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908화
칼로스 북부, 대공의 성.
후욱. 훅.
학생들의 임무평가 기간에 고향으로 돌아온 북부대공 진은 집무실에서 맨몸 훈련에 한창이었다.
상의는 탱크톱, 하의는 가벼운 반바지만 걸친 그녀는 한 손을 바닥에 댄 채, 다른 한 손은 등 뒤에 붙이고 한쪽 팔힘만으로 몸을 지탱하고 있었다.
목표까지 정신없이 페이스를 올리고 있는 그때.
"대공!"
벌컥!
북부의 2인자, 대장군 가니로가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그러다 훈련 중이던 그녀의 차림새를 보고 헛 하고 숨을 삼키더니 시선을 돌렸다.
"이거 죄송합니다. 훈련 중이셨습니까?"
"내가! 노크하라고! 몇 번이나 말하지 않았느냐!"
그녀가 대장군을 째릿 노려본 뒤, 한숨을 푹 쉬었다.
"하여간 야만적인 북부 남정네들."
"허, 고작 노크 가지고 뭐라 그러십니까? 한동안 남쪽에서 교수 노릇 하더니 도시물 좀 먹으셨나 봅니다."
화난 그녀가 다른 한 손으로 아령을 집어 던졌다. 가니로 대장군이 얼른 몸을 낮춰 피하며 통신 수정구를 꺼내 보였다.
"그보다 대공께 연락이 왔습니다!"
"대장군."
그녀의 표정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그대야말로 평화의 시대에 감이 다 뒈져 버렸느냐. 내가 훈련 도중에 다른 용무를 받던 적이 있더냐? 국왕 폐하의 연락이라도 내 훈련을 멈출 수는 없......."
"그렇습니까. 그럼 어쩔 수 없이 끊어야겠네요."
가니로가 입꼬리를 올렸다.
"대공의 제자, 시몬 폴렌티아 학생회장의 연락인데요."
우뚝.
그녀의 동작이 멈췄다.
이내 팍! 하고 탄력을 이용해 제자리에 선 그녀가 근처의 물통을 낚아채서 꿀떡꿀떡 냉수를 들이켜는 동시에 목에 걸린 수건으로 땀을 닦았다.
"아, 음."
가볍게 땀을 닦아낸 그녀가 혼탁해진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이내 가니로를 째려보며 말했다.
"뭐 하느냐? 당장 그것만 놓고 꺼지거라!"
가니로가 허허 웃으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세상에, 대공 역시 도시물 먹으셨......."
뻥!
진이 대장군의 엉덩이를 걷어차 집무실 밖으로 내보내고는 통신 수정구를 작동시켰다.
이내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청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예, 진 아르스칼트입니다."
* * *
같은 시각.
펜타모니엄에서 잔뜩 긴장한 얼굴로 통신 수정구를 들고 있던 시몬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아, 대공! 저 시몬입니다."
통신 수정구 너머로 진의 툴툴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쯧, 네놈이었냐. 바쁜데 무슨 일이느냐? 일국의 대공이 아무 때나 연락할 수 있는 한가로운 자리가 아니거늘.
"아하하, 죄송합니다. 그게......."
전화 거는 타이밍이 좋지 않았나?
시몬은 더더욱 긴장하며 말했다.
"이번 임무평가 기간 동안 북부에 돌아가셨다고 들었습니다. 조금 걱정이 돼서요."
-걱정?
"결사로 대륙 전체가 시끄럽잖아요. 북부는 별일 없었어요?"
시몬의 물음에, 어쩐지 만족스러워하는 듯한 진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안 그래도 그 문제를 해결하러 올라간 것이니라, 지금은 거의 해결됐다.
"그거 다행이네요."
-북부야 결사 놈들이 활약하기에 썩 좋지 않은 곳이지. 건방진 것, 너도 알지 않느냐?
시몬도 이제야 미소를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칼로스 북부는 극도의 전사 중심 문화에 무를 숭상하는 분위기고, 외부인은 철저하게 배척한다.
