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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화. 똑똑하네. (11/31)


11화. 똑똑하네.
2023.04.06.


‘내가 그만큼 좋아한다고 하든지. 솔직하게.’

지난밤 기주와의 통화를 떠올리며 화장대 앞에 앉은 은채는 거울에 비친 제 얼굴 중 다문 입술로 시선을 내렸다.

욕이라도 할 걸 그랬나.

그녀는 조금 메마른 입술에 립밤을 바르며 곧바로 생각을 부정했다. 바늘에 꿰이는 것을 알고도 떡밥을 무는데 화를 낼 이유는 없지. 다만 너무 거침이 없어서 당황했을 뿐이다.

촉촉하게 윤이 나는 입술을 달싹이던 은채는 립밤을 화장대 위에 내려놓으며 서랍을 열었다.

문득 보면 비어 있는 듯한 서랍 뒤쪽으로 손을 넣자, 딱딱하고 차가운 금속이 손끝에 만져졌다. 서랍을 여는 반동으로 인해 뒤로 쏠려져 있던 라이터였다.

은채는 라이터를 손에 들었다.

딸칵-.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라이터 뚜껑을 여닫았다.

‘딸칵.’

그는 그녀보다 더 크고 기다란 손으로 익숙하게 라이터 뚜껑을 젖히며 담배에 불을 붙였었다.

담배는 싫지만, 권기주가 피우는 모습은 그럭저럭 볼만했다.

성격은 몰라도 겉모습이야 구경하기 좋게 잘 빠졌으니 그럴까.

이따금 턱을 세워 하늘을 올려다보거나, 도통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는 눈을 감은 채 닫은 입술 틈새로 연기가 나올 때면 졸린 듯한 느낌으로 멍하니 쳐다보게 되었다.

좀처럼 볼 수 없는 그의 고요한 모습이었다. 그래서 그의 이름 첫 번째 이니셜이 각인 된 라이터를 보고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나 보다.

‘지금 사용해 봐요.’

내미는 하얀 손을 물끄러미 보던 그는 라이터를 가져갔다.

그의 손으로 옮겨간 라이터는 필리핀 현지 시장에서 산 싸구려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는 곧 담배를 입에 문 채 고개를 기울여 불을 붙였고, 끝이 지지직 타오르며 뿌연 연기가 흘러나왔다.

그가 담배 쥔 손으로 눈썹을 슥슥 문지르며 눈을 치켜뜨자, 기침이 콜록 나왔다. 지금 당장 피워 보라는 당당한 모습은 어디 가고, 코앞에서 밀려 들어오는 담배 연기에 목을 매만지며 콜록거렸다.

뭐 이런 게 다 있냐는 듯 쳐다보던 권기주는 아랑곳하지 않고 담배를 씹어 물며 폐부 깊숙하게 연기를 빨아 뱉었다. 곧이어 구둣발로 지져 꺼 버렸지만.

탁-.

뚜껑을 세게 닫으며 예전 기억을 다시 집어넣은 은채는 라이터를 서랍 안에 내려놨다. 그는 사용하지 않아 기름 냄새도 나지 않는 라이터를 재회 후에도 가지고 있었다. 당시에 줬을 때는 생각지도 않은 일이었는데.

이렇게 된 이상 본격적으로 유혹할 수도 있겠지만 그 권기주를 속일 자신이 없었다.

결은 달라도 비슷한 상처는 줄 수 있다.

그가 진심일수록 상처받기 쉬울 터였다. 2년 전의 나처럼.

손목시계를 보며 시간을 확인한 은채는 곧 외투를 챙겨 방을 나섰다.

* * *

백화점 퍼스널 쇼핑룸에 행거 여러 개가 배치됐다.

미리 브랜드별로 요청해 둔 은채는 맞은편 소파에 앉아 컬렉션 잡지를 보기도 하고, 직접 착용해 보기도 하며 쇼핑했다.

그런데 오늘 리스트에는 웬일인지 남성용 제품도 있었다. 그녀가 넥타이를 두고 고민하자, 지켜보던 기주의 눈매가 길게 늘어졌다.

넥타이까지 구매 결정을 한 그녀는 퍼스널 쇼핑룸에서 나와 시계 브랜드로 향했다.

품목별로 꺼내 놓고 보던 은채는 기주를 힐긋 보며 직원이 마침 오늘 입고됐다고 한 시계를 골랐다. 초침이 복잡한 구조로 되어 있는 것 같은 스틸 시계였다. 포장까지 마친 시계 쇼핑백을 기주가 건네받았다.

그렇게 구매한 모든 것들은 기주의 손에 들려 집에 도착했다. 방에 따라 들어와 여러 개의 쇼핑백을 내려 두자, 스카프를 풀던 은채가 입을 열었다.

“넥타이랑 시계는 가져가요.”

