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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928화 (928/934)

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928화

"가만히 돌이켜 보면, 그리 놀라운 일도 아니었습니다."

바힐이 턱을 짚으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세상 어디서든 흔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죠. 경험 없는 신인 교수에게 분에 겨운 재능의 제자가 들어왔고, 주변의 환경과 세상이 두 사람을 부추겼습니다."

감정 한 톨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였지만, 묘하게 날이 서 있었다.

"그러다 망가진 거죠. 두 사람 다."

"......."

"그런 종류의 흔한 이야기일 뿐입니다."

바힐은 입을 닫았다. 그러곤 저 멀리 아론과 화이트가 훈련하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볼 뿐, 더 자세히 이야기해 주지는 않았다.

가만히 바힐의 말을 곱씹고 있던 시몬이 입을 열었다.

"바힐 교수님은."

"?"

"아론 교수님을 걱정하고 계시네요."

그 말을 들은 그가 멈칫했다.

"......그렇게 보입니까?"

고개를 끄덕인 시몬이 몸을 똑바로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니 그동안 화이트를 쭉 주시해 왔고, 화이트를 통해 결사를 치려는 제 계획에 동참하시려는 거잖아요."

"아하, 하하하."

바힐이 손바닥으로 눈을 가린 채 어깨를 들썩이며 조용히 웃었다.

어깨를 들썩이며 웃는 모습마저 묘한 품위가 있었다.

"그 천재적인 통찰력이 인간관계에도 적용되는 건 아닌가 봅니다."

"네?"

"학생 앞에서 할 이야기는 아니지만, 사실 나는 아론 선배를 무너뜨리고 싶었습니다. 키젠 교수 간의 경쟁이 학생 못지않은 건 알고 있겠죠?"

그가 입맛을 다셨다.

"여러 계획과 모략들을 떠올려 봤습니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 아론 선배가 '매그너스를 연상시키는' 학생을 다시금 가르쳐야 하는 상황에 부딪히면 어떻게 될까?"

바힐의 입꼬리가 길게 찢어졌다.

"과연 선배는 이번에도 무너질지, 아니면 무너지지 않고 꿋꿋이 원래의 길을 갈지. 뭐 그런 생각이지요."

"......."

"결국 뻔한 것 같아서 그만뒀습니다만, 지금 눈앞에 내가 생각하던 광경이 딱 펼쳐져 있군요."

바로 전면에, 아론이 화이트의 팔을 받쳐주며 동작을 교정해 주는 모습이 보인다.

"많이 놀랐죠. 마치 누군가가 내 머릿속에 들어왔다 나와서 이 계획을 실행한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궁금해졌습니다."

그가 다시금 날렵한 제 턱에 손을 얹었다.

"나와 같은 생각을 떠올린 자가 누구인지."

"......."

탁.

바힐이 뒤로 돌아서 시몬의 어깨에 손을 얹고는 걸어갔다.

"그 계획에는 나도 합류하는 걸로 알고 있겠습니다. 물론 따로 관여는 하지 않겠습니다. 내게 위치 정보만 제공하면, 그게 어떤 곳이든 폐허로 만들어 드리도록 하죠."

"어떤 곳이라도요?"

"그래요."

그가 입꼬리를 올렸다.

"나는 최강의 까마귀 요원이니까요."

그야말로 오만이 넘치는 발언.

사실상 본인을 대륙 최강의 네크로맨서라고 말하는 거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어쩐지 바힐이 말하니 묘하게 납득이 되기도 했다.

'바힐 교수님, 분명 대단한 전력인 건 사실이지만 나는.......'

"참, 당신의 정체를 숨겨야 한다는 핑계를 댈 필요는 없습니다. 다 알고 있으니까요."

시몬은 자신도 모르게 어깨가 움찔했다.

'설마?'

심장이 철렁하다 못해 내려앉을 뻔했다. 시몬이 목각인형처럼 고개를 삐걱거리며 바힐을 돌아보았다.

바힐이 웃는 얼굴로 시몬을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당신에 대해 전부 알아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라."

진짜 아는 건가?

아니면 떠보는 건가?

말 한마디도 뻥긋할 수 없었다. 그 모든 것이 바힐에게 정보가 될 것이 분명하기에.

"왜 그렇게 소환학과를 고집하나 했더니. 그런 사정이 있었습니까."

바힐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하지만 모든 진실을 안 지금에도 내 생각에는 일절 변함이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더 확고해졌습니다."

