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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926화 (926/934)

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926화

교단에 서 있던 바힐이 교과서를 덮었다.

그 모습을 본 학생들의 눈이 반짝였다. 바힐이 교과서를 덮는다는 게 의미하는 바는 하나.

오늘은 수업 외의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는 날이다.

"우선 이렇게 시작하죠."

그가 분필을 쥐고는, 칠판에 우아한 필체로 글자를 적어나갔다.

<단계 저주>

"저주는 소환에 비해 역사가 길지 않다고 여기는 사람들도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인류는 늘 저주와 함께였지요. 협박, 선동, 억압, 세뇌 등 인간은 다른 인간과 무리 짓게 된 그 순간부터, 타인을 자신의 의도대로 움직이게끔 하고 싶어 하는 강렬한 욕망을 품었으니까요."

바힐이 빙그레 웃으며 학생들을 돌아보았다.

"너무 먼 이야기를 했나요? 조금 더 앞으로 와보죠. 흔히 말하는 '부두술'이라는 게 있습니다. 연쇄살인마의 애장품, 고문받아 죽은 남자의 손톱, 자살한 처녀의 머리카락, 불에 탄 커튼 부스러기. 온갖 부정적인 물건들을 한데 모아서 저주할 상대방의 집에 가져다 놓거나, 장신구로 가공해서 착용하고 다니게 하는 겁니다. 이게 물질을 이용한 저주의 기원이었죠."

학생들은 하나둘씩 깃펜을 책상에 내려놓고, 턱을 괴거나 편안한 자세로 바힐의 이야기를 들었다.

"시간이 지나 칠흑 코어가 개발되며 네크로맨서가 등장한 뒤."

타악. 탁.

바힐이 칠판에 '초창기'라고 썼다.

"초창기의 저주는 칠흑으로 일으킨 온갖 '부정한 효과'들을 한꺼번에 상대에게 날리는 것이었습니다. 재미있게도, 저주의 효과는 술사도 상대의 반응을 보기 전까지는 몰랐습니다. 어떤 자는 눈이 멀었고, 어떤 자는 두드러기가 났으며, 어떤 자는 유령이 보인다며 잠을 설쳤죠. 모든 부정적인 효과를 끌어모아 사용했기 때문에 상대가 잘 듣는 쪽의 효과가 두드러지게 보였던 겁니다. 자! 그러면 현대의 저주는 어떤가요?"

곳곳에서 팔이 번쩍번쩍 올라갔지만, 바힐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넘어갔다.

"여러분 모두가 생각하는 게 정답입니다. 시야를 차단하는 블라인드, 소리를 차단하는 사일런스, 환각을 보게 하는 일루젼 등 '특정 효과'에 '집중한' 저주를 구사하게 됐죠. 그 편이 효율적이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이해하기 쉬운 설명에 학생들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며 강의를 즐겼다.

빠르게 저주 종류를 칠판에 써 내려간 바힐이 분필을 흔들며 말했다.

"자, 그럼 반대의 경우는 어떨까요."

"?"

"최근의 트렌드는 강력한 저주보다, 적에게 잘 통하는 저주가 더 중요해졌습니다. 정화마법이나 저주저항 등 '대저주 방어 기술'이 극도로 발달한 지금이기에 그 중요성은 말할 필요가 없죠."

설명을 듣던 시몬이 힘주어 고개를 끄덕였다. 시몬이 배운 판타서스류 슬립이 특별한 이유가, 바로 상대가 저주를 막거나 저항하지 못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저주술사들은 머리를 굴렸습니다."

바힐이 이마에 손을 올렸다.

"우리는 저주의 효과를 좁게 좁게 집중시키면 더 강력한 힘을 발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럼 비슷한 원리로, 저주가 발동되는 조건 자체를 '의도적으로' 복잡하고 어렵게 만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

갑자기 이야기의 난이도가 확 올라 버리자 학생들의 머리가 빙빙 돌아갔다.

"바로 이해가 안 되는 게 정상입니다."

바힐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슬쩍 웃은 뒤, 칠판 지우개를 들어서 처음에 썼던 '단계 저주'를 제외한 주변을 깔끔하게 지웠다.

"단계 저주."

툭.