갑작스럽게 외부인이 등장하기도 힘들고, 이간질을 당해도 당사자들끼리 한판 붙어서 앙금을 푸는 곳이었다. 그래서 시몬도 처음엔 북부에서 적응하느라 애를 먹었다.
"혹시 사태가 커졌다면 얼마든지 말씀해 주세요! 제가 바로 갈게요!"
-흥, 꺼지거라. 임무평가로 바쁠 텐데 잘도 전화했구나. 너는 지금 어디지?
"펜타모니엄입니다."
두 사람은 가볍게 이런저런 안부를 주고받았다.
그때 진이 불쑥 말했다.
-그래서, 안부 인사는 명분이겠고 뭔가 전화한 이유가 있겠지?
시몬이 찔끔한 표정을 지었다.
이내 슬슬 눈동자를 굴리던 그가 흠 하고 입을 열었다.
"이, 이번에도 마정석 광산 수입. 가불해 주시면 안 될까요?"
-또 시작이군.
그녀의 툴툴대는 목소리가 들렸다.
-이쯤 되면 슬슬 수상하구나. 혹시 도박이나 사치에 맛 들였느냐? 혹은 이상한 계집에게 붙들려 놀아나기라도 하는 것이냐.
"무슨 말씀이세요!"
시몬이 펄쩍 뛰었다.
그런 시몬의 반응이 재미있는지 수정구에서 크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네놈의 아버지가 어떤 인물인지 아는데, 합리적인 의심이 아니더냐!
"그런 거 아닙니다! 이번 본 드래곤 제작 때문에 추가로 필요한 재료가 있어서요."
-막대한 돈을 쏟아부어 만든 드레드 하트로는 충분하지 않나 보군?
"네, 솔직히 조금 더 제대로 만들어보고 싶은 욕심이 생겼어요."
시몬은 사실대로 사정을 이야기했고, 이내 진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이번엔 1만 골드라, 북부의 행정예산 몇 달 치를 하루 만에 태우려고 하다니. 네놈도 제정신은 아니구나.
"......하하."
-마침 펜타모니엄이라고 했나? 아르스칼트의 가문의 이름을 대면 지급보증서를 써줄 것이니라. 내가 말해놓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대공!"
몇 번이고 거듭 감사 인사를 한 시몬이 이내 통신을 종료했다.
이내 가슴에 손을 올리고 길게 숨을 토해냈다.
"......큰 산 하나 넘었다."
네크로맨서라는 직업이 미친 듯이 돈이 많이 드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그래도 이제 돈도 확보됐고 재료를 구할 준비는 마쳤다.
시몬은 가볍게 제 뺨을 두들기며, 한결 진지해진 얼굴로 통신시설에서 빠져나왔다.
"가보자."
* * *
본 드래곤에 쓰일 재료에 대해서만큼은, 아론과 외디프의 의견이 갈렸다.
아론은 지금 있는 재료들을 활용해, 현실적인 방법으로 본 드래곤을 완성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더 이상 재료에 더 돈을 들일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였다.
반면 외디프는 달랐다. 조언자급 드래곤의 유해에 더해 생생한 드래곤 하트까지.
이번 본 드래곤은 희대의 걸작이 될 테니 무리해서라도 최고급의 비싼 재료들을 써서 완전한 작품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의견이었다.
두 교수의 성향과 가치관이 다르니 일어난 의견 충돌.
시몬은 당초 드래곤 하트 외에 다른 재료에는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지만, 외디프의 끈질긴 설득에 마음이 흔들렸다.
-시몬 군, 자네가 가구 장인이라고 생각해 보게! 아무리 소파의 가죽이나 솜을 최고급으로 쓴다고 해도, 싸구려 물풀로 팔다리를 붙일 텐감? 나중에 누가 쓰다가 소파 다리가 떨어져 나가면 그건 결국 명품이 아니라 쓰레기일세!
재료에 대한 집착이 어마어마한 외디프는 무조건 최고급 재료를 써야 한다며 힘주어 말했다.