그의 눈에 불똥이 튀었다.

"당신은 저주를 전공해야 합니다, 시몬 폴렌티아."

"......."

바힐은 그 말을 남기고 천천히 걸어갔다. 시몬은 멍하니 그의 뒤를 바라보았다.

"참."

그때 바힐이 잠시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선 채 말했다.

"모쪼록 아론 선배한테는 들키지 않는 편이 좋을 겁니다."

* * *

바힐과 만난 뒤, 시간은 정신없이 흘러갔다.

2학년도 이제 거의 다 끝나간다. 기말고사, 조별과제, 대형 수행평가 같은 굵직굵직한 일정들이 코앞이었고, 교수들은 학생들을 미친 듯이 굴리기 바빴다.

-자! 출발하제요!

홍펭의 마투학 수행평가.

하늘에 펼쳐진 텔레포트 마법진에서, 학생들은 등에 커다란 대검을 짊어진 채 내려와 바다에 빠졌다.

자그마치 대양 수행평가였다. 사전에 먹이들을 뿌려놔서 해양 몬스터가 바글거리는 바다 한복판이었지만, 학생들은 새롭게 배운 '체내 칠흑 유화'를 이용해 몬스터들을 피해 다니며 목적지인 육지까지 헤엄쳐야 했다. 대검의 무게가 상당했기 때문에 칠흑의 운용이 필수적이었다.

-자! 자! 멍청한 것들아! 이 정도도 못 해내고 쓰러지지 말라고!

별야의 맹독학 수행평가.

이번에 학생들은 맹독의 늪을 맨발로 통과해야만 했다. 거기에 이 늪에서 섭취하거나 얻은 독을 변형시켜서 독에 면역을 가진 몬스터들을 쓰러뜨리며 나아가야 했다.

-준비가 끝난 학생부터 방 안으로 들어가십시오.

제인의 칠흑역학 수행평가.

시몬은 이 수행평가가 가장 힘들었다. 창문 하나 없이 새하얀 방에 학생들이 한 명씩 들어갔는데, 방에는 아무것도 없었고 칠판 하나뿐이었다. 그리고 칠판에는 공식 한 줄이 적혀 있었다.

<해당 공식을 증명하시오.>

당연히 수업에서 배운 적 없는 공식이었고, 심지어 교과과정에는 등장하지도 않는 난해한 종류였다.

가장 중요한 '메인 룬어' 칸도 텅 비어 있고, 회로나 법칙들은 전부 처음 보는 것이다. 배우지도 않은 걸 어떻게 증명하란 말인가. 학생들은 주어진 24시간을 그냥 멍하니 있었다.

그런데 인간의 뇌라는 건 신기했다. 눈만 뜨고 숨만 쉴 수 있는 이 공간에서 하나의 물음만 주어지니, 풀 수 없는 해답을 풀기 위해 뇌가 저절로 온갖 상상의 나래를 펼쳐 나갔다. 몇 시간 뒤에는 홀린 듯이 잉크펜을 집고는, 벽에서 글자를 끄적거리게 된다.

그동안 배웠던 수식들, 룬어들, 제인이 수업 시간 중 곳곳에 남겨놓은 힌트까지.

눈이 번쩍 뜨인다. 두뇌가 활성화된다. 답을 향해 나아갈 결심을 하니 모든 기억들이 힌트가 되면서 답으로 인도한다. 이건 정말 겪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쾌감이었다.

첫 단락을 써 내려가니 그 뒤는 무리 없이 꽉꽉 써 내려갈 수 있었다. 그동안은 제인이 떠먹여 주는 지식들을 머릿속에 억지로 밀어 넣었다면, 이번 수행평가는 그 원리를 자기 스스로 고찰하며 다시 되새겨야만 앞으로 나갈 수 있었다. 첫 수업부터 마지막 수업까지 전부 이어져 있었다. 제인의 수업 설계 능력은 정말 대단했다.

그리고 모든 방을 글자로 다 채울 즈음, 시몬은 해당 문제를 증명해 냈고 방에서 나올 수 있었다.

"이 바보야!"

거의 좀비가 되어서 밖으로 나오니, 걱정 가득한 표정의 메이린이 울먹이며 뛰어 들어왔다. 조교들도 웅성거리며 시몬의 몸 상태를 점검하러 다가왔다.

"왜 이렇게 융통성이 없어? 못 풀겠으면 그냥 나오면 되잖아!"

