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사소하지 않은 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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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사소하지 않은 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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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사소하지 않은 감정.
2023.03.16.
무료 급식소를 차린 교회 앞마당에는 배식을 기다리는 사람들로 바글바글했다.
선행은 최대한 알려야 한다는 송 회장의 뜻을 받들어 방송국 카메라도 여러 대였다.
카메라가 돌아가는 이상 송 회장은 노숙인들에게 친절하고 다정한 봉사자였다.
은채를 귀가시킨 후 합류하기 위해 차를 끌고 온 기주는 시동을 끈 채 양손으로 제 뒷머리를 받쳤다.
출신성분이 비천해서 그런지 송 회장은 정치인보다 이미지 관리에 열을 올리는 편이었다.
그래봤자 골수에서부터 진동하는 악취를 지울 수는 없는 노릇인데, 참 부지런했다.
그 점은 높이 사 줄 만했다.
귀찮다는 듯 주먹으로 눈두덩을 문지른 기주가 운전석 문을 열고 내렸다.
이미 차가 주차선 안에 처박힐 때부터 주시하고 있던 경호실장, 광일이 얼굴을 굳히며 다가왔다.
“따라와.”
멱살이라도 잡아챌 기세로 다가왔던 광일은 남들 눈을 의식했는지 나직이 말했다.
광일을 따라간 곳은 교회 뒤편 소각장이었다.
따라붙는 이가 없는지 몇 번이고 확인한 끝에 광일은 다짜고짜 고함부터 내질렀다.
“미친 새끼. 너 돌았어?”
살벌한 기세였지만, 기주는 무표정으로 일관했다. 부는 바람에 머리카락만 사락, 흩어졌다.
위압적으로 다가선 광일이 그에게 으르렁거렸다.
“내가 다 된 밥에 재 뿌리지 말라고 했지. 입원? 열이 삼십 팔도가 돼도 비올란지 나발인지 연주하러 가는 독종이야, 걔. 그 뱀 같은 노인네가 눈치까면 어쩌려고, 새끼야!”
“증빙서류 조작하면 되잖습니까.”
“밥그릇 걷어차고 나갔다가 꼴리는 대로 복귀한 주제에 입은 살았지.”
“…….”
“비밀병기, 비밀병기 해 주니까 만만해?”
권기주는 이쪽 세계에서 무척이나 악명 높았다. 한번 작전에 착수하면 표적의 먼지 한 톨까지 탈탈 털어 아예 재기불능으로 만드는 능력이 탁월했다.
KIS(Korea Intelligence Service)의 비밀병기라고 불릴 정도니 오죽할까.
입사 직후부터 승승장구하던 녀석이니 국내 사건에는 관심이 없을 거라고 여겼지만, 이상하게도 그는 ‘종달새 프로젝트’에 자원했다.
미꾸라지처럼 법망을 빠져나가는 송명환의 꼬리를 잡기 위해 시작된 프로젝트였다. 그의 합류로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될 거라고 판단했지만, 어이없게도 권기주는 2년 전 손을 털고 나갔다.
송명환이 낌새를 차릴 것을 걱정해 다른 놈으로 대체도 못 하고 광일이 혼자서 고군분투했다.
그런데 권기주가 최근 제 결정을 손바닥 뒤집듯이 뒤집은 거다.
책임감이 결여된 인간을 무엇보다 질색하는 광일이 그를 믿을 수 없는 건 당연했다. 아무리 능력이 출중하다고 해도.
화를 삭이려는지 광일이 한숨을 삼켰다.
“무슨 꿍꿍인진 몰라도 한승윤이 송은채 컨디션이 안 좋기에 배웅해서 보냈다고 했어. 그 새끼 말이니까 송 회장은 믿는 눈치고. 너 그거 아니었으면 인마!”
이제는 화를 내는 건지, 타이르는 건지 모를 광일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던 기주가 대뜸 말했다.
“혈압 올릴 시간에 송 회장 마크나 잘해요.”
티타늄 시계를 힐긋 내려다본 기주가 무뚝뚝하게 덧붙였다.
“3분 지났네. 그 노인네 눈치 빠르다며.”
나지막하게 욕설을 내뱉은 광일은 몸을 돌렸다.
천천히 따라가던 기주는 어느 순간 걸음을 멈췄다. 송 회장의 비열한 얼굴과 함께 송 회장의 똥을 치워 준 첫 일이 떠올랐다.
신상덕 3선 의원의 정치 자금을 대 주며 불가능한 사업 계획서를 승인받아 왔던 송명환은 그 당시 갑작스러운 기업 감사를 받게 되며 위기를 맞았다. 여우 같은 신상덕의 꼬리 자르기에 꼼짝없이 당할 판이었다.
