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910화
그날 오후.
<결사 사태 약물과 광기의 비밀 - 렉사나>
시몬은 렉사나 박사의 학술회에 참석했다.
키젠 교복 대신 최대한 눈에 띄지 않는 차림으로 와서 자리에 앉았다. 주위를 둘러보니 연구자들보다는 왕국의 고위 관계자나 기자들이 더 많이 참석한 것 같았다.
'펜타모니엄이 세상에 끼치는 영향이 크긴 크구나.'
동공이 변하는 '이상증세 약물'에 대한 연구 발표는 아직까지 없었다. 그러니 이번 수석 연구자인 렉사나의 발표가, 앞으로 암흑연합의 정책에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은 분명해 보였다.
얼마 기다리지 않아 연단 뒤의 커튼이 걷히며, 또각 또각 구둣발 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얗게 센 머리카락의 중년여성이 웃는 얼굴로 걸어 나오고 있었다.
"이렇게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렉사나입니다."
그녀가 능숙한 시선 처리로 청중들을 훑으며 말을 이었다.
"결사라는 정체불명의 집단 때문에 대륙이 혼란스러운 지금, 저희 펜타모니엄의 연구가 여러분의 고민을 해소하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녀가 손짓하자, 조수들이 후다닥 뛰어 들어와 테이블에 커다란 가방을 내려놓았다.
"무엇이 결사가 일으킨 일이고, 무엇이 우연으로 일어난 일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세상입니다. 하지만 저희 연구소 연구 결과, 결사의 사건으로 추정되는 사건들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그녀가 가방을 열고 흰 액체가 든 유리병을 들어 올렸다.
"바로 이겁니다."
기자들이 웅성거리며 마력 촬영기를 작동시키기 시작했다. 시몬도 고개를 쭉 빼 밀고 그것을 보았다.
'확실해.'
에르제베트가 사이비 종교의 아지트에서 봤다는 그 약.
교주 행세를 한 노파는 바로 저 약물을 신도들에게 먹였었다.
"이 물처럼 찰랑거리는 하얀 액체가 혼란의 주범입니다. 저희 연구소에서도 어렵게 확보했습니다."
그녀가 유리병을 자신의 눈앞까지 가져와 흔들었다.
"이 약물을 복용하면 인간 본연의 공격성이 극단적으로 증폭된다는 연구결과가 나왔습니다. 최근에 일어난 여러 결사 사태에서 똑같은 증상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속속 발견되고 있습니다."
검은 로브를 입은 노년의 네크로맨서가 콧방귀를 뀌었다.
"공격성 증폭? 그 정도의 약물이나 저주 아티펙트는 세상에 얼마든지 있지 않소."
"아니요, 지금까지 나온 약물들과는 완전히 궤를 달리하는 물건입니다."
그녀가 관중들을 바라보았다.
"음용 직후 30분 만에 효력이 나타나며 인간의 뇌를 강렬하게 자극해 인간을 인간 이하의 금수로 퇴화시킵니다. 효력도 오래가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제작에 큰 비용이 들지 않는 건지 대륙 전역에 수 만병이나 발견되었습니다."
그녀가 한층 목소리를 높였다.
"무엇보다, 악의를 가진 집단이 이 물건을 대량으로 유통하고 있다는 점이 문제입니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 이 약물을 마시고 미쳐 버릴지 모르는 시대를 살아가게 된 겁니다."
관중들이 수군거리는 사이, 마력 촬영기를 든 여성 기자가 손을 들었다.
"대책은 있습니까?"
"네, 물어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선 저희 펜타모니엄에서 해독제를 제작 중입니다. 현재 제작 진행률은 80% 정도 됩니다."
오오오오!
모두가 바라 마지않던 상황이었기에, 기자들의 눈동자가 흥분으로 차올랐다.
"이 약품에 어떤 원료가 들어갔는지 분석 중에 있습니다. 풀린 물량으로 미루어보아, 단가가 저렴하고 생산이 어렵지 않은 원료로 추정되는 만큼 해독제로 충분히 대응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그럼 해독제가 완성되기 전까지는 어떻게 하죠? 해당 약품을 구분할 방법은 없는 겁니까?"
"있습니다."
렉사나가 목소리를 높였다.
"해당 약품에는 이질적일 만큼 강렬한 '쓴맛'이 있습니다. 대륙민 여러분은 해독제가 만들어지기 전까지는 외부에서의 식사를 자제하시고, 음식에 이상한 쓴맛이 느껴진다면 즉시 폐기하시길 권고드립니다."
