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897화
그날 밤.
원정대는 커록커즈를 가둔 결계로부터 조금 떨어진 장소에서 천막을 치고 야영을 했다.
판타서스를 비롯한 몇몇은 천막이 펼쳐지자마자 드러누워 잠들었고, 시몬을 포함한 몇몇은 아직 여운이 남아 있는지 모닥불 주변에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생각해 보면, 결국 아무런 소득이 없었잖아."
원정대원 한 명이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우리가 사과 좀 듣겠다고 목숨 걸고 여기까지 온 것도 아니고. '미친용'을 죽이는 건 용납할 수 없다. 보는 것도 안 된다. 그럼 뭐 어쩌란 거야?"
시몬의 요구.
커록커즈를 보는 것도 결국 드래곤들의 완강한 반대로 거부되었다.
지난 수백 년간의 경험으로 판단했을 때 인간이란 족속은 절대로 믿을 수 없으며, 결계 안으로 들여보내면 틀림없이 무슨 사달이 날 거라는 게 이유였다.
모닥불에 둘러앉은 다른 대원들도 그리 표정이 좋지 않았다. 특히 처음에 반발했던 여성대원의 얼굴은 새까맣게 변해 있었다.
"이제 어찌할 생각인가?"
이곳에서 가장 연장자인 노인이 검을 쓸며 시몬을 바라보았다.
"우리야 이 원정대에 있으면 돈은 꼬박꼬박 들어오니 상관은 없지만, 이대로는 전쟁을 피할 수 없을 걸세."
"......."
깍지를 낀 채 생각에 잠겨 있는 시몬도 딱히 뾰족한 수가 있는 건 아니었다.
결계에 들어가는 건 거절당했고, 그렇다고 드래곤들과 싸우자니 전쟁과 파국을 앞당길 뿐이었다.
"밤이 늦었습니다."
시몬이 부스스해진 머리를 쓸어내리며 말했다.
"여기서 제 생각을 말하기보단, 내일 모두와 함께 대책을 논의해 보는 게 나을 것 같아요."
여기서 불 쬐면서 이야기를 해봐야 드래곤에 대한 분노만 더 타오를 뿐이다. 다른 원정대원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고, 이내 불침번을 남겨둔 채 하나둘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천막은 팀별로 하나씩. 푹신한 깔개를 몇 겹이고 바닥에 깔고 누우니 잿더미 위라도 잠자리는 나쁘지 않았다.
그렇게 눈을 감자마자 정신없이 잠이 들었을 즈음.
-시몬, 시몬! 일어나.
시몬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깨어났다. 익숙한 얼굴이 눈을 말똥말똥 빛내고 있었다.
"에, 에이젤 선배님?"
"쉿."
에이젤이 입술에 손을 올리며, 천막 안의 다른 두 사람을 슬쩍 돌아보았다. 이내 밖으로 나오라는 듯 손짓했다.
'벌써 내 불침번 차례인가?'
눈을 비비며 채비를 마친 시몬이 천막을 빠져나왔다.
그런데.
"어?"
판타서스와 에이젤이 완전무장 차림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판타서스가 입을 찢으며 미소 지었다.
"자네, 왔군! 그럼 출발하지."
"어, 어디로요?"
"커록커즈를 보고 싶다고 말하지 않았나."
판타서스가 옷을 추스르며 말을 이었다.
"지금 보러 갈 생각일세. 음!"
에이젤도 그렇게 됐다는 듯, 늘어지게 하품을 한 뒤 걸음을 옮겼다. 깜짝 놀란 시몬이 얼른 선배들을 뒤따르며 말했다.
"...정말 괜찮을까요?"
"많은 사람들이 죽었어, 시몬."
에이젤이 말했다.
"당장 커록커즈를 죽일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우리에겐 녀석의 상태 정도는 확인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해."
그렇게 말하며 진지한 표정을 짓는 에이젤의 모습은 꽤 근사했다.
