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화. 숙맥일 줄 알았는데. (7/31)


7화. 숙맥일 줄 알았는데.
2023.03.23.


승윤은 개인적인 용도로만 사용하는 스포츠카를 차고에 대충 쑤셔 박고는 허겁지겁 내렸다.

평일 저녁에 아버지, 한지창의 호출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정해진 퇴근 시간보다 한참 이르게 퇴근해서 룸을 잡고 진탕 놀다가 그야말로 날벼락을 맞은 격이었다.

대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비서, 정민재는 차고까지 잽싸게 달려왔다. 집사처럼 팔에는 셔츠와 타이, 재킷을 걸고.

새틴 소재의 재킷과 화려한 셔츠를 벗어 던진 승윤은 정민재의 팔에서 셔츠를 낚아채 팔을 끼우며 신경질을 냈다.

“공사다망하신 양반이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같이 저녁을 먹겠다고.”

중간중간 욕설까지 섞어 가며 표출하던 짜증이 비서에게 불똥이 튀는 건 순식간의 일이었다.

“이런 건 좀 미리미리 체크해서 보고해야 하는 거 아닌가? 응? 정 비서 능력이 이거밖에 안 돼?”

승윤은 능숙하게 맨 타이의 매듭을 다시 한번 고쳤다. 매사에 완벽을 추구하는 부친의 영향으로, 앞에 서기 전에는 만반의 준비를 하는 버릇이 단단히 들어 있었다.

“죄송합니다. 저도 의원님 만찬이 취소되셨다는 소식을 갑자기 접해서…….”

“그걸 말이라고…… 하, 됐고. 두고 보자고.”

마지막으로 재킷을 확 낚아채며 승윤이 차고를 나갔다.

보수적인 가풍 탓에 음악 하나도 취향껏 들을 수 없었다.

뒤에서 몰래몰래 즐기는 것에는 도가 틀 수밖에. 승윤은 클럽에서 묻혀 온 퇴폐의 냄새를 향수를 뿌려 감추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와중에도 바지 허리선 밖으로 튀어나온 셔츠를 안으로 구겨 넣는 것은 잊지 않았다.

소식 없는 아들 때문에 전전긍긍하던 모친, 전수경은 승윤을 보자마자 반색했다.

“승윤이 왔네요.”

그 말에 이제 막 수저를 들던 한지창이 마뜩잖은 얼굴을 들었다. 전수경은 넉살 좋게 목덜미를 훑으며 들어서는 승윤의 어깨를 매만졌다.

“왜 이렇게 늦었어. 회사 일을 너 혼자 다 하니?”

“회의가 연달아 있어서.”

승윤은 말과 함께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한지창은 특유의 근엄한 눈빛으로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한 마디를 남겼다.

“회사일 하는 놈 향수가 독하다. 바꿔라.”

승윤의 얼굴이 잠시 굳어졌지만, 금세 풀었다.

“네.”

“지금 그깟 향수가 대수예요?”

전수경이 볼멘소리로 끼어들었다.

“디원그룹 기사가 오늘 아침에만 세 군데서 났어요.”

“곧 사돈 될 텐데, 어차피 불가피한 소문이야.”

정략결혼을 두고 송 회장에 대해 이런저런 말이 생겼다.

그런 의혹 정도는 덮으면 그만이었다. 무엇보다, 이번 혼사를 준비하면서 그 정도 위험 부담은 안고 강행하겠다는 판단이 있었다. 그보다는 다른 게 문제지.

“남의 눈을 의식하는 거라면 예비부부 관계부터 개선해야지.”

마침 시장하던 차에 밥이나 한술 뜨려던 승윤은 그 말에 뻣뻣하게 굳었다. 밥이 아니라 모래를 씹는 기분이었다.

“송 회장, 그 양반이 워낙 감추는 게 많은 양반이다. 그 양반 사업 자금이 송은채 모친한테서 나왔다는 얘기가 있어.”

“무슨 말도 안 되는…… 그랬으면 그렇게 쥐 죽은 듯이 납작 엎드릴 리가…….”

승윤이 말도 안 된다는 듯, 은근히 그녀를 업신여기는 말투로 말하자 한지창이 엄격한 눈으로 쳐다봤다. 그러자 승윤은 곧장 입을 다물었다.

