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왜 돌아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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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왜 돌아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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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왜 돌아왔어요?
2023.03.06.
스물한 살. 모친의 기일이었다. 다 마른 줄 알았던 눈물이 둑이 터진 것처럼 쏟아진 날. 그날도 너무 울어 퉁퉁 부은 몰골로 내려가자, 부친이 느닷없이 새로운 경호원을 소개해 주었다.
‘이쪽은 권기주라고, 앞으로 네 경호를 전담할 거다.’
평소 의심이 많은 부친이 예외적으로 흡족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은채는 언짢은 심기를 숨기지도 않고 그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간간이 본 기억이 있었다. 이 집에는 워낙에 일하는 사람이 많아 대체로 누굴 본들 다 초면인데 남자는 아니었다.
심혈을 기울여 조각해 놓은 듯한 이목구비와 짐승처럼 야성적인 체격. 모친 대신 그녀를 키운 함안댁 아주머니마저 뉘 집 자식인지 궁금해하던 그 남자니까.
제법 능력도 있었다. 경호원으로 시작했는데, 부친의 측근으로까지 부상했으니. 물론 그녀에게 좋은 징조는 아니었다. 부친에게 믿을 만한 심복이라면 그녀에게는 그만큼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전제가 진작부터 명시된다.
은채의 전담 경호원은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송 회장에게 고해바치는 것까지가 업무다. 그런데 심복이기까지 하니, 얼마나 세세하게 보고를 할까.
불행 중 다행으로, 그녀의 눈에 비친 권기주는 부친이 그렇게나 강조하던 충성심과는 거리가 멀었다. 예의도, 긴장감도 찾아볼 수 없었다. 건들건들하지만 않을 뿐 삐딱한 시선 처리까지. 이상할 정도로 여유가 몸에 밴 남자였다.
‘잘 부탁합니다.’
그래도 묵례를 하긴 했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는 것이 갸륵해서 은채도 적당한 말을 고르며 목을 가다듬었다. 남자의 시선이 피곤하고 지루하다는 듯 주변을 부유하지 않았더라면, 그래. 분명히 평소처럼 다소곳하게 인사를 했을 터였다.
‘뭘요?’
‘…….’
‘앞으로 널 잘 감시했다가 회장님께 보고할 테니 좀 불편해도 잘 부탁드린다. 뭐 그런 뜻인가요?’
남자는 일말의 타격도 받지 않은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조금 실망했다. 무심한 저 얼굴이 좀 일그러지는 걸 보고 싶었던 것도 같은데.
송은채. 하고 부친이 나무라듯 불렀으나, 그녀는 그대로 지나쳐 걸어갔다. 뒤에서 저 애가 좀 까칠해. 그래도 잘 타일러서 데리고 다니는 게 네 능력이다. 부친이 그렇게 변명하는 소리가 들렸다. 왠지 심장이 쿵쿵 뛰었다.
그다음 날, 정말로 남자가 학교까지 동행하려는지 그림자처럼 따라붙었다. 은채는 일부러 그를 건드렸다.
‘회장 경호하다가 왜 갑자기 날 경호하게 된 거예요? 좌천 이런 건가. 그럼 그쪽 큰일 났네요. 그 나이에 벌써.’
제 발로 그만둬라, 그만둬라. 빌고 또 빌었다. 하지만 남자는 생긴 대로 놀았다. 뭘 해도 꿈쩍하지 않고, 보기완 다르게 참을성도 좋았다.
그를 다시 보게 된 계기는 아주 사소한 사건 때문이었다. 은채는 몰래 모친에 대해 조사했고, 오래전 이 집에서 일했다는 가사 도우미 아주머니를 찾아냈다. 거제에 있다는 아주머니를 만나기 위해 남자를 따돌리고 기차에 올랐다.
하지만 아주머니는 약속 장소에 나오지 않았다. 허탈감과 무력감에 휩싸여,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하루를 꼬박 거제에서 보내고, 다시 기차를 타고 돌아왔을 때 역에는 남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그 사실을 부친에게 보고하지 않았다.
‘나 동정하는 거라면 필요 없으니까, 하던 대로 아버지한테 말씀드리세요.’