사실 시몬도 자금에는 여유가 있었고, 나중에 후회가 되지 않도록 힘닿는 선에서는 좋은 재료들을 쓰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결국 본 드래곤의 주인인 시몬이 그렇게 결정했으니 아론도 동의했다. 대신 지나치게 사치스러운 재료나 어느 정도 대체가 가능한 재료들은 조금 더 값이 싼 쪽으로 고르기로 했다.
-마침 여기는 펜타모니엄! 대륙의 온갖 진귀한 재료들이 모이는 곳이지! 자! 내가 필요한 물건 목록을 준비했다네!
일반 네크로맨서 상점에서는 구하지 못하는 물건들, 펜타모니엄 경매장에서만 구할 수 있는 호화로운 재료 다섯 가지가 있었다.
-물풀 아교.
-미로수염버섯 포자.
-고울의 힘줄.
-에버 드레이크의 이빨.
-천둥나무의 열매즙.
시몬이 자금을 확보해 오자마자 외디프는 모든 계획을 짰다. 경매 일정표를 분석해서 완벽한 일정을 구성했다.
-나만 믿게! 내가 펜타모니엄에 언데드 재료를 확보하러 한두 번 온 줄 아는감?
외디프는 펜타모니엄의 VIP였다.
시몬도 물론 예전에 펜타모니엄에서 활약했던 것 때문에 VIP 이상의 취급을 받고 있었고 두 사람은 함께 경매장에 들어갈 수 있었다.
지금부터는 심리전이었다.
신분이 노출되면 원하는 물건이 노출될 수 있었기에, 시몬은 정장에 동물가면을 쓰고 경매장 안으로 들어갔다. 가면은 갈기가 나 있는 사자가면이었다.
이내 희귀 재료들을 확보하기 위한 전쟁이 시작됐다.
-500골드!
-700골드!
귀족 가정의 몇 달 치 생활비가 가볍게 오르락내리락하는 치열한 경매 속, 외디프는 필승 전략을 세워왔다.
그는 쪽지를 뒤로 보내 시몬에게 지시를 내렸고, 시몬은 철저히 그 지시에 따랐다.
-1,500골드.
-네! 1,500골드! 더 없으십니까?
경매란 게 결국 참가자들의 최종예산에 따라 승자가 결정된다고는 하지만, 가격을 정하는 게 사람인 만큼 심리전인 요소도 간과할 수 없었다.
시몬은 단번에 높은 가격을 불러 경쟁자들의 의욕을 꺾기도 하고, 경쟁을 방관하다가 마지막에 형성된 가격으로 뒤엎기도 하면서 다채로운 전술을 사용했다.
-저 사자가면이 싹쓸이하는군.
-오늘 키메라를 만들려고 했는데 힘줄을 빼앗겼어. 정체가 뭐야?
투덜거리는 네크로맨서들을 보며, 시몬은 가면을 써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과연 외디프는 숙련가답게, 그야말로 펜타모니엄 경매장을 들었다 놓았다 했다.
-2,000골드!
-2,000골드 나왔습니다!
시몬이 필요한 물건을 사는 데 집중할 수 있도록 다른 물건들의 가격을 높이 올려 버리거나, 다른 경쟁자들이 적정가 이상으로 구매하도록 유도하기도 했다.
또한 반대로 시몬이 원하는 물건이 너무 노골적인 경우, 다른 경쟁자들이 시몬을 견제하려고 가격을 높여 버릴 수도 있었기에 외디프는 시몬에게 관심 없는 다른 물건들도 경매에 참여하도록 지시했다.
그렇게 순조롭게 경매가 이어졌고.
"후아아아."
경매를 끝마친 시몬은 건물 밖을 빠져나와 공원 벤치에 늘어지듯 앉았다. 가면은 가방에 넣은 채 지금까지 낙찰받은 물건들을 확인했다.
-물풀 아교. (O)
-미로수염버섯 포자. (X)
-고울의 힘줄. (O)
-에버 드레이크의 이빨. (O)
-천둥나무의 열매즙. (X)
경매에서 무조건 이길 수는 없었다. 두 가지 물건은 확보하지 못했지만, 이 정도만 해도 승률은 높은 편이었다.
