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3/31)


3화.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2023.03.09.


은채의 얼굴에서 손을 떼어 낸 기주는 다른 손에 들고 있던 서류 뭉치를 바닥에 던지듯 내려놨다.

“치밀하게 준비한 거 같은데, 제가 먼저 발견 못 했으면 들켰을 겁니다.”

발끝에 흐트러진 이민 자료들과 여권을 은채는 멍하니 바라봤다. 절망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녀가 남들 눈을 피해 가며 육 개월 동안 치밀하게 준비했던 흔적이었다. 그게 이렇게 쉽게 발밑에 나뒹굴었다.

“앞으로 두 달만 얌전히 있으면 이런 거 눈감아 줄게요. 스케줄에 맞춰서 움직이는 겁니다.”

하. 은채의 잇새로 웃음 섞인 탄식이 터져 나왔다.

다른 건 다 몰라도, 그와 자신이 경호대상과 경호인.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라는 건 명확히 잘 알아들었다.

한승윤과의 결혼까지 얌전히 처박혀 있으라는 뜻이니까.

그녀는 송 회장의 충실한 개일 뿐인 권기주를 비웃었다.

“3개월이겠지.”

잠시 침묵을 고수하던 그가 굳게 다문 입을 뗐다.

“2개월.”

은채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눈썹을 찌푸렸지만, 기주는 설명을 덧붙이지 않았다.

대신 그녀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손을 뻗었다. 움찔하며 입술을 앙다문 은채는 그의 기다란 손가락이 퉁퉁 부어 까진 제 입술에 조심스레 닿는 걸 느끼고는 손으로 날카롭게 쳐냈다.

“……꺼져요.”

은채의 앙칼진 말에 기주는 뻗은 팔을 내렸다.

빳빳한 셔츠 소매 깃 사이로 나온 손에 힘이 들어가더니, 이내 곧 등을 보이며 방을 나갔다.

눈에 잔뜩 힘을 주고 있던 은채는 숨을 길게 내쉬며 침대에 풀썩 쓰러졌다. 방금까지 그가 서 있던 자리에 눈길이 가, 그만 눈을 감아 버렸다.

그의 이름과 함께 가둬 놨던 기억들이 머릿속에 차올랐다.

비참하게 버려질 줄도 모르고, 너무 순진했었다.

“나쁜 새끼…….”

한때는 사랑한다고 믿었던 남자가, 이제는 한승윤 같은 망나니와의 결혼까지 손과 발을 묶어 놓을 수단으로 복귀했다.

배신한 걸로도 모자라서, 부친이라는 지옥에서 한승윤이라는 지옥으로 옮겨 가는 걸 돕겠다고.

은채는 거대한 절망 앞에 무력하게 주저앉았다.

* * *

교대를 위해 별채에 모인 경호팀은 권기주가 들어와 욕실로 들어갈 때까지 숨죽여 그를 주시했다.

권기주는 필요 이상으로 과묵하고, 어쩐지 재수가 없었다.

2년 전 그와 함께 근무했었던 팀원들이 닫힌 욕실 문을 탐탁지 않게 흘겨봤다.

이윽고 물소리가 끊기고, 트레이닝 팬츠만 걸친 기주가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털며 나왔다.

거실에 있던 경호팀은 저절로 떡 벌어지는 입을 서둘러 닫았다.

권기주의 몸은 도무지 일개 경호학과를 졸업한 몸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러니까, 단순히 운동으로 다져진 몸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좀 더 동물적인. 전투에 최적화된 흉기와도 같은 육체였다.

강인한 두께의 목선과 완전하게 벌어진 채로 각이 진 어깨에는 총상으로 추정되는 상처가 있었고, 위압적인 복근에는 꽤 선명한 자상까지 남아 있었다.

감탄과 탄식이 절로 나오는 몸매인 셈이다.

보는 눈들에 무감한 기주가 방 안으로 들어가자, 호기심 어린 눈으로 지켜보던 경호팀 막내가 이때다 싶었는지 입을 열었다.

“권 팀장이요. 정말 건강상으로 쉬었던 거 맞아요?”

“모르지. 지가 말을 안 하는데.”

“저 몸 좀 보세요. 저게 아팠던 몸인가. 듣기로는 조직 생활 좀 했다는 소문이 있던데, 그쪽으로 다시 갔다가 일이 안 풀려서 돌아온 게 아닐까요?”

“UDT 출신이라는 소문도 있던데?”

“그리고 팀장이 왜 아가씨 전담입니까? 실장님 따라서 회장님 경호 안 맡고.”

권기주에 대한 소문은 무성한 가지를 뻗어가고 있었지만, 정작 진실은 누구도 알 수 없었다. 경호 실장이 직접 데려왔고, 2년 전이나 지금이나 일은 철두철미했다.

혹시라도 답을 얻을 수 있을까 싶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질문을 해 대던 경호팀은 기주가 핸드폰을 들고 거실로 나오자, 일제히 입을 다물고 일어섰다.

