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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단추, 풀게요. (4/31)


4화. 단추, 풀게요.
2023.03.13.


“초대해 주셔서 영광입니다.”

“아닙니다. 저희야말로 집으로 모실 수 있게 되어 영광입니다.”

한승윤의 부친, 한지창 의원이 아내 전수경과 함께 반갑게 맞았다.

뒤에 서 있던 승윤도 은채를 보며 눈매를 휘었다.

“아프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괜찮아요?”

그가 내민 손을 멀거니 내려다보던 은채가 악수를 받아 주며 작게 대답했다.

“네. 걱정해 주신 덕분에요.”

완벽한 합이었다. 그 둘을 흐뭇하게 지켜보던 송 회장은 보기만 해도 배부른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한지창 내외를 따라 주방으로 가는 동안 은채는 겨우 지었던 미소조차 사라진 채로 식탁 앞에 앉았다.

객을 의식한 호화로운 식탁이었는데, 가사 도우미들은 여전히 찬을 부지런히 옮기고 있었다.

비서에게 재킷을 건넨 송 회장은 넉살 좋게 웃었다.

“이번에 골프 리조트 계열사를 차린다고 들었습니다.”

맞은 편에 앉은 전수경이 기다렸다는 듯 송 회장의 질문을 덥석 물었다.

“네. 우리 동생이 비즈니스로 해외만 돌았더니 한국에는 낄 자리가 없어서 말이에요. 아예 한국에 일거리를 만들어 버렸습니다. 하하.”

“세금이라거나, 자리 잡는 거나 여기만큼 일 벌이기 편한 곳도 없으니까요. 골프장이면, 자리가 좋아야겠습니다. 제가 건물 좀 세우려고 봐 둔 땅이 몇 군데 있긴 한데.”

“송 회장님 안목이라면 무조건 믿습니다. 모름지기 사돈 될 사인데.”

전수경의 외가는 미국계 호텔 사업을 한다. 동생이 한국 사업에도 눈독 들인다는 건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었다. 단기간에 국내 최대 건설 회사로 등극한 디원 그룹 송 회장과의 인연은 그래서 자연스러운 그림이었다.

한지창 의원은 든든한 처가에 디원 그룹이라는 뒷배까지 두게 되었으니 밥을 안 먹어도 배가 부를 터였다.

“그런데, 은채 양 많이 불편해 보이네요. 혹시 아직 아픈데 저희가 너무 빨리 초대한 건가요?”

전수경이 묻자, 찬을 깨작거리던 은채가 고개를 들며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죄송해요. 아직 빈혈기가 조금 남아 있어서.”

“아, 저런.”

“약혼 파티도 저 때문에 그렇게 돼 버려서, 정말 죄송합니다.”

“그건 어차피 은채 양을 위한 건데, 신경 쓸 것 없어요.”

“은채는 어려서부터 겨울마다 툭툭 쓰러지곤 했죠. 그래서 이젠 겨울이 왔거니, 하고 넘긴답니다.”

송 회장의 장난기 섞인 말에 한 회장이 유쾌하게 웃으며, 은채를 바라봤다.

“은채 양 졸업 얼마 안 남았죠? 전공이…… 비올라?”

“네.”

“베를린 오케스트라 단원에 최초로 한국 비올라 연주자가 들어갔다고 얼마 전에 들었어요. 은채 양도 해외 진출이 목표인가요?”

“그 정도까진 생각 안 하고 있어요. 실력이 부족하기도 하고요.”

“겸손하군요. 그래요. 결혼하면 그런 건 아무래도 무리겠죠. 졸업 연주회는 꼭 가 보고 싶네요.”

은채는 대답 없이 빙그레 웃으며 물을 삼켰다.

식사를 끝마친 후, 그녀는 정원을 구경하겠다는 핑계로 밖으로 나왔다. 수경의 취향대로 꾸며진 마당 정원은 소나무로 인해 겨울 속에서도 푸르렀다.

