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화. 비올라는 거짓말을 못 한다. (21/31)


21화. 비올라는 거짓말을 못 한다.
2023.05.11.


기주는 자신의 오피스텔 문을 열고 들어섰다. 현관 센서등 아래에서 느긋하게 로퍼를 벗고 거실로 발을 디뎠다. 창이란 창은 죄다 암막 커튼으로 막아 놓은 탓에 한낮에도 어두컴컴했다.

곧장 다이닝 룸으로 걸어가는 동안 어둠을 밝혀 주는 유일한 빛이었던 센서 등이 훅 꺼졌다. 그런데도 그의 움직임은 거침이 없었다.

저벅저벅 다이닝 룸으로 들어가 냉장고에서 탄산수 한 병을 꺼내어 뚜껑을 돌려 따더니, 탄산수 입구에 입을 대면서 다이닝 룸을 나와 거실 소파로 이동했다.

고개를 뒤로 꺾어 탄산수를 마시며 소파에 앉은 기주는 곧 나태하게 몸을 늘어뜨렸다. 거실 창으로 맞은편 건물의 전광판 불빛이 스며들자 한쪽 눈매를 찌푸렸다.

손끝을 조여 세 모금 만에 내용물이 동이 난 빈 병을 잡고 목을 뒤로 눕혔다.

까딱, 까딱.

하릴없이 빈 병을 흔들던 손끝의 움직임이 이내 멎었다.

기주는 소리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드레스 룸으로 가서 손목시계를 풀어 진열장 안에 넣고, 재킷을 벗은 후에 타이의 매듭을 풀고 셔츠의 단추를 끌렀다. 그런 다음에는 바로 옆에 위치한 욕실로 걸어갔다.

한 손으로 목덜미를 잡고는 그 반대 방향으로 목을 기울이자 우드득, 하고 뼈 소리가 났다. 기주는 제가 하는 짓거리가 우스워서 푸스스, 웃음을 흘렸다.

별 같잖은 것도 기억이랍시고 곱씹고 있네.

그런 생각을 하며 샤워 부스로 들어가 물을 틀었다. 흐르는 물에 몸을 흠뻑 적시며 목덜미를 쓸었다.

그걸 무모하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당돌하다고 해야 하나.

그녀가 감히 겁도 없이 입술을 비벼 왔다.

그래. 그건 입맞춤도 뭣도 아니고 그냥 비빈 거였다.

고작 그거에 눈이 돌아서 달려들기는.

기주는 그때의 자신을 입매를 비틀어 비웃었다.

그에 비해 송은채는 지극히 태연한 얼굴이었다. 그 멀쩡한 얼굴에 하마터면 속아 넘어갈 뻔했지.

금방 멎긴 했지만 잘게 떨리던 손가락, 긴장했는지 차게 식은 입술.

어설프기 짝이 없는 도발에 기꺼이 함락당해 주었다. 충동이었다. 그다음에는 여자의 반응이 어떨지 궁금했고.

계속 능수능란한 척 몸이라도 더 붙여 오는지, 아니면 제 꾀에 제가 넘어가 수치심에 얼굴을 붉히는지.

예상은 다 빗나갔다. 그녀는 행위가 끝난 뒤에는 건조한 얼굴로 밀치고 갔다.

무반응이라.

늑골이 묵직하게 꺼지는 느낌이었다. 그 감각이 아직도 생생했다.

기주는 욕설 비슷한 말을 혀끝을 씹어서 뭉개며 샤워 부스에서 나왔다. 타월로 젖은 머리를 털며 나와서는 곧장 서재로 들어갔다. 걸을 때마다 물이 뚝뚝 떨어졌으나 개의치 않았다.

노트북을 열어 전원을 켠 후에 파일을 불러와 메모를 간단하게 남겼다. 그 속에는 송명환 회장을 중심으로 송은채와 한승윤, 그리고 한지창 의원의 사진이 있었다.

기주는 유독 송은채 사진에 눈을 고정하다가, 마지못해 전원을 껐다.

그리고 다시 드레스 룸으로 들어왔다. 비슷비슷한 블랙슈트 중에서 망설임 없이 한 벌을 꺼내 입고는 정작 타이를 고를 때는 고심을 했다.

겨우 골라 목에 두른 것이 송은채에게서 받은 하사품이었다.

이런 걸 목줄이라고 하나.

기주는 타이의 매듭을 지으며 조소했다. 그런 다음에는 기어코 손목시계도 송은채가 하사한 것으로 골라 손목에 채웠다.

* * *

부촌은 대체로 평이하다. 간간이 지나다니는 차량이 있을 뿐 보행하는 이도 극히 드물었다. 견고한 담벼락 뒤에 또 견고한 담벼락을 보고 있노라면 꼭 펜스를 쳐 둔 것 같다.

