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921화
시몬은 지하의 기숙사 휴게실로 내려왔다.
늦은 시간이라 사용하는 사람이 없을 줄 알았는데, 2학년 학과생 세 명이 소파에 앉아 수다를 떨고 있었다.
그들이 내려온 시몬을 발견하고는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어, 회장이다!"
"안녕! 너 점호할 때 없어서 난리였잖아! 운이 없었네."
시몬도 웃는 얼굴로 동기들의 인사를 받아주었다. 뚱뚱한 2학년 남학생이 쩝쩝거리며 말했다.
"회장, 이거 먹을래? 할머니가 보내준 호두파이야."
그가 음식을 권하는 짧은 시간 동안 입가에 묻은 부스러기가 우수수 호두파이에 떨어지고 있었다. 시몬은 애써 못 본 척하며 손을 휘저었다.
"괘, 괜찮아. 저녁을 너무 많이 먹어서."
"회장, 이야기 들었어."
이번엔 이름만 간신히 기억나는 여학생이 귀밑머리를 샤락 쓸어 넘겼다.
"대영지 리버론을 구하고 미친용이랑 싸웠다며? 대단하다."
"난 크게 한 거 없어. 판타서스 선배님이랑 에이젤 선배님이 다 하셨지."
"회장은 매번 남들 공을 높이는 것 같아. 아! 혹시 이번 수행평가에 대한 새로운 정보 들었어?"
처음으로 시몬의 귀가 쫑긋했다.
"새로운 정보?"
"응, 묘소 활용력을 평가하려고 장애물이 많은 시험장을 만들고 있대. 근데 나는 이번 묘소가 조금 어려운 것 같거든. 묘지기 컨트롤도 어렵고."
그녀가 살짝 시몬의 눈치를 봤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혹시 괜찮다면 나랑 연습......."
거기까지 말한 그녀의 고개가 갑자기 뒤로 홱 젖혀졌다. 다른 두 명도 움찔움찔 어깨를 떨었다.
시몬이 무슨 일인가 싶어서 보고 있는데, 다른 두 명이 드르륵 의자를 끌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 오네, 슬슬 가야겠다."
"나는 과제 마무리하러."
그들이 설렁설렁 계단을 올라갔고, 마지막으로 여학생이 극도로 진지한 표정으로 시몬을 노려보았다.
"난 똥 싸러 간다."
"그, 그래."
밑도 끝도 없이 그런 소리를 내뱉은 그녀가 쿵쾅쿵쾅 계단을 올라갔다.
시몬이 멍해 있는 사이, 이번에는 또 한 명의 인물이 계단을 내려왔다.
"좋은 밤이에요, 시몬."
뭔가 이상하다 했더니 역시나.
비단 같은 백금발 머리카락을 흔들며 상아탑의 차기 후계자, 세르네 아인다르크가 계단을 걸어 내려왔다.
"너 또 동기들을 깃털로 조종한 거야?"
"글쎄요. 진짜 생리현상이 아니었을까요?"
그녀는 천연덕스럽게 대답을 회피하고는, 아까 그 여학생이 올라간 계단을 돌아보며 살벌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끼 부리네. 죽을라고."
"응? 뭐?"
"오호호.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녀의 눈꼬리를 휘며 시몬을 돌아보았다.
"그보다 시몬이 먼저 나를 불러내다니 조금 의외네요. 무슨 일 있어요?"
바로 본론인가.
더 싸워도 의미도 없었으니 시몬은 작게 한숨을 쉬고는 고개를 들었다.
"사실 부탁할 게 있어서."
할짝.
그녀가 혀로 입술을 훑었다.
"부탁? 부탁. 아주 좋은 울림이네요. 쿠폰 도장 몇 개짜리 부탁인지 궁금한걸요."
'......윽.'
"조금 걱정되는 거 있죠? 시몬도 알다시피 나를 부리는 비용은 꽤."
고개를 기울여 바짝 다가온 그녀가 고혹적인 웃음을 흘렸다.
"비싸서."
시몬이 침음을 흘렸고, 세르네는 만족스럽게 미소 지은 뒤 한 걸음 물러났다.
"중요한 이야기면 방음 결계를 칠까요?"
"부탁해."