조금이나마 답답한 속이 트이는 것 같던 은채는 소나무 이파리에 툭 내려앉은 물방울을 지그시 응시했다.

고개를 바짝 들어 하늘을 바라보니 비가 한 방울, 두 방울 떨어지기 시작했다. 안으로 들어가야 했지만, 무리 속에 섞이기 싫다는 생각에 어물거렸다.

바스락-.

그때, 낙엽 밟는 소리가 울렸다.

흠칫 놀란 은채가 뒤를 도는 순간, 승윤이 우산을 쓰고 서 있었다. 그는 굳게 다문 입매를 비틀었다.

“아버지랑 어머니는 속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난 아니에요.”

“…….”

“아프다는 거 거짓말이죠?”

“무슨 말을 해도 믿지 않을 거잖아요.”

“뻔뻔하기도 하네. 이 결혼 좋아하는 척이라도 해요. 방해돼서 거슬리려고 하니까.”

승윤은 짜증스럽게 혀를 차며, 품에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양 볼이 움푹 패면서 거무튀튀한 연기가 스멀스멀 올라갔다.

“분명 그때 알아듣게 잘 설명하지 않았나? 어차피 하게 될 거 무탈하게 얌전히 좀 하자고요.”

“저기요. 한승윤 씨.”

“믿는 구석도 없는데 왜 그러실까. 현재 처지나 결혼한 후의 처지나 똑같은 인생 아닌가?”

솨아-.

빗방울이 거세졌다. 쏟아지는 물줄기에 은채가 젖어 들었다.

보란 듯이 우산을 고쳐 잡은 승윤이 은채의 손으로 시선을 내렸다.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더니, 악기는 제법 잘 다루나 보죠? 졸업 연주회 때 갈 거니까 내가 가는 게 싫으면 졸업 연주회도 망쳐버리든지. 약혼 파티처럼.”

비아냥대는 목소리에 은채는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피식 웃었다. 약혼 파티 물 먹인 게 그에겐 꽤나 화나는 짓이었단 걸 알게 되니 우스웠다.

“그러네요. 내 연주 그쪽이 듣는 거 싫은데 망쳐 버릴까요.”

“뭐?”

승윤이 잘못 들었다는 듯 눈썹을 찌푸리다가 비열하게 웃었다.

“신사답게 얘기하면 못 알아듣는 타입인가?”

은채는 아래로 떨군 손을 말아쥐었다. 주먹 쥔 손가락 사이로 빗물이 스며들었으나 이내 곧 멎었다.

그녀의 머리 위로 그림자가 드리우더니 장우산이 씌워졌다.

속눈썹에 빗물을 방울방울 달고 있는 은채의 떨리는 시선이 옆으로 향했다.

키 차이로 인해 넓은 어깨가 먼저 보였고, 그보다 시선을 더 올리니 힘 있는 목선과 날카로운 턱선이 순서대로 느릿하게 보였다.

“은채 씨 호흡기 건강이 좋지 못하셔서.”

우산을 들고 있지 않은 손으로 승윤의 입에서 담배를 빼낸 기주는 그걸 바닥에 툭 버렸다.

승윤은 날카롭게 찢어진 눈매 끝을 파르르 떨었다. 목소리는 분노로 진동했다.

“이제 대놓고 시위라도 하겠다는 건가?”

승윤이 기주를 찢어 죽일 듯이 곁눈질하며 재차 말했다.

“이 새끼까지 대동해서?”

기주는 은채의 어깨를 감싸고 뒤로 돌았다. 고개를 아래로 떨군 그녀는 흙에 더러워진 구두를 바라보며 헛숨을 내뱉었다.

“……하.”

그랬지. 이 사람은 항상 흙탕물에 처박혀 있을 때 나타난다.

비참함의 끝에 뭐라도 되는 양 나타나 어지럽게 한다.

“아직 내 말 안 끝났다고.”