내 약점을 잡고 휘두르려는 생각은 일찌감치 접으라는 경고였다. 하지만 남자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부친은 계속 그 일에 대해 모르는 눈치였다.
그를 의식하는 날이 늘어나고, 그는 여전히 경호 대상에게 무심한 날들이 이어졌다.
그에게 마음을 완전히 빼앗기게 된 것은 사업차 필리핀에 가는 부친과 동행했을 때였다. 빈 시간에 그와 함께 필리핀 노점상을 돌아보던 중 갑자기 괴한이 덮쳐왔다.
그는 은채 대신 칼에 찔림으로써 경호원이라는 직무를 충실하게 이행했다. 괴한들은 포기하지 않을 것 같았고, 경찰이 올 때까지 우선 몸을 숨기기로 했다.
여관방에도 못 미치는 수준의 필리핀 호텔 방이었다. 최대한 감정을 억제하려고 노력했지만, 피를 흘리는 남자를 보는 순간 단전에서 화가 치밀었다.
‘왜 그랬어요?’
은채는 말라비틀어진 목구멍 때문에 잘 나오지도 않는 목소리를 쥐어짰다. 부친에게 적이 많다는 거야 익히 알고 있었다. 사업에 있어 공격적인 기질이 강한 탓에 쓸모가 없다고 판단되면 가차 없이 버리는 냉혹한 면이 원수를 만드는 격이었다. 해외 사업을 할 때마저 그런 면모를 발휘했을 줄은 몰랐다.
‘누가 대신 죽어 달랬냐고요.’
부친은 갑작스럽게 디원의 필리핀 공장 전면 철수를 선언했다. 하필이면 그녀가 입국해 있을 때였다는 게 문제였다. 많은 이들이 하루아침에 직장을 잃었다. 그중 관리 감독직을 맡았던 현지인이 앙심을 품고 그녀에게 흉기로 위해를 가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애석하게도 은채는 구사일생했다. 그 앞을 무모한 남자가 가로막는 바람에.
‘내가 묻고 싶은 말이에요.’
남자가 곱게 내린 눈꺼풀을 치켜올렸다. 이내 새카만 동공이 쓱, 하고 그녀를 향했다.
‘피할 수 있었는데 안 피했잖아.’
그가 바닥에서 몸을 세웠다. 강인한 목선, 곧게 뻗은 어깨, 잘 짜인 흉곽, 가파르게 좁아지는 허리, 움직일 때마다 깊게 골이 패는 복근까지. 흉악한 육신에서는 김이 펄펄 끓어 올랐다.
옆구리의 부상 때문임에 틀림이 없었다. 실제로 찍, 새어 나온 피가 환부를 덮은 거즈를 더욱 검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상관없잖아요.’
‘…….’
‘나한테 관심 없다며.’
은채는 일부러 냉정하게 말했다.
‘그렇게도 나한테 관심이 받고 싶으셨다.’
그런데 남자가 지포 라이터를 찰칵거리며 여상히 되물었다. 말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은채는 일순 부아가 치밀었다. 제 마음을 다 알고서 굳이 물어보는 악취미가 짜증스러웠다.
피하자. 환자랑 입씨름이나 하는 옹졸함을 보일 순 없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더러워서 피하지, 무서워서 피하는 게 아니다.
은채가 벌떡 일어나려는데, 동시에 팔이 잡혔다. 잡아당기는 악력에 속수무책으로 끌려가고 말았다.
쿵!
등이 바닥과 맞닿았다. 그걸 인식하기 전에 은채는 숨을 삼켜야 했다. 몸 위에 올라탄 남자의 육신이 뜨거운 열기를 뿜고 있었다.
‘송은채.’
보통 사람보다 낮은 목소리를 그가 긁듯이 뱉었다. 곧바로 길쭉한 눈매를 확 일그러뜨리며 고개를 떨궜다. 어둠에 안 그래도 잿빛으로 뒤덮인 얼굴이 검은 머리카락에 더 가려졌다.
놀란 은채가 환부를 내려다보려고 하자, 그가 고개를 확 치켜들었다.
‘그러니까 관심이 좀 가는데.’
‘…….’
‘더 해 봐요.’
둥그렇게 눈이 확장된 은채의 얼굴에 그림자가 깊게 드리워졌다. 그가 자세를 한껏 낮춘 탓이다. 눈에서는 검은 얼룩 같은 것이 일렁이는 게 보였다.