그러곤 분필로 처음의 단어에 방점을 찍었다.

"우리가 너희들에게 저주를 거는 조건을 더 어렵고 까다롭게 할게. 대신 너희들은 저주저항으로 막기는 어려워지고, 한번 걸리면 해주나 정화로 풀기 어려워져. 심지어는 저주에 걸렸다는 사실조차 알기 어려워지는 거야. 이게 바로 '단계 저주'의 의의입니다."

타닥.

바힐이 빠르게 칠판에 글씨를 썼다.

-타깃이 특정 시간, 특정 장소에 방문하면 저주가 걸린다.

"이건 너무 쉽죠?"

학생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타타닥.

타다다닥.

이내 바힐이 그 아래로 새롭게 필기했고, 학생들도 정신없이 깃펜을 들고 필기해 나갔다.

-타깃이 특정 시간에 특정 장소에 방문했을 때.

-특정 소리를 듣고.

-특정 냄새를 맡고.

-특정 행동을 하고.

-특정한 감정을 느낀 뒤.

-뒤를 돌아보면 저주가 걸린다.

탁.

거기까지 쓰고 바힐은 학생들을 돌아보았다.

칠판을 보는 학생들의 눈이 다소 흔들리고 있었다.

"어떤가요? 앞에 학생, 소감을 말해보세요."

바힐은 가장 앞 자리의 한 남학생을 지목했다.

"......아, 그."

"솔직하게 말해도 됩니다."

잠깐 바힐의 눈치를 보던 그가 입을 열었다.

"실전성이...... 없는 것 같은데요."

바힐은 고개를 끄덕이며 이번엔 옆자리의 학생들을 차례대로 가리켰다. 다른 학생들도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저주 조건이 저렇게 까다로우면 아무도 안 걸리죠."

"발동형이 아니라 설계형인 것 같은데, 이러면 기존 저주에 비해 아무런 장점도 없는 것 같습니다."

바힐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그럼 이런 예시를 하나 들어보죠."

바힐이 분필 쥔 손을 뻗으며 말을 이었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누군가에 의해 의도된 시간에, 의도된 자리에 앉고 말았습니다. 저주의 조건이 충족되는 것도 모르고요."

학생들이 흥미로운 눈으로 이야기를 듣는 와중, 시몬은 천천히 고개를 내렸다.

그러고 보니 오늘.

책상에 모두 이름이 붙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의도된 특정 시점에, 어떤 현상에 대한 강한 의문과 의구심을 느끼고 있습니다."

시몬처럼 눈치가 빠른 학생들의 눈이 급격히 커지기 시작했다.

"네, 의구심은 확신으로 바뀌기 시작하고, 이제 그들은 심적으로 동요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실을 깨달았을지 궁금하군요."

당황한 학생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바로 그 순간.

쨍!

시끄러운 종소리가 들렸다.

학생들이 인상을 찌푸리며 시선을 돌리자, 수석조교 체헤클이 언제 꺼냈는지 모를 종을 들고 있었다.

"정해진 시간에 미리 설계된 소리를 듣고."

킁. 킁.

"정해진 시간에 준비된 향의 냄새를 맡습니다."

학생들이 혼란에 빠졌다. 다들 어찌할지 모르며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가운데.

바힐이 검지를 들어 올렸다.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한 그들은 발밑을 봅니다. 그리고 깨닫습니다."

그러곤 천천히 검지를 내렸다. 학생들의 시선도 따라서 내려갔다.

"사실은 처음부터, 자신의 발밑이 뻥 뚫려 있다는 사실을."

그 말을 듣는 순간.

시몬은 등허리에 소름이 쭉 돋으며 발밑이 꺼지고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곳곳에서 까마득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여기까지."

그 음성이 들리는 순간.

시몬은 식은땀을 흘리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어느새 주위는 다시 그 강의실이었고, 시몬은 그냥 의자에 넘어져 있을 뿐이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다들 마찬가지였다. 바로 근처에 있는 메이린과 카미바레즈, 그리고 저 멀리 다른 학생들까지 모두 엉망으로 넘어져서 앓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노, 놀랐잖아요!"

"교수니임-!"

"......와, 옥상에서 떨어지는 꿈 꾼 것 같네."

