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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화. 잘못 걸렸다. (19/31)


19화. 잘못 걸렸다.
2023.05.04.


관장의 목소리는 아주 작은 소음처럼 간간이 들렸고, 큐레이터는 제 할 일을 하는 중이었다.

“자주 보네요.”

기주가 가볍게 읊조렸다.

“우, 우리 아빠가 주관한 행사였어요!”

기에 눌린 김소희는 변명하듯이 중얼거린 직후 곧장 후회한다는 얼굴을 했다. 한낱 경호원을 두려워한다는 게 어지간히 자존심이 상한 모양이었다. 기주는 같잖음이 농축된 웃음을 흘렸다.

“캐릭터에 충실한 건 좋은데.”

김소희는 제법 훌륭한 장치였다. 은채가 아무리 승윤을 그저 대외적인 남편감으로 두려고 해도 불쑥불쑥 회의감을 갖게 할 존재.

“선은 넘지 말라고 했을 텐데요.”

간간이 꾸며서라도 만들어 내던 웃음기마저 사라진 남자의 차가운 얼굴을 보며, 소희의 호흡이 불안정하게 흩어졌다.

처음 보았던 날, 날 것의 위협을 느끼게 했던 남자의 행동이 다시 떠오른 것이다.

* * *

도끼로 문을 찍어 멋대로 침입한 남자.

평소 제멋대로인 한승윤을 송은채에게로 재깍 가게 만든 그 남자를 향해 소희가 덤벼들었다.

“네까짓 게 뭔데. 뭔데 오빠한테 함부로 해!”

소희는 남자의 등이며 어깨를 때리고 밀치며 갖은 패악을 부렸다.

단단하고 거대한 그에게는 그저 솜방망이질에 불과했는지,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동반한 부하 직원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소희는 무감한 반응에 더욱 흥분해서 날뛰었다.

경호원 주제에 감히. 이거 소문나면 이 바닥에서 벌어먹고 살 수 있을 줄 아냐고. 평생 송 회장 밑에 발발 기며 붙어살라고. 거기서 나오는 순간 비참해질 테니까.

소희는 극도의 흥분 상태에서 협박을 넘어 저주에 가까운 말을 지껄였다. 무시로 일관하던 남자가 반응다운 반응을 보인 것은 아주 갑작스러웠다.

“송은채 파혼당하면 너도 쫓겨날 텐데……!”

그 말을 채 완성하기도 전에 남자가 고개만 돌려 쓰윽, 눈알을 내리떴다. 다 돌아본 것도 아니어서, 얼굴 옆면만 드러난 채로 빈정거렸다.

“말하지 않았던가.”

지독히도 낮은 목소리에 소희는 일순 목덜미에 소름이 돋았다.

“너희들이 함부로 기만하고.”

기주는 몸을 완전히 소희 쪽으로 돌려세웠다. 삐딱하게 얼굴을 기울이고 두 손을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로 말을 중얼거렸다.

“폄하할 상대가 아니야, 송은채는.”

주머니에 꽂혀 있던 커다란 손이 뻗어 왔다. 소희는 선득함을 못 이기고 몸을 움츠렸다. 그가 실소를 흘리면서 소희의 머리카락 끄트머리를 한 움큼 움켜쥐었다.

“몰래몰래 해요, 그냥. 지금처럼.”

평생 송은채 앞에 나타날 생각은 말고, 쥐 죽은 듯이. 없는 사람처럼. 기주가 알아들었냐는 듯이 상체를 구부려 시선을 맞춰 왔다. 소희는 그 순간 어떤 확신 같은 게 들었다.

미친놈한테 잘못 걸렸다고.

* * *

“이거,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합니다.”

김 관장이 너스레를 떠는 소리에 소희는 회상에서 겨우 빠져나왔다. 기주는 여전히 소희에게 시선을 박아 넣은 채 관장과의 거리를 감안해서 마지막으로 말을 덧붙였다.

“웃어요. 들키면 안 되잖아.”

어떻게든 들키고 싶겠지만.

기주는 소희의 속내를 꿰뚫고 있었다. 그녀는 한승윤이 진짜 사랑하는 건 본인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계산기 두드려 결혼하겠다는 결심마저 사랑이 흔들어 놓을 수도 있다고 착각에 빠져 있고.

어찌 보면 순진한 건가.

기주는 가늘게 웃었다.

* * *

은채는 아침 햇살 아래에서 전신 거울을 보며 원피스 매무새를 정돈했다. 기대도 하지 않는 드레스 피팅이지만 어쨌거나 몇 벌은 입어 보아야 할 것이다.

옷을 여러 벌 입어 보는 게 귀찮아서 평소 쇼핑을 즐기지 않지만, 예비 신랑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하고 감당해야 하는 부분이었다. 그러려면 입고 벗기 쉬운 원피스가 제격인 듯했다.

은채는 오직 실용성만을 목표로 선택한 원피스 위에 캐시미어 코트까지 걸친 후에 방에서 나왔다.

드레스 피팅을 앞두고 있다는 말에 당사자보다 더 기대를 하던 함안 댁이었다.

