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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노골적인 불호. (12/31)


12화. 노골적인 불호.
2023.04.10.


기주는 돌계단을 뚜벅뚜벅 걸어갔다. 본채와 가까워질수록 더욱 서슴없어지다가, 무성의한 손길로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언제 맡아도 진하고 눅눅한 사골국 냄새가 현관에서부터 맡아졌다.

송 회장은 사지육신 멀쩡한 주제에 건강이라면 기를 쓰고 챙긴다. 악한 인간이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양심의 부재는 수도 없이 많이 보아왔지만, 기도 안 찰 일이지.

기주는 구두를 벗고 중문을 열었다. 거실 소파에서 신문을 읽고 있는 송명환 회장의 뒤통수가 곧장 보였다. 벽난로에서는 은은한 불꽃이 마른 장작을 태우고 있었다.

기주는 종잇장 넘어가는 소리에 맞춰 묵례했다.

“부르셨습니까.”

그 말에 송 회장이 친히 돌아보았다.

“그래, 저녁이나 같이 하자고.”

송 회장은 그의 얼굴만 보아도 흡족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신문은 한 손에 대강 거머쥐고, 기주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리기도 했다. 더할 나위 없이 친근한 행위였다.

기주는 다이닝룸까지 가는 동안 송 회장의 보폭에 맞추었다.

“얼굴이 야위었네, 권 팀장.”

권기주는 강력하게 부인하는 대신 한 손으로 턱을 한번 쓸어 만졌다. 가볍게 웃는 넉살까지 보여 주었다.

송 회장은 구태여 겸손 떨지 않는 게 마음에 들었다는 듯 호탕하게 웃었다.

“자네는 배우를 해도 손색이 없을 얼굴인데 말이야. 이거 내가 귀한 얼굴 함부로 쓰는 거 아닌가 몰라.”

마지 부자지간처럼 화기애애하게 다이닝룸으로 들어오는 두 사람을 발견한 함안 댁이 부랴부랴 국그릇을 테이블로 옮겼다.

송 회장은 펄펄 끓는 국그릇이 있는 상석의 의자를 빼내 앉았다. 그 오른편에 기주가 착석하자, 함안 댁이 곧장 국그릇을 가져와 앞에 놓아 주었다. 사골국에 평양식 만두와 고기까지 가득했다.

“들지.”

그 말을 한 후에 송 회장은 숟가락으로 큼지막한 만두 하나를 꺼내어 앞접시에 옮기고, 반으로 쪼개었다.

기주도 같이 숟가락을 들긴 했으나, 딱히 식욕이 없는지 국물만 한 입 먹었다. 송 회장은 만두를 입에 넣고 우적우적 씹으면서 말했다.

“김 실장이나 최 변호사는 권 팀장이 너무 젊다고들 하거든. 무지렁이들 같으니라고. 권 팀장 반만큼이라도 했으면 내가 여기까지 빙빙 돌아왔겠냐고.”

돌이켜 생각해 보니 짜증이 치밀어 오른다는 듯, 송 회장이 숟가락으로 국그릇의 밑바닥을 탁탁 쳐 댔다.

“난 철저히 능력주의야. 그렇게 해서 지금의 내가 있었고. 그래, 권 팀장. 네 목표는 뭐야?”

송 회장이 욕심으로 번들거리는 눈에 기주를 담았다. 사내 능력 평가를 했을 때, 권기주는 만점을 받은 수재였다. 내로라하는 대학을 나온 이들과 같거나 더 나은 실력인 셈이었다.

감만 좋은 놈인 줄 알았는데, 보통내기가 아니었던 거지. 송 회장은 그가 앞으로 보여 줄 성과와 비례할 디원의 미래를 그려 보며 진작부터 벅차올랐다.

“명예? 권력?”

기주는 숟가락으로 국그릇을 설렁설렁 휘저으며 대꾸했다.

“돈이요.”

송 회장이 의외라는 듯 눈을 키우자, 기주는 피식 웃었다.