기자들이 마력 촬영기의 소리가 끊임없이 울려 퍼졌다.
* * *
렉사나의 강렬했던 학술 설명회가 끝나고, 기자들은 신문에 이 내용을 싣기 위해 앞다투어 빠져나왔다. 연구자들이나 왕국 관계자들은 그녀를 둘러싸고 질문을 퍼부어댔고, 그녀는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지식과 연구의 최전선, 저희 펜타모니엄을 믿어주시길 바랍니다."
그녀는 어떤 질문에도 상냥하게 대답했다.
사람들이 만족한 얼굴로 하나둘 떠나가고, 렉사나도 짐을 챙긴 뒤 학술회장에서 빠져나가려는데.
"실례합니다."
"아."
렉사나가 안경을 고쳐 썼다.
"마지막 질문자는 당신이네요. 시몬 폴렌티아 학생회장."
시몬은 차분한 얼굴로 그녀의 앞에 멈춰 섰다.
"혹시 궁금한 점이라도 있었나요?"
"사실 궁금한 점이라기보다는......."
시몬이 성큼성큼 걸어가서 액체가 든 서류가방을 달칵 소리가 나게 열었다.
"의아한 점이 있어서요."
"이, 이보시오!"
조수들이 시몬을 말리려고 했지만, 렉사나가 손을 들어 제지했다.
"그만, 그만. 키젠의 수사권을 존중해 주자고요."
시몬은 서류가방 안에서 흰 액체를 뽑아 들더니 눈앞에서 한번 흔들었다.
"이거, 진짜는 아니죠?"
"......."
안경 너머로 렉사나의 눈빛이 번쩍였으나 순식간에 그런 낌새는 사라졌다.
"네, 사실은 샘플이에요. 어렵게 입수한 진짜들은 연구소에서 연구 중이니까요. 설명회에 굳이 진짜를 가지고 나올 필요도 없구요."
그녀가 제 어깨를 문지르며 말을 이었다.
"혹시나 그런 걸로 키젠에서 문제 삼으실 생각이라면...... 네, 잘못은 잘못이니 변명의 여지가 없네요. 저희 사정을 고려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시몬은 다시 그 샘플병을 가방에 넣고 말을 이었다.
"설명회에서 이 약물의 효과는 공격성 증폭이라고 말씀해 주셨는데, 혹시 그 외에 다른 증상은 없었나요?"
"......."
잠시 침묵을 지키던 렉사나가 이내 슬쩍 웃었다.
"발견되는 증상이 사람마다 다 달라서요. 저희는 가장 대표적이고 공통적인 증상만 설명회에 이야기했을 뿐입니다. 공격성이 증폭됐을 때 사람의 반응도 다 다르고요."
"그렇군요."
시몬이 서류상자를 완전히 닫아서 잠근 다음, 등을 돌려 걸어갔다.
"협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실례했습니다."
"학생회장님."
그녀가 떠나려는 시몬을 불러세웠다.
"키젠의 학생회장이라면 현장에도 자주 나가겠죠? 혹시 이 약물에 대해 더 아는 정보가 있다면, 제보해 주실 수 있을까요? 많은 사람들을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답니다."
완전히 그녀를 돌아본 시몬이 애매한 미소를 흘렸다.
"사실 저도 동료들한테 주워들은 이야기뿐이라, 펜타모니엄에 제보할 정도로 공신력 있는 정보를 가진 건 아니네요."
"아쉽군요."
"이번 설명회 잘 들었습니다. 정말 좋은 일을 하고 계시네요! 앞으로도 암흑연합을 위해 힘써주시길 바라겠습니다."
"그럼요. 키젠의 학생회장만큼은 힘들겠지만, 저희들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야죠."
시몬은 가볍게 목례한 뒤 밖으로 나갔다.
이내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저벅저벅 걷다가 숨죽인 목소리로 말했다.
"......에르제."
"네, 네."
어느새 시몬의 옆으로, 분홍색 머리카락의 여성 기자 한 명이 옆으로 따라붙었다. 뿔테 안경을 내린 그녀가 눈을 찡긋했다.
"부르셨나요? 나의 주인님."
"리버론에서 가져온 물건, 갖고 있지?"
"그럼요."
그녀가 유리병 하나를 건네주었다.
시몬은 그것을 옷에 숨긴 뒤, 바로 근처의 화장실로 들어왔다. 문을 닫고 유리병의 뚜껑을 연 뒤, 혀를 살짝 대보았다.
반응은 바로 왔다.