처음 만났을 때, 안경을 쓰고 키를 높이고 완벽한 학생회장을 연기하던 그때의 아우라가 자연스레 풍겨 나오는 느낌이다.
커록커즈가 있는 결계에 도착하기에는 아직 거리가 있었기에, 시몬은 선배들에게 이런저런 키젠의 이슈들을 이야기해 주었다.
판타서스에게는 그의 여동생인 메리다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최근에 무아몽중의 힘을 완전히 각성했고, 교류전에서 당시 3학년 전체 4위였던 페르노미아를 꺾었다는 이야기까지.
"정말인가! 메리다가 그 페르노미아를!"
판타서스는 시몬의 이야기를 듣자마자 크게 웃음꽃을 피웠고.
"그 멍청이."
에이젤은 동기가 졌다는 말에 툴툴거렸다.
"하하하! 이제 내 동생도 재능이 터져 나올 때가 됐지! 음! 훌륭하군!"
"메리다한테 못 들었어요? 편지 같은 거 많이 보냈을 것 같은데."
"나야 늘 대륙을 떠돌아다니니 말일세!"
이를 드러내며 미소 짓고 있던 판타서스가 이내 조금 진지한 얼굴로 시몬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나를 그리워하고 있던가?"
"네."
"그렇군."
그가 턱을 쓱쓱 쓸었다.
"어린 시절 내 그늘이 너무 컸던 모양이야. 메리다도 조금 더 주도적인 삶을 살아야 할 터인데."
"그래도 정말 많이 좋아졌어요. 나중에 만나서 이야기해 보면 깜짝 놀랄 거예요."
그리고 에이젤에게는 발락 사태에 관해 이야기해 주었다.
물론 1급 비밀인 부분은 생략해야 했지만, 대체적인 흐름은 알 수 있을 정도로 이야기했다. 에이젤은 복잡 미묘한 얼굴로 눈을 감았다.
"......내가 '나 자신'을 잃고 남들에게 보이는 모습에만 집착할 때, 발락은 계속 나랑 승부해 줬어."
그가 길게 숨을 내뱉었다.
"발락에게 내 진짜 모습을 속인 건 맞아. 녀석의 승부욕에 동하는 '척'하던 것도 그렇고. 사실은 그 녀석이 무서웠거든."
"......."
"그래서 진실을 알게 된 발락이 내게 배신감을 느꼈던 것도 이해는 해. 하지만-"
에이젤은 눈을 감았다. 아마도 머릿속에서, 키젠 생활 동안 무수히 벌어졌던 결투의 장면들을 떠올리는 것 같았다.
"지고 싶지 않았다는 마음만큼은 진심이었어."
"아."
"실력은 꾸밀 수 없잖아? 계속 싸움을 걸어오는 발락의 태도는 분명 힘들었지만, 막상 싸우다 보면 내 자신을 온전히 토해내는 감각이 좋았던 것 같아. 그 녀석과 통했다고 생각했을 때도, 라이벌이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던 때도 분명히 있었어. 만약 그 녀석과 다시 만난다면-"
에이젤이 눈을 천천히 떴다.
"네게 가졌던 마음이 전부 거짓인 건 아니었다고, 그렇게 말해주고 싶네."
"......."
"네크로맨서로서 활동하다 보면 언젠간 만날 수 있겠지?"
시몬이 쓰게 웃으며 옆머리를 긁적였다.
"그 사람, 펜타모니엄에서 탈출해 실종됐는데요?"
"그 녀석이 죽었을 리는 없어."
에이젤이 단언하듯 말했다.
"분명히 어딘가에 살아 있을 거야."
그렇게 전 학생회장 선배들과의 이런저런 학교 이야기도 잠시, 이제는 진지해져야 할 때가 다가왔다.
저 멀리 커록커즈가 갇혀 있는 결계가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모두가 굳게 입을 다물고 기척을 없앤 채 움직였다.
