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화. 노력해 봐요. (10/31)


10화. 노력해 봐요.
2023.04.03.


반응을 고르느라 은채는 잠깐 침묵했다.

그 사이 코앞까지 다가와 선 그는 눈을 낯선 남자에게 박아 넣었다. 머쓱한 얼굴로 남자가 서둘러 자리를 뜨는데도, 그 뒷모습까지 주시했다.

방금 보여 주었던 얼굴은 없었다.

저 서늘한 눈빛을 안다. 처음 만났을 때도 저랬었다. 네가 고용주건 뭐건 개의치 않는다는 표정을 하고서 건성으로 인사를 했었다.

준비 없이 떠오른 기억을 은채는 목을 조여 누르고, 그를 바라보았다.

같은 공간에 있기 싫어 일부러 피한 건데. 그걸 모를 정도로 눈치 없는 것도 아니면서.

그 마음을 만면에 노골적으로 드러내는데도, 권기주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뭐 하러 나왔어요.”

그가 망설임 없이 재킷을 벗어 얼어붙은 어깨를 감싸 주는 걸 은채는 가만히 두었다.

일일이 반응할 필요 없었다. 권기주는 자기 일을 할 뿐이니까. 은채는 품이 큰 재킷을 이불처럼 덮은 채로 목을 세웠다.

“권기주 씨 보려고 나온 거 아닌데요.”

기주가 중얼거리듯이 낮게 대답했다.

“알아요.”

거기다 알겠다는 듯 고개까지 끄덕였다. 순간 투정하는 아이가 된 기분이었다. 은채는 눈썹을 일그러뜨리며 퉁명스럽게 물었다.

“다른 분은 어디 간 거예요?”

“보냈어요.”

“…….”

“오늘 일정이 있어서 처음부터 동행 못 한 건데, 안 오길 바랐나.”

“그럼 중간에 굳이 왜 왔어요.”

“그냥 내가 오고 싶어서.”

아.

일순 말문이 막힌 은채는 그를 노려보았다.

권기주는 태연하게 시선을 얽어왔다.

온통 검은 거 같다가도 기묘한 빛깔이 느껴지는 눈동자를 보고 있으면 기분이 이상해지고는 한다. 빨리 벗어나지 않으면 그대로 잠겨버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무렵, 은채는 목구멍에서 올라오는 말을 배설했다.

“언행 불일치가 특기예요? 스케줄따라 움직이라며. 결혼할 때까지 내 손발 다 묶어 놓을 계획 아니었냐고요.”

“좀 더 두고 보려고 했는데 생각이 바뀌었어요.”

“돌아온 이유는 복귀 명령 때문이라며. 단지 그것뿐이었다며. 마음 변한 적 없다며?”

당장에 떠오르는 모순점만 해도 벌써 이만큼인데. 어서 그 잘난 입으로 해명이나 해 보시지. 은채가 눈을 부릅떴다.

“은채 씨와는 다르게 난 거짓말 잘하니까.”

직설적인 것 같지만 이번에도 핵심은 교묘히 피했다. 은채는 그 사실을 지적하지 않았다.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똑같은 화법으로 응수했다.

“지금 이 모습이 거짓이라면?”

“내가 은채 씨 결혼을 싫어한다는 건 잘 알고 있을 텐데요.”

그 말에 비어 있는 퍼즐 조각이 맞춰진다.

관심, 그리고 애정.

그 두 가지로 모든 이유가 충족된다.

하지만 그 말을 믿을 수 있을까. 권기주만큼 변덕이 심한 남자를.

은채는 피식 새어나가는 웃음을 막지 않았다.

“결혼은 내 선택이에요. 간섭하지 마.”

그때, 찰나였지만 남자의 눈에서 날카로운 빛이 사선으로 쓱 지나간 것 같았다. 정신을 차리고 다시 보았을 때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대신에 기주가 무심한 듯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어디까지 허락해 줄 건데.”

그 말이 퍽 간절하게 느껴지는 건 착각이겠지. 은채는 엉겨 붙는 시선을 떼어내며 차갑게 일갈했다.

“노력해 봐요. 누가 알아? 내가 감동해서 마음이 바뀔지.”

“…….”

“애들이 찾겠네. 나 들어가요.”

