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903화
햇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쇠창살 속.
긴 머리의 여성이 돌바닥에 드러누운 채 늘어지게 하품을 하고 있었다. 이내 기지개를 한번 쭉 켜고는 몸을 빙글 돌려 옆으로 누웠다.
그녀의 정체는 에르제베트였다.
'어이없네. 기도문 하나 잘못 말했다고 가두다니.'
가관이었다.
타칭 '주룡'을 섬기는 이 사이비 종교는 강박적으로 신도들을 검열해서 스파이를 찾으려 했다. 에르제베트는 경비 앞에서 미리 외워둔 기도문을 잘 읊었지만, 지나가던 교주 노파가 그 모습을 보고 지적했다.
-주기도문이 틀렸습니다! 2절에는 '권위의 채움'이 아니라 '비움'이죠! 저자는 영주의 스파이거나, 신앙심이 부족한 역적입니다! 구원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그렇게 갇히게 된 것.
이제 와서 알게 된 사실은 '채움'이 맞았다. 하지만 주위 신도들은 그 말을 듣고 바로 채움을 비움으로 바꿔 버렸다고.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아무리 정신이 피폐해졌다고 해도, 인간들은 왜 그런 사기꾼의 헛소리에 홀라당 넘어가는 건지, 참으로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녀가 다시 바닥에 똑바로 누워서 천장을 바라보았다.
'조용해졌네.'
군단장인 시몬의 명령이 떨어지지 않은 이상, 인간들에게 함부로 손을 댈 수는 없다. 그녀에게 허락된 명령은 정보 수집뿐이었으니까.
하지만 위층에 있을 수많은 신도들이 전부 밖으로 나간 걸 보니 뭔가 심상치 않았다. 뭔가 큰 사태가 벌어질 전조일지도 몰랐다.
'슬슬 나가볼까?'
그녀가 입을 달싹이며 검지를 세웠다.
그러자 드드득 돌바닥 긁히는 소리가 들렸다. 저 멀리 어둠 속에서, 거미줄로 휘감겨 있는 감옥 열쇠가 반짝이며 끌려오고 있었다.
* * *
같은 시각, 리버론 광장에서는 커다란 소란이 벌어져 있었다.
-언제까지 죄 없는 주민들이 죽어야 하나! 리버론의 영주는 물러나라!
-인간의 힘으로 이길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아이 스무 명을 제물로 바치고 용서를 빌어라!
주룡을 믿는 사이비 종교의 신도들이 광장으로 나와 시위를 벌였다.
이대로 두면 영지성까지 침입할 기세였기에, 리버론의 영지병들이 이들을 막고 있었다.
"허가되지 않은 불법 집회는 해산하시오!"
"언제 또 불덩이가 떨어질지 모릅니다! 대피소로 돌아가세요!"
그러나 신도들이 그 말을 들을 리가 없었다. 병사들 보다 다섯 배는 많은 규모의 그들이 함성을 높였다.
-제물을 바쳐라!
-영주는 주룡께 찾아가 용서를 빌어라!
병사들이 쩔쩔매고 있는 그때, 이 촌극을 이를 갈며 바라보고 있는 남자가 있었다.
커록커즈의 공격으로 아버지를 잃고, 새롭게 영주자리에 오른 리버론의 젊은 영주였다.
"후우우우우우."
그의 입장에선 피가 거꾸로 솟고 복장이 터질 일이었다.
미친용이 아버지를 죽였다. 영지민들 또한 가족들을 잃었을 터, 당연히 미친용에 대해서만큼은 모든 사람들이 똘똘 뭉쳐서 저항할 줄 알았다.
그런데 아버지를 죽인 미친용을 섬기라고?
다름 아닌 자신의 영지민들이 저러니 복장이 터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우리 가문은 대체 지금까지 뭘 지켜온 거지?'
그는 인간에 대한 염세마저 느끼고 있었다.
"......."
그리고 그 뒤에서는 경비대장이 불안한 눈으로 영주를 바라보고 있었다.
"브래들리 경."
그때 젊은 영주의 입이 열렸다.
