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달라고 하면 줄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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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화. 달라고 하면 줄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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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화. 달라고 하면 줄래요?
2023.04.13.
“어차피 대외적으로 몇 번 끼고 말 테니까 대충하죠.”
승윤은 그 말에 안전핀이 뽑혀 나갔다.
“뭐든 알아서 갖다 바쳐지는 공주님은 취향이 더 특별한가 보네요.”
“…….”
“그렇죠? 팔다리 다 잘린 공주님.”
가만 보면 한승윤은 기분이 오락가락하는 편이다. 변덕 부리는 날씨처럼. 하지만 그 비위를 맞춰 주고 싶은 의향이 그녀에겐 없었다.
은채는 안면을 굳혔다.
“한승윤 씨 취향이 별로라는 거 굳이 돌려 말하지 않아도 돼요.”
승윤은 이를 꽉 물었다. 이 여자는 입만 열면 정나미가 뚝뚝 떨어지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그러니 말을 길게 해선 안 된다. 그는 사무적으로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시일이 급해서 드레스부터 맞춰야 해요. 브랜드 측 디자이너 연결해 줄 테니 내 별로인 취향과 다른 그쪽 취향에 맞춰서 진행해 봐요.”
그 외에도 승윤은 이것저것 결혼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늘어놓았지만, 벽에 대고 이야기하는 기분이 들었다.
원래 이런 건 여자들이 더 환장하는데. 아무리 허울뿐인 결혼이라지만.
승윤은 답답한 마음에 연거푸 맹물을 들이켰다. 결국 분위기는 또 진창에 처박혔다. 부모에게 갖은 핑계를 대던 것처럼, 승윤은 일을 핑계로 이 자리에서 벗어나려 했다.
송은채도 순순히 따랐다.
그래, 거기까진 좋았다.
주차장에 권기주가 버젓이 서 있지만 않았다면.
“저 자식은 왜 불렀어요?”
단순한 디자인의 블랙 슈트를 입고서도 단숨에 타인의 시선을 낚아채는 존재감의 남자. 승윤은 사회적 지위로든 뭐로든 명백하게 우위에 있는데도 묘한 패배감을 느끼게 하는 권기주가 지독하게 거슬렸다.
“부른 게 아니라…….”
은채는 무슨 말을 할 것처럼 입을 뻐끔거렸지만, 끝내 입을 꾹 다물었다.
주차장 기둥에 나른하게 기대어 선 기주가 눈을 들었다. 송은채를 에스코트하겠답시고 허둥지둥 달려오는 시늉도 없이 자세만 고쳐 선다. 무심한 눈길은 승윤을 의식하지도 않고 송은채에게만 꽂혀 있었다.
저 건방진 새끼.
승윤은 이상한 반발심과 승부욕이 동시에 끓어 올랐다. 본능적으로 은채의 앞을 가리고 섰다.
기주의 눈이 그제야 승윤에게 박혔다. 언뜻 무감해 보이지만 오싹한 찬기만이 도사렸다. 언어로 발현되지 않았을 뿐 뚜렷한 적대감이 흘렀다.
“이만 가 볼게요.”
그녀가 또각또각 걸어가자 승윤이 어깨를 움찔했다. 하지만 은채는 발을 멈춰 세우지 않았다.
기주가 그녀의 뒤에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따라붙었다. 그 바람에 승윤은 그녀와 제대로 인사조차 나누지 못했다. 은채를 뒷좌석에 태운 후에 기주가 눈을 돌려 승윤을 쳐다봤다.
그래도 제게 인사라도 할 모양인가 싶었으나 착각이었다.
기주가 잇새로 픽, 웃음을 흘리고는 그대로 운전석에 올라탔다. 곧바로 시동이 걸렸고, 차량은 그대로 승윤을 지나쳤다.
우두커니 홀로 남은 승윤은 기가 찼다.
“하. 가지가지하네, 아주.”
승윤은 목구멍으로 치밀어 오르는 욕설을 거침없이 내뱉으며 머리를 쓸어 올렸다.
* * *
겁이 없다 없다 했어도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은채는 창문을 통해 들이치는 밤거리의 조명이 수놓은 얼굴을 한 손으로 쓸어내리며 입을 열었다.
“사회성 없는 건 아는데, 한승윤한테는 좀 그러지 마요.”
정면만 응시하던 기주가 시선을 들었다.
백미러를 통하는데도 관통당하는 느낌은 여전했다. 은채는 일부러 눈을 마주 보지 않았다. 얼굴이 따갑도록 내버려 둔 채로 말을 이었다.
“젊은 꼰대인 거 딱 보면 몰라?”
한승윤은 부모 눈 피해 가며 유흥과 여색을 즐기지만 딱 거기까지다. 권력욕과 권위 의식이 있어 체면이 망가지는 선까지는 절대 넘지 않을 남자였다.
그러니 촌스럽게 알만 큰 다이아몬드 반지를 갖다 바치며 우쭐하지.
