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세컨드.
(8/31)
8화. 세컨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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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세컨드.
2023.03.27.
날렵한 까만 차가 도로 위를 유유히 달렸다.
별다를 거 없이 오히려 한산한 교통상황이지만 핸들을 쥐고 있는 기주는 후방을 계속 주의했다.
이른 오전부터 웬 날파리가 들러붙었다. 나름 티 나지 않게 미행한다지만, 허술한 걸 보니 정부에서 보낸 건 아니었다.
상대가 원하는 게 정보인지 의심의 확증인지를 모르니 지금 상황으로선 역으로 잡아서 추궁하면 예상치 못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었다.
기주는 백미러에서 눈을 떼며 어느 빌라 주차장으로 핸들을 돌렸다.
탁-.
유려한 동작으로 운전석에서 내린 그는 정장 재킷 단추를 끄르며 빌라 계단을 올랐다. 이윽고 지문인식으로 문을 열고 컴컴한 집 안으로 들어갔다.
언뜻 보면 평범해 보이는 집 안은 생활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주로 송 회장의 저택에 머무니 당연했다. 필요한 가구만 놓여 있지만, 그것마저도 사용하지 않는지 조그만 흠집조차 없었다.
넓은 창을 꽉 막은 커튼 앞에 선 기주는 손끝으로 커튼을 옆으로 살짝 젖히며 눈을 내리깔았다.
그렇게 잠시 밖의 상황을 살펴본 그는 옆 벽면의 매립형 콘센트를 들어 올렸다.
딸칵, 소리가 나며 콘센트 부위가 위로 올려졌고, 언뜻 보기엔 아무것도 없는 벽을 누르자 직사각형의 모양대로 스르르 들어갔다. 그와 동시에 거실 한구석 바닥이 슬라이드로 열리며 지하를 통하는 계단이 나타났다.
기주가 계단을 한 칸씩 내려갈 때마다 어둑한 조명이 머리 위로 켜졌다.
빛이 모여 금세 환해진 지하는 10평 남짓한 공간이었다. 그래도 어느 정도 가구가 존재했던 위 공간과는 다르게 길쭉한 책상만이 놓여 듀얼 모니터와 데스크톱이 그 위를 차지했다.
데스크톱의 전원을 켠 기주는 마우스를 쥐며 한 손으로는 책상을 짚어 상체를 기울였다. 커다란 그림자로 덮인 모니터 위로 송 회장의 사진과 암호화된 정보들이 하나둘 뜨기 시작하다가 이내 사라졌다.
기주는 안에 남은 데이터를 남김없이 지워 저장장치를 초기화하고는 상체를 세웠다. 이제 대충 머무는 척, 위에서 시간을 때우는 것만 남았다.
그렇게 다시 계단을 오르려 몸을 움직이는데 기다란 눈매 끝에 뭐가 걸렸다.
고개를 비튼 기주의 검은 동공 안에 사진 하나가 비쳤다. 그는 이내 책상 위에 놓인 사진을 손에 들었다.
놀이기구를 배경으로 남자아이를 가운데에 두고 선 부부가 아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사진 표면이 바래서 얼굴이 잘 안 보이지만 분명 즐겁게 웃고 있었다.
“…….”
빤히 응시하던 기주는 책상 서랍을 열어 일회용 라이터를 꺼내 사진에 불을 붙였다. 금세 일그러지며 타오르는 사진은 바닥에 놓인 스테인리스 통에 툭 떨어졌다.
그 순간 재킷 안에서 짤막한 진동을 느낀 그가 핸드폰을 꺼냈다. 지글지글 우그러드는 새카만 잿더미를 향하던 시선이 핸드폰 화면으로 옮겨갔다.
「한승윤 쪽을 통해 방금 집에 귀가하셨습니다.」
그는 은채의 일정을 보고하는 메시지를 사진보다 더 길게 쳐다보다가 턱을 올려 얼굴을 세웠다.
타닥타닥. 타들어 가는 소리가 지하를 울렸다.
* * *
합주를 못 나간 대신 집에서 비올라를 켠 은채는 밥 먹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연습에 집중했다. 이미 딱딱해진 굳은살에 미세한 통증이 느껴질 정도로 시간 가는 줄 모르다가 결국엔 저녁은 거르기까지 했다.
은채는 잔머리에 촘촘하게 묻은 땀을 손등으로 훔치며 침대에 털썩 앉았다.
제 곁에 아무도 남지 않은 지금. 유일하게 제 뜻대로 할 수 있는 건 비올라뿐이었다.
그래서 비올라를 잡으면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고, 그게 좋았다. 눈앞에 보이는 게 없어지고 귓가엔 비올라 소리만 들려오니까.
가녀린 손을 들어 주먹을 쥐었다 편 그녀는 비올라를 정리했다.
똑똑-.
그 순간 둔탁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은채는 멈칫하며 섰다. 순간 권기주가 떠올랐지만, 오늘 그녀를 따라다녔던 건 다른 경호원이었다.