어이가 없는 듯 인상을 찌푸린 승윤이 앞으로 성급히 다가와 은채의 팔을 낚아챘다.

깜짝 놀란 은채가 파르르 떨자 기주는 그녀의 팔을 잡은 승윤의 손을 꺾었다.

“아악……!”

순식간에 우산을 놓친 승윤이 질겁했다.

“거기까지 하시죠. 나도 내가 지금 뭘 할지 몰라서.”

하. 잇새로 낮은 숨을 내쉰 기주가 승윤을 차가운 눈빛으로 일별하며 은채의 어깨를 감쌌다.

어깨에서 강한 힘이 느껴진 은채는 기주가 걷는 대로 대문 밖으로 따라 나갔다.

그녀는 입술을 꾹 깨물며 비에 젖어 가는 기주를 신경 쓰지 않으려 애썼다.

그는 은채를 검은색 세단에 태우고, 운전석에 앉았다.

눈물인지 빗물인지 모를 것이 눈꼬리를 타고 흘렀다. 소매로 훔쳐 봐도 멈추지 않았다. 결국 제풀에 지쳐 차라리 눈을 감아 버렸다.

* * *

“왜…… 집이 아니죠?”

고급스럽게 점철된 호텔 스위트룸 중앙에 우두커니 선 채로 은채가 물었다.

차량이 주차장에 진입할 때만 해도 어디까지 가나 지켜보려는 심산이었다.

“빈혈로 쓰러져서 병원에 하루 입원했다고 보고했어요.”

주제넘은 짓인지 아닌지 그는 분별할 생각도 없는 눈치였다.

“퍽이나 믿겠네.”

“이대로 있으면 감기 걸릴 테니 씻어요.”

그는 단정한 얼굴로 보송한 가운을 손에 들고 욕실로 등을 떠밀었다.

“도대체 날 왜 거기서 데리고 나온 거예요? 한승윤한테 한 짓이 알려지면 당신…….”

은채의 파리한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지금까지 아버지를 배신한 이들은 다 망가졌다.

그게 정치인이건, 경제인이건, 하수인이건 할 것 없이 그랬다.

“……당신이 뭔데.”

“…….”

“고작 경호원 주제에 왜 쓸데없이 나서?”

은채는 그가 내민 가운을 빼앗아 바닥에 던졌다.

“왜 오버하고 그러냐고!”

허리춤에 손을 올리며 미간을 좁히던 기주가 짓씹듯 말을 뱉었다. 마치 참지 못해 나온 목소리처럼.

“……걱정돼서요.”

“뭐?”

“왜 그러고 있었어요. 한승윤이 뭐라고.”

지그시 쳐다보는 눈빛에 은채가 눈썹을 찡그리며 답했다.

“가만히 있을 생각 없었는데.”

말아 쥔 손으로 얼굴이라도 날려 주려고 했다.

지금 제 앞에 선, 표정이 시시각각 변하는 남자가 나타나기 전까진.

그가 고개를 기울이며 옆으로 눈을 돌렸다.

“그럼 한 대 때리려고 했어요? 그 손으로 왜. 그런 건 제가 해요.”

내 손이 뭐. 은채는 본능적으로 제 손을 펼쳐 내려보다가 기주를 바라봤다.

재회한 순간부터 어떤 생각인지 읽을 수 없고, 그저 태연할 뿐이었던 그의 감정이 처음으로 내비쳐 보였다.

은채는 숨을 크게 내쉬며 눈을 천천히 깜박였다.

“지금, 화 난 거예요?”

“네.”

대답한 기주가 은채의 양옆으로 손을 뻗었다.

그렇게 벽을 짚고, 은채의 어깨 위로 닿을 듯 말 듯 얼굴을 숙이던 기주는 입을 달싹였다.

“생각보다 더, 내가 참을성이 없는 거 같아서.”

이내 고개를 든 그가 잘게 웃었다.