“그게 아니더라도 송 회장한테 자식은 그 애 하나야. 마음먹고 결혼 안 하겠다고 시위라도 하면 차일피일 미뤄지는 건 시간문제다. 비위 맞추는 시늉이라도 해.”

“제가 뭐 그렇게 흠이 있다고…….”

승윤은 능구렁이처럼 빠져나가려 했지만, 한지창은 넘어가지 않았다.

“주변 여자 정리부터 해. 구린내 풀풀 풍기지 말고.”

“…….”

“네가 만나고 다니는 여자랑은 질적으로 다르다, 이 말이야. 까탈스럽지도 않고 그만하면 됐다.”

승윤은 그때 입맛이 그만 뚝 떨어졌다. 이 혼사에서 철저히 계산기를 두드리던 부친이었다. 그런데도 송은채가 꽤 마음에 찬 모양이었다. 예외적으로.

다르긴 달랐다. 처음부터 너한텐 기대조차 품은 것이 없다는 듯한 초연한 태도에서부터 알아봤다. 뭣보다, 여자 문제로 무안을 주고 약점을 잡아 멸시해도 그 품위에 한 점 흐트러짐이 없었다.

같은 조건의 세상 물정 모르는 공주과는 수도 없이 많았다. 간혹 본인은 남다른 배경의 특혜 없이 살아왔다는 프라이드를 가진 여자도 있었지만, 대개 착각에 불과했다.

송은채는 둘 다 아니었다. 산전수전 다 겪은 공주랄까. 한 번도 가져본 적 없는 양심의 가책을 건드렸다. 근데 또 이상하게 못 본 척하고 싶은. 하여간에 이상한 여자다.

게다가 그 옆에 붙어 있는 경호원의 존재도 심히 거슬렸다.

호텔에서의 모욕적인 일은 아무리 은채 쪽에서 지시 한 일이었어도 일개 경호원 주제에 선을 넘은 사건이었다.

복잡한 여자관계에 대한 송 회장의 경고일지도 모른다고 판단하여 넘어갔지만, 내내 찝찝했다.

저녁 식사에서 얻은 거라고는 불쾌감뿐이었다. 승윤은 불편한 위장을 달래며 나와서 애꿎은 정 비서를 불러 세웠다.

“일개 경호원 주제에 왜 그렇게 건방지냐고.”

“네?”

“이 자식에 대해서 알아 와.”

정 비서는 권기주라는 이름이 박힌 명함을 얼떨결에 받아 들었다.

“디원에는 언제 입사했는지, 가족관계는 어떻게 되는지, 뭘 해 먹고 사는 집안인지 알아낼 수 있는 건 다. 전부. 알아들어?”

승윤은 은채를 호위하며 사라지던 뒷모습을 떠올리며 이를 갈았다.

* * *

외출 준비를 마친 후에, 은채는 문고리 잡기를 잠깐 망설였다.

손을 뻗었다가, 다시 내려놓았고 발을 들었다가 물리기도 했다. 그런다고 해서 있었던 일이 없어지는 것도 아닌데. 은채는 실소를 한 뒤에 방문을 열고, 계단을 내려갔다.

권기주는 현관 앞에 서 있었다.

내심 궁금했었다. 세컨드라도 할 테면 하라는 선택지에 어떤 얼굴일지, 어떤 눈빛일지.

권기주답지 않게 핑계를 대고 자리를 피했을 수도 있겠다는 짐작도 했었다.

그랬는데, 또 멀쩡했다. 아무렇지 않게 묵례까지 하고.

은채는 고개를 끄덕여 그 인사를 받았다. 배려 없는 제안이 권기주에게 상처조차 될 수 없는 것처럼, 아무렇지 않게.

그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밖으로 현관문 밖으로 나왔다. 정원을 가로지르고, 대문 앞에 정차한 차량까지 가는 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은채는 익숙하게 차량 뒷좌석에 탔다.

“MK호텔로 가요.”

운전석에 타긴 했으나 행선지를 모르는 탓에 핸들만 잡고 있는 권기주에게 은채가 말했다. 룸미러를 통해 그의 눈길이 데구루루, 굴러왔다.

