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재회.
(1/31)
1화. 재회.
(1/31)
1화. 재회.
2023.03.02.
“늦은 건 미안합니다. 미안한데…….”
약혼자 한승윤은 더 말을 잇지 못하고 다짜고짜 얼음물을 연거푸 두 잔 비웠다. 사이사이 주변을 확인하기도 했다. 그런 태도로 미루어 짐작해 보건대, 그는 왜인지 극도의 불안감에 휩싸여 있었다.
그동안에 은채는 경황이 없어 보이는 그를 차근히 살펴보았다. 방금 막 씻은 듯 뽀얀 피부와 덜 마른 머리끝, 셔츠 소매에 묻은 립스틱. 그리고 그녀에게도 익숙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여기서 엘리베이터만 타고 내려가면 들어갈 수 있는 객실에 구비된 어메니티로 유명했다.
승윤은 연신 주변을 경계한 끝에 무언가 확인이 끝났다는 듯이 등받이에 깊숙이 기대었다. 그런 다음에는 묘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래요. 나 만나는 여자 있습니다. 한 명도 아니고 많아요.”
약혼자의 양심 고백은 갑작스러웠다. 돌발적인 선언이 끝난 후의 자리는 정적에 휩싸였다. 은채는 반응이랄 게 없는 무심한 표정으로 눈을 깜빡였다. 폭탄을 투하한 장본인인 승윤이 도리어 마른침을 삼켰다.
글쎄.
원래도 그는 난잡한 사생활로 악명을 떨치는 남자였다. 서슴없는 여성 편력과 기행을 일삼아, 약혼 발표 직후부터 은채는 결혼도 전에 소박맞은 아내 취급을 받아야만 했다.
내막을 아는 이들이라면 모두가 조롱하는 혼약이었다. 하지만 파혼의 사유로는 부적합했다. 본디 상류 계층의 결혼이란 게 그랬다. 태어날 때부터 자유 의지와 선택권이 자동 박탈된 인생이다. 그러니 애정 따위에 연연하지 않고 집안의 번영과 안정이 유지될 만한 상대를 추천받아 결혼해야만 한다.
약혼자 한승윤은 그 인생을 영위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는 줄 알았는데.
“그 표정. 나는 송은채 씨 그 표정이 정말 마음에 들어. 내가 다른 여자가 있대도 안색 한번 안 변하잖아.”
덜떨어진 난봉꾼인 줄로만 알고 있던 약혼자에게 운명의 상대가 나타나기라도 했다면. 그래서 무모한 투쟁을 시작하려 한다면. 적어도 걸림돌이 되어선 안 되는 일이었다. 그녀는 실패했지만, 한승윤은 성공할 수도 있지 않은가.
은채는 동요하는 대신 티슈로 젖은 손을 닦았다. 오지 않는 약혼자를 기다리며 결로현상이 일어난 컵을 만지작거린 탓이다. 그런 다음에는 고저 없는 목소리를 내뱉었다.
“파혼 통보라면 전화로도 충분했어요.”
처음부터 그걸 원한다고 말했더라면 피차 시간 낭비가 없었을 텐데.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서려 하자, 승윤의 눈이 험악하게 가라앉았다.
“그런 식으로 책임 전가를 하시겠다?”
승윤이 그녀를 삐딱하게 노려보았다.
“……무슨 뜻이에요?”
“치사하게 고자질은 그만두고. 우리끼린데 좀 솔직해집시다.”
“…….”
“내 말은, 어차피 명분뿐인 결혼. 자유와 사생활까지 침해당하고 싶진 않다는 겁니다.”
은채는 설핏 눈썹을 구겼다. 약혼자의 영문 모를 언행에 그녀는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분명한 건 그의 말은 설득력이 형편없다는 것이다.
죄악감이 없구나.
사랑을 위한 투쟁을 하겠다는 게 아니었다. 그녀에게나 내연녀에게나 승윤은 일말의 감정도 없는 것이다. 은채는 대외적인 평판과 품위를 유지해 줄 도구, 내연녀는 저속한 성욕 해소에 필요한 도구.
최악이었다.
“차라리 사랑하는 여자가 따로 있으니 제발 파혼해 달라고 비는 쪽이 구미가 당길 거 같은데요.”
일관되게 오만하던 한승윤이 설핏 미간을 구겼으나 은채는 표정 변화 없이 말을 이었다.
“또 알아요? 당신의 불륜을 내가 평생 눈감아 주겠다고 했을지도.”
그러자 승윤은 대놓고 비위가 상한 표정을 했다. 그녀의 그 말이 한 점 거짓 없이 들리는 바람에 걷잡을 수도 없었다.
“사랑은 얼어 죽을.”
승윤의 눈썹이 짜증으로 들썩였다. 그는 나름대로 최대한 점잖게 말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똑똑해서 좀 다를까 했더니 그놈의 사랑 타령은 여자들 십팔 번이지, 아주.”
