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화. 별수 있나. (9/31)


9화. 별수 있나.
2023.03.30.


그때, 물 흐르듯 하던 곡조가 삑 어긋났다.

당황한 나머지, 은채는 입구를 쳐다봤다.

수십 번 연습한 곡이었다. 실수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왜.

이를 갈 듯 이로 입술을 짓이긴 은채는 활을 고쳐 잡았다.

실수가 신경 쓰인 그녀는 연습이 다 끝나고도 남아서 조금 더 하고 나왔다.

그런데 멀지 않은 곳에서 같이 합주했던 친구 미래와 기주가 같이 있는 모습이 보였다.

미래가 뭐라 말을 하고 있고 가만히 듣고 있던 기주가 어느 순간 시선을 올려, 그들을 빤히 바라보던 은채를 쳐다봤다. 그러자 미래도 은채를 발견하고, 그녀에게로 다가왔다.

기주에게 힐긋 눈짓을 준 은채가 미래에게 말을 걸었다.

“왜. 저 사람이 뭐 꼬치꼬치 물어봤어?”

“어? 아니. 그냥 요즘 너 연습 시간 어떻게 되냐고만 묻던데. 근데 저 사람 되게 오랜만에 보는 거 같다. 나한테 말 거니까 애들이 엄청 부러워하면서 간 거 알아?”

미래가 키득키득 웃자, 은채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혀를 차며 차갑게 일갈했다.

“다음에 또 말 걸면 무시해. 그때도 또 내 일정 같은 거 물어볼 테니까.”

* * *

일 년 늦게 입학해 유일하게 나이가 같은 미래는 다른 팀원보다 은채와 좀 더 친한 편이었다. 그래서 그녀가 기분 나쁜 상황일 거라는 걸 바로 눈치채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른 얘깃거리를 꺼냈다.

“근데 너 단체 메시지 확인 안 했지? 가희가 포천 가자고 했는데. 이모부가 스키장 개장했대.”

“연주회 얼마나 남았다고.”

은채가 말도 안 된다는 듯 대꾸하자, 미래도 안 다는 듯 수긍하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래도 졸업 전에는 놀러 가자고 그랬었잖아. 애들은 다 가는 분위기야. 우리 제대로 된 엠티도 없었고 맨날 연습실이나 여기에서만 박혀 있었는데.”

합주 끝나면 술 먹으러 가는 경우는 종종 있었는데 은채는 주로 빠지는 쪽이었다. 게다가 엠티 같은 분위기의 여행은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일 테니 참석하는 편이 맞았다.

잠시 고민하던 은채는 핸드폰을 꺼내 보였다.

“알겠어. 메시지 확인하고 답 보낼게.”

“가는 거지?”

“그럼.”

재차 묻던 미래는 은채가 웃으며 답하자, 손을 흔들며 사라졌다. 같이 손을 흔들어 주던 은채는 미래와 얘기하고 있던 곳에서 기다리는 기주에게로 갔다.

“기분 나쁘게 내 뒷조사하는 거 언제 그만둘 거예요? 아. 회장님 지시라 어쩔 수 없나?”

은채는 한 발짝 더 다가가, 자신을 지그시 내려다보는 기주를 향해 피식 웃었다.

“여태까지 나한테 무슨 감정이라도 있는 척한 것도 사실은 시켜서 한 건 아닌가?”

비꼬는 거지만 진심이기도 한 말에 기주가 입을 달싹이다가 다물었다. 그러고는 잠자코 있다가 눈가를 설핏 찡그리며 다시 입을 뗐다.

“그냥 내가 궁금해서 물어본 건데요. 개인적으로.”

그렇게까지 생각할 줄 몰랐던 듯, ‘개인적으로’라는 말이 뒤늦게 딸려 왔다.

순간 제가 오해했다는 생각에 할 말을 잃었다가, 더 어이가 없어진 은채는 그를 비켜 지나가 차로 향했다.

“굳이 왜 내 친구한테?”

“직접 물어봐도 안 알려 주잖아요.”

은채는 어깨가 가벼워지는 걸 느끼고 뒤를 돌아봤다. 그녀를 뒤따라 선 기주가 비올라 케이스를 들고 있었다.

다시 고개를 앞으로 돌린 은채는 이해 안 된다는 듯 물었다.

“애초에 그걸 왜 궁금해하는데요?”

“만나는 사람에 대한 건 누구나 그런 거 아닌가.”