그녀가 길고 탐스러운 백금발 머리카락 안으로 손을 넣고는 흔들었다. 새콤달콤한 과일향이 방 안으로 확 퍼지며, 그녀의 손끝에 깃털 몇 장이 붙잡혔다.
이내 그녀가 손을 휘두르자 깃털이 벽과 바닥, 천장 곳곳에 꽂히며 어두운 명암의 결계가 주위를 덮기 시작했다.
"다 됐어요. 그럼 이야기를 나눠보죠."
고개를 끄덕인 시몬이 자리에 앉았다.
'어떤 이야기부터 꺼내야 하지.'
시몬이 머릿속에서 생각을 정리해 보고 있는데, 그녀가 자리에 앉질 않았다. 이상해서 고개를 들어보니 그녀가 테이블 앞에 멀뚱멀뚱 서 있었다.
뒤늦게 시몬이 '아' 하고 깨달은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의자를 대신 빼주었다.
"어머나, 고마워라."
그제야 그녀가 여우처럼 슬쩍 웃으며 교복 스커트를 붙잡고 우아하게 앉았다.
여전히 대접받는 걸 좋아한단 생각이 들었다. 특히 자신이 조종하지 못하는 사람일수록 그런 경향이 강했다.
이내 그녀가 다리를 옆으로 꼬고, 팔꿈치를 괸 채 그 위로 자신의 얼굴을 살짝 올리고는 생글생글 웃었다.
"이제 사연을 들어볼까요?"
세르네와 이야기하면 늘 주도권을 빼앗기는 기분.
나름 학생회장이 됐지만 몇 수 위의 연상을 상대하는 기분이다. 시몬은 흠흠 헛기침을 한 뒤 입을 열었다.
"화이트에 대한 일이야."
시몬은 화이트와 있었던 일, 그의 제안들을 모두 이야기했다.
세르네는 흥미로운 표정으로 이야기를 들었다.
하지만 시선은 자꾸 얼굴 쪽으로 향해 있었다. 시몬의 얼굴을 다각도로 관찰하는 데 정신이 팔린 느낌.
"너, 내 이야기 제대로 듣고 있지."
시몬이 눈매를 살짝 좁히며 말했다.
"그럼요. 묘사하자면, 철창에 갇힌 원숭이가 다른 원숭이들을 구해달라고 부탁하는 내용이잖아요. 사육사를 배신하는 대가로."
세르네는 자신의 정신지배에 저항하지 못하는 인간들을 '원숭이'라고 부르곤 했다. 시몬이 한숨을 쉬었다.
"사람한테 그런 묘사는 좀 그런데. 아무튼."
시몬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같이 가줄 수 있어?"
시몬은 이번 일에 그녀가 최적격이라고 생각했다.
우선 화이트가 제시한 조건에도 부합한다. 키젠에 다니지만 소속은 엄연히 상아탑이니까.
거기에 그녀는 시몬이 군단장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인물이며, 시몬이나 화이트와 함께 소환학과로서 활동하니 비상사태가 터져도 얼마든지 대처할 수 있다.
물론 다른 이유들은 다 제쳐놓더라도, 압도적으로 '강하다'. 그 하나만으로도 자격은 충분했다.
"나 말고 누구한테 또 부탁했어요?"
그녀가 물었다.
"네가 처음이야."
"어머, 그럼 로레인은?"
시몬은 고개를 내저었다.
로레인도 세르네 못지않은 강자고, 시몬이 군단장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지만, 그녀는 완전한 키젠 소속이며 장차 키젠의 총장이 될 후계자다.
그런 그녀가 키젠 측에 사실을 알리지 않고 시몬과 화이트를 개인적으로 돕는 것 자체가 차후에 큰 리스크가 될 수 있다.
그녀에게 그런 큰 부담을 줄 수는 없었다.
"로레인에게 부탁할 수는 없......."
"좋아요."
"응?"
"시몬의 부탁, 내가 들어줄게요."
시몬이 눈을 깜빡였다.
이렇게 빨리 승낙할 줄이야. 훨씬 더 어려울 거라고 생각했다.
"너무 만족스러운걸요? 로레인을 거르고 나한테 먼저 왔다. 그녀가 참가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녀가 키젠이니까."
가까이 다가온 그녀가 입가에 손을 대고 은밀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나서지 않을 이유가 어디 있을까요?"