그 바람에 어제저녁에는 원치도 않는 마스크 팩을 얼굴에 붙이고 자야만 했다. 당일에 음식을 많이 섭취했다가 드레스가 맞지 않을 수도 있다며 간단히 요깃거리만 준비하겠노라 선전포고도 했었다.

그러니 다이닝 룸에는 잠깐 들렀다 나오면 될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랬는데.

“아가씨 따라다니려면 뭐라도 좀 먹여서 보내야 할 거 같아서.”

일순 함안 댁의 말에 눈을 드니 예상하지 못했던 인물이 식탁에 앉는 게 아닌가. 은채는 그 유유자적한 태도에 말문이 막혔다.

“준비가 빠르네요.”

권기주가 인사라고 하기에는 모호한 말을 던지며 아몬드 한 알을 입에 넣더니 천천히 씹었다.

질투심.

소유욕.

독점욕.

그런 게 있다면 아침부터 이렇게 부지런 떨 수 없지 않나. 하다가도 곧장 생각을 중단했다.

그런 원초적인 감정이 그에게 있을 리 만무하다.

“눈이 일찍 떠졌어요. 설레서.”

은채의 말에 그가 설핏 웃었다. 은채는 그를 보자마자 입맛이 뚝 떨어졌지만, 내색하지 않고 제 자리에 앉았다.

함안 댁은 지체 없이 그릭요거트 한 스푼을 떠서 볼에 옮기고, 그 위에 갖가지 견과류와 과일을 얹어 그녀의 앞에 놓았다.

은채가 평소 식욕도 없고 식탐은 더욱 없는 편이라 툭하면 끼니를 건너뛰기 일쑤여서 변덕을 부리기 전에 먹이겠다는 집념이 느껴지는 신속함이었다.

“우리 아가씨가 어릴 때부터 잔병치레도 많고, 몸이 예민했는데.”

함안 댁이 은채의 머리카락을 한 번 쓸어 주고는 분주하게 냉장고로 가면서 말했다.

“그 어린 것 주변에 경호가 항상 붙었었지.”

기주는 제법 큰 호두 한 알을 반으로 툭, 쪼개면서 그녀를 관망했다. 겨우 블루베리 한 알을 티스푼에 올려 입으로 가져가고 있었다. 그것마저 마지못한 얼굴이었다.

하기 싫은 것도 저를 길러준 함안 댁의 권유면 하는 시늉이라도 하는 편이었다. 그러니 저 여자는 정이 많은 축에 속한다. 저는 인정하지 않겠지만.

“근데 그 사람들이 운전이 본업도 아니고, 대개는 젊은 사람들이니 운전이 좀 거칠어?”

함안 댁은 지금 생각해도 안타깝다는 얼굴로 우려 놓은 보리차를 컵에 따랐다.

“학교 갔다 오면 게워 내는 게 일이었지, 아주.”

종종걸음으로 다가온 함안 댁이 그녀의 앞에 보리차 컵을 놓았다. 그러고는 어서 먹으라며 재촉을 했다. 그러자 미적거리던 은채는 견과류를 얹은 그릭요거트를 한 스푼 입에 넣었다.

“그러니 권 팀장님이 돌아온 게 얼마나 다행이게?”

종잡을 수 없는 이야기의 흐름에 은채가 휙, 고개를 들었지만 이미 늦었다. 함안 댁의 열린 입은 닫힐 줄 모르고 질주를 했다.

“권 팀장님이 운전한 차를 탄 뒤로는 차멀미가 없었다니까?”

은채는 그만, 이라고 말하기 위해 입을 떼었다가 그냥 닫았다. 어차피 주워 담지도 못할 말이었다. 그 와중에 맞은편에서 느껴지는 시선에 얼굴이 녹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기주는 흥미롭다는 얼굴로 턱을 괴며 대꾸했다.

“그래요? 몰랐는데. 칭찬 한마디를 안 하셔서.”

안 그래도 없는 입맛이 이젠 완전히 도망을 갔다. 은채는 결국 절반도 비우지 못한 채로 티스푼을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의자를 스윽, 뒤로 밀고 일어났다.

“잘 먹었어요.”

함안 댁은 거의 그대로 남아 있는 요거트 볼을 슬쩍 보긴 했지만,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얼굴을 볼 수가 없어지자 남자의 눈이 등으로 옮겨서 붙었는지 등가죽이 따가웠다. 그 강도는 다이닝 룸을 벗어나도 전혀 강도가 약해지지 않았다.

등에 흔적이 남은 것 같았다.

은채는 한숨을 쉬며 거실 귀퉁이에서 걸음을 멈춰 세웠다. 기껏 준비해서 내려와 놓고 다시 방으로 올라가는 것은 비효율적이고, 그렇다고 밖으로 나가서 기다리는 것도 비효율적이었다.

결국 여기서 권기주를 기다렸다가, 같이 나가는 게 합리적인 선택이다.

그런 결론을 내린 은채는 갑자기 부아가 치밀었다.

평소엔 송명환 회장이 부르지 않으면 다이닝 룸에는 기웃거리지도 않는 남자였다. 오늘은 무슨 바람이 불어서 얼굴을 들이밀어 아침을 휘저어 놓는 걸까.