한승윤과 호텔에서 하루를 보냈으니 그도 떨어져 나간 게 분명했다. 결국엔 진심이었어도 알량한 마음이었을 거다. 처음 시작했을 때처럼.
은채는 작게 숨을 내쉬며 화장대 위에 놓인 집게 머리핀을 손에 들었다.
사용인들은 보통 노크 후 용건을 말하곤 하는데 아무 말도 들려오지 않았다.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아 이상했다.
“들어갈게요.”
누군지 모르고 들어오라고 말하려던 은채는 먼저 들리는 낮은 목소리에 움찔했다.
곧이어 문이 열리더니 기주가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등 뒤로 손을 뻗어 문을 밀어 닫았다.
지켜보던 은채는 집게 머리핀으로 머리를 틀어 올리며 그를 향해 말했다.
“용건이 뭐예요?”
비올라 케이스를 내려다보다가 은채에게로 시선을 올린 기주가 천천히 입을 뗐다.
“언제 왔어요.”
그 말에 은채는 어이없다는 듯 허, 웃으며 눈썹을 찌푸렸다.
“다 알면서. 내가 오늘 뭘 먹고, 뭘 했는지도 알잖아요. 모르는 게 없을 텐데.”
“그러네요. 모르는 게 없어요.”
잠자코 있던 기주가 다시 입을 뗐다.
그는 한쪽 손으로 옆머리를 눌러 올리며 고개를 기울였다.
“나에 대한 은채 씨 마음까지.”
“…….”
“아주 잘, 알았어요. 이제.”
말머리를 스타카토처럼 띄워 말하는 그의 목소리에 은채는 얼굴을 끄덕였다.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미련 같은 건 남지 않았다고 일일이 설명해 주지 않아도 되니까.”
“네.”
당연하듯 대답한 기주가 연이어 말했다.
“만나요, 나랑.”
상황과 전혀 들어맞지 않은 내용이었다. 잘못 들은 듯 은채가 눈을 끔뻑 감았다 떴다.
그녀의 반응에도 그는 여전했다.
“대답 기다릴 필요 없죠? 먼저 그러자고 했으니까.”
“만나자고 한 적 없는데요. 할 거면 세컨드나 하라 그랬지.”
은채가 미간을 찡그리며 뒤를 돌았다. 그런데 그때 그녀의 가느다란 손목이 커다란 손아귀에 잡히며 몸이 앞으로 휙 돌아갔다. 순식간에 그의 코앞에 선 은채가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한 손으로는 은채의 손목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그녀의 조그만 턱을 쥐어 올린 권기주가 상체를 기울였다.
“그러니까 하자고.”
“…….”
“나랑 시작하는 거면 그게 뭐든.”
은채의 동공에 당황이 서렸다.
그 권기주가 세컨드나 하라는 제안을 받을 리 없다고 판단했는데.
저도 모르게 그에게 잡힌 턱에 힘이 들어간 은채는 그의 손을 옆으로 치워 버리며 뒤로 한걸음 물러섰다.
“그래요.”
단조로운 목소리에 기주가 그녀와 시선을 부딪쳤다.
그의 눈을 피하지 않은 은채는 숨김없는 생각을 뱉어 냈다.
“권기주 씨는 나한테 세컨드가 적합하죠. 처음부터 이랬어야 했는데.”
똑똑-.
은채의 말끝에 노크 소리가 따라붙었다. 뒤이어 가사도우미의 말이 방문 너머에서 들려왔다.
“아가씨, 회장님께서 찾으세요.”
기주를 힐긋 쳐다본 은채는 그를 지나쳐 가며 속삭였다.
“먼저 나갈 테니까 알아서 나와요.”
혼자 있었던 듯 문을 열고 나온 은채는 가사도우미의 뒤를 따라 계단을 내려갔다. 제 방에 있을 그가 신경 쓰여 뒤를 돌아보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관계를 시작하는 거면 뭐든 하자던 권기주는 진지했다. 이토록 그의 감정에 휩싸인 느낌은 오랜만이었다. 그의 속셈을 종잡을 수가 없었다. 제안을 가뿐히 받아들이면 휘둘릴 거라는 계산이었을지도.
확실히 2년 만에 그가 나타나고 나선 내내 침착하지 못했다. 예상치 못한 일에 손쓸 방법 없이 당한 거나 마찬가지니까.
그렇게 예고도 없이 또 제 인생을 비집고 들어온 권기주를, 이번에도 받아들였다. 다른 방식으로, 다른 결말을 그리며.
은채는 숨을 작게 내뱉으며 눈을 깜빡였다. 시야가 캄캄해졌다가 밝아졌다.
누군가를 믿을 마음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그가 진심인 걸 확인한 순간 흔들렸을 수도 있었다. 그런데 그런 믿음 따위 그가 부수고 갔으니 남은 것도 없다.