거리가 가까워지자 민망해진 시몬이 살짝 몸을 뒤로 뺐다. 세르네가 웃으며 다시 자리에 앉아 흐트러진 긴 머리를 쓸었다.
"좋아요. 그럼 시몬이 내게 정식으로 빚을 지게 됐으니 쿠폰 도장 네 장으로 받아들일게요."
"말도 안 돼. 두 장으로 해."
"네 장."
"두 장."
"네 장."
"두 장."
한 치의 양보도 없는 흥정이 오갔다.
결국 목숨을 걸고 싸워달라고 부탁하는 쪽은 시몬이었기에, 하는 수 없이 먼저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 세 장."
"좋아요, 세 장!"
그녀도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리 극적이지 않은 타협을 끝낸 두 사람이 손을 맞잡았다.
대체 10장 다 모으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걸까. 늘 그렇지만 걱정이 된다.
"이제 한 팀이 돼서 하는 말인데, 넌 화이트가 한 말을 100% 신뢰해?"
"아뇨. 당연히 함정이겠죠."
너무나 당연한 듯한 대답. 시몬이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나는 내 눈으로 본 것만 믿으니까요. 시몬의 의뢰는 수락하겠지만 내 나름대로 조사해 보려고요."
사실 시몬도 이런 문제는 확실히 해두는 게 좋겠다고 생각은 했었다. 마음으로는 화이트를 믿지만, 몇몇 에이션트 언데드들은 이 계획에 반대하고 있기도 하니까.
"그럼 딱 조사만 부탁할게. 이상한 돌발 행동은 참아줘."
"그럼요."
그렇게 답하는 세르네의 능글거리는 미소가, 시몬은 살짝 불안했다.
* * *
며칠 시간이 지났다.
큰 문제가 없는 하루하루가 지나고 있었다. 소환학과는 현재 아론의 병가로 진 아르스칼트의 묘소 수업 위주로 진행하는 중이었는데, 공동묘지 같은 곳으로 실습을 가야 해서 외부 일정이 많은 편이었다.
그리고 삼엄한 감시가 많은 로크섬 밖으로 나오면, 당연히 화이트가 포탈을 타고 넘어갈 가능성이 높아진다.
언제 어떻게 결사에 쳐들어가야 할지 모르기 때문에, 시몬은 에이션트 언데드들과 군단을 초대형 아공간에 꽉꽉 채워놓고 수업에 들어갔다.
그리고 오늘도 공동묘지에서 묘소 수업이 진행되었다.
"오늘은 묘소를 이용한 새로운 전술과 활용에 대해 배워보겠느니라."
진 아르스칼트가 앞으로 나와 직접 시범을 보였다.
"너희들도 이번에 결사와 싸우면서 느꼈겠지만, 네크로맨서들은 평지나 숲, 산악뿐만 아니라 도심 한복판이나 건물 내에서 싸울 가능성이 크다. 예를 들면 이런 장애물이 있는 경우에는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그녀가 아공간에서 꺼낸 건 좀비였고, 전면에 있는 건 허름한 석재건물이었다.
석재건물 안에 가상의 적이 있고, 좀비의 이빨이나 발톱으로는 건물을 뚫고 들어갈 수 없다.
"묘소를 사용하면 간단히 해결할 수 있느니라."
그녀가 바닥에 묘소를 생성하고, 묘소 안에 깃든 묘지기를 연기처럼 부풀게 하여 좀비 세 마리를 집어삼키도록 했다.
이내 묘지기의 연기가 집 아래의 환풍구로 들어가 집 내부에서 바로 좀비 세 마리를 꺼내 내부의 적을 공격했다.
학생들이 탄성을 터뜨렸다.
"가능하다면 시체폭발까지."
그녀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묘소를 활용하면 소환 행위 자체가 약점이 아닌, 전술이 될 수 있느니라."
흥미로운 수업이 연이어 진행됐지만, 뒷자리에 앉은 시몬은 조금 한눈을 팔고 있었다.
화이트가 신경 쓰였다.
'오늘은 문제없나?'
마침 화이트의 시선도 시몬에게로 향했다.
미리 약속해 둔 신호. 시몬이 오른손으로 귀를 만졌고, 화이트는 제 어깨를 소리 없이 두 번 가볍게 두들겼다.