그런 남자가 필요 이상으로 권기주를 의식하고 있다. 절대 좋은 징조가 아닌데도 그는 조심하는 척도 하지 않는다. 한승윤의 불만은 날이 갈수록 부피를 키워 가는 것 같고.
이만 가 보겠다고 발을 뗐을 때, 무언가 잘못 건드렸다는 직감이 뇌리를 스쳤다. 둘은 마주쳐서 좋을 게 없다고, 은채는 생각했다.
“걱정하는 건가.”
기주가 머리를 등받이에 기대며 물었다. 이번에는 은채의 시선이 백미러로 향했다. 눈이 마주칠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시선이 정면을 향해 있는 기주의 날카로운 눈매만이 보였다.
정지 신호인데도 전방을 주시하고 있는 이유가 뭐야. 그녀가 입술을 깨무는데, 그 순간에 신호가 바뀌었다. 그가 액셀을 짓밟는 소리가 들렸다.
“괜히 나까지 불편하게 하지 말라고요.”
경고에 가깝게 은채가 뇌까리자, 그가 싱겁게 대꾸했다.
“피아식별하는 중인데, 왜.”
“…….”
“뒷조사까지 시킬 정도면 원수잖아요.”
은채는 ‘뒷조사’라는 노골적인 단어에 얼굴이 붉어졌다. 그런 부도덕한 일을 지시했다는 것보다 그가 꼭 제 편인 양 구는 태도에 낯이 뜨거웠다. 보니 앤 클라이드도 아니고.
기주는 그녀가 무슨 핀잔을 주기도 전에 조수석에서 서류 뭉치를 집어 들어 건넸다.
“다른 일 처리하는 김에 했어요.”
은채는 기주가 건네는 서류를 받아들었다. 대충 휘리릭, 들춰만 봐도 한승윤과 관련된 내용이라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정말로 권기주는 시키는 건 뭐든 다 하는 사람인가. 그런 생각을 하며 은채는 시선을 들었다.
뭘 주면 물어올지 생각해 보라더니. 결국 고가의 선물에 넘어온 건가.
은채는 그렇게 자조하며 서류를 덮었다.
그 무렵 차도 집 앞에 정차했다.
“왜 더 안 읽고.”
그가 묻자, 그녀는 일부러 더 피곤한 기색으로 말했다.
“나중에요. 수고했어요.”
그러고는 차 문을 열고 내렸다. 동시에 운전석 문도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내릴 것 없이 바로 차고로 가라는 말을 하려던 은채는 입술을 열지 않았다.
권기주의 타이와 시계는 늘 하던 대로였다.
그녀는 문을 닫아야 한다는 것도 잊은 채 넋이 빠졌다. 기주의 구둣발 소리가 점차 가까워지는 것만이 희미하게 들려왔다. 그는 은채의 손을 차 문에서 떼어 낸 후에 자신의 손으로 문을 닫았다.
“이민 가려고 했었던가?”
그의 손에 수포로 돌아간 일이었다. 그런데 권기주의 입에서 그 말을 듣게 되자, 은채의 눈에 날이 섰다.
“만약 예정대로 성공했다면, 뭘 하려고 했어요?”
은채는 생각지 못한 질문에 미간을 찌푸렸다. 뭘 하려고 계획한 것은 없었다. 그건 도피에 가까웠으니까.
“마땅히 없었어요.”
“대책도 없네.”
“……근데 그건 왜요?”
무슨 자격으로. 은채는 그 말을 덧붙이려다 말았다.
“궁금한 게 많아서요.”
“…….”
“내가 없는 동안 무슨 생각을 했는지.”
그가 눈을 내리떴다. 몸 안의 작은 세포 하나까지 꿰뚫리는 희한한 기분이 들었다. 은채는 그 느낌을 떨치고 권기주에게 다가섰다.
“근데 왜 내가 준 거 안 해요?”
그녀가 두 팔로 부드럽게 기주의 목을 감쌌다. 그가 고개를 비스듬하게 기울여 내려다보는 게 느껴졌다.
은채는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팔을 내려, 그의 타이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리고 저지당하기 전에 타이의 매듭을 사락, 풀었다. 동시에 눈을 들었다.
빤히 쳐다보고 있던 기주와 그대로 눈이 마주쳤다. 그의 눈동자는 가로등 불빛을 받고 불가사의하게 번들거리고 있었다.
밤은 많은 것의 경계선을 흐리게 뒤덮는다. 어둠을 밝히는 조명조차도 끝부분은 무력하게 번지는 게 대부분이고. 다만 권기주는 그 순리를 무색하게 만든다.
어둠보다 더한 음험한 분위기로 주변을 압살해 버린다. 은채는 가까이에서 새삼 그 사실을 절감했다.
권기주가 뭘 꾸물거리느냐는 듯이 고개를 비틀었다. 권태롭다는 듯이 숨을 마시며 척추도 세웠다.
재촉 아닌 재촉에 입이 바싹바싹 마르고 몸이 움찔거렸다.