“돈 말곤 관심 없습니다.”

“솔직해서 좋다. 그래, 돈보다 귀한 건 없지. 근데 남자라면 더 위로 올라가야지.”

“지금처럼 확실하게 챙겨만 주신다면. 능력 인정받은 거로 만족합니다.”

지금이야 기분이 고무되어 뭐라도 줄 것처럼 굴어도, 송 회장은 뼛속까지 비열한 인간이었다.

제 기준에 욕심이 과한 놈이라고 판단되면 가차 없이 버리고도 남는다. 뭣보다, 해결사의 존재가 대외적으로 노출된다면 그 존재만으로도 송 회장의 치부가 된다.

그저 송은채의 경호원인 척 숨을 죽이고, 솔잎만 먹는 송충이 행세가 최고의 선택이었다.

“계속 이렇게만 해 준다면야 자네가 원하는 돈은 내 얼마든지…….”

그렇게 말하면서도 송 회장은 못내 아쉬운지 입맛을 다셨다.

권기주는 저소득층 가정 특별 채용이었다.

병상에 누운 모친에 딸린 동생만 셋. 죽어라 일해도 깨진 독에 물 붓는 격이었다.

송명환 회장은 그래서 권기주를 골랐다. 절박한 인생이어서.

뭘 시켜도 이를 악물고 해낼 수밖에 없는 놈. 쓰고 버려도 찍소리도 못 낼 놈.

그랬던 놈과 이제는 친히 겸상까지 하게 되다니. 송 회장은 세상일, 참 웃기다는 생각을 하며 만두를 베어 물었다.

그렇게 식사가 한창인 무렵, 송은채가 다이닝룸으로 들어왔다.

막 샤워를 했는지 머리끝이 덜 말라 있었다. 화장기 없는 뽀얀 얼굴에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물론 그걸 내색했다는 사실에 자존심이 상했는지 금세 안색을 굳히며 식탁 앞에 앉았다.

기주는 맞은편에 꼿꼿한 자세로 앉아 있는 그녀 쪽으로 눈을 들었다. 넉넉한 홈웨어 사이사이로 보이는 목선이며, 물컵을 들면서 소매가 내려가는 바람에 드러난 손목이며 죄다 희고 가늘었다.

저가 애지중지하는 꽃들보다 더 가냘프다. 저러고 온실에라도 갔다간 찬바람에 감기 들기 십상일 텐데.

기주는 입술 끝을 비트는 것만으로 곤란함을 드러내며, 등받이에 삐딱하게 기대었다.

옆에서는 송 회장이 주절주절 말을 늘어놓았다.

“권 팀장, 골프는 좀 치나?”

“글쎄요. 관심이 없어서.”

“배워 둬. 앞으로 쓸모가 있을 거야.”

송 회장은 정치인들에게 주로 골프로 접대를 해 왔던 이력이 있었다. 골프를 배우라는 건, 그 자리에 권기주도 데려갈 심산이라는 거였다.

완전히 송 회장의 관심 밖인 은채는 필사적으로 귀담아듣는 모양이었다. 평소 그렇게 좋아하지도 않던 콩자반만 반복적으로 집어 먹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는 기주는 괜스레 어금니가 간지러웠다.

“……본사로 들어와서. 응?”

기주는 거의 애걸하는 수준인 송 회장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콩자반 한 알을 더 집어 먹으려다 젓가락이 빗나간 송은채만 보았다.

“아, 네.”

그의 말끝에 웃음기가 섞였다. 다행히 송 회장은 말을 하느라 못 알아챈 모양이고.

애꿎은 송은채가 한쪽 눈썹을 치켜들었다. 그 후에는 반쯤 고개를 들어 눈을 똑바로 마주쳐 왔다. 제대로 빈정이 상했는지 눈빛이 표독스러웠다.

“김 실장한테…….”

“근데.”

