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불쾌감일까, 흥분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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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화. 불쾌감일까, 흥분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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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화. 불쾌감일까, 흥분일까.
2023.05.08.
“혹시 무용 전공이세요?”
드레스를 입는 것을 도와주던 직원이 감탄하며 물었다.
“아니요.”
“이렇게 뼈대가 가는 분은 무용하는 분 외에는 처음 봤어요.”
은채는 전신 거울을 통해 직원을 향해 가볍게 웃어 주었다. 이 직원은 립 서비스가 상당히 좋은 편이다. 주변에서 평판이 좋은 이유였다.
사실 이 결혼에 손톱만큼의 흥미조차 느끼지 못하는 은채도 웨딩드레스를 입은 자신의 모습만큼은 신기했다. 송명환 회장을 따라 파티나 행사에 참석할 때 드레스를 입어 본 적은 있었지만, 그것과는 사뭇 달랐다.
은채는 호기심 어린 눈을 하고 전신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그러다가 새삼 결혼을 한다는 아찔함이 명치를 짓눌렀다.
언젠가 하게 될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그게 이런 식일 줄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는데.
“티아라까지 머리에 얹으면 정말 잘 어울릴 것 같습니다.”
직원이 호들갑스럽게 말했다. 그 말에 은채는 씁쓸하게 웃었다.
“좋아하실 거 같아요.”
직원이 커튼을 걷기 직전에 그렇게 덧붙였다. 예비 신랑인 승윤을 두고 하는 말이겠지만, 은채는 그 말에는 냉소를 지었다.
아니나 다를까.
커튼이 젖혀지고 마주한 한승윤은 핸드폰으로 게임에 열중하고 있었다. 하필이면 뜻대로 되지 않고 있었는지 저속한 욕설을 뱉는 타이밍이었다. 그 바람에 직원은 당혹감에 휩싸인 채 그녀의 눈치부터 보았다.
정작 은채는 놀랍지도 않다는 얼굴이었다. 승윤은 드레스를 입은 그녀와 핸드폰을 번갈아 보며 성의 없는 감상평을 내뱉었다.
“오, 괜찮네. 난 마음에 드는데, 은채 씨는 어때요?”
촌스러운 비즈 장식이 전신을 휘감고 있는데. 이게 괜찮다고.
은채는 그걸 지적하기도 입 아프다는 표정으로 몸을 돌렸다.
“다른 드레스 입어 보죠.”
예비 신랑 반응이 왜 저래, 미친 건가. 하는 아연한 눈빛으로 서 있던 직원이 그녀의 제안을 듣고는 허둥지둥 커튼을 닫았다.
은채는 흘러내린 머리카락 한 가닥을 넘기며 척추를 곧추세웠다. 그 이후로도 몇 벌의 드레스를 더 입어 보았고, 한승윤이 건성으로 보는 일이 반복되었다.
2부 드레스를 입었을 때는 직원이 입고 걸어 보라고 권유를 했다. 그러기도 귀찮았지만, 어쨌거나 자신이 해야 하는 일에는 충실한 편인 은채는 밖으로 나왔다. 그새 피로가 쌓였었는지, 좀 살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승윤은 어디로 갔는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2부 드레스를 입어 보러 들어갈 무렵에 전화를 받으면서 나가는 것 같긴 했는데. 별로 궁금하지도 않았다.
한숨을 돌리며 몇 걸음 걷던 은채는 기주를 발견했다. 눈을 감은 채 담벼락에 기대어 서 있는 그를 보자마자 은채는 생각했다.
부친에게서, 한승윤에게서 나를 지키기 위해서는 사람이 필요하다. 서로의 밑바닥까지 알고 있으니, 다른 사람보다는 기주가 나은 선택지였다. 껍데기일 뿐이더라도 붙들어 놔야지.
오기에서 시작된 일에 이제는 명분까지 생겼다.
은채는 이 상황이 우스운 동시에 기묘했다.
파란만장한 세상에 휩쓸린 주제에 태평하기 짝이 없는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의 손이 닿았던 입술을 제 손으로 매만지면서.
예전 같았으면 담배를 피웠을 거 같은 자세인데. 지금의 그는 어딘가 공허해 보였다.
그러게 왜 어울리지도 않게 담배를 끊었을까.
속으로 그렇게 빈정거리는 순간, 기주가 갑작스럽게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은채는 태연한 얼굴로 다가가 입을 뗐다. 말을 하면서 숨을 뱉을 때마다 입술 사이로 하얀 입김이 피어올랐다.
“김소희 말이에요. 더 자세히 알아 와요.”
기주가 설핏 눈매를 좁혔다.
“그 여자한테 왜 관심이 생겼지.”
“쉽게 포기할 것 같지 않아요.”
그는 은채가 제 앞에 멈춰 선 순간 재킷을 벗었다. 서두르는 기색 없이 그녀의 어깨 위로 재킷을 덮어 주면서 나직하게 말했다.
“해 달라는 대로 내가 다 하는 건 아닌데.”