퉷! 윽, 퉷! 퉷!
시몬은 입에 든 걸 강박적으로 내뱉고는, 물로 몇 번이나 헹궜다. 이내 소매로 입가를 닦으며 중얼거렸다.
"......달아."
에르제베트의 보고를 떠올렸다.
약품은 극단적일 만큼 단맛이라고.
그냥 입에 머금는 순간 이거라는 느낌이 확 왔다. 정말로 렉사나가 해당 약품을 손에 넣었다면 모를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분명 '쓴맛'이라고 많은 관계자들과 기자들 앞에서 발표했다.
'수상해.'
수석 연구원이라면 펜타모니엄의 영향력이 얼마나 막강한지 알고 있을 텐데, 왜 이런 거짓 정보를 유포한 걸까?
"에르제."
"네에-"
옆 화장실 문이 벌컥 열리며 에르제베트의 다리가 드러났다.
"......여기 남자 화장실이거든."
"우훗훗, 뭐 어때요. 소녀는 언데드니까요."
"그래, 그런 것보다."
시몬이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입 안을 헹군 뒤, 말했다.
"사샤가 걱정돼. 지금 당장 렉사나 박사의 뒤를 캐봐야겠어."
* * *
바로 잠입 작전에 들어갔다. 본래 정보수집은 에르제베트에게 맡겼지만, 이번만큼은 시몬도 직접 참여하기로 했다.
"렉사나를 둘러싼 보안을 뚫기 위해선, 렉사나의 주변 인물로 변신해서 들어가야 해요."
에르제베트가 설명했다.
"우선 렉사나 박사의 조수 명단은 확보해 놨사와요. 그들 중 오후 시간에 일정이 없으며 동선을 찾아가기 유리한 인물의 프로필을 싹 외웠죠."
"철저하네."
시몬이 땀을 삐질 흘리며 중얼거렸다. 에르제베트가 말을 이었다.
"자! 여기서 제일 중요한 건 그들의 '이성 취향'이와요."
"왜?"
그녀는 말없이 거미줄을 펼치더니 제 몸에 덕지덕지 붙이기 시작했다.
글래머스한 몸매의 눈밑점까지, 순식간에 프로필에 나온 조수의 이상형으로 변신한 그녀가 눈을 찡긋했다.
"그야 유혹해서 납치한 뒤에 그 사람으로 변신해야 하니까요."
시몬이 할 말을 잃은 표정으로 입을 벌렸다.
그렇게 모든 준비가 끝났다.
에르제베트는 펜타모니엄 건물에서 빠져나오는 조수에게 자연스럽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에발눈 보조 연구원님! 랭거스틴 소속 기자예요! 잠시 인터뷰 가능할까요?"
에발눈이라 불린 조수가 고개를 내저었다.
"미안하지만 사양하겠습니다. 렉사나 박사님이 발표한 것 외에 더 말할 부분은 없...... 아."
차갑게 말하던 그가 에르제베트를 보고는 멈칫했다.
"안, 되나요?"
얼굴을 빨갛게 물들인 그녀가 한 손으로는 머리를 쓸어 넘겨 귀를 드러냈다.
"저는 렉사나 박사님보다 연구원님의 의견이 더 궁금한데."
동시에 다른 한 손으로는 더운 듯 옷깃을 흔드는 시늉을 했다.
"조용한 곳에서 오붓하게 단둘이서 인터뷰. 부탁드려도 될까요?"
침이 꼴깍 넘어간 조수가 홀린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잠시 후.
"으읍! 읍읍!"
음습한 골목 구석까지 끌려들어 간 조수가 거미줄에 포획당한 채 공포에 질린 얼굴로 발버둥 치고 있었다.
시몬은 한숨을 푹푹 쉬며, 조수의 뒤로 돌아가 그를 '슬립'으로 잠재웠다.
"이거 범죄 아냐?"
"뭐 어때요. 정보 확보가 더 중요하죠."
에르제베트가 그의 몸에서 열쇠와 신분증 등을 꺼낸 뒤, 송장거미들에게 맡기고 자료를 찾아오라 명령했다.
이내 치수를 재듯 그의 몸을 훑어보던 그녀가 거미줄을 펼쳐 시몬의 몸에 씌워주었다.
"자, 어떻사와요? 군단장님."
그녀가 거울을 보였다. 방금 그 조수의 모습으로 감쪽같이 변해 있었다.
"제가 변신해야 하니 여성도 한 명 있으면 좋겠네요. 다음 납치할 대상은......."
"됐어!"
