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906화
하르히스는 죽음을 선택했다.
오염되어 가는 몸으로 연명하면 조금 더 버틸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는 시몬에게 자신의 의지를 맡겼다.
그 뒤에 하늘로 날아올라 종이처럼 서서히 바스러졌다.
시몬은 가만히 그의 마지막 모습을 지켜보았다. 불멸의 존재가 필멸을 선택하고 덧없이 사라지는 순간.
햇빛에 반사되어 찬란히 빛나는 유리조각처럼 흩어지는 모습은 애잔하지만 아름다웠다.
모든 것이 끝나고, 시몬은 고개를 돌렸다.
하얀 모래사장 위에 펼쳐져 있는 하르히스의 드래곤 하트.
그의 보존 마법이 지속되어 있기에 체외로 빠져나와도 두근두근 잘 뛰고 있다. 주위의 마나를 끊임없이 빨아들이는 모습이다.
'하르히스의 의지.'
시몬이 주먹을 꾹 쥐었다.
보존 마법이 걸려 있지만 하르히스가 죽었으니 그리 오래 유지되지 않을 터.
그가 목숨을 바쳐서 내어준 물건이다. 아공간에 보관하는 건 가능하겠지만 보존 마법이 풀리면 썩는다. 손상되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슬퍼할 틈은 없다. 시몬은 조심스럽게 본 아머로 이것을 감싸 초대형 아공간에 집어넣은 뒤 움직였다.
지금 시몬에게 있어 최고 우선순위는 드래곤 하트의 보존이었다.
* * *
학교에서는 리버론에서 활동한다고 알고 있을 텐데, 조금 갑작스럽게 하르히스의 섬으로 넘어와 버렸다.
거리 문제인지, 들고 있는 일반 통신수정구로는 바로 로크섬과 연락이 닿지 않았다. 우선 나룻배를 타고 섬에서 빠져나와 육지에 진입했다.
'키젠의 하수인을 만나야 하는데.'
근처에는 작은 마을들밖에 없었다. 외딴곳에 뚝 떨어진 느낌이다.
그래도 이런 상황에서의 대처 매뉴얼은 머릿속에 넣어두었다. 시몬은 마을 주민들에게 정보길드의 위치를 물었고, 물어물어 낡은 정보길드까지 도착했다.
"키젠에서 왔습니다."
시몬이 학생증을 내밀자 정보길드의 직원은 화들짝 놀라며 깍듯이 대해주었고, 바로 키젠과의 연락망을 알아주었다.
그는 작은 쪽지에 뭔가를 빠르게 휘갈겼다. 주소였다.
-에브리암. 161. 2번 가게.
근처의 시장으로 가보라는 내용이었다. 시몬은 그들에게 인사한 뒤, 시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해당 주소는 작은 과일가게였다. 시몬이 그 쪽지를 보여주자, 과일장수는 '아, 그거?' 하고 중얼거리더니 허름한 상자 하나를 넘겨주었다.
봉인을 해제하고 상자를 열어보니 먼지가 뿌옇게 쌓인 수정구가 보인다. 시몬이 그것을 작동시키자 치직거리는 소리와 함께 목소리가 들렸다.
-말씀하십시오.
시몬은 과일장수와 조금 떨어진 곳으로 가서 입을 열었다.
"키젠 2학년 시몬 폴렌티아 학생회장입니다. 응답 바랍니다."
하수인과 연락이 닿는 데 성공했다.
근방에 있었는지 하수인이 헐레벌떡 시장으로 달려왔다. 이런 멀고 먼 곳까지 키젠의 영향력이 미친다니, 새삼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꾸벅 허리 숙여 시몬에게 인사한 뒤 환한 목소리로 말했다.
"소식은 모두 들었습니다, 학생회장님. 리버론 사태를 해결하시는 데 크게 조력하셨다면서요! 갑자기 사라졌다는 이야기에 깜짝 놀랐습니다!"
시몬이 움찔했다.
'그러고 보니 리버론 사건은 어떻게 되는 거지?'
시몬과 배신의 군단장은 반드시 별개의 인물로 존재해야 했다. 그리고 시몬은 배신의 군단장으로서 싸웠다.
이거 성적에 반영되기 어려운 건가?
초조했던 시몬이 리버론의 현 상황에 대해 물어보았고, 하수인은 줄줄 설명을 늘어놓았다.
"예, 학생회장님의 활약으로 여러 문제들이 해결됐다고 합니다."
미친용 커록커즈의 시신은 리버론에서 조금 떨어진 황무지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영주가 직접 와서 죽은 커록커즈를 확인했고, 드래곤들이 커록커즈의 시체를 수습했다.
커록커즈를 죽인 건 실버 드래곤 하르히스.
그리고 조력자로 언급되고 있는 건 배신의 군단장이다.