개 버릇 남 못 준다더니.
은채는 그에게 착실한 반응을 보이는 신체를 억누르며 눈을 부릅뜬 채 노려보았다. 눈알이 시큰거렸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타이를 다시금 당겨 잡았다.
타이는 더 손댈 필요도 없이 스르륵, 풀려 나왔다. 그녀의 다음 목표는 기주의 손목이었다. 원체 다부진 뼈를 감싼 근육질의 손목에서 차근히 시계를 분리해, 손가락 끝에 걸고는 빈정거렸다.
“왜 내가 사 준 거 안 했냐구요. 과분해서 그래?”
“…….”
“과분하라고 사 준 거지. 난 그쪽이 꿈도 못 꾸는 고가의 물질을 제공하고, 그쪽은 그 대가로 애정 같은 건 바라지 않고 그저 내 욕구를 채워 주는 일에 충실한 거. 우리 거래잖아요, 그게.”
거래. 하고 그가 작게 곱씹었다. 그러더니 혀로 입술 끝을 짓눌렀다. 그는 고개를 떨군 채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다가 불쑥 눈을 들어 쳐다봤다. 이마에 생긴 주름이 언뜻 언짢아 보인 것도 같았다.
그때, 은채는 권기주에 대한 제 감정을 어렴풋이 깨달았다.
그가 저를 버렸다. 버리고 간 이유를 몰라서 괴로움에 몸부림쳤다. 그래서 이제라도 그 이유를 만들어 주는 중이었다. 직접.
“근데 해 오라는 건 해 왔네요.”
그 말에 기주는 그녀가 핸드백에 대충 쑤셔 넣은 서류 봉투를 쳐다봤다. 볼품없이 구겨져 있었다.
“송 회장한테 고해바친 건 아니죠? 재미없게.”
“나랑 은채 씨 사이에 있는 일은 아무도 모를 거예요. 앞으로도.”
그가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지나가는 바람처럼 희미해서 오만상을 쓰고 귀를 기울여서야 겨우 들을 수 있었다.
이윽고 기주가 삐딱한 자세로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그래도 제법 또렷한 음성이었다. 무언가 생각이라도 정립된 사람처럼.
“뭘 줄지는 생각해 봤어요?”
그의 질문에 은채는 헛숨을 터뜨렸다. 그러고는 내가 그런 거까지 고민해야겠냐는 듯이 노려보며 대꾸했다.
“원하는 거를 그냥 말해요.”
잠자코 그녀의 시선을 받고 있던 기주가 구둣발로 아스팔트 바닥을 한 번 긁으며 여상히 읊조렸다.
“송은채.”
기주는 어이없다는 듯 동공을 키운 그녀를 보며 입매를 비틀었다. 그녀는 웃는 것 같기도 하고 독이 오른 거 같기도 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부.”
“…….”
“달라고 하면 줄래요?”
“……난 이미 한승윤 건데.”
“누구 마음대로.”
“껍데기라도 가지겠다고 이런 짓 시작한 거 아니에요?”
그 말에 부응하듯 권기주가 팔을 뻗어 그녀의 허리를 잡아당겼다. 그러더니 고개를 비틀어 얼굴을 숙였다. 입술이 부딪히기 직전, 숨결이 흐트러졌다.
작게 떨리는 동공을 위로 치켜뜬 은채는 가볍게 고개를 돌리는 것으로 상황을 불식시켰다.
“뭐 하는 짓이야?”
“송은채 흔들려고 짖으라면 짖고, 앉으라면 앉는 중인데. 그런 말 하면 섭섭하지.”
“…….”
“확인해 보고 싶은데 키스해도 돼요?”
그의 목이 진동했다. 그녀가 표정을 보려고 했지만, 고개를 떨구고 있어 확인할 수 없었다.
그 바람에 괘씸한 마음만 증폭이 됐다. 다짜고짜 키스하려고 했으면서 이제 와서 묻는다고.
“허락부터 구하라고 했을 텐데요. 함부로 행동하지 말고.”
“받고 싶은 게 뭔지 말하라기에 허락인 줄 알았는데.”
기주가 짐짓 억울한 듯 말했다. 상황을 능수능란하게 활용하는 그의 교활함에 은채는 기분이 더 더러워졌다.
그때, 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거칠게 그의 가슴팍을 밀어내고는 고의로 어깨까지 치고 지나갔다.
“어머, 아가씨.”
손에 종량제 봉투를 든 함안 댁이 반색을 하다가, 미묘한 분위기를 감지하고 눈을 끔뻑거렸다. 은채는 살짝 벌어진 종량제 봉투 속으로 보란 듯이 타이와 시계를 집어 던졌다.
“버려 주세요.”
말에는 힘이 있다. 어떻게 말하느냐에 따라서 남에게 위해를 가할 수도 있고 아픔을 달랠 수도 있었다.
은채는 악의를 담아 뱉은 말에 미련을 두지 않고 뚜벅뚜벅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