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화. 의도성 없는 모든 것. (14/31)


14화. 의도성 없는 모든 것.
2023.04.17.


“스튜디오, 드레스, 메이크업 조율 때문에 이미 연락해 뒀는데 아직 송은채 씨 측의 답변을 듣지 못했습니다.”

오랜만에 출근한 승윤에게 비서가 다가와 사색이 된 얼굴로 결혼 준비 사항을 보고했다. 상황 설명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던 승윤은 곧 신경질적으로 눈썹을 구겼다.

리조트 연회장 관련 건으로 상무 직책다운 진두지휘 시늉을 하던 중에 김이 빠진 탓이다.

하여간 그 여자는 도움 되는 구석이 없다. 하다못해 도둑질을 하려고 해도 손발이 맞아야지. 하지만 그 말을 그 여자에게 할 수 없는 노릇이고.

분노의 불똥은 또다시 정 비서에게 튀었다.

“그럼 답을 하도록 닦달하든 윽박을 지르든 무슨 수라도 내야지. 그거 하라고 내가 너 그 자리에 앉혀 둔 거 아니야.”

승윤의 온갖 짜증과 멸시, 업신여김에 이미 단련이 된 정 비서는 침착하게 묵례를 했다.

“다시 연락해 보겠습니다.”

정 비서가 통화를 위해 소란스러운 연회장 밖으로 서둘러 나가는 뒷모습을 승윤이 못마땅한 눈빛으로 주시하는 동안, 연회장에 모인 다른 직원들은 그의 눈치를 보기 바빴다.

국내 굴지의 대기업 측에서 연회장 대여 요청을 해 오자, 소문을 듣고 한승윤 상무가 나타났다.

평소 집무실에서 뭘 하는지는 몰라도 종일 밖으로는 그림자조차 비치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는데. 보나 마나 공을 가로채려는 수작질이 분명했다.

그런 주제에 분위기나 흐리고 앉아 있다. 저것도 상무라고.

하지만 누구 하나 나서서 불만을 제기하지 않고 서로 눈빛만 공유했다.

험악해진 분위기에서 승윤은 홀로 느긋했다. 아니, 생각에 잠겼다. 어떻게 된 계집애가 결혼식이 코앞인데 강 건너 불구경하는 모양새로 있느냐는 말이다. 누군 뭐 대단히 바라는 줄 아나.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에 정 비서는 통화가 끝났는지 연회장 안으로 복귀했다.

승윤은 바지 주머니에 손을 쑤셔 넣은 채 정 비서를 힐끔 쳐다봤다.

“의상도, 스튜디오도 알아서 결정하라고 합니다.”

그 말에 승윤의 입에서 절로 헛웃음이 흘렀다. 마음만 같아선 드레스가 아니라 포대 자루를 입혀 버리고 싶은 충동이 불쑥 들었다.

“고민할 게 없었으면서 답은 왜 늦었대?”

승윤의 어떤 구박에도 포커페이스를 잃지 않던 정 비서가 그 질문에는 잠시 숨을 골랐다.

“그게, 깜빡했다고…….”

명색이 예비 신부가 신랑 될 남자를 안중에 두고 있지도 않았다.

평소 얼굴 두꺼움으로는 자신이 있었던 승윤도 이번에는 제 비서 앞에서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낯짝이 화끈거리고, 귀도 뜨거워졌다. 승윤은 이를 악물었다.

“알았으니까, 가 봐.”

“예.”

승윤은 잠깐 송은채를 떠올려 보았다. 나사 하나는 빼놓고 온 거처럼 영혼 없는 얼굴과 태도가 석연치 않았다.

까칠하고 애교는 약에 쓸래도 없는 여자지만 예쁜 건 부정할 수 없었다. 남자를 한둘이 아니라 대여섯은 거느린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아니지. 승윤은 가능해도 송은채는 문란한 행위가 불가능한 환경이었다. 송 회장이 어지간히 마크했어야지. 그 휘하의 경호원 정보도 철통 보안인데.

열렬한 사랑을 하고 있느냐 하면, 그것도 사실상 힘들었다.

MK호텔 객실 사건만 해도 그랬다. 아무래도 송은채는 그날의 진실을 모르는 눈치인데. 눈에 보이지 않는 것까지 컨트롤하는 권기주, 그 미친개가 따로 남자를 만날 수 있는 틈을 줄 리 없었다.

그런 결론을 내리며 안심하던 승윤은 멈칫했다.

송은채 입장에선 자유를 억압하는 권기주가 지긋지긋할 텐데. 그런 놈을 보는 눈빛에 왜 독기가 없지.

승윤은 문득 그런 의문이 들었다. 꺼림칙한 가정이 막 시작되려는데 핸드폰을 수납한 상의 안주머니에서 진동이 왔다.

꺼내어 확인한 이름은 싱가폴.