그런데 당시 스물여섯 밖에 안 되는 그가 움직였다. 아주 과감하고, 대범했다. 따로 지시하지 않아도 필요한 정보를 미리 입수하고, 동물적인 판단력으로 움직였다. 신상덕의 손자 군 입대 비리, 다른 기업 총수와의 커넥션, 성 관련 이슈까지. 일격에 터뜨렸다.
그 덕에 송명환은 자신을 쓰고 버리려던 신 의원의 정치 생명을 끊는 데 성공했다. 신상덕은 재기불능이 되었고, 송명환은 그 이후 승승장구해 왔다.
‘신수가 훤하군. 난 한 번 내 그늘을 벗어난 물건은 다시 쓰지 않는데. 아직 자네만 한 칼을 못 찾았단 말이지.’
2년 만의 재회 후, 송 회장은 더 탐욕스러워진 눈빛으로 그를 맞았다.
‘내가 이번에 선수를 교체했거든. 한지창 의원이라고.’
이번에는 사업 확장에서 그치지 않을 작정이었다. 한지창 의원은 대선까지 바라볼 수 있는 그릇이었다. 그러니 뒤탈 없는 칼이 절실한 거고.
‘근데 그 밑에 진상이 줄줄이 딸렸어. 내 밑에도 마찬가지고. 자네가 교통정리를 맡아 줬으면 하네. 전처럼, 깔끔하게.’
우위에 있는 말투였지만, 절벽 끝에 서 있는 것도 모르는 노인네였다. 그래도 눈치는 있으니 좀 더 철저했어야 했나.
사실은 광일의 말마따나 스스로도 돈 게 분명하다고 인정했다. 그게 아니고선 대책 없이 구는 행동 따위 하지 않았을 테니까.
그동안 그의 몸은 송은채의 손길을 기억했다. 그 감각만으로 2년간의 공백기를 버텼다.
송은채를 상상만 해도 무슨 약이라도 과다 복용한 것처럼 정신이 흐물거렸다. 그런데도 꿈에서도 감히 함부로 만져 보지 못했다.
그 연약한 여자가 부서져 흩어질까 봐.
그런데 한승윤은 어쩌다 뚝 떨어진 행운을 거머쥐어 놓고 주제도 모르고 그녀를 천치 취급을 해도 유분수가 있지.
감히 누굴 다그치고 불결한 손을 갖다 대. 손가락 마디마디를 꺾어 아예 못 쓰게 만들어도 부족했다.
하지만 그랬다간 송은채가 기절할 수 있으니, 보류한 것뿐.
권기주는 본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빚을 받아 내는 고약한 성질머리를 가졌다.
“사소한 감정.”
귓가에 맴도는 은채의 맑은 목소리와는 다른 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감정이 고작 사소함 따위로 치부할 수 없을 정도라 계획을 짰다.
그리고 지금, 같은 이유로 틀어질 예정이었다.
습관적으로 주머니를 뒤지려던 기주는 재킷이 필요 이상으로 가볍다는 걸 눈치채며 걸음을 멈췄다.
“뭐 해, 안 오고!”
저만치서 광일이 다그치자, 그는 마지못해 뒤따랐다.
무료 급식소가 성공적으로 끝나고, 기분이 고조된 송 회장은 경호팀까지 불러 앉혀 술을 마셨다.
“잔들 채워.”
“예.”
“그동안 수고했다. 일 마무리 되면 보상은 충분히 할 테니까, 조금만 더 고생해.”
“예.”
송 회장이 잔을 비우자, 아랫것들도 차례대로 잔을 비웠다. 얼큰하게 취한 채로 참치회를 한 점 입에 넣은 송 회장은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권 팀장.”
“예.”
“자네가 그 계집애 케어를 잘한 모양이야.”
기주가 시선을 들어 송 회장을 쳐다봤다. 송 회장은 흥에 겨웠다.
“그 까칠한 계집애 컨트롤을 어떻게 한 게야? 비법 좀 전수하지.”
“과찬이십니다.”
“한 상무하고 은채 사이가 좀 돈독해진 거 같더군. 글쎄, 한 상무가 은채 컨디션을 다 물었다니까. 원체 애교가 없는 계집애라 있던 정도 떨어뜨릴까 걱정했는데, 잘됐지. 잘됐어.”
그래도 약혼녀 앞에서 처참하게 굴렀다는 게 적잖이 자존심이 상한 모양일까, 아니면 다른 꿍꿍이속일까.
한승윤의 오만한 표정을 떠올리던 기주는 술잔을 입에 기울였다.
“은채가 결혼식을 앞당겨 달라고 부탁까지 했다고! 얼마나 급했는지 오늘 나한테 전활 다 했다니까.”
들뜬 목소리에 기주의 기다란 눈매가 좁혀졌다.
“한 상무 앞에서 죽상이나 하고 있던 게 말이야! 응? 둘이 아주 손발 척척이야. 남녀 간 한 번 불붙으면 걷잡을 수 없는 게지. 암. 그렇고말고. 그래도 은채 저게 언제 맘을 바꿔 먹을지 모를 일이니, 긴장 풀지 마. 더 단단히 주시하란 말이야.”