외디프는 직접 미로수염버섯을 낙찰받은 사람에게 찾아가 설득해 보겠다고 했다.
문제는 천둥나무의 열매즙이었다.
-워낙 희귀한 열매라 앞으로 몇 달간은 물량이 나오지 않을 걸세.
-다른 방법이 없을까요?
-씨앗은 훨씬 싸게 구할 수 있으니, 1년 즈음만 땅에 심고 기다리면 어떻게든 열매를 구할 수 있지 않겠남?
시몬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건 안 돼요.
네프티스와 약속한 기간은 2학년이 끝나는 시점이다. 이 본 드래곤을 내어준 당사자인 그녀를 실망시키고 싶지는 않았다.
-음! 그럼 그것도 내가 어떻게든 손을 써보겠네!
외디프가 그렇게 말했지만, 자신의 일인데 그를 그 정도로 고생시켜도 되나 싶었다.
시몬이 공원 벤치에 앉아 방법을 고심하고 있는 그때.
"?"
눈앞의 시야가 어둡게 가려졌다.
"누구게?"
작은 손, 은은하게 풍기는 비누 향기.
시몬이 눈을 끔뻑이다가 이내 피식 웃었다.
"......설마, 사샤야?"
"딩동댕!"
시몬에게서 손을 떼어낸 그녀가 이내 뒤에서 와락! 시몬을 끌어안았다.
시몬은 당황했고, 그녀가 머리를 부빗하며 말했다.
"정말 반가워! 시몬 오빠!"
"......아하하."
이내 그녀가 뒷짐을 쥔 채 살랑거리는 걸음으로 시몬의 앞으로 왔다. 여학생 검정 교복에 회색 스커트, 그리고 갈색 단발 머리카락.
명실상부 최강의 1학년.
특례 1번 사샤가 눈앞에 있었다.
"키 많이 컸네!"
시몬이 감탄하자, 그녀가 뽐내듯 제자리에서 한 바퀴 빙그르르 돌았다.
"그치? 이제 숙녀티 나지? 한창 자랄 때거든! 이제 카미 언니보다 내가 조금 더 클걸?"
시몬이 쓰게 웃으며 시선을 돌렸다.
'카미가 상처받겠네.'
하프라고 하지만, 뱀파이어는 인간보다 신체나이를 적게 먹으니 말이다.
시몬이 이내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
"그런데 네가 왜 여기 있어? 학교는?"
"나야 여기가 집 같은 곳인데 뭘."
사샤가 생글생글 웃었다.
"키젠에 입학하는 대신, 펜타모니엄에 3개월에 한 번씩은 돌아와야 해. 내 몸 상태 관리 때문에."
"아, 그렇구나."
사샤는 중립지대 출신으로, 한때 성녀로 각성하기 직전까지 갔던 인물이었다.
시몬처럼 신성과 칠흑 모두에 재능에 있던 인물.
현재는 코어를 각성했지만, 신성의 잔재가 남아 있어서 계속해서 몸 상태를 펜타모니엄에서 주시해야 했다.
"그보다 우리 외디프 교수님한테 들었어! 천둥나무의 열매즙을 구하고 있다며?"
"응."
"씨앗만 가져오면 내 이능으로 빨리 자라게 해서 열매를 맺게 해줄게."
사샤의 이능은 식물을 자라게 하거나 움직이게 하는 힘.
시몬이 벌떡 일어났다. 아무래도 외디프가 알아봤다는 방법이 이쪽인 것 같았다.
"정말이야?"
"대신 조건이 있어!"
그녀가 손끝을 세웠다.
흐흐흐.
시몬은 살짝 불안함을 느꼈다.
뭔가 음모가 있는 듯한 웃음이었다.
"조건이...... 뭔데?"
* * *
시몬과 사샤가 본 드래곤의 재료를 놓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때.
드높은 유리탑 위.
"............."
시몬과 사샤의 만남을 가만히 주시하고 있는 한 쌍의 눈동자가 있었다.
그러다 하얀 가운을 크게 펄럭이며 천천히 내부로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