어깨를 한 번 두들기면 이상 무.
두 번 두들기면 임시 실험실 들어갔다 왔다는 의미였다.
'와, 그 짧은 시간에 포탈로 넘어갔단 말이야?'
이러니 잡기 힘들 수밖에.
그리고 만약 시몬이 신호를 보냈는데 화이트가 응답이 없다면, 다른 화이트로 대체된 것이다.
시몬은 첫 번째 화이트가 준 메모리얼 수정구를 그에게 보여주고 새로 설득해야 했다. 그 화이트가 어떻게 반응할지 모르니 그야말로 최대 변수였다.
'살 떨리네.'
"건방...... 아니, 시몬 폴렌티아."
갑자기 들린 목소리에 시몬이 퍼뜩 정신을 차리며 고개를 들었다.
진이 눈을 게슴츠레 뜨고 있었다.
"감히 내 수업에 한눈을 팔다니 어지간히 자신이 있는 모양이구나, 일어나서 한번 해보거라."
곳곳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시몬이 머쓱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물론 이어지는 시범은 두말할 것 없이 완벽했다.
* * *
묘소 수업 후 잠깐의 쉬는 시간.
"............."
화이트는 홀로 나무에 앉은 새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화이트 학생."
그때 조교 한 명이 다가왔다. 화이트가 새에서 시선을 떼고 고개를 돌렸다.
"전 학기 출석 문제로 진 교수님이 찾으십니다."
끄덕.
화이트가 고개를 끄덕였고, 두 사람은 함께 걸음을 옮겼다.
공동묘지를 빠져나와 옆에 있는 작은 언덕.
빼곡한 나무들이 주위를 둘러싸듯 공터를 휘감고 있는 지형이었다. 조금 더 걸어가니 그곳에서 진이 팔짱을 낀 채 기다리고 있었다.
"왔느냐."
그녀가 나무에서 등을 뗀 채 말했다. 조교는 고개 숙여 인사하고는 자리를 떠나주었다.
"......."
화이트는 걸어가면서 주위를 훑어보았다.
지면과 나무, 곳곳에 깃털들이 꽂혀 있는 모습이 보인다. 그 깃털들이 칠흑을 일으키며 주위에 결계를 펼치고 있었다.
뒤를 돌아보니, 심지어 자신을 안내해 준 조교마저 뒷덜미에 깃털이 꽂혀 있었다.
"눈치가 빠르네요?"
진이 그렇게 중얼거리며 제 가슴에 손을 올렸다. 파르르륵! 갑자기 그녀의 몸에 깃털들이 비둘기 떼처럼 빠져나가며 새로운 인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세르네 아인다르크였다.
"시몬에겐 이야기 들었죠? 내가 당신의 배신 작전을 위한 새로운 조력자예요."
끄덕.
화이트가 고개를 움직여 긍정의 뜻을 밝혔다.
"시몬은 당신의 말을 믿는 쪽인 것 같지만 나는 아니라서요."
그녀가 두 손을 가볍게 모으며 부탁하는 시늉을 했다.
"당신의 기억을 한번 봐도 될까요?"
"......."
화이트는 아무런 대답도 동작도 하지 않고 제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사실상 부정의 의미. 그녀가 혀를 차며 머리를 쓸었다.
휘이이이잉-
바람이 불어오며 나뭇잎이 휘날렸다. 경계하듯 제자리에 가만히 서 있던 화이트가 순간적으로 팔을 뻗어 자신의 목 뒤로 손을 움직였다.
팟!
그 손가락 틈으로 나뭇잎 하나가 잡혔다. 화이트가 주먹을 움켜쥐자 나뭇잎이 찌그러들며 세르네의 깃털로 바뀌었다.
"제법이네요. 쉽게 당해주지는 않을 것 같네."
세르네가 뒷짐을 지고 천천히 옆으로 걸었다.
"근데 생각해 봐요. 당신의 행동, 모순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의 태도가 아니잖아요. 시몬이 얼마나 큰 리스크를 짊어지고 움직이는데, 당신도 공평하게, 꽁꽁 싸매지 말고 모든 걸 밝혀야죠."
그렇게 말한 그녀가 태연히 눈웃음을 쳤다.
"싫다면 힘으로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