굵직하고 걸걸한 목소리를 여린 은채의 음성이 끊어 놨다. 송 회장의 눈길이 그제야 송은채를 향했다. 뭔가 싶은, 그러다 이윽고 제 말을 끊었다는 사실에 송 회장의 얼굴에 불쾌감이 언뜻 스쳤다.

은채는 아랑곳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저한테 사실은 남자가 있다면, 어떻게 되는 거예요?”

식탁은 순식간에 정적에 휩싸였다. 송명환 회장이 백태 낀 혀를 날름거리며 아랫입술을 적셨다.

“무슨. 너, 그게 무슨 소리야?”

기가 막힌다는 듯, 송 회장이 주먹을 말아쥐었다. 어찌나 억세게 움켜쥐었는지, 손의 주름 사이가 희게 질렸다.

은채는 그 변화를 고요하게 바라보면서 또박또박 말했다.

“숨겨 둔 남자라든가.”

그 말에 송명환 회장은 반사적으로 권기주를 쳐다봤다. 정말로 송은채에게 남자가 붙었다면 그 즉시 보고했을 테니까.

기주는 금시초문이라는 듯 태연하게 고개를 저었다. 송 회장은 그 대답을 철석같이 믿고는, 오히려 은채를 보며 혀를 찼다.

“헛소리 빽빽 할 거면 들어가. 결혼이 코앞인데 무슨!”

은채는 얼굴색 한 번 안 변하고 거짓말을 하는 권기주를 보며 한쪽 뺨을 들썩였다.

“그냥 말 그대로예요. 남자가 있었으면 결혼 때문에 헤어졌어야 하는 거냐고.”

“그걸 말이라고.”

송 회장은 헛웃음을 흘렸다. 원래도 사사건건 비협조적인 아이였다. 또 뭐에 심사가 뒤틀린 모양이지. 송 회장은 한숨과 함께 이 대화를 일축하려 했다.

“결혼 준비나 서둘러. 머리 아플 거 없이 그쪽 집에서 알아서 한다니까 넌 따라가기만 해.”

“네. 좋네요.”

그 말을 하고서 은채는 반으로 쪼갠 만두를 입에 넣었다. 기주는 등받이에 깊숙이 기댄 등을 굳혔다. 기분이 참, 더러웠다.

* * *

승윤은 식탁 위로 팔꿈치를 내리고, 두 손은 숙연하게 깍지를 끼운 채 생각했다. 주기적으로 만남을 이어가고 있긴 하지만, 아무래도 찝찝하고 짜증스러웠다.

그 여자, 그 여자는…….

승윤은 말 한마디로 제 자존심을 짓밟는 게 특기인 송은채의 말을 잠깐 더 떠올려 보았다.

‘파혼 통보라면 전화로도 충분했어요.’

‘그러네요. 내 연주 그쪽이 듣는 거 싫은데 망쳐 버릴까요.’

‘심심하면 만나는 여자 부르든지 해요. 상관없어요.’

소문 무성하던 송은채는 확실히 친절한 성격은 아니었다. 우리들의 세계에서 기본으로 탑재해야 할 연기력마저 가뿐히 스킵한 건 그렇다 쳐도, 고분고분하지도 않고.

송명환 회장이 지금껏 그녀를 제 입맛대로 굴렸다는 게 심히 의심이 갈 지경이었다. 그 뻣뻣하고 재수 없는 계집애를 대체 무슨 수로.

승윤이 안 그래도 불편한 만남에 대해서 불편한 감정을 더욱 키워 갈 무렵, 레스토랑으로 입구로 송은채가 들어왔다.

떨떠름한 마음과는 다르게 승윤의 몸은 즉각 반응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걸로도 모자라 몇 걸음 마중을 나가기까지 했다.

뒤늦게 상한 자존심을 챙겨 보려고 테이블을 한 손으로 짚으며 딴청을 피웠지만, 이미 은채는 제 앞에 당도해 있었다.

승윤은 머쓱한 얼굴로 눈에 띄게 어색한 인사를 건넸다.