은채는 일단 그의 목에 팔부터 감았다. 머뭇거렸지만, 금욕적으로 보일 정도로 단정한 입술에 제 입술을 붙이는 데까지 성공했다. 그가 목울대를 진동하며 웃는 소리가 들렸다.
* * *
회상을 하다 구역질이 올라왔다. 은채는 눈을 부릅떴다.
지금 이 상황이 도무지 현실감이 없었다. 그저 헛것인가 믿기지 않는 얼굴로 남자를……. 권기주를 넋 놓고 바라보았다.
2년 전보다 머리는 좀 길었고, 살이 약간 빠졌는지 콧대와 턱선이 더욱 선명했다. 간담이 서늘했던 길쭉한 눈매 끝은 묘하게 선홍빛이었다.
눈매 끝이 원래 저랬던가.
은채가 복잡하게 뒤엉킨 기억 속을 되짚는 사이 그가 무심한 얼굴로 대답을 했다.
“네. 권기주입니다.”
“당신이 왜… 여기에…….”
놀라고 당혹스럽고. 은채는 도무지 이성적인 판단을 할 수 없었다. 귀신이라도 본 것 같으니.
“복귀, 했습니다.”
권기주가 간단하게 일축하는 말을 듣던 그녀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발목이 잡힌 탓이다. 차갑게 얼어붙은 살갗을 감싼 그의 손은 기가 막힐 정도로 따뜻했다.
은채는 가만히 그가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구두를 신겨 주는 손가락이 쓸데없이 곧고 길다. 그런 생각이 의지와 상관없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시키지도 않은 수발을 든 후에 그는 느릿하게 몸을 일으켜 세웠다. 눈을 내리깔아서 은채에게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상체를 가볍게 비틀어 코트를 벗었다.
아.
은채는 소리 없이 탄식했다.
살이 빠진 게 아니었다. 전에도 군살을 찾아볼 수 없던 몸인데 지금은 근육으로 더욱 단단해져 있었다.
은채는 순간 단전에서부터 무언가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권기주는 벗어든 코트로 그녀의 몸을 단단히 감쌌다. 은채는 코트를 입은 게 아니라 파묻힌 것이나 다름없는 모습으로 올려다보았다.
“일어나시죠.”
그는 잡고 일어나도 좋다는 듯이 손을 내미는 것으로 또다시 후한 인심을 베풀었다. 은채는 잠시간 제 눈앞에 있는 남자의 손을 쳐다보았다. 이윽고 자신의 손으로 거침없이 탁, 하고 쳐냈다. 그런 뒤에 보란 듯이 바닥을 짚고 일어섰다.
기주는 내쳐진 자신의 빈손을 쓰윽, 비비는가 싶더니 이내 아무렇지 않게 그 손을 바지 주머니에 푹 찔러 넣었다. 그러고는 갑자기 들리는 구둣발 소리를 따라 고개를 반쯤 돌려 쳐다보았다.
그때서야 송명환 회장이 보낸 경호원들이 온 것이었다. 그들은 은채를 발견하자마자 당장에 제압해서 끌고 갈 기세로 다가서다가, 일순 뱀이라도 본 것처럼 몸을 굳혔다.
권기주가 서늘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쳐다보며 머리를 쓸어 넘긴 탓이다.
은채는 저 얼굴을 알고 있었다.
주로 수가 틀리면 하는 짓거리였다.
하.
은채는 저조차도 의미를 알 수 없는 실소를 터뜨린 후에 정적에 휩싸인 자리를 또각또각 걸어갔다.
기주의 눈이 그녀를 좇아 가로 방향으로 움직였다. 반면에 송명환 회장이 보낸 경호팀은 언제라도 잡아챌 기세로 몸에 힘이 들어갔다.
철컥, 하고 차량 문이 열렸을 때는 모두가 이게 뭔가 싶은 눈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은채는 차에 탔다. 그런 뒤에 바로 문을 닫는 것으로 옆자리는 허락하지 않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그걸 보던 기주는 이윽고 한 손으로 목덜미를 훑었다. 그러다가 흥미롭다는 듯 흐응, 한숨을 흘리며 한쪽 눈썹을 찡그렸다.