기주가 차 문을 열고, 비올라 케이스를 먼저 밀어 넣었다. 그의 옆모습을 힐긋 쳐다본 은채는 좌석에 올라타며 읊조렸다.

“난 권기주 씨 뭐 하는지 안 궁금한데.”

문을 닫으려다 말고 다소곳이 앉은 은채에게로 시선을 떨어뜨린 기주가 차 지붕을 짚었다. 기다란 손가락이 지붕 표면을 툭툭 두드렸다.

“세컨드니까, 별수 있나.”

낮은 목소리에 은채가 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기주는 상체를 푹 숙여 그녀와 얼굴을 가까이했다.

“괜찮아요. 나만 궁금해하면 되니까.”

그의 손이 귀밑 목덜미에 닿은 것을 느낀 은채는 눈을 가늘게 떨며 다급히 운전석을 확인했다.

화장실을 갔는지 운전기사는 보이지 않았지만, 여긴 교내였다. 누군가 밖에서 볼 수도 있는 상황에 목덜미와 옆통수를 콱 감싼 손이 앞으로 당겼다.

그가 평소 사용하는 무거운 향수 냄새가 코끝을 간질였다. 은채는 입술이 저렸다. 그런 은채의 입술을 응시하던 눈동자가 위로 도르르 올라왔다.

“티 내지 말아야 하는 건 좀 별로네요.”

아쉬운 듯 떨어져 나간 기주는 넥타이를 고쳐 잡으며 침착하게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은채를 잠깐 지켜보더니, 이내 문을 닫았다.

그가 조수석에 올라탈 때까지 아주 잠깐 혼자가 될 수 있었던 은채는 막힌 숨이 이제야 뚫린 것처럼 후, 내쉬었다.

그러고는 차 시트에 몸을 기대는데, 목덜미와 귓불이 뭐에 물린 것처럼 뜨겁게 간지러웠다. 은채는 결국 연습할 때 묶었던 머리를 풀어 버리며 눈을 감았다.

* * *

종이를 와락 구기는 소리가 사무실을 울렸다.

승윤의 앞에 선 비서가 그의 눈치를 보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손안에 든 종이를 구기다 못해 분을 못 이겨 종이를 부욱 찢어 버린 승윤은 갈기갈기 찢긴 그것을 비서의 몸에 던져 버렸다.

아무리 디원 그룹일지언정 고작 경호원 하나 캐 오라는데 고작 가져온 정보가 명함에도 적혀 있는 수준의 형편없는 것들뿐이었다.

가족관계조차 적혀 있지 않은 이따위 보고서를 받아 줄 리 없단 걸 잘 알 텐데도 비서가 하는 말은 똑같았다.

권기주를 조사할 수 있는 기록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고.

회사에 기재 된 정보와 미행으로 인한 추측만 나열된 서류로는 약점은커녕 조금이라도 켕기는 점을 찾을 수 없었다.

“그게 말이 돼?”

“보고가 앞당겨져서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시간을 조금 더 주시면 미행을 더 붙여 알아 오겠습니다.”

“됐고, 내일 송은채랑 약속 잡아 둬.”

“네.”

비서가 잠시 나가자 승윤은 머리칼을 신경질적으로 쓸어 올리며 허탈하게 웃었다.

그럼 뭐 하늘에서 뚝 떨어져 나온 새낀가.

분간도 못 하고 시건방져서 뭐 하는 놈인지 알아보려다가 화만 더 뻗쳤다.

어차피 별거 아닌 놈 아닌가. 제까짓 게.

“전무님. 내일 송은채 씨 포천에 스케줄이 있어서 다녀오면 연락 주시겠다고 합니다.”

다시 들어온 비서가 또 마음에 들지 않는 답을 들고 오자, 승윤은 인상을 찌푸리며 나가라고 손을 털었다.

* * *

한승윤과의 사이에서 문제를 내지 않고, 순탄하게 진행되고 있다고 여긴 송 회장은 스키장 외박에 태클을 걸지 않았다. 물론 예외 하지 않고 경호원은 존재했지만, 이번엔 기주가 아니라 다른 경호원이 은채를 따라나섰다.

잠깐 눈으로 기주를 찾은 은채는 그가 따라오지 않는 것을 깨달았다.

경호 외에 다른 일도 하는 건가. 가는 길에 다시금 기주의 부재를 생각하던 은채는 스키장에 도착해, 경호원에게 안 보이는 곳에 있어 달라고 했다. 그는 외형상 애들이 조금 무서워해서 곤란했다.

