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905화
많은 드래곤들이 부정했다. 그 현명한 '미르미즈'가 미쳤을 리 없다고.
잠깐의 변덕일 뿐이라며, 다시 정신이 돌아올 것이라며, 방치한 채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당시의 하르히스도 크게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녀가 하르히스의 동생을 물어뜯어 죽일 때까지는.
-꽈드드득!
아직도 기억이 선명했다. 온 비늘에 동생의 피를 벌겋게 묻힌 채, 눈을 희번덕 뜬 스승의 모습을.
심지어 스승은 동생을 죽인 뒤, 같이 온 블루드래곤 유르이스까지 죽이러 다가가고 있었다. 유르이스는 이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했는지 울먹이며 뒷걸음질만 치고 있었다.
이에 하르히스는 움직였고.
정신을 차리니 짙은 혈향이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눈앞에는 스승이었던 벌건 살덩어리가 놓여 있었다.
-......이제 어떻게 할 거야?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 비로소 유르이스의 떨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하르히스는 말없이 스승의 유해를 짊어지고 산을 올랐다.
커다란 산봉우리에 땅을 파서 스승을 깊게 묻고, 그 위에 다시 흙을 채워 넣었다.
늙은 드래곤들에게는 미르미즈가 동생을 죽인 뒤 잠적했다고만 말했다. 드래곤 사회는 그녀를 퇴출시켰다.
그렇게 드래곤들은 언제나 그랬듯이, 흐르는 시간 속에 그녀를 잊으려고 했지만.
-캬아아아아아아아악!
그녀가 돌아왔다.
묻혀 있던 산봉우리에서 미르미즈가 빠져나온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미쳐 있던 그녀는 갇혀 있던 수년간의 분노로 완전히 눈이 돌아가 버렸고, 말리려던 하르히스와 다른 드래곤 둘에게 지워지지 않을 상흔까지 남겼다.
사실 하르히스는 알고 있었다.
그녀는 살아 있을 거라는 사실을. 율법상 그는 그녀를 죽이지 못하기에 생매장했을 뿐이었다.
심각하게 미쳐 버린 그녀는 기어이 인간의 도시까지 내려가 공격을 감행했고.
이후, 완전히 잠적한다.
그녀가 인간들의 도시로 간 뒤 사라졌다는 소식에 드래곤들이 눈이 뒤집혀서 모여들었지만, 인간들은 해명했다.
네크로맨서들이 나서기도 전에 미르미즈는 스스로 모습을 감추었으며, 마나의 흔적도 사라졌기에 추격을 멈추었다고. 위대한 종족 여러분들이 그녀를 데려간 줄로만 알았다고 말했다.
사실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드래곤은 없었지만, 의외로 드래곤 세계는 순순히 물러났다.
그리고 이 소식을 들었을 때는 하르히스도 있었다. 하르히스는 집으로 돌아와 등을 기댄 채 쓰러졌다.
문득.
자신도 모르게 이런 소리가 흘러나왔다.
-다행이다.
그렇게 내뱉고 스스로도 놀랐다.
위대한 규율로 보호받는 동족이자, 스승의 죽음에 안도한 자신에 대해.
자신의 위선과 구질구질함에 대해서도.
그때부터였다.
하르히스가 '진실'에 이상하리만치 집착하던 건.
그는 미르미즈 사태에 대한 재판을 받기도 전에 스스로 드래곤 사회를 떠나, 인간 사회를 돌아다녔다.
* * *
[말해보게 하르히스! 어째서 커록커즈를 죽였나!]
[제정신이 아니군! 그는 우리의 조언자였다!]
[무슨 변명이라도 해보시오!]
'미친용' 커록커즈가 죽었다.
하르히스가 그의 드래곤 하트를 베었다. 드래곤 하트를 벤 무기를 마지막에 들고 있던 건 명백히 하르히스였다.
극도로 격분한 드래곤들은, 중상을 입고 오염되어 죽어가는 하르히스에게 잘잘못을 따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덤덤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제 마지막 말을 들어주십시오, 여러분."
마지막 말이라는 말에 드래곤들이 멈칫했다.
"인간 세계를 돌아다니며 느낀 바가 있습니다. 시대가 변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영생을 누리는 존재이기에 천 년을 항유하며 세월을 관조하지만, 1년이라는 짧은 시기에 얼마나 많은 것들이 새롭게 생기고 사라지는지 알면 놀랄 겁니다."
그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개체수가 없던 까마득한 과거에나 동족을 죽여서는 안 된다는 율법이 지엄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제는 우리의 그 율법을 이용하여 우리를 파멸시키려는 자들까지 나타났습니다. 늘 그렇듯 뒷짐 지고 세상을 관조하다 보면, 언젠가 혼란이 바로잡히고 평온이 찾아올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천만에요."
그가 고개를 돌렸다.