곳곳에서 엄살 가득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바힐이 조용히 웃음 지으며 가장 앞자리에 쓰러진 남학생에게 손을 내밀었다.

"내가 늘 수업마다 매번 강조하던 말이 있었죠. 저주학은?"

남학생이 그 손을 맞잡으며 앓는 소리를 냈다.

"......거는 건 물론, 걸려보는 것도 수업이다."

"정답입니다."

이내 하나둘 학생들이 앓는 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몬이 메이린과 카미바레즈를 챙기는 사이, 바힐이 말했다.

"그럼 모두 자리에 앉기에 앞서, 멀쩡히 자리에 앉아 있는 여섯 명의 이야기를 들어보죠."

바힐의 말에 학생들의 시선이 돌아갔다. 바힐이 한 학생을 딱 지목해서 가리켰다.

"번리 학생. 왜 당신은 저주에 걸리지 않았을까요?"

번리는 앞자리에 있는 여학생의 등을 한번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말했다.

"수업 전에 쟤들이 자리 바꿔달라고 부탁해서요. 커플이라고."

하하하!

우우우-

곳곳에서 웃음소리와 야유 소리가 반반씩 섞여 나왔다. 여학생은 부끄러움에 더더욱 고개를 숙이며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렸다.

"좋습니다. 다른 학생들에게도 물어보죠."

넘어지지 않은 학생들이 하나둘 무안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감기에 걸려서 냄새를 못 맡았던 것 같아요."

"잠시 딴생각하느라 첫마디가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리고.

유일하게 학생회 멤버중에 넘어지지 않은 딕이 말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졸았습니다!"

하하하하하!

곳곳에서 왁자지껄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바힐은 괜찮다며 모든 학생들에게 착석 지시를 내린 뒤 말했다.

"이렇듯 많은 조건 중에서 아주 작은 부분이라도 살짝만 삐끗하면 저주에 걸리는 게 실패하게 되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시다시피 많은 학생들이 저주에 걸렸습니다."

바힐이 느긋하게 걸음을 옮기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 이런 단계 저주를 사용하기 위해선 상대에 대한 치밀한 조사와 준비, 설계가 필수적입니다. 물론 실전성이 떨어지고, 성공해도 파격적인 효과를 기대하지 못하는 건 사실이지만, 지금처럼 특정 경우에 따라서는 효과적일 수 있지요. 자, 이런 단계 저주를 사용하기 위한 가장 좋은 장소가 어딜까요?"

강의실 전체가 조용해졌다.

바힐의 질문에 답할 절호의 기회였지만, 바로 생각나는 장소가 없었다. 그때 바힐이 말했다.

"좋습니다. 이번 질문에 답하는 학생은 상점을 드리죠."

학생들이 더더욱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시몬도 마찬가지였는데, 옆자리의 메이린이 팔을 움찔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시몬이 숨죽인 목소리로 말했다.

"왜 그래? 메이린. 뭔가 떠올랐으면 한번 도전해 봐."

"아, 음...... 확실한 건 아니지만......."

시몬의 말에 용기를 얻은 메이린이 손을 들었다. 모두의 시선이 모였고, 바힐도 손짓으로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메이린 빌렌느입니다! 혹시......."

주뼛주뼛 망설이던 그녀가 이내 부끄러운 듯 하늘색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며 대답했다.

"극장. 아닌가요?"

바힐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체헤클 조교. 메이린 빌렌느 학생에게 상점 5점 기록해 두세요."

오오-!

곳곳에서 감탄성이 터져 나왔다. 메이린은 뺨이 빨갛게 물든 채 자리에 앉았고, 옆자리의 딕이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으며 조용히 말했다.

"역시 업계 종사자라 그런지 잘 아네?"

"닥쳐! 쫌! 조용히 해!"

바로 짝! 하고 등짝 응징이 가해졌다. 크게 얻어맞은 딕이 과장되게 허우적거리며 책상에 엎어졌다.

그사이 바힐의 설명이 이어졌다.

"드레스덴 왕국령에서는 극장에 일정 수준 이상의 저주술사를 비치해야 하는 게 왕국 법으로 정해져 있습니다. 이유가 있죠. 극장은 단계 저주에 걸리기에 지나치게 좋은 장소니까요. 정해진 시각, 정해진 좌석, 그리고 배역의 연기에 관중이 느끼는 감정까지 일정합니다. 사건에 흐름에 따라 분노하고, 슬퍼하고, 감격하죠."