우왕좌왕하던 중에 그나마 정신을 가까스로 붙든 막내만이 입을 열었다.

“아시겠지만 호출이 있지 않은 한 여기서 대기입니다. 무슨 일이 생기면 백업은 제가 나올 테니까, 저한테 연락하시면 됩니다. 제 이름은 아시죠?”

기주가 대답 없이 몸을 굽혀 모니터를 통해 보이는 CCTV 화면을 살피자, 막내는 발끈했지만 다른 팀원이 소매를 잡아당겨 끌고 나갔다.

그제야 본격적으로 의자에 앉은 기주는 발목까지 오는 리넨 원피스를 입은 은채가 집에서 나와 온실로 들어가는 모습을 발견했다.

보일 듯 말 듯 한 미소가 입가에 걸쳤다.

“꽃은 어지간히 좋아하지. 잠도 안 자고.”

안 그래도 작은 몸을 굽혀 꽃을 살펴보는 은채의 모습을 지켜보던 그는 화면을 커다랗게 확대했다.

쭈그려 앉은 은채가 모니터를 가득 채웠고, 시선은 은채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는 은채의 조그만 등을 보며 오전 일을 떠올렸다.

시차 적응에 실패해 의식이 몽롱하던 참이었다. 차라리 가수면 상태에 가까웠다. 그 의식 사이로 핸드폰 알림음이 끊이지 않고 쏟아져 들어왔다. 디원 그룹 송명환 회장의 비서 실장 김진호였다.

[한승윤한테 여자가 있습니다.]

한승윤은 송명환의 예비 사위다. 한지창 의원의 셋째 아들로, 위로 형과 누나를 두고 있다. 기업체를 운영하는 외가 덕에 호텔 및 리조트 사업 부문에서 한자리를 꿰차고 있으나 입지가 터무니없이 좁다. 그 불안을 술과 여자, 그리고 도박으로 푸는 난봉꾼으로 명성이 자자했다.

[회장님께서 오늘 있을 약혼식에 지장 없도록 주의를 주라십니다.]

잇새로 웃음이 피식 새어 나왔다. 예비 사위가 여색에 빠졌다는 사실을 송 회장이 지금에야 알았을 리 없다. 알고도 묵인하다가 수면 위로 드러날 것 같으니 조치를 가하려는 것뿐이다.

[은채 아가씨와의 약속에도 늦지 않도록요.]

아가씨. 은채. 아가씨. 은채.

그 단어를 머릿속으로 곱씹다가 몸을 일으켰다.

호텔 MK의 VIP를 위한 스위트룸은 재력을 갖추었다고 해서 투숙할 수 있는 객실이 아니었다. 엄격한 검증을 거쳐 선별된 소수의 인원만이 이용할 수 있었다.

1시간 뒤. 그 비밀의 방을 간단히 전화 한 통으로 침입을 허가받고 객실 앞에 서자, 직원이 멍청한 얼굴로 말했다.

‘그럼, 벨 누르겠습니다.’

직원이 달달 떨리는 검지를 세워 벨을 눌렀다.

딩-동.

‘룸서비스입니다.’

안에서는 기척이 없었다.

다급해진 직원이 재차 벨을 누르는 사이, 기주는 가죽 장갑을 고쳐 꼈다. 그러고는 바로 뒤에 선 장정에게서 빼앗아 든 도끼를 문짝에 대고 휘둘렀다.

퍽! 퍽!

문짝이 도끼질 몇 번에 쩌저적, 찌그러졌다.

안에서 혼비백산한 중얼거림과 희미한 욕설이 흘러나왔고, 곧이어 문이 벌컥, 열리며 한승윤의 낯짝이 튀어나왔다.

‘뭐야!’

그새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신 직원의 낯짝이 파들파들 떨렸다.

‘그, 그, 그게…….’

연기력이 형편없는 직원을 가볍게 밀치고, 한 손으로는 객실 문을 더 활짝 열었다. 마치 병풍을 제치고 관짝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이런. 내가 불청객인가.’

다짜고짜 안으로 밀고 들어가, 우리에 풀어놓은 사자처럼 객실 내부를 서슴없이 휘젓고 다니자, 한승윤이 지껄였다.

‘당신 뭐야? 누구야?’

2시간 전에 입실했다는 객실 안은 엉망이었다. 뭘 어쨌는지 침대 시트가 무질서하게 엉켜 있고, 옷은 뱀이 허물을 벗은 듯이 나뒹굴었으며, 욕조에 물은 언제부터 틀어 놓았는지 물이 울컥울컥 범람 중이었다.

바로 몇 시간 후에는 약혼식도 앞두고 있겠다, 스릴감에 미쳐 날뛴 정황이 아주 확연했다.

‘삼십 분 지각이네요.’