"역시 지키는 자가 있군."
결계 앞에 앉아 있는 드래곤 하나가 보인다. 판타서스와 에이젤, 그리고 시몬은 은밀하게 옆으로 우회했다.
결계는 산 분화구 전체를 둘러싸고 하늘까지 닿을 만큼 방대했다. 결계 전역을 지킬 수는 없을 터, 틀림없이 빈틈은 있을 것이다.
"그런데 결계는 어떻게 뚫을 생각이에요?"
"하하하! 그거야 우리 중 가장 칠흑역학 성적이 높았던 에이젤이 어떻게든 해주겠지! 그렇지 않나 에이젤 후임?"
에이젤이 '응?' 하는 표정으로 눈을 끔뻑였다.
"제가요? 저는 선배한테 뭔가 생각이 있을 줄 알았는데요."
"하하하하! 그럴 리가!"
이 인간들 믿어도 되는 걸까.
시몬은 뒤늦게 걱정이 앞섰다.
그러는 사이 세 사람은 부지런히 움직여 경비가 허술한 결계 쪽을 찾아냈다. 판타서스가 소매를 걷으며 앞으로 나왔다.
"좋네! 이 몸이 어떻게든 해보도록 하지!"
"잘 부탁합니다, 선배. 들키면 끝장이니 잘해줘요."
에이젤이 못내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판타서스가 결계 앞에 다가가 두 손을 붙이려는 순간.
"이런."
판타서스의 입가에서 당혹감 섞인 소리가 흘러나왔다. 시몬이 눈을 깜빡였다.
"왜 그러시는...... 아."
결계에 비친 뒤쪽의 광경에서, 어느새 여자 한 명이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세 사람이 다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
블루 드래곤, 유르이스가 빤히 지켜보고 있었다.
셋만 있을 때 당당하게 굴던 에이젤은 바로 쪼그라들었고, 판타서스는 허허 웃으며 얼른 결계에서 손을 뗀 뒤 머리카락을 긁적였다.
시몬이 잽싸게 앞으로 나왔다.
"유르이스! 이제 어떻게 된 거냐면......!"
"그렇게 해서라도 커록커즈를 꼭 봐야만 하겠습니까?"
그녀가 물었다. 잠시 입을 다물고 있던 시몬이 마침내 답했다.
"네."
유르이스와 시몬의 시선이 다시 한번 허공에서 교차했다.
이내 그녀가 휴우 한숨을 쉬었다.
"사실 이럴 것 같아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저를 따라와 주세요."
* * *
유르이스의 안내에 따라 시몬 일행은 걸음을 옮겼다.
아까의 장소에서 한참을 더 멀리 떨어진 장소였다.
"그쪽에서 결계를 뚫고 갔다면, 바로 다른 제 동료에게 들켰을 거예요."
"......아."
옆에 있던 시몬이 놀란 얼굴로 그녀를 보았다.
"우릴 도와주시는 건가요?"
그녀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 동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드래곤들이 양보할 수 있는 부분은 양보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대신 커록커즈를 봤다는 사실은 비밀로 해주세요."
"하하! 물론이오. 덕분에 살았소!"
판타서스가 힘주어 말했다.
시몬은 그녀와 나란히 걷다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실례되는 이야기일지 모르겠지만...... 어제 했던 이야기 중에서요."
"네."
-커록커즈의 증세를 완화하기 위해 시도하지 않은 마법이 없습니다. 하지만 어떤 마법과 약초도 듣지 않았어요. 두렵습니다. 그가 결국 그의 누나처럼 될까 봐.......
"커록커즈의 누나란 분도 비슷한 증세가 있었던 건가요?"
그녀의 걸음이 한순간 멈칫했다.
평정을 찾기 힘든 듯 동공이 흔들리고 있다가 이내 이마를 감쌌다.
"네. 커록커즈처럼 몸이 변하는 증세까진 없었지만......."