은채는 그 말을 남기고는 건물 안으로 걸어갔다. 뒤통수가 따가웠다. 그가 여전히 같은 자리에서 조금도 약해지지 않은 강도의 시선으로 쳐다보고 있다는 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은채는 계단으로 올라가면서, 그 계단이 꺼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한숨을 푹푹 쉬었다. 카디건 주머니에서 잊고 있던 핸드폰이 진동한 것은 그때였다.

층계참에서 발을 멈춰 세우고 은채가 불빛이 번쩍거리는 핸드폰을 꺼내 보았다. 저장되지 않은 번호였다.

잠깐 망설이긴 했지만, 은근한 압력을 못 이기고 전화를 받았다. 바로 목소리를 내지는 못하고, 핸드폰을 조용히 귀에 붙인 채 청각을 세웠다.

곧 들려오는 낮은 목소리에 귓바퀴부터 잔 소름이 일었다.

-앞으로는 다른 데 연락하지 말고 이 번호로 연락해요.

뚝.

전화가 끊겼다. 은채는 어이없는 실소가 나왔다. 기가 막힌 얼굴로 낯선 번호가 찍힌 화면을 들여다보며 헛웃음을 웃기도 했다.

다른 곳엔 연락할 생각도 하지 말라는 듯 연락처를 주다니.

그래. 이 남자는 보통의 상식으로는 가늠하기가 불가능하지.

다시 송 회장의 개로 돌아와 다른 남자와의 결혼을 종용할 땐 언제고 어디까지 허락할 건지 묻는 태도 또한 그랬다.

그가 자신을 계속 원하게 될수록 갈증만 나는 것이니 의도대로 되는 것일까.

카디건 주머니에 핸드폰을 도로 넣으려다 멈춘 은채의 동공에 문득 이채가 서렸다. 이내 권기주의 낯선 번호를 연락처에 저장했다. 희열이 느껴지는 변덕이었다.

* * *

체력도 약하면서.

기주는 비가 오려는지 흐린 하늘을 흘깃 보았다. 먹구름이 이동하고 있었다.

시선이 룸미러로 향했다. 송은채가 있는 듯 없는 듯 뒷좌석에 앉아 있었다.

대뜸 약속 장소를 말해 놓고서는 피곤한 기색이 완연하다. 유화 같은 부드러운 느낌의 얼굴을 본뜨듯이 눈으로 선을 따라가던 그는 이내 시선을 거뒀다.

이윽고 모던한 건물 앞에 차를 세웠다. 은채는 곧장 차에서 내리려다 말고 선심 쓰듯 쳐다보며 말했다.

“먼저 가요.”

말없이 보면, 그녀가 깔끔하게 일자로 뻗은 눈썹을 구기며 덧붙인다.

“기다리든가.”

대답은 듣지도 않고 송은채가 내렸다. 사이드미러에 곧장 건물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옷깃을 추스르는 모습이 비쳤다.

기주는 픽, 하고 웃으며 운전석 문을 열고 내렸다. 눈치껏 다가오는 발레 요원에게 키를 넘기자, 송은채가 뭐 하는 짓이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이유는 창문 너머에 있었다. 꼴사납게 핸드폰 삼매경에 빠져 있던 한승윤이 그녀를 발견하고는 마지못해 상의 안주머니에 집어넣는 게 보였다.

그 직후에 눈이 마주쳤다. 놈은 대놓고 인상을 찌푸렸다. 입술을 뻐끔거리며 뭐라고 지껄이기도 했다. 모양을 보아하니 대충 욕인 것 같고.

인간이 저토록 투명할 수가 있나. 기주는 목 옆선을 손으로 훑으며 은채에게 다가섰다. 동시에 한승윤이 문을 열고 나와 마중 나온 척했다.

“왔어요?”

“네.”

은채는 전에 없이 친절한 한승윤을 보며 떨떠름한 얼굴을 했다. 승윤은 뻔뻔할 정도로 서글서글하게 웃었다.

“근데, 나름 데이트신청한 건데…….”

그 말을 하며 승윤의 눈길이 권기주를 향했다. 하고 싶은 뒷말은 굳이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사실 그녀도 대체 왜 따라 내리느냐고 묻고 싶은 내색이 보였지만, 말은 다르게 했다.