무심한 어조가 위압적으로 나왔다. 문을 박살 내고 침입한 상대에게 쉽사리 덤비지도 못하는 꼴이 우스워지려던 찰나, 얼굴이 볼품없이 붉어진 한승윤은 꼴에 여자 앞이라고 항의를 하고 나섰다.

‘너 누구야? MK호텔은 고객 대접을 이따위로 하나?’

‘송은채 씨가 그렇게 한가한 분이 아닙니다.’

송은채. 그 이름에 한승윤의 얼굴이 곧장 검게 변했다. 추잡한 행각을 들켰다는 수치심보다는 눈앞의 저를 좋게 쳐 줘봤자 비서 정도 되겠다는 확신이 앞선 게 분명했다.

‘하, 이 새끼가 미쳤나. 고작 비서 나부랭이가 어딜 감히. 송 회장이 이딴 식으로 굴라고 했나? 너 이거 내가 문제 삼으면, 감당할 수 있어?’

감당? 내가 감당 못 할 일은 없는데.

거만하게 삿대질하며 다가오는 한승윤의 팔을 단번에 꺾었다. 동시에 기울어진 한승윤의 머리를 우악스럽게 움켜쥐고, 테이블에 처박았다.

‘지금 내려가서 정중하게 사과부터 하는 거예요.’

‘…….’

‘신사답게. 응?’

팔이 한계까지 꺾인 한승윤을 그대로 패대기치는데 한승윤과 같이 있던 여자가 빽빽 비명을 지르며 경찰을 부르겠다고 법석을 떨었다.

웃기지도 않지.

생각을 거두고 CCTV 모니터에 손을 올린 기주는 둥근 모습의 그녀를 엄지로 지그시 눌렀다.

기다랗고 굵은 손끝이 그녀의 목덜미부터 등허리까지 투박하게 쓸어내리다가 떨어져 나갔다.

“…….”

내리뜬 눈으로 모니터를 응시하던 기주가 망설임 없이 뒤를 돌았다.

애틋해 보이는 지문이 모니터에 선명히 자리 잡았다.

* * *

추위가 한풀 꺾였다. 먹구름으로 가득한 하늘을 여상히 보던 은채는 이내 대기하고 있던 리무진으로 다가섰다.

그러자 인기척도 없이 뒤에서 손이 뻗어 나와, 뒷좌석 문을 대신 열었다. 곧바로 시선을 치켜올린 은채는 태연한 권기주를 싸늘하게 응시했다.

뺨의 상처가 유난히 눈에 띄어, 거슬렸다. 시간이 지체되자 검은 눈동자가 아래로 움직였다.

낌새를 차린 은채는 눈이 부딪히기 전에 눈길을 돌리고 몸을 숙여 리무진에 올라탔다.

천장에 부딪히지 않게 손으로 그녀의 정수리 위를 가려 주던 기주는 차 문을 닫았다.

그가 차량에서 한 발자국 물러나는 모습을 곁눈질로 보던 은채가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송 회장이 서슬 퍼런 안광을 빛내며 다그치듯 말했다.

“천하의 박복한 딸을 좋은 배필 만들어 보내 주겠다는데 초를 쳐?”

퍽도 애틋한 부성애다.

피 한 방울 안 섞인 애를 호적에 올려 준다는 말에 감격했다는 엄마와 달리 은채는 송 회장의 속셈이 뼛속까지 보였다.

뭐든지 철저한 계산과 계획 후에 움직이는 송 회장이 사별한 부인의 딸을 여태껏 키운 이유는 부성애 따위가 아니었다.

사업확장을 위한 미끼이자 도구. 그러니까, 철저히 상품이었다.

그러니 망나니로 소문이 자자한 한승윤을 놓고 좋은 배필이라는 감투까지 씌워 가며 안달이지.

“내 덕에 먹고 살았으면 그만한 보답을 해야지. 워낙 픽픽 쓰러지는 애니, 이번에도 쓰러져 응급실 보냈다고 했다. 그러니 그 번지르르한 말솜씨로 가서 사과나 똑바로 해.”

경험이라는 건 참 무시 못 할 일이다. 수십 번 도망치고 반항해 봐야 제자리걸음이라는 걸 깨닫자, 의욕이 사라졌다.

희망이 없다는 건 이런 걸까. 알고도 당하고, 모르고도 당하는 거.

그 사실을 다시 한번 인정하며, 은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송 회장은 조금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쪽 집안이 예술에 흥미가 있나 보더군. 클래식 공연장까지 지어 가면서 후원도 하고 말이야.”

“…….”

“네 전공 관련해서 재주껏 대화 좀 섞어 봐. 꽤 좋아할 거다.”

정작 본인은 흥미 있지도 않은 클래식 음악에 관해서 주절주절 말을 늘어놓기도 했다.

가만히 들어 주던 은채는 조소를 흘리며 창가로 시선을 돌렸다.

엄마가 돌아가시자마자 비올라를 버리려고 했던 사람이 하는 말 치곤 조금 우습다고 생각하며 휙휙, 빠르게 지나가는 풍경에 집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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