그녀는 스카프를 의자에 걸쳤다. 의자 등받이를 잡은 하얀 손끝에 시선을 주던 기주가 눈을 들었다. 은채는 무슨 의도인지 파악하려는 무뚝뚝한 얼굴을 마주하며 다가섰다.

“아니다. 선물이니 지금 해 봐요.”

하. 짧은 숨을 뱉은 기주가 낮게 웃었다. 그러더니 셔츠 소매에 감춰진 시계를 풀어 아무렇게나 내려놓고는 쇼핑백 안에서 커다란 박스를 꺼내, 은채가 산 고가의 시계로 갈아 끼웠다.

“잘 어울리네.”

지켜보던 은채가 감상평을 내놓더니 그에게 한 발짝 더 다가서서, 넥타이를 잡았다.

자연스럽게 상체가 기울어진 기주의 눈길이 넥타이를 푸는 은채의 손으로 고정됐다. 그가 착용하고 있던 넥타이를 금세 풀어 내린 은채는 백화점에서 산 넥타이를 챙겨 직접 매 주기까지 했다.

꼼꼼하게 손을 움직이던 그녀의 정수리 위로 어이없는 숨소리가 닿았다.

“이건 뭐죠.”

그는 새로 착용한 넥타이와 시계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침대에 걸터앉은 은채가 다리를 꼬며 실내 슬리퍼 신은 발을 까딱였다.

“파트너한테 보통 이런 거 주기도 하니까. 앞으로도 종종 이런 선물 해 줄게요. 기쁘게 받아요.”

파트너. 말을 곱씹어 뱉은 기주가 성큼 발을 뗐다. 피할 새도 없이 다가간 그는 은채의 어깨를 밀쳤다.

등이 침대 시트에 맞닿게 된 그녀가 상체를 다시 일으키려 하자, 기주는 바짓단이 팽팽해진 한쪽 무릎을 그녀의 무릎 사이에 지탱하며 두 손을 침대 바닥에 짚었다.

“난 아직 아무것도 안 했는데. 뭐라도 내가 했어야 이런 걸 받지.”

그가 대꾸하자, 은채가 입을 뗐다.

“우리가 어떤 관계인지 알아도 한승윤은 왜 아무것도 못 한다는 거죠?”

“본인도 떳떳하지 않으니까.”

“그럼 한승윤 캐 와요. 뭐 하는 사람인지, 과거가 어떤지 내가 알 수 있게. 그게 당신이 할 일이에요.”

불순하면서도, 고작 이것밖에 되지 않는. 거래 같은 관계.

“비켜요.”

차분히 일러 준 은채는 다시 일어나려 어깨를 들었지만, 다시 밀쳐지며 소용없게 돼 버렸다. 게다가 이번엔 손목까지 잡히고 말았다.

기주는 한 손에 다 들어오는 손목을 잡아 누르고선 다른 손으로는 제 얼굴 반쪽을 가렸다가 내렸다. 그는 이제 본연의 모습을 숨길 생각도 없는 듯 고개를 세워 내려다보며 웃지도 않았다.

“나 같은 개X식은 고귀한 아가씨 대접이 어려워서.”

내려간 손이 은채의 쇄골 쪽에 맞닿았다.

움찔한 은채가 그의 오연한 얼굴을 마주하며 눈꺼풀을 떨었다.

“이런 것도 내 허락 맡아야죠. 세컨드에 맞게 굴어요.”

다행히 말을 하는 중간에 다시 안정을 찾은 은채는 뚫릴 듯이 빤히 보는 그의 눈을 피하지 않고 긴장이 오가는 정적을 꾹 참았다.

“까다롭네.”

그가 고개를 숙였다.

까만 머리칼이 은채의 턱밑을 간질이며 목덜미에 부드러운 촉감이 맞닿았다.

“똑똑하네요.”

“…….”

“이렇게 잘 써먹어야지.”

은채의 살결에 맞닿은 입술을 떼고서 그가 말했다. 그러고선 옴짝달싹 못 하게 하던 커다란 몸을 뒤로 물렸다.

그의 체향이 멀어지자, 은채는 오히려 몸에 힘을 풀며 일어날 생각을 하지 못했다. 숨이 크게 들이마시고, 내쉬어지며 가슴이 급격히 오르락내리락했지만 목소리는 여전히 차분했다.

“한승윤이 지금 누굴 만나는지도 속속히 알아 와요.”

완벽히 일어선 기주는 넥타이를 고쳐잡았다.

“부탁인가.”

이내 손목을 가볍게 돌려보며 시계를 보던 기주가 다시 그녀를 눈짓하며 비스듬히 팔을 내렸다.

“그런데, 난 이런 물질적인 거에 관심 없어요.”

“…….”

“뭘 주면 물어올지 잘 생각해 봐요.”

하얀 시트 위 흐트러진 은채의 머리칼 한 줌을 엄지와 검지로 문지르던 그는 제 행동과 다르게 미련 없이 방을 나갔다.