차 안에 앉아서 시간이 정지한 거 같은 풍경을 무감하게 응시하던 기주의 눈이 소음에 반응했다. 육중한 대문이 열리는 소리였다.

그 사이로 송은채가 걸어 나왔다. 케이프 디자인의 반코트 아래 통이 넓은 부츠를 신고서 나오다가 함안 댁을 돌아보았다. 그러면서 차분하게 반 묶음 한 머리가 바람에 치렁치렁 날렸다.

기주는 두 팔을 머리 뒤로 한 채 깍지를 끼고 등받이에 깊숙이 기대었다. 사이드미러에 송은채가 그대로 보였다.

함안 댁이 그녀의 어깨에서 비올라 케이스를 뺏어 들려고 하자, 한사코 거절하면서 웃었다.

함안 댁이 입도 안 댄 듯 보이는 케일 주스를 권하자 마지못해서 한 입 머금었다. 그런 뒤에는 더 먹이려는 함안 댁과 거부하는 은채 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졌다.

어제, 자신을 차갑게 밀어내던 여자와는 사뭇 달랐다.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고, 생동감 있는 몸짓을 하고.

차이점을 인식한 기주의 눈매가 삐뚜름해졌다. 긴 팔을 서슴없이 뻗어서 차량의 스타트 버튼을 짓눌렀다.

시동 걸리는 소리가 예고도 없이 들리자 송은채가 멈칫하며 돌아보았다. 차 안에 누가 있는지 알고서 응시하는 눈이었다. 이윽고 그녀가 함안 댁에게 무어라 말을 한 뒤에 곧은 다리를 뻗으며 계단을 내려오기 시작했다.

기주는 문을 열고 내렸다. 그녀가 자신의 등장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뒷좌석 문을 스스로 열려고 하자, 반 박자 빨리 문고리를 잡았다. 그러고는 극진히 대접하는 양 문을 열고서 고개를 까딱였다.

은채는 비올라 케이스를 먼저 안으로 밀어 넣은 후에 그 옆으로 올라앉았다. 그런 다음에 몸을 구겨 넣느라 흐트러진 코트 자락을 툭, 툭 정리했다.

기주는 제게 눈길조차 주지 않는 그녀를 물끄러미 보다가, 느릿하게 문을 닫았다. 좀 과하다 싶게 선팅이 된 창문 너머 유려한 실루엣을 빤히 보다가 돌아섰다.

여자는 그날에 벌어진 행위가 아무 일도 아니란 듯 태연하기만 했다.

기주는 겸허하게 고개를 끄덕이다가, 어금니를 맞물었다. 턱이 으스러질 듯 일렁이는데, 정작 표정은 무심했다.

그가 운전석에 탄 후 차 안은 정적이 장악했다. 누구 하나 입을 열지 않은 채로 학교까지 도착했다.

기주가 뒷좌석 문을 열어 준 뒤에 비올라 케이스를 받아 들었다. 아니, 받아 들려는 시도에서 그쳤다. 은채가 비올라 케이스를 짊어진 어깨를 비틀어 피하는 바람에 무산되었다.

“됐어요. 혼자 갈게요.”

그녀가 그렇게 말하며 비올라 케이스의 손잡이 부분을 고쳐 잡았다. 기주는 허공에서 갈피를 잃은 손을 한 번 비볐다.

“그러시든가.”

그가 무심하게 말하면서 그 손을 바지 주머니로 찔러 넣었다.

“근데 왜 나 안 봐요.”

그녀가 무슨 소리냐는 듯이 목을 세웠다. 기주는 무언가를 가늠하는 듯이 굽어다 보았다.

“아무렇지 않다면서.”

그 말에 은채는 고개를 숙였다. 이어서 답답하다는 듯 나지막한 한숨 소리가 그녀의 작은 입술에서 나왔다.

“영리한 줄 알았더니…… 완전 숙맥이네.”

은채는 혼잣말을 하듯이 중얼거렸다. 그는 그녀의 숱 많은 머리를 조이고 있는 버건디 색상의 리본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 바람에 숙연할 정도로 조용했다.

“김소희에 대해서나 더 알아 와요.”

“…….”

“계산은 확실히 해야죠.”

이윽고 은채가 고개를 들었다.

들리기나 했는지. 들어서 상처를 받은 건지.

뭔지 모를 얼굴을 하고 서 있는 기주를 보며 그녀는 점차 눈썹을 찡그렸다. 그의 시선이 눈썹의 일그러짐을 따라서 움직였다.

“……키스 대신이라는 건가.”

은채는 그렇다는 대답 대신 묵묵히 바라보았다. 일직선으로 뻗은 그의 눈길과 그대로 마주쳤다.

