈'라는 이름의 조언자급 레드 드래곤이었다.
커록커즈는 드래곤 세계에 어떤 일이 있을 때 외에는, 본인이 한번 주거지로 정한 '레어'에서 벗어나지 않는 성향이었다.
그는 늘 리버론 북쪽의 산맥에 살았다. 리버론이라는 도시가 들어서기 전부터도 말이다.
그러던 어느 순간.
"커록커즈의 정신이...... 혼탁해졌습니다."
적절한 낱말을 고르던 그녀가 마지못해 그렇게 말했다.
"조언자로서, 평소처럼 현명한 판단을 내리지 못하는 모습이었습니다. 파괴에 집착하고, 분노에 잡아먹혀 갔습니다. 자기 자신을 제대로 제어하지 못하여......."
"그러니까 미쳤다는 거 아니오."
대원 한 명이 불쑥 말했다.
유르이스의 얼굴이 빨갛게 물들었고, 멀리서 듣던 그린 드래곤이 꽥 소리 질렀다.
[뭐라? 감히 미물 따위가 위대한 종족에게 무슨 망발을......!]
유르이스가 팔을 뒤로 뻗어 그를 말리고는 청명한 목소리로 정정했다.
"정신이 '많이' 혼탁해졌습니다."
"그렇군요!"
시몬이 얼른 맞장구쳤다.
그녀가 감사의 의미로 살짝 눈짓을 보냈다.
"커록커즈는 평소에 크게 상관치 않던 인간의 도시를, 갑자기 부수고 파괴하려고 했습니다. 분노와 충돌에 점점 휩쓸려가던 그는 결국 완전히 광기에 잡아먹히고 말았습니다."
세부적인 상황을 들어보니 단순히 미쳤다고 할 게 아니었다.
유르이스의 묘사에 의하면 피부가 썩어가고 몸이 문드러지며 전신에서 지독한 독기를 뿜어낸다고 한다. 위대한 레드 드래곤인 그가 독과 죽음을 뿜어내는 괴물로 변해갔다.
보다 못한 유르이스와 다른 드래곤들이 커록커즈가 밖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막았지만, 커록커즈는 하늘을 향해 브레스를 쐈고.
"그게 바로 리버론에 떨어졌다. 사람들이 말하던 '첫 번째 화마'란 말이군."
판타서스의 중얼거림에 유르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을 비롯한 여러 종족께 다시 한번 죄송한 마음뿐입니다. 우리 드래곤들도 필사적으로 막으려 했습니다. 하지만 막기는커녕 가까이 가는 것으로 독기가 옮겨붙는 터라."
그녀의 시선이 살짝 옆으로 향했다.
저 멀리 폴리모프 상태로 앉아 있는 드래곤의 두 손이 시꺼멓게 물들어 있었다.
"두 드래곤이 크게 다쳤습니다. 회복도 되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들었나? 필멸자들.]
그린 드래곤이 독기 어린 숨을 내뱉었다.
[우리라고 손을 놓고 있던 게 아니다. 애초에 나는 미천한 자들을 지키기 위해 우리 드래곤이 희생되어야 하는 상황 자체가 납득이 되질 않는단 말이다!]
드래곤 쪽에서도 피해가 나올 정도면 상당히 사태가 커지고 있는 것 같았다.
유르이스가 다시 말했다.
"결국 저희는 결계를 펼치고, 커록커즈가 이곳에서 나가 더 큰 악행을 저지르지 못하도록 막는 게 최선입니다. 그래도 가끔 커록커즈의 광기가 심해지면 결계마저도 뚫고 브레스를 날리거나 용언으로 몬스터를 조종하기도 하죠."
이번엔 에이젤이 질문을 던졌다.
"커록커즈가 왜 그렇게 미쳐...... 아니, 혼탁해졌는지 짐작 가는 바가 없나요?"
"없습니다."
그녀가 고개를 내저었다.
"커록커즈의 증세를 완화하기 위해 시도하지 않은 마법이 없습니다. 하지만 어떤 마법과 약초도 듣지 않았어요."
그녀가 손바닥을 세워 얼굴을 묻었다.
"저는 두렵습니다. 그가 결국 그의 누나처럼 될까 봐......."
"네?"
"아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실언이니 잊어주세요."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시몬의 눈이 급격히 커졌다.
방금 누나라고?
"답이 나왔잖아, 뭘 망설여."
그때 원정대원 한 명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미친용을 죽입시다. 그게 전쟁을 막고, 인간도 드래곤도 다시 행복해질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쓰레기 같은 미물들이!]
걸러 들을 수 없다는 듯, 바로 그린 드래곤도 들고 일어났다.
[드디어 본색을 드러냈구나! 역시 인간은 멸족하는 길뿐이다!]
"아니, 내가 틀린 말 했나? 댁들도 다쳤다며. 그 미친용을 죽이는 게 유일한......."
"미안하지만 그 말만큼은 저도 동의할 수 없습니다."
유르이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드래곤의 제1 원칙. 가장 큰 규율."
그제야 시몬은.
"드래곤은 드래곤을 죽일 수 없고, 드래곤을 죽게 내버려 둬서는 안 된다."
이 상황에 대한 파악이 끝났다.
"차라리 저희가 그를 말리다가 같이 오염되어 죽을지언정, 그를 죽게 둘 수는 없습니다. 모든 이야기를 듣고도 인간 여러분이 내린 결론이 커록커즈를 죽이는 것이라면, 우리도 대륙의 운명이 어찌 되든 여러분과 싸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동안 늘 유하고 인간 편을 들던 그녀가 단호하게 나오자 원정대원들도 당황해했다.
"이야기 중에 죄송하지만-"
모든 상황을 파악한 시몬이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커록커즈의 상태를 한번 볼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