그러면 알려 줘야지. 자존심 다 버리고 와도 고작 내 인생에 그 정도일 뿐이라고.
그때 내가 얼마나 비참했는지. 네가 얼마나 잔인한 짓을 벌였는지.
가지기 위해서 애가 닳고 닳다가 결국 갖지 못하고 상실감만이 남도록.
뼈가 저리고 살이 떨리는 비참을, 권기주도 겪기를.
* * *
다음날 오전. 은채는 학교로 가기 위해 집을 나왔다.
약혼 파티 때 일로 한승윤과의 약속이 아니면 움직이기가 어려웠는데, 어젯밤 송 회장이 연주회 연습은 어떻게 돼 가는지 먼저 물어보더니 새 비올라를 사들였다며 뭣 모르는 행동까지 보였다.
평소엔 관심도 없다가 결혼하기로 한 집안에서 클래식에 관심이 많으니 이젠 합주 연습은 두 손 들고 환영인 모양이었다. 무슨 이유든 방해하려 들지 않으니 그녀는 좋았다.
계단을 내려가니 앞에 대기하고 있던 기주가 차 문을 열었다.
뒷좌석에 올라탄 은채는 앞 창문으로 시선을 던져, 보닛 쪽으로 돌아서 조수석으로 가는 기주를 응시했다.
세컨드로 만나겠다고 한 게 바로 어제였다.
하루밖에 지나지 않아서 그런지 그와의 부적절한 관계가 정말 성립이 된 건지 실감 나지 않았다.
기주가 조수석에 올라탄 순간 은채는 턱을 괴며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러다 잠깐 시선을 앞으로 한 순간 룸미러를 통해 그와 눈이 마주쳤다.
숨을 집어삼킨 은채는 저도 모르게 먼저 시선을 돌렸다.
언제부터 보고 있던 거지.
우연일까. 우연이라기엔 너무 정확했다.
진짜 비밀연애 하는 것도 아니고. 아니, 비밀연애가 맞나. 상대방 처지에선 맞을 터다.
운전기사를 의식하며 다시 힐끔 눈을 드는데 그는 여전히 이쪽을 보고 있었다.
은채는 찌릿한 촉감이 얼굴을 기어 다니는 것 같아, 뺨을 매만지며 고개를 돌렸다.
곧이어 학교에 도착했고, 차에서 내린 그는 비올라를 대신 들고 은채와 함께 아트홀까지 같이 갔다.
굳이 아트홀까지 온 그가 이해되지 않아 하드 케이스를 빼앗듯이 건네받은 은채는 바로 등을 돌렸다.
그녀가 경호원을 대동하고 다닌다는 건 이미 학교에 소문이 파다해서, 팀원들은 익숙하다는 듯 각자 자리를 잡았지만, 팀원들의 얼굴을 뇌리에 새기듯 쳐다보며 돌아서는 기주의 뒷모습에 무수한 시선들이 박혀 들었다.
2년 만이어도 몇몇 합주자들은 자신을 기억하는 모양이었다. 남의 관심 따위 대수롭지 않은 기주는 밖으로 나왔다.
그는 곧이어 문틈으로 흘러나오는 악기 소리를 감상했다.
정확히는 송은채의 목소리 같은 비올라에 귀를 기울였다.
‘바이올린이 미, 라, 레, 솔이라면 비올라는 라, 레, 솔, 도의 현으로 이루어져 있어요. 음역이 중간인데, 잘 들어 보면 되게 부드러워요. 마치 엄마 품처럼 따뜻하고.’
비올라 선율을 타고 쏘아보는 송은채의 얼굴이 눈앞에서 환영처럼 일렁였다.
‘그럼 전처럼 당신이랑 뒹굴까?’
그 말을 할 때의 송은채는 눈 밑이 유독 붉었다.
가시를 세운 고슴도치 같기도 하고 잔뜩 웅크린 고양이 같기도 하고. 뭐가 됐든 죄다 연약했다. 그래 놓고선 아무렇지도 않게 세컨드나 하라며 제안했다.
미련 한 줌 없는 듯. 미움마저도 다 소갈 돼 버린 듯이. 권기주 같은 건 깡그리 잊었다는 듯이.
그것이 바라던 바가 아니었나.
무엇이 문제인지 그는 머리에 묵직한 타격이 있었다.
미움받는 것조차 안 되는 건, 아무것도 아니게 돼 버린 건, 그건.
눈매 끝을 조인 기주는 미간을 문질렀다.
왜.
막상 잊힌 존재가 되었다는 것을 확인하니 충격이라도 받았나.
기주는 제가 한심해서 조소를 했다. 차가운 얼굴을 옆으로 돌려, 아트홀 입구를 쳐다보다가 팔짱을 끼고 벽에 등을 기대 눈을 감았다.
귓가에는 여전히 은채의 소리가 들려왔다.
팔짱을 끼고 벽에 등을 기댄 기주는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