* * *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운전자나 조수석의 권기주나, 뒷좌석의 은채나. 서로 약속이나 한 듯 침묵을 지키는 차 안에서 그녀가 하던 생각은 황당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흔한 통보조차 없이 사라졌던 남자가 예고도 없이 눈앞에 나타났다.
원래부터 제 자리인 양 태연하게.
송 회장이 어떤 지시를 내렸는지 은채는 다시 약혼식장으로 끌려 들어가지 않았다. 대신 집으로 모셔져 자신의 방에 갇힌 신세가 되었다.
한창 서성이는데 누군가 방으로 들어왔다.
은채는 자신의 방에 허락도 없이 침입한, 침입자를 노려보았다. 혼란에만 빠져 있기에는 이제 그녀는 순진하지 않았다.
“당분간 외출 금지입니다. 회장님 명령이에요.”
“…….”
“송은채 씨 스케줄은 제가 관리할 거고.”
“…….”
“제 동의 없이는 사적인 약속도 안 됩니다.”
은채는 부아가 치밀었다. 준엄한 얼굴을 하고서 기함할 말들만 골라 내뱉는 권기주를 보며 속이 분노로 메슥거렸다.
어째서. 숍에서 공들인 화장이 다 번진 자신과 달리 남자는 조금의 결점도 찾을 수 없을까.
“능숙하네요? 송은채 경호는 2회차다, 이건가.”
그녀가 빈정거려도 권기주에게서는 이렇다 할 반응이 돌아오지 않았다.
“근데 어쩌죠…….”
“…….”
“경력직은 경력직인데, 불량품이잖아요.”
은채는 일순 강렬한 두통을 느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무단 퇴사한 직원, 내가 어떻게 믿고 내 스케줄을 맡겨요?”
“회장님 지시받고?”
그가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이며 대꾸했다. 은채는 차가운 손끝을 말아 쥐었다.
권기주에 대한 배신감은 충분히 느꼈다고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다.
“……왜 돌아왔어요?”
억눌린 목소리에는 겹겹이 쌓인 원망과 미움이 가득했다.
“복귀 명령을…….”
탁-!
말을 끝맺지 못한 기주의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다. 핸드폰을 그의 얼굴에 던져 버린 은채는 숨을 급히 몰아쉬며 쏘아봤다.
핸드폰 케이스 액세서리에 긁힌 그의 뺨이 상처로 벌어지며 피가 새어 나왔다. 은채의 눈은 그 피만큼 붉게 충혈됐다.
“뻔한 말은 집어치워.”
권기주에 대한 배신감은 충분히 느꼈다고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다.
“…….”
“너무 쉽게 속아 넘어가서 시시했어? 막상 꼬시긴 했지만 사람 하나 망가뜨리는 건 일도 아닌 회장님한테 들킬까 봐 무서웠니? 차라리 기다렸다가 딜을 했어야지. 헤어지는 대가로 한몫 거하게 챙겨서 도망을 가지 그랬어. 그럼 최소한 돈 때문에 다시 돌아와서 네가 버린 여자 꽁무니 쫓는 구질구질한 짓은 안 해도 됐잖아.”
줄곧 고분고분한 척을 하던 그의 입술이 비틀렸다. 말아 넣은 아랫입술은 이에 짓눌렸다. 인상을 쓰는 것 같기도 하고 웃는 것 같기도 한 기묘한 표정이었다.
“그럼 나랑 결혼이라도 하려고 했어요?”
상처를 가볍게 손으로 쓸며 피를 닦아 낸 기주가 물었다. 깨끗한 음성과는 달리 그의 얼굴은 무섭도록 음울했다.
“또 그 얼굴이네. 세상에서 제일 불행한 얼굴.”
“…….”
“나랑 살면 진짜 불행 구렁텅이에 빠지는 건데. 정말 나한테 발목 잡히고 싶었어요?”
다정하게 얼굴을 감싸는 손이 뜨거웠다.
“말해 봐요. 도망이라도 가서 살려고?”
아이를 어르고 달래는 말투가 눈물이 나도록 사근사근했다.
“툭하면 경호원들한테 위치 추적당하고 이렇게 끌려오면서.”
“…….”
“정신 차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