기주는 이윽고 가볍게 웃더니 시동을 걸고, 액셀러레이터를 느리게 짓밟았다.

차량이 도로에 진입한 후 처음 신호에 걸렸을 때, 그는 상의 안주머니를 더듬었다.

그러고는 껌을 하나 꺼내 물고 질겅질겅 씹었다. 소리 없이 턱과 볼만 들썩였다. 도로 상황을 주시하는 무심한 눈이 룸미러를 통해 뒤를 확인하는 일은 없었다.

이후 몇 번 더 신호에 정차한 끝에 MK호텔에 도착했다. 그는 주차장에서부터 로비까지 태연하게 에스코트했다.

로비층에서 몇 걸음 앞서 걷던 은채가 돌연 멈추어 섰다. 두 걸음쯤 뒤에서 기주도 발을 멈춰 세웠다.

그녀는 몸을 돌려 쳐다봤다. 기주가 느리게 껌을 씹으며 시선을 내렸다. 뭐 필요한 거라도 있냐는 듯이.

“그만 따라와요.”

“…….”

“한승윤이 권기주 씨 안 좋아하니까 눈에 띄지 말란 뜻이야.”

껌을 씹던 그는 그 말에 피식 웃었다. 은채는 개의치 않고 돌아섰다. 그대로 엘리베이터가 있는 방향으로 가려다 말고, 문득 돌아봤다.

“아, 기다리지 마요.”

그 말을 끝으로 은채는 혼자서 엘리베이터에 탔다. 열린 문을 사이에 두고, 서로를 응시했다. 무덤덤하게 있던 그는 문이 닫히기 직전, 목덜미를 손으로 훑었다. 은채도 그걸 알아차렸지만, 문은 그대로 닫혀 버렸다.

* * *

기주는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자 눈을 들었다. 은채가 탄 엘리베이터가 객실 층에 멈추는 걸 확인했다. 재킷 한쪽을 젖혀,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그 숫자를 관망했다. 그런 후에 몸을 돌려, 출입구 쪽으로 걸었다.

프런트 직원이 그를 알아봤는지 엉거주춤 눈인사를 해 왔다. 대강 고개를 끄덕이며 응답해 주고는, 호텔 밖으로 나왔다. 호텔의 조명이 밤을 억지로 밝히고 있었다.

도로를 오가던 차들이 점차 줄어들고, 새벽의 찬 공기가 아스라이 퍼지고, 예보에도 없던 비가 퍼붓는 동안 그는 우두커니 서 있었다. 중간에 습관적으로 상의 안주머니를 더듬어 라이터를 찾기도 했지만 그뿐이었다.

일출이 뜨기 직전에, 기주는 문득 생각했다. 제가 여자에게 더는 존재감이 없다고.

송은채가 품은 감정은 필사적인 미움이나 묵은 원망이어야 했다.

그랬으면 핀트가 나가는 일은 없었을 텐데.

빗물과 함께 내리친 상실감으로 몸이 차가워졌다.

기주는 헛웃음을 흘리며, 비에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씹던 껌에서는 단물이 다 빠졌다.

* * *

탁-.

고동색 문을 밀고 들어온 승윤이 뻐근한 목을 주무르며 침대에 걸터앉아 시선을 들었다.

태블릿 PC와 노트북이 자리한 실버톤 테이블, 그 위를 너저분히 덮은 서류, 그보다 더 위로 올라가 천장으로 고개를 틀면 며칠 전 눈이 부시다고 깨부순 후 바뀌어 있는 채도 낮은 커다란 조명이 보였다.

확실히 호텔 방보단 익숙한 제 방이었지만, 어쩐지 목이 뻐근한 불편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못다 한 잠을 푹 자기 위해 오전 일정을 오후로 미뤄 두고 일부러 집에 왔거늘, 어째 피곤함은 더 늘었다.

‘피곤한데 쉬다 가죠.’

이게 다 그 여자 때문이다.

단정한 목소리가 떠오른 승윤이 눈썹을 구기며 몸을 뒤로 눕혔다.

어제, 식사하는 내내 입을 잠가 놓던 송은채는 그 말을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단 한 번도 시선을 마주치지 않던 눈동자가 잠깐 맞닿았다. 그리고 차분히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반면 그는 좀 전의 은채처럼 입을 다물었다. 그들이 있는 장소는 호텔 레스토랑이었기에 무슨 뜻이냐고 묻지도 않았다.