"예, 영주님."
"내가 불법 집회의 주모자를 잡아 오라 명하지 않았습니까."
"소, 송구합니다. 병사들을 잠입시켰지만 전부 들통나서 갇히는 바람에......."
"그럼 지금이라도 하면 되겠군요. 힘으로라도 저 집회를 해산시키세요."
경비대장이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자세를 낮추었다.
"지금 정규병으로 영지민들을 제압했다간 대규모 폭동 사태로 이어질 우려가 있습니다."
"상관없습니다."
"그, 그리고 영주님. 아시지 않습니까."
경비대장이 주위에 누가 없는지 휙휙 둘러본 뒤 말했다.
"저건 사이비 종교입니다. 저들을 물리적으로 해산하는 과정에서 잡음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군대까지 부른 마당에, 이 일이 왕국의 높은 분들의 귀에 들어갔다간......."
암흑연합은 대부분의 생활양식이나 문화적 차이, 개인의 성향을 존중하는 편이기는 했지만 종교에 대해서 만큼은 자비가 없었다.
그들이 가장 끔찍하게 생각하는 건 데바교가 암흑연합에 뿌리내리는 것.
따라서 어떤 종교든지 간에 암흑연합 내에서 발생할 경우, 극형은 물론 책임은 해당 땅을 다스리는 자들이 지게 되어 있다. 리버론 같은 대영지에서 사이비 종교가 탄생했다는 소식이 알려지면 그 파장은 어마어마할 것이다.
하지만 분노에 눈이 먼 젊은 영주는 그런 뒷일까지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그는 만류하는 경비대장을 뒤로 물려 버린 뒤, 확성 수정구를 들고 직접 앞으로 나왔다.
"폭도들에게 전한다! 지금부터 수를 셀 때까지 해산하지 않는다면, 그대들은 더 이상 내 영지민이 아니다. 무력 진압을 선포하겠다!"
병사들이 움찔하며 영주를 바라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젊은 영주는 숫자를 셌다.
"아홉."
여덟. 일곱. 서서히 숫자가 내려가고 있었지만, 사이비 신도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다섯."
그가 절반의 숫자를 부르는 시점에.
돌멩이 하나가 날아와 영주의 이마에 부딪혔다.
"리버론의 영주가 드디어 미쳤다! 탐욕에 눈이 멀었다!"
"당신의 가문이 용의 분노를 불러왔소! 그대가 우리 모두를 죽인 거요!"
돌멩이들이 연달아 날아왔다. 기겁한 경비병들이 뛰어와 영주의 앞을 방패로 막았지만, 이미 영주가 받은 충격은 돌멩이 하나 맞은 정도가 아니었다.
이마를 매만진 그가, 손바닥에 묻은 피를 보며 실성한 듯 중얼거렸다.
"아버지 죄송합니다."
그러고는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리버론의 영주로서 명한다. 지금 당장 이 자리에 있는 사이비 종교, 전원을 사살하라."
처억!
척!
결국 병사들이 창끝을 세우며 걸어오기 시작했다.
교주인 노파도 지지 않고 목소리를 높였다.
"다들 보셨지요? 드디어 영주가 간악한 욕망을 드러냈습니다! 주룡께서 우리들을 지켜주실 겁니다! 피로서 우리의 터전을 사수해야 합니다!"
신도들도 삼각형으로 일그러진 동공을 빛내며 농기구나 쇠붙이 따위를 치켜들었다.
일촉즉발의 상황, 서로에 대한 분노가 끝까지 치달은 바로 이 순간에.
께에에에에에에에에에!
끔찍한 괴성이 울려 퍼진다. 싸우려 들던 모두가 멈칫하며 고개를 들었다.
하늘에서 불덩이가 떨어지고 있었다.
"화마다!"
"다시 불의 화마가 떨어진다!"
그 모습을 보는 젊은 영주의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졌다.
"미친용......!"
화르르르르륵!
순식간에 주변의 건축물들이 불살라지고 무너져 내렸다. 경비병들과 주민들은 식겁하며 도망치기 바빴다.
그리고 이어서.