하르히스가 커록커즈를 죽였으므로 드래곤의 법률은 발동되지 않는다. 우려했던 종족전쟁도 일어날 이유가 없었다.
이내 왕국에서 보낸 군대가 영지에 도착했고, 군은 전쟁 대신 재건을 돕기로 했다. 커록커즈를 '주룡'이라 섬기며 사이비 종교를 주도한 간부급들은 전원 체포, 리버론의 젊은 영주는 이번 일에 책임을 지고 영주직을 포기했다.
커록커즈가 사라지자 용언도 풀렸는지 영지 밖에 우글거렸던 몬스터들도 본래의 영역으로 돌아갔다. 덕분에 식량과 각종 생필품을 실은 상단의 마차들도 다시 리버론으로 들어올 수 있게 되었다.
다행히 드래곤을 막아 세웠던 판타서스도, 사람들을 대피시키던 에이젤도 모두 무사하다고 한다.
"판타서스 님과 에이젤 님이 증인으로 나서주셨습니다."
하수인이 문서를 읽으며 말했다.
"시몬 폴렌티아 학생은 커록커즈의 전투에 직접 조력하고, 사태 해결 및 주민대피에 큰 전과를 세우셨다고요."
'응?'
"거기에 커록커즈의 몸에 직접 큰 상처를 내셨다고 들었습니다! 역시 대단하십니다!"
시몬이 쓰게 웃었다.
'맞는 말이긴 한데.'
아무래도 두 선배들이 시몬의 성적을 위해 이야기를 잘해준 것 같았다. 하수인은 시몬의 공헌을 찬양하듯 줄줄 읊어나간 뒤 말했다.
"아, 그런데 리버론에 계셔야 할 분이 왜 이곳 스톤리지에 계신 건지요?"
"그게......!"
시몬이 웃는 얼굴로 여러 변명거리를 머릿속에서 빙빙 굴리다가 입을 열었다.
"저도 조금 혼란스럽긴 한데요. 사실 원정대 중에 한 명이 바로 그 폴리모프한 실버드래곤 하르히스였거든요? 제가 커록커즈와 싸우다가 위험에 빠진 순간에 얼른 저를 다른 곳으로 이탈시켜 준 것 같아요."
진실과 거짓을 교묘하게 섞으면 진실처럼 들린다던가.
하수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이해했습니다! 일단 본부에는 그렇게 보고해 두도록 하죠."
어차피 지금은 임무평가 중이니 크게 따져 묻지는 않는 것 같았다. 나중에 학교에 돌아가면 상황을 상세히 설명해야 하리라.
이어서 하수인은 근처의 숨겨진 비밀 텔레포트 마법진으로 시몬을 안내했다.
"바로 학교로 돌아가시겠습니까?"
하수인의 물음에 시몬은 고개를 내저었다.
이번 임무평가 기간은 2주일, 리버론 사태를 해결한 직후 아직 일주일 정도가 더 남아 있었다.
"혹시 아론 교수님과 통화할 수 있을까요?"
"아, 물론입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하수인은 즉시 본부와 연락했고, 이내 아론이 로크섬이 아니라 펜타모니엄에 가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임무평가 기간 동안에도 그는 여전히 하르히스의 '숨결'을 이용한 새로운 드레드 하트 제작에 몰두하고 있는 모양. 그의 연구실은 제한 구역에 있어서 당장 통화는 힘들다는 것 같았다.
"그럼 제가 펜타모니엄으로 갈게요."
이번 2주간의 임무평가 기간 중에는 어디든 텔레포트 마법진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학생들이 직접 임무내용과 루트를 짜는 형태이기 때문에, 하수인들은 학생들이 어디로 간다고 해도 협조할 의무가 있었다.
하수인도 명령을 받아들였다. 이내 그가 두루마리에 적힌 대로 보안식을 해제한 뒤 오래된 텔레포트 마법진을 작동시켰고, 시몬은 그 위로 올라탔다.
"보람찬 여정 되시길 바랍니다. 학생회장님."
"네, 늘 뒤에서 노고가 많으십니다. 덕분에 학생들이 잘 지내고 있어요."
시몬의 입장에선 당연한 인사를 했을 뿐이지만, 하수인은 감격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무슨 말씀을. 그게 저희 같은 사람들의 당연한 의무입니다. 더더욱 열심히 서포트하겠습니다!"
이내 낯선 곳에서 만난 하수인과 헤어지고, 빛무리와 함께 시몬의 발이 허공으로 두둥실 떠올랐다.
* * *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했다.
세상의 모든 지식과 정보가 축적되어 있다는 연구자들의 도시, 펜타모니엄.