"변화에 대응하지 못하여 죽는 불멸은, 필멸보다 못합니다."
[하르히스!]
[어째서 그런 소릴 입에 담는가!]
[인간들과 어울리다 보니 정신도 그들과 닮아버렸군!]
드래곤들이 으르렁거리며 소리쳤다. 특히 그린 드래곤 헤르헤스는 금방이라도 찢어 죽일 듯 이를 갈며 다가왔다.
[커록커즈는 위대한 조언자였다! 나의 친우이자 내가 아는 가장 현명한 존재였다!]
그가 고개를 들이밀었다.
[네놈이 그를 죽인 거다! 커록커즈의 죽음에 그 어떤 변명도 필요하지 않다!]
하르히스가 미소 지었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당연히......!]
그러자 그린 드래곤의 입에서 새로운 음성이 튀어나왔다.
-커록커즈가 이대로 죽어서 다행이다.
[!]
그가 급히 입을 틀어막으려 했지만 입가에서 흘러나오는 진실을 막을 수는 없었다.
-인간의 네크로맨서라는 놈들을 상대하는 건 번거롭다. 괜히 싸워서 지랄 맞아지는 것보다는 이런 마무리가 낫겠지.
다른 드래곤들이 경멸 섞인 눈으로 그린 드래곤을 바라보았다. 그린 드래곤이 고개를 미친 듯이 내저었다.
[이, 이건 진심이 아니다! 내가 한 말이 아니야!]
[자네도 하르히스와 다를 게 없군!]
[그러고도 위대한 종족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동족의 죽음에 안도하는 게 어찌 위대한 종족인가!]
그때 하르히스가 다른 드래곤들을 바라보았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드래곤들이 움찔한 표정을 지었다.
이내 그들의 입에서도 하나같이 다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드래곤들이 전부 오염될 뻔했어.
-커록커즈가 죽어서 우리가 살았군. 다행이다.
곳곳에서 드래곤들이 진실을 고하기 시작했다.
[어째서! 이런!]
혼란에 빠진 드래곤들을 보며, 하르히스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사실 모두가 정답을 알고 있다.
하지만 누군가는 허례허식으로, 누군가는 자존심 때문에, 진실을 알고도 모른 척하는 것일 뿐.
드래곤은 너무 오래 산다.
시간이 대부분의 문제를 해결해 주리라는 것을 그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무슨 일만 생기면 사라지고, 관조하고, 시간에 흘려보낼 생각을 하는 이유다.
하지만 이제는 바뀌어야 한다.
하르히스가 고개를 돌렸다.
"유르이스."
[.......]
블루 드래곤은 그저 눈물만 흘리고 있을 뿐이었다.
"앞으로는 현명한 네가 조언자가 되겠지. 그때는 네가 바꿔야 해. 장로들을 설득해 줘."
[너까지 나를 두고 가는 거야?]
"미안하다. 뒤를 부탁한다."
하르히스가 웃었다. '오염'은 이제 머리까지 올라오려 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고개를 돌려 시몬을 보았다.
"갈까요? 나의 친우여."
"어, 어디에요?"
"마지막으로 당신에게 주고 싶은 게 있습니다."
* * *
하르히스는 마지막 힘을 쥐어짜 내 텔레포트 마법을 사용했다.
그렇게 두 사람이 도착한 곳은, 처음 아론과 함께 하르히스와 만났던 바로 그 작은 섬.
[저번에는 시몬이 제게 이야기를 들려주었지요.]
"네, 그랬죠."
본체의 모습이 된 하르히스가 천천히 자세를 낮추며 미소 지었다.
전신이 점점 더 검게 오염되어 가는 그는 금방이라도 숨이 멎을 듯 위태로워 보였지만, 목소리만큼은 태연했다.
[이번에는 내 이야기를 들려줄까 합니다.]
미르미즈가 실종된 직후, 하르히스는 폴리모프를 사용해 인간계를 돌아다녔다.
명목은 미르미즈가 미치게 된 이유를 찾는 것. 반항기에 들어선 어린 드래곤들이 '유희' 삼아 폴리모프 상태로 인간계를 돌아다니는 건 흔한 일이었지만, 미르미즈는 성룡이 되어서도 자주 유희를 즐겼다.
그는 그녀가 미치게 된 이유가 인간계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결국 그녀가 미치게 된 것도, 실종된 것도, 모든 원인은 인간.
하르히스는 인간들을 절대 좋아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하르히스는 인간의 삶에 푹 빠졌고, 제한된 수명 아래 모든 것을 불태우며 살아가는 인간들의 태도에 큰 감명을 받았다.
그는 인간의 아내를 만나 결혼까지 했다. 물론 종족적인 문제 때문에 아이를 낳을 수는 없었지만, 아내는 이해해 주었다.