새까만 몸체의 뭔가가 하늘에서 내려왔다.
꽈아아아앙!
그것은 타일을 짓뭉개며 리버론의 정중앙에 위치한 광장에 내려앉았다. 모두가 얼빠진 채 그 모습을 지켜보는 가운데, 노파의 표정이 환희로 차올랐다.
"아, 주룡님께서 우리의 위기를 보고 친히 내려오셨습니다!"
검은용이 고개를 치켜들고 울부짖었다.
드래곤의 형태는 아무리 봐도 아니었다. 잿더미를 쌓아 올린 것처럼 새까맣고 뱀처럼 길어진 몸체에, 단단한 비늘이 아니라 곤죽처럼 줄줄 흘러내리는 몸뚱이.
그리고 그와 대비되는 하얀 눈동자.
병사들이나 일반 주민들은 물론, 신도들마저 혼란에 빠졌다.
방금의 그 브레스는 틀림없이 재앙을 일으켰던 용의 것이 맞았지만, 노파가 늘 묘사했던 위대한 붉은 용과는 완전히 딴 판의 모습이었다.
"......찾았다."
그리고 멍한 얼굴로 중얼거리던 영주가 허리춤의 검을 뽑아 들었다.
"아버지의 원수, 선조께서 쌓아 올린 모든 것을 무너뜨린 악의 축."
그가 검을 천천히 붙잡고 다가갔다.
"판타서스의 원정대는 결국 실패했는가! 그럴 줄 알았다. 오히려 잘되었구나!"
원수가 눈앞에 있다.
분노에 눈이 먼 영주가 걸어가고 있는 그때, 커록커즈의 고개가 하늘로 향하더니 입을 크게 벌렸다.
캬아아아아아아아악!
<드래곤 피어>
쿠구구궁!
즉각 주위의 모든 인간들이 공포에 질린 얼굴로 털썩 털썩 바닥에 주저앉기 시작했다. 손에 든 무기가 쨍그랑 소리와 함께 바닥을 굴러다니고 바지가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커흡!"
검을 들고 다가가려던 영주조차, 사색이 된 표정으로 몸을 파들파들 떨었다.
'어, 어째서?'
그 '미친용'이 눈앞에 있다.
모든 것을 파멸로 몰아간 절대악.
세상 무엇보다 증오하는 대상.
저 미친용을 죽일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가 더 버티지 못하고 무릎을 꿇었다.
'그런데 왜!'
무서웠다.
두렵고, 공포스럽다.
동력이라고 생각했던 증오는 어떻게 된 건지 몸뚱이를 움직여 주지 않았다. 다리가 바들바들 떨리고 전신에서 식은땀이 흐른다. 속이 울렁거리고 바지가 축축하게 젖어 든다.
영주 자격도 포기하고 군대를 불렀다.
미친용을 죽이는 데 반대하는 영주민들까지 학살하려 했다.
이 대륙을 전쟁에 구렁텅이로 몰아넣고, 무수한 사람들의 생명을 갈아 넣어서라도 이루려고 했던 그 목적.
모든 것을 걸고 원수를 죽이려 했던 나의 다짐은.
'이렇게 보잘것없는 것이었나!'
객기였다.
아버지의 복수라는 사명을 둔 아들이라는 생각에 스스로에 도취했을 뿐이었다.
아버지의 죽음이라고 말만 하면 모두가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도 못 하니 더더욱 도취했을 뿐이다.
자신의 각오 따위.
사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모든 것을 깨달은 영주가 공포에 질린 채 바들바들 떨며 눈물을 쏟아냈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드래곤 피어에 직면한 누구도 제대로 버티지 못했다. 신도들은 아예 바짝 엎드려 있었다.
"아하! 하하하하하!"
그때 반쯤 정신이 나간 노파가 덜덜 떨리는 다리로 커록커즈에게 다가갔다.
"꼴불견이군요. 영주! 이제야 주룡의 위대함을 아신 모양입니다!"
그녀가 두 팔을 들어 올리며 외쳤다.
"위대한 주룡이시여! 여기 제물이 있사옵니다!"