이곳은 작년에 왔던 것처럼 여전했다. 흔히 말하는 '유리의 도시'라는 이명에 걸맞게, 내부가 비치는 광석으로 가공된 수십 층 높이의 초대형 탑 건축물들이 들어서 있었다.
그 밖으로는 도시 전체를 감싸고 있는 거대한 결계가 보인다.
'옛날 생각나네.'
1학년 때 여기서 학생 학술회도 했었고, 제5군단장 매그너스의 계략도 막아낸 적이 있다. 판타서스를 처음 만난 곳도 여기였다.
'그럼 가볼까!'
우선은 아론을 만나야 했다. 아공간에 있을 하르히스의 드래곤 하트가 신경 쓰인다. 얼른 전문가의 조치를 받고 싶었다.
무엇보다 아론에게 하르히스의 최후에 대한 이야기도 해야만 했으니까.
시몬은 하수인이 적어둔 쪽지대로 이동했다. 유리탑 안으로 들어가 안내 데스크에서 신분을 밝힌 뒤, 아론 데이아를 만나러 왔다고 이야기했다.
이내 내부 마법진을 타고 고층으로 이동. 순식간에 아론의 연구실에 도착했다.
'여기구나.'
로크섬 내부의 시설로도 어지간한 건 다 할 수 있지만, 가장 최신 이론은 펜타모니엄에서 처음으로 나온다.
이번에 필요한 건 고가의 드레드 하트로 깨우는 것에 실패한 강력한 조언자급 본 드래곤을 만드는 것.
기존의 이론으로는 어려우니 새로운 이론들을 적용해 나가야 했고, 그게 아론이 임무평가 기간의 휴가도 마다하고 펜타모니엄에 틀어박힌 이유였다.
저벅 저벅.
잠깐 기다리고 있으니 발소리가 들렸다. 어느새 아론이 퀭한 얼굴로 모습을 드러냈다.
'아.'
시몬은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근래 본 아론의 모습 중에서 가장 컨디션이 나빠 보였다. 다크서클은 눈 밑을 점령하다 못해 얼굴을 덮을 기세로 영역을 확장하고 있었고, 장발의 떡진 머리는 최근에 머리를 언제 감은 건지 헤아릴 수 없었다.
"...왔나."
아론이 부스스한 머리를 쓸어넘기며 말했다. 시몬이 얼른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교수님!"
"중요한 임무평가 기간에 이런 곳에 올 여유도 있다니, 팔자도 좋군."
그렇게 말한 그가 손바닥으로 눈두덩이를 누르다가, 고갯짓했다.
"들어와라."
"네! 실례하겠습니다."
펜타모니엄에 마련된 아론의 연구실.
간단히 소감을 말하자면 '개판'이었다.
넓고 하얀 바닥 위로 온갖 연구 장비들과 언데드 재료들이 마구 어질러져 있었다. 곳곳에 그을린 자국이나 폭발의 흔적까지 보였다.
사방이 난잡한 가운데, 그나마 가장 깔끔한 중앙 테이블 위에는 드레드 하트 재료와 하르히스의 숨결이 담긴 병이 놓여 있었다.
"나쁜 소식이 한 가지 있다."
아론이 말했다.
"저도 나쁜 소식이 있습니다."
시몬도 대답했다. 그러고는 먼저 말씀해 달라는 듯 아론에게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아론이 긴 숨을 내뱉으며, 주머니를 뒤적거리다가 시가를 하나 꺼내 입에 물었다.
"순환 룬어와 숨결을 이용한 신 사양의 동력장치. 연구해 보니 실패확률이 너무 높게 나오더군. 사실상 본 드래곤 제작에는 적합하지 않을 것 같다."
아론은 시가에 불을 붙이려 라이터를 들며 물었다.
"그럼 네 나쁜 소식은......."
"하르히스가 죽었습니다."
그 말에 시가에 불을 붙이려던 아론이 멈칫했다.
뒤이어 시몬이 입을 열었다.
"결사와의 계략을 막다가 그렇게 됐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제게 드래곤 하트를 남겼습니다."
툭.
아론의 입에 문 시가가 바닥에 떨어졌다.
* * *
아론은 그 뒤로 말없이 시가를 몇 개비나 피웠다. 연구실 내부가 시가 연기로 뿌옇게 변했다.
그가 퀭한 눈으로 천장을 바라보았다.
"내 심장으로 내 스승을 뛰게 해주어라. 그 힘으로 내 아내가 사랑했던 세계를 지켜달라."
그가 처음으로 픽 웃음 지었다.
"하르히스답군."
"네."
그가 마지막 시가를 태운 뒤 바닥에 떨어뜨렸다.
"그의 드래곤 하트를 보여다오."
그의 눈빛이 거대한 의지로 번들거렸다.
"반드시 성공시키지 않으면, 그 녀석에게 면목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