“이 사람은 내 경호원이에요. 불편하겠지만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세요.”

있는 놈을 어떻게 없다고 생각해. 한승윤의 표정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뿐이겠지.

여자에게 경호를 물리라 요청하면 저만 애가 닳아 보이는 게 자존심이 상할 테고, 나서서 내쫓기엔 병적으로 송은채를 감시하는 송명환의 반응이 두려울 테고. 결국 어느 쪽도 선택할 수 없는 우유부단한 놈이니까.

여자는 이런 걸 약혼자랍시고 피곤을 뒤로한 채 스키장에서부터 몇 시간을 달려왔다. 그걸 또 경호랍시고 따라왔고. 최근 그것만큼 좋은 핑곗거리가 없다.

기주는 눈썹 끝을 문지르며 시선을 내렸다. 비웃음이 한쪽 입꼬리 끝으로 터져 나왔다.

이딴 쓰레기랑 데이트하는 데 데려다줘 놓고서 끼어들어 만족감을 느끼고 있다.

유치한 새끼.

자조가 튀어나오는 거마저 새롭고 재밌었다. 당혹감으로 웃음기가 사라진 송은채의 미간 주름 하나에 방점을 찍었다.

* * *

뭐 하는 짓이야.

은채는 안색을 굳히며 나이프를 움켜쥐었다. 안 그래도 어색한 자리인데, 꼴 보기 싫은 얼굴을 둘이나 앞과 옆에 두고 있자니 속이 메스꺼워 죽을 지경이었다.

“아가씨는 갑각류 알러지가 있습니다.”

권기주가 이제 막 테이블을 차지하는 랍스터를 보고는 의도적으로 눈썹을 구기며 쯧, 하고 혀를 찼다.

그러면서 저는 보란 듯이 스테이크를 먹기 좋은 크기로 조각내었다. 그 순간에 한승윤의 표정은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로 찌그러졌다.

은채는 헛숨을 삼키며 옆을 노려보았다. 다른 테이블이긴 해도 바로 옆이었다. 게다가 권기주는 일행임을 숨길 생각도 없어 보이고.

그는 이번에도 자기 일을 하는 거겠지만, 은채는 부아가 치밀었다. 불필요한 참견을 하지 말라는 경고의 눈빛을 보냈다. 그런 다음 다시 한승윤에게 집중하기 위해 노력을 했다.

“그런 알러지가 있는 건 몰랐는데. 이거 미안하게 됐네요.”

한승윤이 굳은 입매를 억지로 끌어 올리는 게 보였다.

측은했다. 안 그래도 서로 의무감으로 행하는 데이트인데, 감시자까지 따라붙는 신세라니. 그녀는 익숙하다지만, 한승윤은 졸지에 독 안에 든 쥐의 경험을 하는 것이니 도의적인 미안함은 느꼈다.

“전 샐러드면 돼요.”

그 말에 나지막하게 웃는 소리가 귀로 파고들었다. 다른 테이블에서 나누는 대화와 식기 부딪히는 소리에 가려질 법한, 너무나도 작은 소리였는데도.

은채는 입술을 꾹, 하고 다물었다. 그게 누구의 웃음인지 알고 있다. 그래 놓고 태연하게 스테이크 한 점을 입에 넣었다는 것도 예민한 감각으로 알아차렸다.

사실 그녀는 샐러드 같은 건 굳이 찾아 먹지 않는다.

집에서도 함안 댁 아주머니가 편식하지 말라고 귀에 딱지 앉을 만큼 잔소리를 하는데. 그런 주제에 샐러드면 된다는 거짓말을 하니 그게 웃기다는 뜻이겠지.

은채는 귓등이 뜨거워졌지만, 모르는 체했다. 한승윤이 파스타나 리소토를 권유했지만, 괜한 오기가 생기는 바람에 극구 사양했다. 권기주를 의식하며 궁색한 변명도 굳이 덧붙였다.

“마침 가벼운 게 당겼거든요.”

한승윤은 그제야 수긍했다. 정작 수긍해야 할 사람은 듣기는 한 건지 모를 태도로 물을 마셨다.

진짜 성가시게.

은채는 포크로 루꼴라를 쿡, 찌르며 생각했다. 한 끼 식사가 이렇게 길고 긴 대장정일 수도 있구나.