저 머릿속은 정말이지 알 수가 없다고, 그녀는 생각을 했다.

다행히 오래 기다릴 필요는 없었다. 생각이 끝날 무렵에 권기주가 다이닝 룸에서 휘적휘적 나왔다.

은채는 괜히 민망한 기분이 들었다. 권기주가 운전한 차에 탔을 때만 멀미가 없었다는 게 밝혀진 것이 싫었다.

아니. 부끄러운 건지, 싫은 건지.

정확하게 정의를 내리기 곤란하다는 쪽이 더 알맞은 표현이었다.

그런 반응을 즐기는 건지 뭔지. 그가 굳이 코앞까지 와서 말을 걸었다.

“오늘도 부드럽게 할게요.”

누가 들으면 오해하기 쉬운 말이었다. 해석에 따라 낯뜨거운 상상이 되기도 하는. 은채는 고른 숨을 쉬며 그를 쳐다보았다.

운전이라는 주어를 생략한 것이 다분히 고의적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은채는 설핏 인상을 쓰며 그것을 지적했다.

“당연한 걸 일일이 말할 필요 없어요. 그리고, 주어 붙여요.”

“코너링은 좀 급했던 거 같기도 하고.”

그가 혼잣말하듯이 중얼거렸다. 은채는 듣기 싫다는 내색을 했다.

“됐고, 빨리 나가기나 해요. 늦기 전에.”

재촉을 받은 기주의 목울대가 진동했다. 웃은 것이다. 은채는 입술을 깨물었지만, 그가 이미 앞장을 선 후라서 뭐라고 하기에는 늦었다. 하는 수 없이 뒤를 따르면서 은채는 한숨을 쉬었다.

대문 앞에는 이미 시동 걸린 차가 대기 중이었다. 미리 지시를 받고 차고에서 차를 옮긴 운전 기사가 운전석에서 내리면서 꾸벅 묵례를 했다.

은채도 어색하게 고개를 까딱이는 것으로 인사를 받고는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기주가 문을 열어 준 뒷좌석에 올라탔다. 그런 뒤에는 그가 쓸데없는 말을 늘어놓기 전에 팔짱을 껴서 방어 태세를 갖추었다.

이윽고 운전석에 올라탄 기주는 재킷의 단추를 끌렀다. 그런 후에는 상의 안주머니를 더듬으며 뭔가를 확인하기도 했다.

이제 곧 출발하겠거니, 했지만 감감무소식이었다.

의도적으로 창문 밖을 응시하고 있던 은채의 고개가 결국 정면을 향했다. 등을 보인 그를 다시 한번 재촉했다.

“안 가요?”

그러자 한 손을 핸들에 얹은 채로 기주가 돌아보았다. 그냥 돌아본 게 아니라 위아래로 훑어보는 게 느껴졌다.

의도를 알 수 없는 행동에 은채는 일순 얼이 빠졌다. 그 사이에 그는 느릿하게 자세를 고쳤다.

이윽고 차가 움직였다. 곧 따뜻한 히터가 차 안을 가득 채웠다.

은채는 원피스를 입는 바람에 신을 수밖에 없었던 검은 스타킹을 손끝으로 문질렀다.

* * *

얼굴에 주먹을 날리면 내 손이 더 아프려나.

드레스 숍에 들어섰을 때 여직원에게 농을 던지고는 뺀질거리며 웃는 한승윤을 보자마자 은채는 잠깐 그런 고민을 했다. 물론 금세 머릿속에서 삭제했다.

제집 안방인 양 소파를 차지하고 있던 승윤은 그녀를 발견하고는 마지못한 티를 팍팍 내면서 다가왔다.

“왔어요?”

“약속을 엄수하는 편이라서요.”

은채가 그렇게 말하며 지나쳐 걸어가자, 승윤은 소리 없이 헛숨을 터뜨렸다. 하여간에 보통이 아닌 여자란 말이지. 하는 눈빛으로 돌아보기도 했다. 그 옆으로 기주가 묵례도 없이 지나가자, 도끼눈을 뜨고 노려보았다.

이것들이 쌍으로 무슨 약을 처먹었나.

승윤은 금방이라도 불만을 제기할 듯이 둘을 번갈아 보았다.

“피팅 룸은 어디죠?”

은채가 고상한 어조로 직원에게 물었다. 권위적인 태도가 아닌데도 상대를 압도하는 우아함이 있었다. 직원은 유명 인사는 물론이고 상당한 재력가도 여럿 상대해 봤지만, 젊은 여성에게서 이 정도의 품위가 나온다는 것이 신기한 눈빛이었다.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직원이 앞장을 서자, 은채는 묵묵히 따라 걸어갔다.

아름다운 신부님이라며 벌써 진심이 담긴 감탄을 들어도, 그녀의 얼굴은 조금의 설렘도 비치지 않았다.

세컨드가 함께 있는 상황에서 마음 없는 약혼자와의 웨딩드레스 피팅.

아무도 겪어 본 적 없을 이런 상황 속에 은채는 예의 미소를 띠고 나선, 곧바로 미소를 감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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