은채는 턱을 세우며 올려다보았다. 그는 피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더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촌스러운 비즈여도 반짝이며 그녀를 빛내 주는 드레스를.
“……예쁘네.”
은채의 동공이 일순 흔들렸지만, 아주 잠깐에 불과했다. 그녀는 앙다문 입술을 열었다.
“줄 거 생각났는데.”
“…….”
“확인해 보고 싶은 게 있다고 했잖아요.”
그에게 한 걸음 더 바짝 다가선 은채가 그의 타이를 낚아챘다. 기주는 팽팽하게 늘어진 타이와 그녀를 번갈아 보았다. 네가 뭘 어쩌겠냐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 바람에 은채는 더욱 오기가 발동했다. 그대로 타이를 잡아당겼다.
그는 순순히 끌려와 주었고, 은채는 그대로 차가운 입술 위에 제 입술을 포개었다. 무겁고 시원한 향기가 훅 풍겨 왔다. 쌉싸름한 코오롱 같은.
심장이 욱신거렸다.
자박-.
멀리 뒤에서 낙엽이 짓밟히는 소리가 울리는 듯했지만, 이상한 통증에 눈꺼풀을 들어 올린 은채는 그저 숨만 내쉴 뿐이었다. 그가 눈을 내리뜬 채 보고 있었다. 처음부터 눈을 감지 않은 듯했다.
이윽고 그녀는 무덤덤한 얼굴로 그의 가슴팍을 밀어냈다. 줄 거 줬다는 태도였다.
기주는 손으로 턱을 쓸어 만지며 낮게 웃었다.
“이거 좋아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네.”
은채는 무슨 말이냐고 묻지 못한 채 몸을 굳혔다. 그의 손이 그녀의 목덜미를 잡아채더니, 우악스럽게 끌어당겼다.
당황한 읏, 소리조차 기주에게 집어 삼켜졌다. 순간적으로 몸을 웅크리자, 그는 그것조차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얼굴을 움켜쥐었다.
은채는 벼락에라도 맞은 양 몸이 진동했다. 거침없이 밀고 들어오는 행위를 속수무책으로 감당했다.
배 속이 자글자글 끓고, 두 다리가 후들거렸다.
불쾌감일까, 흥분일까.
그것을 가늠하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모든 사고 회로가 정지된 채 오로지 육감에 지배당하며 기주에게 매달릴 뿐이었다.
망측함 따위는 이미 머릿속 저편으로 날아갔다.
그가 입안에서 가장 여린 곳을 깨무는 순간에는 흐느끼기도 했다. 그것조차 기주가 모조리 삼켰지만.
한 가지 생각만이 희미하게 떠올랐다.
남자는 어쩌지 못하게 만드는 능력이 아주 탁월하다고.
* * *
내가 이래서 장사치들 상대를 안 한단 말이지.
잠시도 가족과의 저녁 식사에 집중하지 못하던 승윤은 그 말에 고개를 들었다. 부친이 잠깐 치매에라도 걸렸나, 싶었다.
장사치 중 장사치인 송명환 회장과 사돈을 맺고 싶어 안달이 난 양반이. 그 바람에 최근 자신의 초라함이 최고치에 달했는데. 갑자기 무슨 가당치 않은 소리란 말인가.
하기야, 부친의 언행 불일치가 어디 한두 번이었던가.
승윤은 이젠 일일이 반응하기도 귀찮다는 듯이 눈을 돌리고, 잘라놓은 망고를 한입에 욱여넣었다. 냉장실에 들어갔다 나온 모양인지 이가 시릴 정도로 차가웠다.
속으로 욕을 씹으며 티슈 하나를 빼는데, 허벅지에서 핸드폰이 진동했다. 부친의 눈을 피해 발신자가 소희임을 확인한 승윤은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이만 가 봐야겠습니다. 시간이 늦었네. 세종 도착하면 밤이겠어.”
“어머, 내 정신 좀 봐. 저녁만 먹이고 보낸다는 게.”
모친이 걱정스럽다는 듯 따라 일어섰다. 한지창 의원은 일에 열중하는 것을 대견한 듯이 바라보고.
미리 출장 핑계를 대 두었던 게 효과가 있는 것이다. 승윤은 현관 밖까지 따라 나오려는 모친을 저지하고는 연신 손목시계를 확인하는 척하며 집을 빠져나왔다.
대문 앞에 서자, 정 비서를 시켜 미리 빼돌려 놓았던 스포츠카가 헤드라이트를 번쩍이며 다가왔다.
승윤은 운전석에서 내린 정 비서에게 차량 키를 건네받으면서 당부를 했다.
“집에서 전화 오면 출장 길어질 수도 있다고 대충 둘러대.”
“네, 알겠습니다.”
정 비서의 대답까지 챙겨 들은 후에 차에 타려던 승윤이 문득 돌아보았다.
“수고했어.”
정 비서는 고개를 조아리는 것으로 답을 했다. 한승윤이 매분 매초 악질인 것은 아니었다. 감정이 널을 뛰는 인간이라 종잡을 수가 없어서 문제일 뿐.