"혹시 다른 드래곤들에게도 그런 병이나 증상이 있었소?"
판타서스의 물음에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없었어요. 그 둘뿐이었어요. 그래서 더 참담하고 힘드네요."
"그럼 그 드래곤은 어떻게 되었소? 이번처럼 다른 드래곤들이 말린다고 해결될 일은 아니었을 것 같은......."
"사라졌습니다."
유르이스가 복잡한 심정으로 말했다.
"그뿐이에요."
"......."
다시 정적이 흘렀다.
살갑게 대해주던 유르이스는 그 이야기를 꺼낸 직후 무섭게 표정이 굳어 있었다. 하지만 시몬은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혹시 그분의...... 이름이......."
유르이스가 고개를 돌려 빤히 시몬의 눈을 바라보았다. 시몬은 심장이 덜컹하는 것 같았지만 필사적으로 티를 내지 않았다.
"인간이 드래곤의 이름을 궁금해하다니, 이상하네요."
"아 그게......."
"미르미즈라고 합니다."
그녀는 그렇게 답하고는 조금 더 빠른 걸음으로 시몬을 지나쳐갔다. 시몬은 침을 꿀꺽 삼켰다.
'확실하네.'
시몬이 네프티스로부터 물려받아 아공간에 보유하고 있는 드래곤의 유해.
-그녀는 나의 스승이다! 100년 전 드래곤 세계에서 홀연히 종적을 감추고 실종되었던 드래곤의 '조언자' 미르미즈다!
그 정체는 미르미즈.
이 모든 게 미르미즈와 엮여 있었다. 실버 드래곤 하르히스의 부탁을 듣고 이리로 온 거긴 했지만, 시몬은 숙명과도 같은 뭔가를 느꼈다.
"다 왔네요."
어느새 결계 앞이었다.
"최근에 폭주한 뒤로는 잠잠해졌지만,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주의해 주세요."
그녀가 손바닥을 펼쳐 결계를 어루만지자 끝부분이 살짝 허물어지며 구멍이 열렸다.
일행들은 긴장한 얼굴로 안으로 들어갔다.
"윽!"
들어가자마자 지독한 악취와 독기에 숨을 쉬는 것도 힘들었다.
결계 밖에서 보는 내부의 광경은 일반적인 분화구였는데, 내부는 훨씬 끔찍했다.
그야말로 죽음의 공간.
바닥은 시커멓게 오염되어 있었는데 거의 호수를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그 죽음의 호수에서 뭔가가 발버둥 치는 모습이 보인다.
-끼에에에에에에에에에엑!
고약한 호수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거대한 용의 머리.
일행들 전원, 할 말을 잃어버렸다.
"저게...... 드래곤이야?"
위대한 종족이라기에는, 그저 고통에 몸부림치는 마물처럼 보인다.
"거의 드래곤의 형상도 무너지고 있군. 아니, 무너지는 동시에 회복하는 건가."
판타서스가 중얼거렸다.
영겁의 고통 속에서 발버둥 치는 것 같았다. 그것이 몸부림칠 때마다 분화구가 더더욱 오염되어 갔다.
그 모습을 괴로운 눈으로 지켜보던 유르이스가 고개를 돌렸다.
"잠시 결계를 잠가둘게요. 다른 드래곤들이 보면 여러분을 죽이려 할 테니."
"하하하! 그거 고맙소!"
그때.
끼긱.
드래곤의 눈동자가 시몬 쪽을 향했다.
'저 눈동자는......!'
동공의 모양이 일그러진 삼각형의 형태를 이루고 있었다. 에크레시 해적선장의 바로 그 눈이었다.
시몬이 홀린 듯이 앞으로 걸어나갔다.
"뭐, 뭐 하는 거야? 시몬! 위험해!"
에이젤의 외침이 무색하게, 호수 속에서 빠져나온 거대한 아가리가 시몬의 눈앞까지 도달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