이윽고 혼자 따로 도착한 은채까지 팀원이 다 모였다. 스키장은 새로 개설한 만큼 시설이 매우 좋았다. 날도 조금 풀리는 듯싶더니 다시 추워져서 조금 걱정하던 부분도 사라졌다.

왁자지껄 모인 팀원들은 세 명씩 나눠 리프트에 올라탔다. 은채는 초급 슬로프에 내려 감을 잡기 위해 천천히 타다가 이내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어렸을 적에 스키나 보드를 포함한 수영, 발레, 스쿼시 등 취미로 다양한 운동을 접한 덕에 몸에 남은 듯했다. 하지만 어릴적에도 운동신경이나 체력이 약했던 은채는 곧잘 타는 듯싶다가 결국 한 번 크게 넘어졌다.

발목이 조금 꺾이긴 했지만, 큰 부상도 아니라 유난 떨고 싶지 않았다. 결국 은채는 마지막까지 다 놀고 리조트에 들어가면서 경호원에게 메시지로 발목을 삐었으니 파스 같은 걸 가져다달라 부탁했다.

그 뒤에 너나 할 것 없이 씻으러 가는 바람에 마지막 순번으로 샤워하고 나오니 와인이랑 와인에 어울리는 안주상이 차려져 있었다.

“은채 언니, 빨리 와!”

가희가 손짓하며 은채를 불렀다.

은채는 조금 덜 마른 머리를 등 뒤로 넘기며 자리에 앉았다.

졸업 연주회는 보통 연인을 초대하는 게 당연했고, 그 전에 남자친구를 사귀고 싶어 하는 얘들이 잔뜩 들떠서 그에 관한 얘기들이 오갔다.

“아, 좋아하는 애한테 그날 시간 되냐고 물어볼까, 지금?”

“그래, 해. 술 먹은 김에 용기 내 봐.”

“난 얼마 전에 미팅했는데, 첼로랑 바이올린을 헷갈려하는 남자였다니까? 진짜 최악이야.”

그 말엔 은채가 대꾸했다.

“그러게. 비올라랑 바이올린이면 모를까.”

대꾸 받은 여자는 피식 웃는 은채를 보며 손뼉을 쳤다.

“참, 은채 언니는 좋아하는 사람 없어요?”

집안 상 은채의 정략결혼을 아는 몇 명이 갑자기 입을 다물며 분위기가 싸해졌다.

정작 본인은 아무렇지 않은데 눈치를 보는 애들이 하나둘 늘어나니, 난감해진 은채는 와인을 한 모금 마시며 장난으로 넘겼다.

“글쎄?”

“언니는 예쁘고, 착하니까 인기 엄청 많죠? 부러워요.”

“맞아. 은채 언니는 너무 예뻐서 진짜 구체관절인형 같아.”

서로 맞다며 공감하는 사이,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던 은채는 손바닥으로 새하얀 뺨을 문지르며 치즈를 먹었다.

딩동-.

때마침 인터폰 벨이 울리자, 은채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인터폰을 확인하려던 미래에게 앉으라며 손짓한 그녀는 현관으로 향했다.

“내가 불렀어.”

경호원이라고 생각한 은채는 슬리퍼를 신으며 문을 열었다.

그런데 문밖에 서 있는 사람은 오늘 따라온 경호원보다 더 키가 컸다.

시선을 더 들자, 기주와 눈이 마주친 은채가 깜짝 놀라며 눈썹을 휘었다.

그는 파스를 포함하고도 다른 구급 약품도 손에 들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건네지 않고 은채의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차근차근 훑어보더니 입을 뗐다.

“다쳤어요?”

은채는 순간 몸의 중심이 뒤로 넘어갔다. 예상하지 못한 얼굴을 느닷없이 마주하자 몸이 경직됐다.

하얀 눈을 장시간 보았던 바람에 착시라도 생겼나,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마저 잠깐 머리를 스쳐 갔다.

“아…….”

잠시 후 은채는 낮은 탄식을 뱉었다. 고개를 보통보다 한 뼘은 더 꺾어야만 완전히 시야에 담을 수 있는 장신의 남자가 시선을 내리떴다. 눈이 마주한 권기주는 뭘 보고만 있냐는 듯이 고개를 비틀었다.

맞춤 슈트를 매끄럽게 소화한 몸은 복도의 조명을 받아 윤기가 흘렀다. 손에 들고 있는 구급 용품마저 세련되어 보였다. 웃기지만 은채의 감상은 그랬다.

“은채야, 무슨 일 있어?”