수 세기가 넘는 그의 삶에서 가장 눈부신 60년이었다. 그는 스스로도 완벽하게 인간처럼 지냈다고 자신했다. 폴리모프의 인간 폼도 인간의 세월에 맞춰 노화를 가장했다.
하지만 인간들은 은연중에 진실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당신, 사실 인간이 아니죠?
아내가 임종하던 날,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아무리 당신이 세월에 따라 늙어지도록 겉모습을 바꿔도, 생각과 관념은 처음 만난 그대로였다고.
인간은 세월에 육체는 물론 정신 또한 변하지만, 당신은 변함없이 그대로였다고.
그런 한결같은 모습을 사랑했다고.
아내는 그렇게 말해주며 임종을 맞았다.
한 인간의 젊은 시절과 죽음을 함께한 하르히스는 그 가치관이 송두리째 바뀌게 되었다.
아내를 뒤뜰에 묻어준 하르히스는 다시 여행을 떠났다. 생물학적인 이유로 그녀에게 아기를 가져다줄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그녀의 집안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었다.
그렇게 오랜 세월을 다시 떠돌아다니던 중, 그녀의 성을 쓰는 '데이아' 가문의 핏줄을 찾아냈다.
당시의 젊은 그는 상당히 다혈질이었다.
-이대로는 우리 고향이 영지전에 휘말릴 거야! 욕심이 끝도 없는 부자 놈들 때문에!
아론 데이아라는 이름의 청년이었다.
그에게 도움을 주고 싶었지만, 드래곤은 인간의 정치사에 관여하는 건 금지되어 있었다.
아론 데이아는 이 전쟁을 막기 위해 새로운 소환수를 만들고 있었는데, 쉽지 않아 보였다.
-내게 조금만 더 힘이 있었다면......!
무슨 변덕이었을까.
죽은 아내의 젊은 시절을 쏙 빼닮은 그 청년의 괴로움에 눈을 돌리지 못하기라도 하는 걸까.
하르히스는 그에게, 자신이 보관하고 있던 동생의 유해를 건네주었다.
아론은 불세출의 '천재'라고 불리는 부류의 인간이었다. 키젠의 졸업자라고 했다.
그는 끝내 전쟁 전에 본 드래곤을 완성해 냈고,
-포기해라.
본 드래곤을 타고 무려 전쟁의 당사자인 후작의 영지성에 직접 쳐들어가 드래곤 피어로 그들을 무릎 꿇리고 전쟁을 중지하겠다는 서약을 받아냈다.
본 드래곤의 위엄에 후작은 그대로 전쟁을 포기했다고.
하르히스는 감탄했다. 만약 동생의 유해로 만든 언데드로, 당장의 적을 철저히 파괴했다면 그는 동생으로 만든 언데드를 부술 생각이었다.
하지만 아론이 보여준 방식은 현명했다.
-나를 믿고 당신의 동생을 넘겨준 거잖아? 사사로운 일에 쓰지 않을 거야.
하르히스는 아론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현재.
[.......]
이제는 아론이 데려온 그의 제자가, 자신의 스승의 유해를 '본 드래곤'으로 만들려 하고 있었다.
운명의 장난과도 같은 굴레.
하지만 하르히스는 어떤 숙명을 느꼈다.
[이제 나는 곧 죽습니다, 시몬 폴렌티아.]
하르히스가 말했다.
[아내가 죽은 뒤, 이 세상에 미련은 없다고 생각했지만 아니었습니다. 너무나도 큰 미련과 원한이 나도 모르는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게 무슨......."
[결사라는 자들의 멸절.]
스승인 미르미즈는 결사에게 당해 미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동생과, 커록커즈와, 결국은 하르히스 본인까지 죽음으로 몰아넣은 자들.
[죽음은 두렵지 않지만, 그들을 뿌리 뽑지 못하고 사라져야 하는 운명이 한탄스럽습니다.]
그의 동공이 돌아갔다.
[이제 곧 사라질 나를 대신해 그들을 심판해 주겠다고, 약속해 주시겠습니까? 시몬 폴렌티아.]
"......."
잠시 가만히 서 있던 시몬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네."
하지만 그를 바라보는 눈동자는 굳건했다.
"약속합니다."
우우우우웅!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하르히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앞으로 마법진이 연달아 펼쳐졌다.
"잠깐...... 뭘 하려는!"
[이 몸은 오염되어 쓰지 못하겠지만, 내부까지 오염되기 전에 받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내 마법진을 통과해 그의 몸에서 튀어나온 건 거대한 심장.
보존 마법이 걸린 진짜 '드래곤 하트'였다.
[이제는 죽어 없어질 몸.]
하르히스가 시몬을 보며 웃었다.
[내 심장으로 다시 한번 내 스승을 뛰게 해주십시오. 그 힘으로 내 아내가 사랑했던 세계를 지켜줬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