씩씩거리던 은채의 숨이 흐트러지며 동공이 커졌다.

그의 길쭉한 눈가가 짙어지고, 눈빛이 침잠했다.

“지금도 감기 걸릴까 봐 걱정돼.”

벽에서 손을 떼고 바닥에 떨어진 가운을 집어 든 그는 상체를 올렸다.

지독한 저음이 귓바퀴를 타고 흘러들어 왔다.

“그런데도 알아서 벗을 생각은 없어 보이고.”

완전하게 까만 눈동자가 젖은 머리카락부터 축축한 어깨, 그리고 오르락내리락하는 가슴께를 훑어 내리다가 다시 올라왔다.

“단추, 풀게요.”

한숨같이 흘러나온 말을 끝으로 단추가 툭, 풀리며 하얀 목덜미가 드러났다.

벌어진 셔츠 사이 하얀 살결에 기주의 손끝이 닿았다.

“날 만지고 싶은 거예요?”

쇄골 근처를 선회하던 손이 뚝 멈췄다. 그런데도 은채는 그에게서 물러서지 않고 올려다봤다.

물끄러미 보던 그가 입을 뗐다.

“왜요.”

“…….”

“그렇다고 하면, 허락하려고요?”

남자는 시종일관 거짓이었다. 사랑을 속삭일 때도, 떠났을 때도, 돌아왔을 때도 무엇하나 손에 잡히는 게 없는 사람이었다.

온통 암흑천지인 세상에 던져진 기분이었지만, 여태까지와는 다르단 걸 은채는 느꼈다.

그의 눈동자는 아지랑이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그런 눈으로 보면 기대에 부응해야 할 것 같은데.”

“…….”

“그게 싫으면 씻고 가운으로 갈아입어요.”

은채는 제 몸에서 떨어져 나간 기주의 커다란 손을 쳐다봤다.

“그런데, 그쪽이 왜 내 걱정을 하지? 스케줄 대로만 움직이라며. 지금 방해하는 거잖아.”

“내가 정한 것 중에 한승윤이 은채 씨한테 까부는 건 어디에도 없어요.”

“꼭 그러니까 사소한 감정이라도 있는 거 같네.”

은채가 웃긴다는 듯 말했지만, 기주는 미소조차 띠지 않았다.

“없어요.”

“…….”

“사소하지 않으니까.”

입을 벙긋거리고 있던 은채는 그에게서 가운을 빼앗아, 욕실로 들어가 버렸다.

샤워를 마치고 나왔을 땐 우려와 달리 기주는 없었다. 가운 차림으로 입안 여린 살을 씹어 대던 은채는 의자에 걸쳐진 그의 젖은 재킷이 눈에 들어왔다.

지갑이든, 핸드폰이든 뭐라도 찾으면 여기서 나가야지.

은채는 재킷 주머니에 샅샅이 손을 넣어 봤다.

이윽고, 작지만 묵직한 뭔가가 손에 잡히자 망설임 없이 끄집어냈다.

군데군데 도금이 벗겨진 금속 라이터였다.

마뜩잖은 얼굴로 라이터를 뒤집어 바닥 면을 확인한 은채의 기분이 진창에 처박혔다.

음각으로 ‘K’가 새겨진 라이터는 분명 그녀가 필리핀에서 선물한 거였다.

권기주의 첫 번째 이니셜과 일치한다며 선물한 싸구려 라이터.

뚜껑을 열어 몇 번 당겨 봐도 불꽃이 피어오르지 않았다. 상태를 보아하니 기름을 넣어도 불꽃이 필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수명도 끝난 라이터를 왜 아직도 들고 다니는 거야. 도대체…….”

사소하지 않다는 권기주의 감정이 도대체 뭘까.

머릿속에 혼란스러운 의문이 가득 들어찼을 때, 객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반사적으로 은채는 라이터를 가운 주머니에 감추듯이 집어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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