기주는 대답 없이 잔을 내려놨다.
계획은 이로써 완벽히 틀어졌다.
결국 그녀가 가만히 있어 주지 않았기에.
* * *
잡념을 잊기 위해 은채는 부지런히 움직였다. 제법 무거운 산세비에리아 화분을 끙, 하고 들어 올려 자리를 옮겼다. 그 뒤로는 이미 그녀가 위치를 바꿔 놓은 화분들이 줄지어 있었다. 이마에 땀방울까지 맺혔다.
그때, 빼곡하게 들어찬 유칼립투스 나뭇잎 사이로 기주가 보였다. 놀라서 엉덩방아를 찧을 뻔했던 은채는 재빨리 일어섰다.
손을 뻗어 나뭇잎을 대충 걷어 낸 기주가 입을 열었다.
“결혼 날짜 앞당겼다면서요.”
욕심이 덕지덕지 붙은 송 회장의 얼굴에 웃음꽃이 만개했었다. 정작 기쁨을 준 송은채는 여기서 궁상을 떨고 있다.
“그런 놈이랑 정말 결혼하고 싶어요?”
그는 뒷걸음질 치는 은채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상관없잖아요. 어차피 결혼 전까지 날 감시하는 역할 아니에요?”
추궁하듯 은채가 그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내 일이 송은채 씨 결혼이랑 관계있다고 답한 적 없습니다.”
“그럼 뭔데요. 빨리하든 말든 당신이랑 무슨 상관이라고.”
은채는 일부러 그의 속을 긁을 수 있는 말만 골라 했다.
그는 선악과 같은 남자였다. 선이 있으면 악이 존재했다.
괜히 라이터 때문에 마음이 시끄러웠지만, 그런 것조차도 용납할 수 없었기에 뿌리를 뽑고 싶었다.
“내가 생각했던 것 중엔 한승윤 같은 건 없었다고 말했을 텐데.”
역시나 전처럼 반응을 보이는 그의 모습을 보며 은채는 정말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다.
“다시 물을게요. 그런 망나니 새끼한테 인생 버릴 거예요? 당신이 하고 싶은 비올라도 버리고?”
한승윤과의 결혼까지 얌전히 있으라더니, 모두가 원하는 결혼을 앞당겼더니 득달같이 쫓아왔다.
왜?
은채가 의문으로 가득한 눈으로 바라봤다.
“2년 전에요.”
“…….”
“왜 날 떠났어요?”
권기주는 눈썹을 휘며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닌 거 같은데요.”
모든 게 미궁인 권기주는 아직도 솔직해질 준비가 안 된 모양이었다.
2년 전과 다를 바가 없이 그의 언행은 불일치하고, 그런 권기주를 그녀는 믿을 수 없었다.
그럼 끊어 내야지.
전처럼 휘둘려서 혼자 만신창이가 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이제 그녀는 그때처럼 순진하지 않았다.
“나, 한승윤 씨랑 잤어요.”
그 순간이었다. 여태 이렇다 할 표정이 없던 기주의 얼굴 근육이 딱딱하게 굳었다.
미간 사이를 우그러뜨리는 권기주를 보며 은채는 솜털이 돋았다.
“……약혼 파티 있던 날 낮에 호텔에서 만났거든요.”
비참했던 그 날을 은채는 로맨틱한 만남으로 포장했다.
“그때 한승윤 씨한테 끌렸는데 그 남잔 나한테 관심이 없어서 불만이었어요. 지금도 마찬가지고요.”
태연히 말하고 싶었지만, 은채의 말끝이 떨렸다. 하지만 미세했다. 걱정할 정도로 바보 같진 않았다.
기주의 눈 밑이 유독 붉어지더니 입꼬리 한쪽이 확 치켜 올라갔다.
그가 낮게 웃었다.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하, 헛웃음까지 뱉었다. 그러더니 유칼립투스를 걷어 내고 있던 팔을 물리며 걸어 나왔다.
“어떻게 감히 그 형편없는 남자한테 끌렸다고 말해요.”
거침없이 발소리를 내며 다가오다가, 한 뼘 앞에서 멈췄다.
갑자기 돌변한 태도에 은채의 눈이 둥그렇게 커졌다.
습윤한 다갈색 눈을 내려다보며, 그는 머릿속으로 잠깐 계산을 했다.
조금만 참으면 되는 일인데. 고작 육십일을 못 버티고 며칠 만에 이 꼴이 됐다.
“은채 씨랑 잔 사람 나밖에 없는데.”
우리, 하나는 인내심이 더럽게 없고, 하나는 거짓말을 더럽게 못 하고.
오합지졸이잖아.
“아는데도, 그런 거짓말은 좀 화나네요.”
기주가 근사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