승윤은 여자와 시작할 때 여행을 데려간다. 여자 이름이 다 거기서 거기니, 실수하지 않도록 여행지 국가 이름으로 저장하는 게 그의 오래된 습관이었다.

“어. 내가 전화하려고 했는데. 저녁에 데리러 갈게.”

승윤은 저만 바라보고 서 있는 직원들을 향해 휘휘, 손짓을 하고는 몸을 돌려세웠다. 핸드폰에서 새어 나오는 애교 있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연회장을 가로질렀다.

직원들의 얼굴에는 일제히 허무하고 어이없는 감정이 번졌다.

* * *

기주는 음대 입구에서 받은 팸플릿을 눈으로 훑었다.

졸업 시즌의 대학은 졸업 작품 보는 재미가 있다고 했던가. 음대도 물론 졸업 공연 준비가 한창이었다.

송은채도 합주 연습이라는 명목으로 뻔질나게 학교를 드나들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무감하게 팸플릿을 훑어내리던 시선 끝에 송은채의 이름이 유독 선명히 보였다.

나는 이름에 이응이 들어가는 게 좋아요. 동글동글한 이미지가 있잖아요. 하고 재잘거리던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지레 양심에 찔렸는지 서둘러 덧붙이던 말도 떠올랐다.

물론 내 성격은 좀 모났지만, 희망 사항은 그렇다고요.

그 뒤에는 뭐라고 툴툴거리기도 했다. 그러다 모순적이라고 생각했는지 아이처럼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던가.

기주는 이내 팸플릿을 덮었다. 그러자 귓가에서 바르작거리던 그녀의 목소리도, 웃음도 뚝 끊겼다.

대신 현실의 송은채가 나타났다. 서너 명의 친구들과 대열을 만들어 걸어오고 있었다. 오른쪽 끝에서 간간이 웃는 게 전부인데도 묘하게 시선을 끌었다.

“저번에 스키장 재밌었는데. 멀리까지 가긴 시간적 여유가 없으니까, 오늘은 클럽 어때? 요즘 클래식만 지겹도록 들었잖아.”

누군가 제안하자 의견이 분분했다. 가만히 귀를 기울이던 은채는 자기도 스키장이 꽤 재미있었다며, 클럽도 좋다고 말을 했다.

기주는 팸플릿을 상의 안주머니에 넣은 후에 뒷짐을 지고 기다렸다. 눈이 마주치자 은채는 또 귀찮아지겠네, 하는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기주는 거리가 좁혀지자 나지막하게 말했다.

“저녁 스케줄에 늦지 않게 도착하려면 지금 가셔야 합니다.”

그 말에 친구들이 웅성거렸다.

“언니 약속 있어요?”

은채는 반항하기도 지친 얼굴로 대꾸했다.

“그랬나 봐. 내가 깜빡했네. 오늘은 나 빼고 가야겠다.”

이후에도 그녀는 아쉬워하는 친구들을 달래는 말을 몇 마디 더 했다. 기주는 뒤에 서서 상황을 관망했다.

상황이 수습된 후에야 은채는 돌아보았다. 미소를 지운 얼굴은 차분했다.

“회장님이 부른 거예요?”

당사자도 모르는 저녁 스케줄 같은 게 있을 리가. 기주는 그렇게 말을 길게 하는 대신 함축했다.

“아니요.”

그녀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나 놀고 싶었는데 무슨 짓이에요?”

“원래 클럽 안 좋아했던 거 같은데.”

“아닌데요. 나 죽순인데.”

“자랑이에요?”

은채가 아랫입술을 질끈, 사리 물었다. 그러더니 휙, 몸을 돌려 친구들을 좇으려고 했다.

“친구들 이미 갔어요. 어딜 가게.”

그녀는 들은 체도 하지 않고 앞만 보고 걸었다. 흔들리는 긴 머리칼이 몸속을 헤집는 기분이었다. 여자의 의도성 없는 모든 것들에도 정신이 아찔해진다. 기주는 얼굴선을 손으로 쓸어내렸다.

은채가 설핏 돌아보는 게 느껴졌다. 따라와 봤자 좋은 꼴 못 볼 거라고 경고하듯이 퉁명스러운 눈초리와 시선이 부딪히는 순간에 깨달았다.

그럴듯한 이유를 아무리 갖다 붙여도 결국은 돌아올 구실일 뿐이었다. 여자에게 흔들리는 건 계획에 없었다는 것도 거짓이다.

다시 만나는 순간 저 작은 발밑을 기며 되찾을 궁리만 해 댈 거, 알았잖아.

기주는 저를 두고 영악한 새끼라며 조소했다.

이윽고 시선을 거둔 은채의 뒤통수에 시선을 고정했다. 플랫슈즈를 또각거리며 걷는 그 뒤로 발길을 얹었다.

* * *

기가 막혀서.