그녀가 손짓하자, 엎드린 신도들 사이에서 아이들 열댓 명 정도가 끈으로 손목이 묶인 채 끌려 나왔다.
"이들을 잡아드시고 저희를 어여삐 여겨주시길 바랍니다! 원한다면 무엇이든 드리겠습니다! 대신 저를 첫 번째 심부름꾼으로 삼아 주룡의 뜻에 따라 움직이게 하신다면......!"
으적!
노파의 말은 더 이어지지 않았다.
뱀처럼 긴 용의 아가리가 움직여 시끄러운 노파를 입에 문 것이다.
"......!"
모든 신도들이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어억! 무슨! 이 미친 괴물이! 하, 하지 마! 끄아아아아아아악!
피가 튀어 오르고, 비명이 울려 퍼진다.
어느새 노파의 목소리는 사라지고, 그저 용이 아가리를 움직일 때마다 팔과 다리가 덜렁거릴 뿐이었다. 신도들은 믿기 힘든 눈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복수하려는 자도.
재해에 승복한 자도.
목숨도 걸고 전쟁도 불사하려던 그 모든 의지는.
크르르르르!
그저 '힘'이라는 진실 앞에서 한낱 촛불처럼 사그라져 버렸다.
-도망쳐!
-아윽! 아아아아아아!
모두가 겁에 질려 흩어지듯 도망친다. 커록커즈가 아가리를 벌리며 브레스를 모으려는 그 순간.
쐐애애애애애액!
하늘에서 새로운 진실이 모습을 드러냈다.
[가요! 하르히스!]
하늘에서 맹렬한 빙하의 숨결이 커록커즈에게로 쏟아졌다. 도시를 공격하려던 커록커즈가 방향을 돌려 하늘로 브레스를 쏘아 보냈다.
두 강력한 힘이 중간에서 부딪히며 거대한 폭발을 일으켰다.
그리고 브레스끼리 부딪혀 일어난 연기를 뚫고 혜성처럼 내려온 하르히스가 커록커즈의 머리를 붙들고 바닥에 처박았다.
꽈콰콰콰콰콰쾅!
바닥에 커다란 균열과 크레이터가 생겼다.
기겁하며 물러나는 영주병들과 신도들의 머리 위로, 검은 불꽃의 잔해가 떨어지고 있었다.
[하여간, 이럴 줄 알았사와요.]
그때 도망치던 신도들의 허리에 투명한 거미줄들이 휘감기더니 단번에 뒤로 당겨지며 떨어지는 화염의 범위에서 벗어났다.
후우우우웅!
그리고 반대편의 영주들은 모두 갑자기 불어닥친 돌풍에 휘말려 안전한 곳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그 돌풍을 일으키는 건 후드를 눌러쓴 회색 머리의 소년이었다.
"급하게 왔더니 이게 무슨 난리야."
에이젤이었다. 그가 입가를 닦으며 정면을 보았다.
오염된 미친용과 싸우고 있는 건, 결계에서 봤던 드래곤들이 아니었다.
그 자리에는 없었던 완전히 새로운 실버드래곤이 브레스를 뿜으며 싸우고 있었다.
꽈아아아앙!
실버드래곤이 다시 한번 다리로 커록커즈의 머리를 붙잡고 강타했다.
[에이젤 브링어.]
그때 드래곤의 머리 위에서 새로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강렬하면서도, 감히 부정할 수 없는 음성.
[주민들을 대피시켜라.]
에이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본 아머를 입고 투구를 눌러썼으며 망토와 칠흑으로 전신을 감싼 채 눈처럼 새하얀 대검을 든 남자.
"배신의 군단장......!"
정체는 불명이지만 배신의 군단과 계약한 뒤, 결사와 싸운다는 존재. 소문은 과장된다고 하지만 에이젤이 보기엔 그 이상이었다.
'......군단에 이어서 드래곤까지 부린다고?'
잔해나 건물에 숨어 있던 주민들도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끔찍한 역사의 주범이었던 배신의 군단장이, 이제는 악룡으로부터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싸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