"아, 그게."

시몬이 머리를 긁적였다.

"재밌어서 시간 가는 줄 몰랐거든."

밥도 못 먹고, 잠도 못 자고. 인간의 극한을 시험하는 수행평가. 제인의 일반 칠흑역학을 듣는 학생들 중 1/4 정도가 합격했는데, 탈출 시간이나 풀이의 정확도 등에 따라 성적이 달라졌다.

중도 포기자들도 증명의 진행도에 따라 성적이 다르게 주어졌다. 일찌감치 포기한 딕이 말했다.

"얘들아. 나 그림에 재능 있는 것 같아."

벽에 그림을 그리다 보니까 재미가 붙었다고.

당연히 메이린의 분노에 찬 잔소리가 쏟아졌다.

'이제 살겠네.'

시몬은 간이침대에 누워 음식을 먹고, 재생 포션을 마신 뒤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러다 고개를 돌렸다.

'맞다, 이 수업도 화이트가 들었지?'

시몬이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그는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눈에 띄는 하얀 머리카락의 소년이 자리에 쪼그려 앉은 채 멍한 얼굴로 하늘을 날아다니는 새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새가 완전히 시야 밖으로 사라지자, 천천히 고개를 내렸다가 시몬을 보았다.

'나보다 빨리 나왔어? 역시 대단하네.'

시몬은 웃음 지으며 귓불을 매만졌다.

이상은 없냐고 물어보는 신호였다.

그런데 화이트가 멍한 눈으로 시몬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답신이 없어?'

심장이 덜컹했다.

시몬은 자리에서 일어나 화이트의 시선에 들려고 노력했다. 그러다 눈이 마주쳤을 때 다시 신호를 보냈지만 화이트는 인지하지 못했다.

확실했다.

신호가 뭔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이게 뜻하는 바는 하나.

저 화이트는 지금, 자신이 알고 있던 그 화이트가 아니다.

'우려하던 상황이 왔네.'

거대한 변수가 발생했다.

어서 다음 계획으로 넘어가야만 했다.

* * *

시몬은 로크섬에 들어가자마자 조력자인 세르네와 만났고, 상황을 설명한 뒤 바로 계획을 짰다.

우선 저 새로운 화이트를 유인하는 게 먼저였다.

이때는 학생회장으로서의 권한과 세르네의 이능을 전부 활용하기로 했다.

아론 교수가 금지된 숲 공터에 미리 작업해 둘 게 있어서 물건을 옮겨놔야 한다는 설정을 만들었고, 세르네는 파수꾼들을 조종해 근처에 있던 화이트를 지목해서 데리고 왔다.

이내 그들은 금지된 숲의 벌목장에 도착했다. 파수꾼들은 화이트를 남겨둔 채 하나둘 사라졌다.

그리고 화이트는 벌목장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와, 미리 기다리고 있던 시몬과 만났다.

"안녕, 화이트. 너도 작업 도우러 왔어?"

끄덕.

화이트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만으로 인사했다. 벌목장 안에서 기다리는 두 사람 사이에서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거의 30분째 아무 일도 없었다.

완전한 정적 속에, 화이트가 천천히 손바닥을 펼쳐서 칠흑을 끌어모으는 모습이 보였다.

"나를 죽이러 왔지?"

시몬의 그 한마디에 화이트가 멈칫했다.

"넌 결사에서 왔을 거고, 결사의 실험체 중 하나일 거야. 그들이 널 부르는 별명은 '왕자 후보'."

이내 시몬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화이트의 동공이 한 차례 흔들리더니, 이내 멍한 눈에 힘이 들어갔다.

화아아아아아악!

그의 전신에서 순백의 이능이 솟구쳤다. 시몬은 진정하라는 듯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이 모든 건, 너랑 교체된 화이트가 자기 입으로 말해준 사실이야."

"......."

"W-1 맞지? 그 녀석이 이걸 남겼어."

시몬은 책상에 메모리얼 수정구를 내려놓고 작동시킨 뒤, 두 손을 들어 올린 채 뒤로 물러나 벽에 딱 붙었다.

"네게 남길 말이 있대. 그걸 본 뒤에 싸워도 늦지 않을 것 같은데."

화이트는 메모리얼 수정구는 상관없다는 듯, 자세를 낮추고 돌진하려 했으나.