은채는 어이없는 얼굴을 하고 맞은편에 앉은 기주를 쳐다보았다. 저조차도 대학 신입생 때나 몇 번 와 보았나 싶은, 학교 근처의 저렴한 술집인데. 그는 버젓이 따라 들어왔다. 부끄러움은 제 몫이 아니라는 듯 뻔뻔했다.

은채는 흉기보다 더 위압적인 하반신을 싸구려 철제 의자에 구겨 넣고 앉아 있는 그를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마카로니 뻥튀기만 반절 담긴 이가 나간 나무 그릇 하나에, 살얼음 낀 500ml 생맥주 두 잔과는 실소가 나올 정도로 안 어울렸다.

졌다, 졌어.

은채는 반포기한 얼굴로 맥주잔을 집어 들었다. 잔을 가득 채운 채 출렁이는 맥주에 망설임 없이 입을 가져다 대자, 그가 눈을 들었다.

시선이 마주치자 괜한 오기인지, 객기인지 정확히 정의할 수 없는 감정이 불쑥 치밀어 올랐고. 그녀는 눈을 피하지 않고 술을 삼켰다.

권기주도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다소 어두침침한 술집의 조명 탓인지, 아니면 이제 막 몇 모금 마신 술기운 탓인지. 이도 저도 모르겠지만 치켜 올라가는 눈꺼풀의 움직임이 고혹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사이 목구멍은 한도 초과였다. 은채는 눈을 질끈 감으며 반이나 줄어든 맥주잔을 테이블에 쾅, 하고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입가에 축축하게 묻은 거품을 손등으로 스윽, 훔치면서 입을 열었다.

“뭐 하나 물어봐도 돼요?”

기주가 허락한다는 듯이 한쪽 눈썹을 들었다. 두 손은 허벅지 위로 무심히 깍지를 끼웠다. 딴에는 경청한다는 외적 표현 같은데, 진짜 거만해 보였다. 본인만 모르지.

은채는 다섯 손가락에 마카로니 뻥튀기를 하나하나 끼우면서 말했다.

“권기주 씨는 자존심 없어요?”

그가 별 희한한 소리를 다 듣는다는 듯이 픽, 하고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사실 줄곧 궁금은 했었다. 저야 그에게 악감정이 있으니 세컨드 운운하며 골탕 아닌 골탕을 먹이는 중이지만.

권기주는…….

굳이 떠올려 보자면 후회? 아니면 죄책감?

은채는 엄지에 꽂은 과자를 입 안에 넣고 와그작, 소리가 나도록 씹으면서 질문을 이어갔다.

“아, 그냥 얼굴이 두꺼운 거였나.”

“…….”

은채는 슬쩍 그를 쳐다보았다. 그에게선 딱히 반응이랄 게 없었다. 그녀는 침묵에는 침묵으로 맞서면서도 눈을 마주했다.

기주는 무심하게 몸을 늘어뜨리더니 무언가 가늠하듯이 쳐다보았다.

은채는 무심코 마른침을 삼켰다. 유달리 선명한 그의 눈이 술집 조명을 받아 오묘하게 촉촉했다.

그건 뭔가를 기대하게 만든다. 구체적으로 뭘 기대하게 되는 건지는 구분이 되지 않았다. 이 분위기에 대학가 술집이라는 장소까지 한몫해 긴장이 풀린 탓인가.

은채가 괜히 여길 들어왔나, 하고 뒤늦은 후회를 하려는 순간 그가 입을 열었다.

“그게 궁금해요?”

기주가 손으로 허벅지 위에 있지도 않은 먼지를 툭, 툭 털어내며 도리어 물어왔다.

그만큼 너를 사랑한다고 애절하게 고백을 할지, 그만 좀 하라고 질색을 할지. 선이 고운 저 입술에서는 무슨 대답이 나올 확률이 높을까.

전자일까, 후자일까.

“……앞에 거.”

자존심이 없다는, 허무할 정도로 간단하고 명료한 대답이었다. 은채는 미간을 찌푸렸다.

“하?”

그녀가 헛웃음을 치는 것으로 되묻자 기주는 상체를 구부리더니 과자가 담긴 나무 그릇을 손끝으로 낚아챘다. 그 바람에 나무 그릇이 힘없이 그의 앞으로 끌려갔다.

기주는 그릇 안에서 과자를 우악스럽게 한 움큼을 쥐고는 어깨를 벽에 무심히 기대었다. 그러고는 주먹 쥔 손아귀에서 과자를 빼내 우적우적 씹었다.

은채가 넋 놓고 바라보자, 그는 삐딱하게 마주 바라보며 말을 씹어 뱉었다.

“그렇다면?”

“…….”

“이젠 뭘 줄 건데. 거래라면서요.”

역시, 권기주는 반성하려면 아직 멀었다.

은채는 손가락에 남아 있는 과자를 빼서 나무 그릇에 던져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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