“…….”
“송은채 씨는 저녁에 있을 약혼 파티에서 얌전히 있기만 하면 됩니다.”
이 결혼은 썩어빠졌다. 한 달 전만 해도 흙탕물 정도라고 생각했는데, 은채는 오물을 뒤집어쓴 기분이었다.
“결혼은 석 달 뒤에 할 거고요.”
승윤은 특히나 ‘석 달 뒤’를 말할 때 악센트를 주었다. 그리고 반박의 기회를 주지 않겠다는 듯 몸을 일으켜 세웠다. 선 채로 가볍게 슈트 재킷을 툭, 툭 털기도 했다.
“비올라, 라고 했던가? 그건 내가 죽을 때까지 원 없이 연주하게 해 줄게요. 뭐, 독주회 같은 거.”
이 상황에 한승윤은 기억력도 좋았다. 애정도 없는 약혼녀의 전공이 비올라인 점을 기억하다니.
감동의 눈물이라도 흘려야 할 것만 같았다.
“장담하는데 오늘 같은 수를 써도 우리가 파혼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렇게 원한다면 직접 해 보시든가.”
승윤이 고상한 어조로 빈정거렸다. 그녀가 절대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명백한 무시이자 조롱이었다. 그런 다음 차갑게 몸을 돌려 멀어져 갔다.
은채는 그 후련한 뒷모습을 잠시간 바라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어느새 창밖에는 제법 굵은 눈발이 흩날리고 있었다. 고작 11월인데. 평년보다 빠른 첫눈이었다.
* * *
어지간히 자존심이 상했는지 한승윤이 씨근덕거리며 나왔다.
로비로 나온 직후부터 인파에 휩쓸렸다. 앞길이 좀 막힌다 싶었는지, 한승윤은 욕지기를 내뱉으며 타이를 손으로 잡아 내렸다. 그러더니 핸드폰을 꺼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그 모습을 등지고 키가 큰 남자가 품에서 명함을 꺼냈다. 몸에 밴 습관대로 검지와 중지 사이에 끼워 프런트에 내려놨다.
「디원 그룹 권기주 경호팀장.」
직사각형의 명함은 단출하지만 고급스러웠다.
“크게 결례했습니다.”
정중하고 차분한 중저음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비정상이 정상이 될 수는 없는 일이다. 5성급 호텔 MK에서, 경찰이 영장을 들이밀어도 들어줄까 말까 한 사안을 남자는 태연하게 요청하지 않았던가.
그가 VIP가 투숙하는 스위트룸 문을 도끼로 내리찍고, 객실로 침입한 것도 모자라 VIP의 얼굴을 짓이겼다는 소문은 이미 호텔에 파다했다.
그런 다음에 영장 대신 명함이라.
상식적인 사람 시늉을 하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직원은 얼굴을 붉혔다.
“호텔 측에 끼친 손해는 보상하겠습니다.”
스위트룸 문짝 교체 비용 일체와 호텔의 이미지가 손상될 법한 소란을 일으킨 점에 대한 적절한 보상금을 지급하겠다는 약속이었다. 더불어 냄새를 맡고 달려들 언론사의 기사화도 막아 주겠다는 우회적인 표현.
남자는 그 절차에 대해 일일이 열거하는 대신 펜을 들었다. 그리고 명함에 박힌 자신의 이름 옆 여백에 펜촉을 내리고 사인을 했다.
“고 대표님께는 저희가 따로 연락드릴 거고.”
곧이어 멋스러운 글씨를 새긴 명함 위에 펜을 내려놓았다. 직원이 명함을 챙겨 따로 보관하는 것까지 확인한 후 남자는 다시 몸을 돌려세웠다. 한승윤이 이제 막 통화를 끝낸 듯했다.
“……!”
승윤은 그와 눈이 마주치자 당황한 기색을 보이다가, 이내 분하다는 듯 주먹을 말아쥐었다. 제게 당한 험한 일에 분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뿐, 덤벼들 배짱 같은 게 있을 리 만무했다.
이윽고 먼저 눈길을 피한 승윤이 걸음을 옮겼다. 그 뒷모습이 퍽 필사적으로 보이는 바람에, 남자는 피식 웃었다.
* * *
전통 한옥을 표방한 5성급 호텔에서의 약혼이었다.
절벽을 축소해 놓은 듯한 투박한 협곡을 따라 흐르는 물줄기 소리가 가야금 연주와 절묘하게 어우러져 고즈넉한 분위기를 고조하는 가운데, 육중한 출입문이 열렸다.
얼핏 양가의 친척까지만 참석한 간소한 자리로 보이나, 실상은 평소 한자리에서 보기 힘든 정·재계의 내로라하는 인물의 집합이다.