<나는 화이트, W-1이다. 우리를 대표해서, 우리 모두의 앞날을 위해 할 말이 있다.>

화이트의 음성이 들려왔다. 그의 동공이 천천히 돌아가며 수정구를 보았다.

<나는 저번 장기 임무평가 도중, 결사의 실험체였던 발락을 만났다.>

특유의 차분한 어조로 설명이 이어졌다.

어떻게 심정에 변화가 생겼는지, 왜 결사를 배신하고 도망칠 계획을 세웠는지.

화이트는 여전히 이능을 거두지 않은 채 시선만 메모리얼 수정구로 향해 있었다.

'솔직히 이게 먹힐지는 모르겠는데.'

하지만 이 메모리얼 수정구를 남긴 W-1 화이트는 확신에 차 있었다.

-우리는 모두 같으니까, 내 심정 바뀌었다면 다른 나도 충분히 바뀔 수 있어.

그렇기에 설정해 둔 플랜 B다.

만약 실패하면 이 화이트를 제압해야 했다.

물론 이 녀석을 잡아봐야 아는 것도 없을 테고, 결사의 중앙 연구소로 돌아갈 길도 막혀 버리겠지만 말이다.

"......."

이 새로운 화이트는 메모리얼 수정구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리고 수정구 영상이 끝나니, 본인이 다시 작동시켜서 들었다. 그렇게 수차례 반복해서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시몬은 참을성을 가지고 기다렸고, 마침내.

"그래."

화이트가 고개를 들어 시몬을 보았다.

"나도 '우리'의 생존을 위해 협력하겠다."

'됐어!'

시몬이 속으로 탄성을 터뜨리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이게 정말로 될 줄이야.

"믿어주는 거야?"

"처음엔 함정이라고 생각했지만, 또 다른 나 자신이 하는 말이라는 게 확실해 보였다."

시몬은 안도의 한숨을 쉰 뒤 드디어 궁금했던 것들을 물어보았다.

"넌 임시 실험실에서 온 거야?"

"응. 그곳에서 W-1과 교체되어 그 대신 키젠에 잠입하는 역할을 수행하게 됐다."

역시 목적지였던 결사의 중앙 연구소는 아니었던 모양.

"그럼 교체된 화이트는 어떻게 되는 거야?"

"몸 상태를 회복하며 대기했다가 나와 교체되리라 생각해."

그렇게 말한 화이트가 눈을 감았다.

"W-1. 그 화이트가 가장 우수하니까."

* * *

같은 시각.

결사의 임시 실험실.

꾸르르륵- 꾸르륵-

조금 전만 해도 키젠의 교복을 입고 돌아다니던 W-1 화이트는 실험관에 들어가 있었다.

이 실험관이야말로 원래 그가 머물던 세계였다.

그에게 허용된 건, 밖을 볼 수 있는 자그맣게 유리로 된 공간뿐.

화이트는 가만히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다른 나 자신이 어떻게 움직일지 걱정은 됐지만 기다리는 게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웅성 웅성 웅성.

그런데 평소와는 달리 실험실 밖이 요란스러웠다. 화이트는 눈을 움직여 밖을 응시했다.

무슨 일이 있는 건지 사람들이 꽤 많이 와 있었다. 그 콧대 높은 연구자들이 허리 숙여 인사하는 모습이 보인다.

누군가 방문한 건가.

눈매를 좁히고 시야에 집중하자 마침내 그 방문자의 모습이 보인다.

-매그너스, 알지? 그 사람과 너는 무슨 관계야?

시몬 폴렌티아는 자신과 닮은 인간이 존재한다고 했다.

그가 묘사한 바에 따르면, 자신과 같은 하얀 머리카락에 마른 체형의 남자라고 했다.

그래, 바로 저 앞의 남자처럼.

실험체로서 수명은 적겠지만, 자신이 나이를 먹는다면 저렇게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런데.

척.

그가 동공을 움직여 이쪽을 바라보았다.

섬뜩함을 느낀 화이트는 얼른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린 채 눈을 감았다.

뚜벅. 뚜벅.

발소리가 들린다.

화이트는 어쩐지 긴장감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걸음 소리는 점점 더 가까워지더니 이내 완전히 사라졌다.

"......."

꽤 시간이 지났다.

가만히 눈을 감고 있던 화이트가, 기척이 사라진 걸 깨닫고는 다시 눈을 떴다.

"!!"

시뻘겋게 충혈된 부릅떠진 눈동자가.

좁은 틈 사이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둘이서 잠시 이야기 좀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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