이후에도 한승윤은 눈물겨운 노력을 지속했다.

연인처럼 입가에 묻은 것들 떼어 주기도 하고, 좋아할 법한 샴페인을 권하기도 하고. 경호원의 존재를 신경 쓰지 말라고 했던 처음의 부탁이 무의미할 정도로 철저히 권기주를 무시했다.

그래. 권기주가 자리를 비우기 전까지만 해도 그런 줄 알았는데.

“자란 환경을 무시할 순 없겠지만.”

기주가 어디론가 걸어가는 뒷모습을 무심코 응시하던 은채가 그 말에 눈길을 거두었다. 방금 전까지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연출하던 한승윤은 굉장히 불쾌한 얼굴로 바뀌어 있었다.

“애정 결핍인지 뭔지.”

“…….”

“이 상황, 즐기는 겁니까?”

하, 진짜.

은채는 불쾌감을 숨기지 않고 쳐다보았다. 한승윤은 지난번에도 다짜고짜 여성 편력을 드러내더니, 이번에도 맥락 없는 말로 어이없게 만들고 있었다.

“이봐요. 왜 갑자기 돌변한 건지 모르겠지만, 알아듣게 설명해 줄래요?”

한승윤은 방금 전까지 기주가 앉았던 자리를 눈짓하며 질문을 거듭했다.

“그냥 경호원, 맞아요?”

“……무슨 소리예요?”

“혹시 경호원이 송은채 씨를 마음에 두고 있는 건가?”

그러자 은채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한승윤은 그게 선을 넘은 의심이었다고 판단했는지, 흘깃거리며 눈치를 보았다.

“아니면 말고.”

“……상상력이, 풍부하시네요.”

은채는 그 한 마디로 상황을 일축했다. 하지만 그새 핏기가 가신 손끝이 경련했다.

* * *

기주가 핸드폰 벨소리를 들은 건 샤워를 막 끝냈을 때였다.

당직도 아닌 밤에 콜이 올 리는 없고. 그런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털며 느긋하게 욕실을 나왔을 때도 벨소리는 끊이지 않았다.

수건을 한쪽 어깨에 걸며 핸드폰이 있는 책상 앞으로 간 기주는 목울대를 조였다. 검은 화면의 하얀 글씨를 본 순간, 섬광을 목격한 듯 눈이 아렸다.

송은채.

그 이름을 찬찬히 뜯어 보는 동안, 벨소리는 기분 탓인지 마치 절정을 향해 가는 것처럼 가팔라졌다.

기주는 벨소리의 숨이 멎기 전에 핸드폰을 집어 들었고, 귀에 붙였다.

여보세요, 그 말은 할 필요도 없었다.

-한승윤이 우리 사이 의심해요.

여자는 희미하게 목소리를 떨었다.

대체 뭐에 겁을 먹은 건데.

한승윤에게 미움받을까 봐? 아니면 송명환으로부터 쓸모없어졌다는 악평을 들을까 봐?

의문점들이 머릿속에서 거미줄처럼 늘어졌다. 가만히 두면 걷잡을 수도 없이 불어날 텐데. 규칙적인 여자의 호흡소리가 의문을 단번에 불식시킨다.

“그래서요.”

-이번에는 대충 황당하다는 반응으로 뭉갰는데, 앞으론 내가 이런 변명할 일 없게 해요.

“왜요. 맞다고 하지.”

-……미쳤어요?

기주는 책상에 삐딱하게 걸터앉았다.

“어차피 우리 관계 알아도 아무 짓도 못 해. 한승윤은.”

-……권기주 씨가 내 세컨드인 걸 말해도 된다는 거예요?

“네.”

여자의 숨소리가 달라졌다. 그 미묘한 변화에 고막이 꿈틀거렸다.

병신같이.

“내가 그만큼 좋아한다고 하든지. 솔직하게.”

“…….”

“그거라도 좋아서 잡았잖아요, 내가.”

송은채는 침묵했다. 욕이라도 안 들은 게 다행인가. 기주는 조소하며 말했다.

“잘 자요.”

16805038453198.jpg/20230403130056282014_EB84A4EAB080+EB8298EBA5BC+EC9E8AEC9D84+EB958C.jpg alt="">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