승윤은 부하 직원의 수고를 알아 준 자기 자신에게 취한 듯한 얼굴을 하고는 운전석에 탔다.
도착지는 호텔 이강이었다. 권기주에게 수모를 당했던 MK에는 발길을 끊은 지 오래였다. 호텔 이강은 MK보다는 못해도 트렌디한 인테리어와 마케팅으로 최근 급부상을 하고 있었다. 젊고 허영심 깊은 여자들을 데리고 오기에는 딱이었다.
주차장에 차를 주차한 뒤에 엘리베이터에 탑승한 승윤은 삐뚤어진 타이를 고쳤다. 그 바람에 불쾌한 그림이 불현듯이 떠올랐다.
드레스를 입은 송은채가 권기주의 타이를 붙잡았고, 입을 맞추던 장면.
아니, 사실 그보다는 둘이서 교환하던 시선이 뇌리에 강렬하게 남아 있었다. 거기서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무언가를 느꼈다. 기분 더러운 기억이었다.
나지막하게 욕설을 내뱉은 승윤의 귀에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는 알림음이 들려왔다. 이어서 문이 열렸다.
딱 잘라서 정의할 수 없는 더러운 기분을 환기하기 위해 승윤은 일부러 경쾌하게 발을 떼었다.
라운지 Bar에 홀로 앉아 기다림에 지쳐 가던 소희가 곧장 그를 발견하고 눈을 반짝였다.
“오빠.”
소희가 곡선이 아름다운 몸을 살랑살랑 흔들며 불렀을 때, 승윤은 이만하면 되었다는 생각을 했다. 송은채. 그깟 여자 따위는 제게 아무것도 아니라고.
“어, 오래 기다렸어?”
“아니야. 가족 식사 있다고 했었잖아.”
배려심이 듬뿍 담긴 말에 승윤이 소희의 머리를 손으로 쓰다듬으며 옆자리에 앉았다. 그러고는 저를 알아보는 바텐더에게 늘 먹던 거로 달라는 말로 주문을 하고는 자세를 고쳐 세웠다.
소희는 그린 올리브와 치즈, 체리가 담긴 접시를 밀어 주며 몸을 더욱 밀착했다. 그러면서 승윤의 표정을 살폈다.
저 말고도 승윤에게 여자가 더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대부분 길어 봤자 한 달 만에 끝이 난다는 것도.
여자와 정리를 하는 날이면 승윤은 어김없이 고가의 선물을 했다. 아무리 한눈을 팔아 봐도 결국 김소희보다 나은 여잔 없다는 걸 깨달아서일 거라고, 소희는 그렇게 믿었다. 그래서 그가 선물을 해 올 때마다 기쁘게 받고는 했다.
집안 사정으로 결혼을 해야 한다고 고백할 때는 더했지.
국내에 몇 대 없다는 외제차를 공수해 주었다. 결혼은 형식일 뿐이고, 달라지는 건 없다는 말도 했다.
평소 자기 부모 이외의 사람들 비위는 맞춰 본 적도 없고, 그럴 생각도 없어 보이던 남자였는데.
그게 사랑이 아니면 뭐란 말인가.
소희는 승윤의 마음이 제게 있다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래도 결혼 상대가 궁금하긴 했었다.
결혼한다는 소식을 처음 접했을 때부터였는지. 아니면 MK호텔 사건으로 그 여자의 흉을 보는데 승윤이 그 여자 이야긴 하고 싶지 않다고 딱 잘랐을 때부터였는지.
시기를 특정할 순 없지만 그랬다.
결국 타이밍을 잡아 송은채와 만나고, 정체까지 일부러 들킨 거나 다름이 없었다. 후환은 좀 두렵긴 했다.
약점 잡히는 걸 싫어하는 승윤이 화를 낼 수도 있다고 믿었다.
그랬는데.
“그날 서운했지?”
승윤이 그렇게 묻자, 소희는 순진한 척 눈을 크게 뜨는 것으로 되물었다.
“송은채 말이야. 내가 애인 앞에서 와이프 끼고 다니는 쓰레기는 아닌데. 본의 아니게 일이 그렇게 됐네.”
승윤에게 고자질을 했을 거라고 생각했던 소희는 명치가 싸해졌다. 이거, 진짜 보통 아니네. 하는 생각이 들었으나 표정 관리를 하느라 입꼬리가 경련했다.
그런데 소희가 무어라고 대답하기 전에 승윤이 방금 막 건네받은 위스키 잔을 소리가 나도록 내려놨다.
“그래. 그런 쓰레기는 아닌데 말이야.”
알 수 없는 짜증에 휩싸인 승윤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진동했다.
소희가 괜찮냐는 듯이 어깨를 감싸는데, 그 손까지 신경질적으로 쳐냈다. 그런 뒤에는 낄낄 웃음을 흘렸다.
저답지 않게 노력을 해 봤는데, 승윤은 도무지 용납할 수가 없었다.
결혼할 남자 앞에서, 애인을 끼고 다니셨다?
발칙하네, 아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