“왔어요?”

은채는 권기주만큼은 아니지만, 전봇대같이 큰 키로 시야를 가로 막고 선 승윤을 탐탁지 않게 올려다보았다.

“네.”

승윤은 습관적으로 그녀의 뒤를 넘겨다 보았다. 은채는 권기주가 아니라 다른 경호원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왔다.

그 사실이 믿기지 않는 듯 승윤은 흘끔흘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 시간은 찰나에 불과했는데도, 은채는 눈썹을 찌그러뜨렸다.

앞을 떡하니 가로막고선, 왜 안 비키는 건지. 마음만 같아선 밀치고 가고 싶지만, 그것은 교양이 없는 행동이었다.

은채는 참을 인을 가슴 속에 세 번이나 새기며, 겉으로는 침착하게 대응했다.

“자리에 앉고 싶은데, 비켜 주세요.”

“아. 그래야죠, 참.”

승윤은 테이블을 짚었던 팔을 거두고, 옆으로 비켜섰다.

은채는 앞길이 뚫리자, 그 길로 곧장 걸어가 의자에 앉았다. 이번에도 목과 어깨, 등을 반듯하게 세운 자세였다.

승윤은 진짜 질린다는 듯 인상을 구겼지만, 금세 표정을 감추었다.

최근 세무사의 수상한 행적이 발각되면서 세무조사를 받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 바람에 외가에서 부친의 정치 활동에 자금을 융통해 줄 여력이 안 되게 됐다.

정말로 송명환 회장이 절실해진 것이다. 즉, 어떻게든 이 여자의 환심을 사야 했다. 결혼이 절박한 건 당연하고.

한승윤은 그 사실을 상기하며 미소를 지었다.

“차 안 막혔어요? 퇴근 시간이라.”

“이 시간에 부르기에 그거 모르는 줄 알았는데.”

“……다음엔 점심으로 하죠. 내가 너무 고생시켰네.”

“고마워요.”

은채가 넙죽 대답하자, 승윤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대접받는 게 익숙한 여자들은 밥 먹듯이 보고 자랐지만 이렇게까지 투명한 여잔 처음이었다. 봐도 봐도 새롭다.

승윤은 어렵사리 성질을 죽이고, 대신에 서버를 향해 음식 세팅 신호를 주었다. 그러고는 준비한 쇼핑백을 테이블 위로 밀었다.

“이걸 이제 주네요.”

쇼핑백을 보는 은채의 얼굴은 시큰둥했다.

굳이 열어보지 않아도 반지가 들어 있을 게 뻔했다.

하지만 성의 표시는 해야 하니, 마지못해 쇼핑백 안에서 반지 케이스를 꺼내었다. 케이스 뚜껑을 열자, 잘 세공된 다이아몬드가 박힌 링이 존재감을 뿜어냈다.

승윤의 어깨는 거만하게 치켜 올라갔지만, 듣는 이가 거북할 정도로 상냥하게 물었다.

“어때요? 마음에 들어요?”

안목이란 게 있다면 값이 꽤 나가는 것을 알 텐데. 승윤은 무시 반, 기대 반이 담긴 눈빛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은채는 케이스 뚜껑을 소리 나도록 닫고, 핸드백에 쑤셔 넣는 것으로 승윤의 예상을 물거품으로 만들었다.

“별론데.”

그녀는 혼잣말하듯 무미건조하게 읊조렸다. 악의는 없었다.

그저 잠자리가 동하지 않는다는 말까지 무감하게 느껴지는 약혼 관계에, 한승윤과는 서로 예의를 차리기에 너무 멀리 왔다는 생각이 무의식 속에 뿌리내려, 행동으로 발현된 것뿐이었다.

다만 그것만큼 노골적인 불호가 또 있을까. 부정적인 반응을 면전에서 들어본 역사가 없었던 승윤은 모욕감을 느꼈는지 뺨이 들썩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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