시몬은 소름이 살짝 끼치는 걸 느꼈다.

그렇다면.

"실제로 사례가 있습니다. 은퇴 후 조명 담당이었던 전직 네크로맨서 라이만은 단계 저주를 극장에 설계했죠. 이후 극이 끝나고 출구에 빈 상자를 든 채 서 있었습니다. 상자에는 '아내가 병에 걸려 아픕니다'라는 글귀를 붙여뒀습니다. 어땠을까요? 저주에 걸린 관중들은 홀린 듯이 비싼 티켓값의 수 배의 금액을 순순히 냈고, 그는 하루 만에 수백 골드를 벌어들였죠."

와-!

학생들이 탄성을 터뜨렸다. 딕은 뭔가 또 아이디어가 떠올랐는지 제 무릎을 팍팍 치며 '저주학과 전공할걸!' 하고 중얼거렸다.

"그러다 결국 집에 돌아와 이상하다고 생각한 관중들이 라이만을 신고했고, 그는 체포되어 감옥에 갇히게 됐습니다. 만약 라이만이 돈이 아니라 조금 더 위험한 의도가 있었다면...... 상상하기도 싫은 대참사가 일어났겠죠."

과거 이야기를 빗대어 설명하니 더더욱 이해가 잘됐다.

바힐이 분필을 든 손을 내렸다.

"저주에 걸리지 않겠다는 마음가짐 중의 하나는, 타인의 의도대로 되지 않겠다는 마음입니다. 여러분은 뭔가 이상한 걸 깨닫고도, 너무나 쉽게 분위기에 휩쓸려 저주에 걸리고 말았죠."

주변이 조용해졌다.

"대륙 전체가 시끄러웠던 이번 결사 사태도 마찬가지입니다."

바힐이 어깨를 매만졌다.

"결사가 왜 그런 일을 저질렀을까? 의도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건 그들이 '혼란'을 원한다는 사실이죠. 그들에게 필요한 게 혼란이라는 걸 알면서도 왜 대륙민 전체가 흔들리는 건지 의아합니다. 그들이 원하는 대로 움직여 주면-"

바힐의 목소리가 차분히 내리깔렸다.

"우리는 언젠가, 대가를 치러야 할지도 모릅니다."

"......."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짝.

짝 짝.

조금씩 박수 소리가 들리더니.

짝짝짝짝짝!

이내 큰 소리의 박수갈채가 터져 나왔다. 바힐은 감사의 의미로 몸을 굽혀 신사처럼 인사하고는, 등을 돌려 칠판을 지웠다.

"이 이야기를 하시려고 단계 저주 이야기를 꺼내신 거구나!"

"아으, 진짜 바힐 교수님 수업 너무 좋아. 푹 빠지겠어."

"그럼 결사의 목적은 광범위 단계 저주 아냐?"

"병신아, 수업 귓등으로 들었지? 이유는 필요 없고 의도에 놀아나지 않으면 된다니까."

곳곳에서 환호성이 일어나고 있는 가운데, 바힐이 '아' 하고 말했다.

"다음 수업까지 제출할 리포트가 있습니다. 단계 저주의 효용과 실제 사례를 조사해 오도록 하세요."

아아-!

학생들이 머리를 붙잡았다. 바힐이 미소를 짓고는 칠판 앞으로 걸어갔다.

"그럼 잠깐 수업 진도도......."

그때 대앵- 하고 수업 종료를 알리는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바힐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시간에 하도록 하죠."

"수고하셨습니다!"

학생들이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나 짐을 챙기고 있는데, 수석조교 체헤클이 손뼉을 치며 학생들을 주목시켰다.

"저번 리포트를 보고 교수님께서 직접 미달자와 면담하시겠답니다! 호명하는 학생은 남아주세요!"

학생들의 표정이 굳어졌다. 체헤클이 말했다.

"마크 챈들러, 카렐 옥사라, 딕 헤이워드, 그리고."

그녀의 시선이 한쪽으로 향했다.

"시몬 폴렌티아 학생, 이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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