한동안 적막이 흘러도 그녀는 가만히 기다렸다. 눈을 아래로 깔고 있어, 새하얀 피부에 속눈썹이 펼쳐져 있었다. 살며시 올린 가녀린 손으로 새카만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겼다.

유혹하는 주제에 도도했다. 사실은 거절당할 생각은 조금도 안 하는 것 같았다. 그가 당연하게 받아들일 줄 안다는 것처럼 질문하지 않았으니까. 그녀의 말은 통보나 다름없었다.

평소라면 본인이 꺼낼 말이라고 생각했지만 승윤은 그녀의 뜻대로 했다.

결국엔 전략적인 관계에 순응하는 거겠지. 그러니 결혼 날짜도 당기고, 어설프게나마 이런 유혹도 하고.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로열 스위트 룸에 들어서자마자 정장 재킷을 벗었다.

‘숙맥일 줄 알았는데, 노력은 가상하네요.’

되지도 않는 반항보단 꼬리라도 흔들며 잘 보이는 쪽을 선택하는 게 맞다.

승윤은 응접실을 거침없이 지나는 그녀의 등 뒤에 대고 조소를 흘렸다. 승윤과 마찬가지로 재킷을 벗어 팔에 걸친 은채가 천천히 뒤를 돌았다.

‘전 이쪽 방 쓸게요.’

그녀가 제 뒤를 턱짓하며 눈을 맞춰 왔다.

이해 못 한 승윤이 한쪽 눈썹을 세우자, 당연한 듯 말을 이었다.

‘심심하면 만나는 여자 부르든지 해요. 상관없어요.’

군더더기 없는 동작으로 몸을 돌린 은채가 멈칫하며 고개를 틀었다.

‘아, 나 잠귀 밝으니까 되도록 얌전하게 놀아 줬으면 해요.’

은채는 그대로 승윤을 두고 걸음을 옮겼다.

승윤이 재빨리 그녀를 따라가려다 발을 멈췄다. 그녀에게 버림받은 모양새가 돼 버렸다. 착각하고 있던 걸 엄청나게 원했던 것처럼.

……허?

어이가 없고, 황당해 어금니에 힘을 바득 주고 제자리를 빙빙 돌다가 결국 그녀가 들어간 방의 맞은편 침실로 갔다.

막상 상황이 들이닥치니 자존심이 있어 튕기는 건가. 여기까지 왔으니 내가 먼저 굽히고 다가가는 걸 예상한 건가.

그는 코웃음 쳤다. 결국 방을 넘는 건 송은채라고 생각하며 기다렸다.

그런데 몇 시간이 흘러도 그녀는 코빼기도 비추지 않았다. 하다못해 응접실을 들락날락하지도 않았다.

이게, 지금 뭐 하자는 거지?

처음엔 황당했고, 시간이 흐르자 머리에 피가 쏠렸다.

일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굳이 되짚어 보면, 그녀는 쉬다 가자고 했지, 다른 말은 안 했다. 착각하게 만들었다고 해도 문제였다. 따지기엔 꼴이 우스워진다.

송은채가 아무렇지 않게, 만나는 여자를 부르라는 것처럼 저도 송은채를 바란 적도 없기에.

그래서 처음엔 그녀의 말대로 보란 듯이 해 주려다가 그 상황도 그녀의 뜻대로 굴러가는 것 같아 그만뒀다.

그냥 혼자 두고 나가려고도 했지만, 평정심을 보여 주기 위해 조금 더 버텼다. 그러다 어쩌다 보니 뜬 눈으로 하루를 보냈고, 아침이 되어서는 기사를 불러 집까지 보내 주는 매너도 보였다.

누가 봐도 하룻밤을 함께 보냈지만, 그는 수면조차 제대로 취하지 못했다.

“기분이 참…….”

누워서 시계를 풀던 승윤은 손에 들린 티타늄 시계를 벽장에 던졌다.

쿵-!

“엿 같네.”

벽장에 놓인 오브제가 바닥으로 후두둑 떨어지는 모습을 보던 승윤은 욕을 짓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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