문제는, 은채의 눈에 그 저명한 인사들이 죄다 탐욕스러운 돼지로 보인다는 것이다. 벌건 대낮에도 립스틱을 묻히고 돌아다닌 주제에 예비 신랑이랍시고 실실 웃고 있는 약혼자는 뻔뻔한 얼간이로 보이고.
그리고 최근 10년간 재계 10위권 밖으로 나간 적이 없는 디원 그룹의 외동딸이라는 잘 포장된 허울을 쓰고 있는 자신은…….
“최악이네.”
출입구 앞에서 문득 발을 멈춰 세운 은채는 벽에 걸린 거울을 힐긋 보았다. 그런 다음에 분주히 움직이고 있는 제 또래의 호텔 직원들을 훑어보았다. 공허한 눈은 이내 허공을 가로질러 담장 너머 어딘가를 향했다.
그 수모를 당하고도 여길 왔네.
누구 말마따나 벨도 없나.
냉소를 머금은 은채가 기껏 세팅한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렸다.
……이기려고 하는 것만이 투쟁은 아니지.
의지를 보여 주기 위한 투쟁도 있는 법.
그 순간, 은채는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양가가 한데 모여 인사를 나누는 모습을 뒤로 하고 빠르게 걸었다. 하이힐을 신고서 가파른 계단을 무작정 내려갔다.
제 발 저린 도둑처럼 슬쩍 돌아본 찰나, 공교롭게도 부친과 눈이 딱 마주쳤다. 반색하며 웃던 송명환 회장은 이내 무언가 낌새를 차렸는지 사정없이 인상이 구겨졌다.
그 순간, 은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죽기 살기로 뛰었다. 부친의 불호령이 떨어졌는지, 경호원들이 시커먼 물살처럼 뒤따랐다.
은채는 텅빈 로비를 뛰어가 앞으로, 더 앞으로 나아갔다.
밖으로 나가서 택시를 잡아타야겠다는 일념이었는데. 그것을 비웃듯이 호텔 앞이 텅 비어 있었다.
은채는 일순 당혹감에 휩싸여 방황했다.
이제 어떡하지, 하는 고민도 잠깐. 그녀는 겁도 없이 도로 쪽으로 다리를 뻗었다.
그 순간.
끼이이이이익-!
찢어질 듯한 소음과 함께 눈을 찌르는 섬광을 마주하고 은채는 그만 주저앉았다. 가쁘게 뱉어 내는 숨은 입김이 되어 눈앞을 자욱하게 물들였다.
“하아, 하아…….”
주변이 정적에 휩싸인 가운데, 은채는 헤드라이트를 밝히고 있는 검은 세단을 넋 놓고 바라보았다.
세단도 급정거를 했는지 바퀴에서 김이 올라왔다.
이윽고 문이 철컥, 하고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운전석에서 나온 새카만 인영은 바닥에 주저앉은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곧고 묵직한 시선이었다.
은채는 묘한 기시감에 눈도 깜빡이지 못했다.
지금 제가 보고 있는 이가 간절함이 만들어 낸 허상인지 실재인지 판별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마침내 그가 헤드라이트를 등지고 섰다. 그런 다음 서슴없이 거리를 좁히며 한쪽 귀에 꽂은 무전 이어폰을 빼냈다.
은채의 맥박이 빠르게 뛰다가 끝내는 호흡이 멎었다.
유백색 피부, 흐트러졌지만 포마드로 올린 검은 머리카락, 길쭉한 눈매 속에 형형한 검은 동공.
남자의 모습이 기억 속의 모습과 너무나도 똑같아, 도리어 현실감이 없었다.
“도망친 게 고작 여긴가.”
남자가 검은 가죽 장갑을 벗어 왼손에 옮겨 쥐며 말했다. 시선은 그녀의 놀란 얼굴에서 드러난 어깨로, 그리고 하이힐이 벗겨진 맨발을 차례대로 훑었다.
“여전하네요.”
그 말에 은채의 몸이 의지를 배반하고 움찔거렸다. 부친과 약혼자를 향한 보잘것없는 반항심은 기억 저편으로 사라진 지 오래였다.
남자가 그녀의 앞에 친히 무릎을 굽혀 앉으며 벗겨진 하이힐을 주워 들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여서 엉망이 된 은채의 발바닥을 보며 잘생긴 얼굴을 설핏 구겼다. 그때 당혹감에 넋을 잃었던 그녀의 심사가 완전히 뒤틀렸다.
은채는 붉게 충혈된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권기주…….”
그의 이름을 읊조리자마자 피가 나도록 입술을 짓씹었다.
남자가 적선하듯 던져 주던 말에 갖은 의미를 부여하다가 어떤 종말을 맞았었는지 잠시 망각했다.
은채는 아직도 2년 전에 버려진 사랑이 바로 어제의 일처럼 생생하게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