* * *

급격한 곡선을 타고 성장한 디원 그룹의 욕심에는 끝이 없었다. 마케팅에 회장 본인이 간섭하는 기업이 디원말고 있을까.

비열한 수법도 마다하지 않고 몸집 부풀리기에만 집중하던 때와는 확연히 달랐다. 송 회장은 여우 같은 면이 있었다.

그러니 전략기획 쪽에서나 생각해 낼 법한 기업 이미지 관리를 몸소 생각해 내 실천하지. 어차피 다음 대선 때 같이 묶여 추락당하겠지만.

송 회장의 바로 옆에서 그를 조사하는 광일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여유는 조금도 갖고 있지 않았다.

간첩 조사할 때보다 더 은밀하게 추진되고 있는 국정원 기밀 프로젝트였고, 송 회장과 밀접하게 붙어 있는 게 그의 일이니까.

그런데 요즘 들어 권기주가 송 회장과 붙는 일이 많아졌다.

지시가 내려온 것도 아니고, 제가 시킨 일도 아니었다. 더 오래 진행되는 프로젝트도 있지만 2년이 넘는 시간이면 적은 것도 아니었다.

그렇게 공들인 작전에 설마 변수로 적용되는 건 아니겠지만 뜻 모를 돌발 행동인 건 마찬가지였다.

사락-.

종이 넘기는 소리에 광일이 기주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철제 의자에 앉아 있는 기주는 꼰 다리 위에 서류를 올려놓아 휙휙 넘겨 보고 있었다. 그가 확인하고 있는 서류는 송 회장이 개인적으로 맡긴 뒷일이었다.

굳이 능력을 써 가며 필요도 없는 신임을 왜 얻는 걸까. 도통 무슨 생각을 하는지 파악이 안 되는 놈이었다.

광일은 그에게 뚜벅뚜벅 다가가 가볍게 말아쥔 손으로 책상을 똑똑 노크하듯 쳤다.

“송 회장의 신뢰가 과해. 무슨 생각이야.”

“그만뒀다가 복귀했으니 의심 삼지 않도록 전보다 더 신뢰를 얻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요. 다 예정대로고.”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대꾸한 기주는 다 읽은 서류를 책상 위로 던져 놓고 광일을 쳐다봤다.

“송은채 결혼 앞당겨졌는데 그건 어떻게 되는 겁니까.”

“어쩔 수 없지.”

송 회장의 비리, 거기에 얽힌 한승윤의 집안. 물론 정치 쪽 건드리는 건 늘 매우 조심스러운 일이었지만, 이번 건은 대선에 영향을 줄 정도였다. 그러니 이 프로젝트의 끝은 다음 대선에 맞춰 있었다.

그 시기까지 미루지 않고 앞당겼으니 한승윤과 결혼해 버린 은채의 사생활은 어쩔 수 없었다.

혼인신고를 해 버리면 없던 일로 하긴 무리였다. 정략결혼이고 송 회장의 강압을 입증한다면 무효 소송에 유리할 순 있겠지만, 결혼을 앞당긴 건 그녀 본인이니.

“이 일로 송 회장 무너지면 송은채의 재산은 정부에서 도와주지 않겠냐. 그런 부분에서는 괜찮을 거야.”

은채의 모친은 한국에서 손에 꼽히는 부유한 집안의 딸이었다. 조상이 살았던 곳이 국보로 지정됐을 만큼 집안 자체가 남달랐고, 부모님 소유의 재산을 다 물려받아 상속세가 혀를 내두를 정도로 어마어마했다.

그런 그녀를 별 보잘것없던 건설업의 사장이 제대로 꾀어서 재산을 삼키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그녀는 선천적으로 몸이 약해 송 회장과 재혼 후 몇 년 못 살고 죽었다. 물론 송은채 앞으로 해 둔 재산까진 건드리지 못하지만, 원래는 전부 송은채의 것이었다.

대외적으론 재혼도 안 하는 로맨티시스트에 피 안 섞인 딸을 애지중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모든 게 거짓인 것이다.

재혼도 하지 않았을 뿐이지 바뀐 애인만 십수 명에 달했다. 질 안 좋은 곳에서의 만남이거나, 연예인, 회사원, 직속 스타일리스트, 직종도 가지가지였다. 송은채는 모친이 죽고 나서 그런 송 회장의 꼭두각시로 살아왔다.

광일도 그 점은 안타깝게 여기고 있으니 바로 옆에서 마크하고 있는 권기주도 그녀를 동정하는 건 아닐까.

어떤 더러운 일도 마다하지 않고, 원하는 목적을 위해서면 무고한 피해가 있어도 어쩔 수 없다고 그 누구보다 빠르게 판단하는 권기주가 송은채에게만?

하지만 광일은 질문하고서 바로 관심을 끊는 기주를 보며 쉽사리 판단하지 않았다.

“송 회장이 호출했다. 아무리 그래도 적당히 엮여.”

광일의 주의에 답을 하지 않은 기주가 송 회장에게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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