감감무소식이니 뒤에서 걱정을 해 왔다. 은채는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민망해진 그녀는 얼떨결에 권기주가 손에 든 것들을 빼앗듯이 건네받고는, 문까지 소리 나게 닫아 버렸다.

불쾌할 수도 있을 만큼 소리가 컸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침실로 돌아온 후였다.

기다리던 이들은 그녀를 어리둥절한 눈으로 보았다.

“이거 가져오라고 부탁했거든.”

은채는 무의식적으로 변명하듯이 말했다. 그게 그렇게 정신까지 빠질 일이냐는 눈빛이 돌아왔지만, 마땅한 해명거리가 없었다. 그저 손에 든 것을 난감한 얼굴로 내려다보았다.

그 와중에 목을 길게 빼서 문을 넘어다보던 가희는 얼굴까지 붉히며 말했다.

“저 사람도 왔었어? 무섭게 생긴 사람만 온 줄 알았는데.”

“누구? 혹시 그……?”

습관적으로 되묻던 미래는 말하던 중간에 이미 눈치를 챘는지 눈을 크게 떴다. 그러자 가희는 더욱 흥분하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언니도 알고 나도 아는 그!”

“뭐야, 난 못 봤는데!”

“진짜 잘생기긴 했다. 저 얼굴이 왜 아직 현실 세계에 남아 있지? 기획사 지하 연습실에 안 있고.”

그 말을 하며 가희는 눈을 초롱초롱 빛냈다. 평소 연예인에 대한 환상을 품고, 대화의 주제로도 종종 운을 떼 왔던 터라 새삼스럽지 않았다. 그랬는데, 왜인지 은채는 불편했다.

쓸데없이 복잡해지려는 머리를 환기하기 위해 의식적으로 입을 열었다.

궁금하지도 않은 가희의 아이돌 콘서트 후기를 질문하기도 하고, 본 적도 없는 드라마의 대사를 아는 체하거나 하며 대화를 다른 방향으로 주도해 갔다. 다행히 분위기는 나쁘지 않게 흘러갔다.

알코올도 적당히 들어갔겠다, 하나둘 침대로 쓰러지는 건 시간문제였다. 마지막까지 버티던 가희마저 잠에 곯아떨어진 후, 은채는 조용히 방을 빠져나왔다.

주량이 약해 금세 취기가 오르는 바람에 초반부터 조절했었는데. 그래도 부족했는지 얼굴이 뜨거웠다.

화끈거리는 두 볼을 손등으로 꾹꾹 눌러가며 은채는 건물 밖으로 나왔다. 밤에 보는 스키장은 또 달랐다. 바글바글했던 대낮과는 달리 간간이 보드를 타고 내려오는 이들만 있었다.

은채는 고요한 풍경을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카디건을 여미며 발길을 돌렸다. 그러나 한 발 떼기도 전에 발을 내렸다.

숙소의 외벽에 기대 서 있는 권기주를 발견한 탓이다. 가지만 남은 나무들을 배경으로 둔 채 그가 눈을 들었다.

몇 초 남짓 마주 바라보았던 것도 같다. 하지만 은채는 구태여 말을 걸지 않고, 몸을 돌렸다. 그가 있는 곳과는 반대 방향으로 다리를 뻗었다.

등에 붙은 끈끈한 점성의 시선이 잡아당기는 것 같았지만, 무시했다.

발길이 멈춘 곳에는 협소한 흡연 부스가 있었다. 낯익은 남자가 피고 있던 담배를 황급히 껐다.

은채는 그제야 그가 옆 숙소에 묵는 남자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시선에 예민한 미래는 힐끔힐끔 쳐다보는 게 기분이 나쁘다고 했었다. 그 말이 괜히 신경이 쓰여, 은채는 시선을 회피했다.

허공에 남은 연기마저 휘휘, 손으로 날려 보내는 시늉을 하던 남자가 쭈뼛쭈뼛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귀찮아질 것 같은 예감에 은채가 자리를 피하려고 할 때였다.

“송은채.”

권기주가 뚜벅뚜벅 걸어왔다. 은채는 숨을 깊게 마셨다. 차가운 공기가 폐부를 가득 채우는 바람에 잠깐 머리가 아찔했다.

바람이 부는 방향을 역행하고 있는 그의 머리카락이 스산하게 흩날렸다. 그 바람에 흠잡을 데 없는 이마며 콧대가 드러났다.

“왜 이제 나와. 기다렸는데.”

설핏 웃는 얼굴이 얼핏 친근하고 다정하게 느껴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