시몬이 얼른 말했다.
"그냥 적당히 아무 연구원 중 한 명으로 변신하면 안 돼?"
"그러다 그 사람이랑 마주하면 곤란한...... 아."
에르제베트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생각해 보니 괜찮을 것 같은 사람이 한 명 있네요."
"?"
* * *
펜타모니엄, 제1 연구시설 중앙탑.
"수고하고."
"어어."
이제 막 근무교대를 마친 경비 요원들이 자리에서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입구를 지키고 있었다.
가장 경비가 삼엄한 중앙탑이었지만, 이 시간대는 그나마 한가할 시간대였다.
그때 마침 문이 열리며 한 쌍의 남녀가 들어왔다.
"어서 오...... 음?"
어쩐지 어색하게 웃고 있는 흰 가운 차림의 보조 연구원, 그리고 그 옆에는 예쁘장한 까만 교복을 입은 소녀가 그 옆에 팔짱을 끼고 있었다.
소녀 쪽은 워낙 유명인물이었다. 사샤 앤드라실. 키젠에서 무려 특례 1번을 따낸 아이.
그리고 남자 쪽은.......
"에발눈 자네, 오늘 오후는 일찍 퇴근이지 않았나?"
옆으로 지나가던 연구원이 불쑥 물었다. 에발눈은 귀찮은 얼굴로 대꾸했다.
"연구원이 퇴근이라고 어디 진짜 퇴근이겠나."
그는 세상 모든 엔니지어의 근심을 뒤집어쓴 듯한 얼굴로 대꾸하고는, 신분증을 경비에게 내밀고 말했다.
"렉사나 박사님이 사샤를 데려오라고 해서 말일세."
"아, 그렇군."
"뭐 그렇지."
신분증을 확인한 경비들이 물러나 주었다. 약간의 동정 어린 시선은 덤이었다.
"그럼 올라가 보겠네."
"수고하게. 사샤 학생도 공부 열심히 하고요."
"안녕히 계세요!"
이내 그 연구원과 헤어진 에발눈과 사샤는 걸음을 옮겼다. 어느새 긴장으로 셔츠가 땀으로 흠뻑 젖은 에발눈이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에르제, 조금 떨어져!"
"에헤헤."
사샤로 변신한 에르제베트가 더더욱 몸을 밀착하며 얼굴을 부빗거렸다.
"시몬 오빠아-"
역시 이건 아닌 것 같다. 시몬이 얼른 사샤로 변장한 에르제베트를 떼어놓으며 조용히 말했다.
"에르제! 아무리 다른 사람으로 변신했다더라도......!"
"흑, 오빠 너무해."
사샤가 바로 울먹이는 시늉을 했다.
두 손을 눈가에 대고 '힝힝' 소리를 냈다.
"나두 평소엔 시몬 오빠를 귀여워하는 쪽이었지만, 가끔은 귀여움받고 싶을 때도 있단 말야."
미칠 지경이었다.
주위에 아무도 없는 걸 재차 확인한 시몬이 말했다.
"내가 절대명령을 쓰게 하지는......."
"리버론 사태의 활약에 대한 포상, 아직 못 받았는걸."
사샤의 눈매가 살짝 사나워졌다.
"오빠랑 같이 지내고 싶어서 원정대 면접도 봤는데, 오빠가 나 정보수집이나 맡겨 버렸잖아. 이번에도 내 마음대로 못 하게 구속하려고? 그럼 나 삐뚤어질지도 몰라. 오빠."
'윽.'
그러고 보니 그랬다.
양심이 찔렸던 시몬이 움찔하더니, 이내 손을 내리며 길게 한숨을 쉬었다.
"......알았어."
"예이!"
사샤가 초롱초롱한 눈으로 뭔가를 요구하듯 바라보았다. 시몬이 하는 수 없이 손바닥을 그녀의 이마에 덮고 쓰다듬어 주었다. 그녀가 으히힛 웃었다.
'이게 대체 무슨 꼴이야.'
아무리 봐도 정보를 캐는 게 아니라 에르제베트의 역할 놀이처럼 되어버렸다.
이래서 둘이서 같이하자고 했구나.
시몬은 당했다는 생각을 했지만, 이미 여기까지 와 버렸으니 어쩔 수 없었다.
"저쪽 계단으로 올라가자, 시몬 오빠."
가짜 사샤가 팔짱을 끼며 소곤거렸다.
"렉사나 박사님의 방이 이 위에 있을 거야."
그저 사샤와 마주치지 않기를 바라야 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