둘의 시선은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못한 채 충돌했다.

“…….”

“…….”

기주의 목울대가 짧지만 급격하게 일렁였다.

“내가 어디까지 바랄 줄 알고 그래요.”

말을 씹어 뱉은 후에 그는 돌아섰다. 바람에 롱 코트가 흩날렸다. 은채는 언뜻 그가 핸드폰을 꺼내 드는 것을 보았다.

기주는 운전석에 올라타기 직전, 핸드폰을 한 번 터치하고는 그대로 차 안으로 몸을 집어넣었다.

동시에 은채의 반코트 주머니에서 핸드폰이 진동했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여 확인하는 사이 차가 출발했다.

그녀는 느리게 고개를 들었다. 차는 빠르게 거리를 늘려 갔다. 학교의 정문까지는 순식간이었다. 이제 코너만 돌면 차는 완전히 시야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은채는 문득 아득히 멀어진 기분이 들었다.

이래도 안 떨어져? 이래도? 하고 지독하게 군 것은 자신인데, 어째서일까. 우습지도 않지.

황폐한 눈을 아래로 떨군 채로 은채는 주머니를 더듬어 핸드폰을 꺼내었다.

권기주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설명 한 줄 없이 파일만 하나 덩그러니.

휑한 채팅방을 잠시 바라보고 있는데, 갑자기 화면이 까맣게 변하면서 전화가 왔다. 발신자는 한승윤이었다.

달갑지 않은 이름이 눈에 담기자마자 은채는 지긋지긋하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받아 봤자 영양가 없는 소리만 할 게 뻔한데. 그렇다고 안 받을 수는 없고.

은채는 제풀에 끊기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쯧, 하고 혀를 차고는 마지못해 화면을 드래그했다.

여보세요, 하고 말하기도 전에 승윤이 불쑥 말했다.

-내일 좀 만납시다.

전화 매너 하고는. 은채는 그것을 지적하기도 입 아픈 얼굴을 하고서 무덤덤하게 대꾸했다.

“더 할 일이 남아 있어요?”

그 말은 결혼식을 위한 준비를 다 마쳤으니 되도록 만나고 싶지 않다는 우회적인 표현이었다.

마음만 같아서는 결혼식 때나 보면 되지 않느냐고 하고 싶었지만, 나름 배려를 한 것이다. 한승윤이 그 깊은 마음을 헤아릴 줄 알면 다행일 텐데.

-할 일보다는 할 말이 있죠.

놀랍게도 승윤은 그녀의 의도를 간파했다. 안타깝게도 만나자는 요구는 철회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은채는 엄지로 핸드폰의 측면을 두드리며 고심을 했다.

만나서 좋은 꼴을 본 적이 없는데.

그런 생각이 저변에 깔려 있어서였는데, 승윤은 그것마저 꿰뚫고 있었다.

-안 들었다간 후회할 텐데.

전화를 통해서였는데도 그의 빈정거림이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은채는 상대하기 피곤하다는 얼굴을 하고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알아서 해요. 난 보는 걸로 알고 있을 테니까.

승윤의 그 말을 끝으로 전화가 뚝, 끊겼다. 은채는 통화가 끊어진 핸드폰을 스윽, 쳐다보았다.

좋지 못한 예감이 엄습해왔다.

“송은채! 은채야.”

그녀는 이름이 불린 방향으로 굳은 몸을 억지로 비틀어 세웠다. 한겨울에도 얼음이 가득한 테이크아웃 커피잔을 든 채 미래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 * *

불협화음이 연습실에 울려 퍼졌다. 활을 든 손을 허공에 멈춰 세운 채 은채는 상체를 구부리고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이미 여러 번 합을 맞춰 왔기에 그녀의 컨디션 난조를 눈치챈 이들은 침묵했다.

연주가 마음대로 안 풀릴 때 섣부른 조언이나 참견은 금물이다. 누군가 분위기를 환기하기 위해 좀 쉬었다 하자며 창문을 열었다.

은채는 천천히 자세를 세웠다. 자신조차도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호흡은 여전히 거칠었다.

“……미안. 잠깐 화장실 좀.”

그렇게 말한 후에야 은채는 허공에 두었던 팔을 내렸다. 그러라고 입을 모으는 이들을 뒤로하고 서둘러 연습실을 빠져나왔다.

시야에 들어온 복도가 유난히 공허했다.

은채는 화장실을 향해 빠르게 걸었다. 팔도 다리도 다 뻣뻣한 느낌이 들었다. 그럴수록 몸에 힘을 주고 걸었다.

이윽고 화장실에 도착한 은채는 곧장 세면대에서 찬물을 틀었다. 한여름에도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할 정도로 추위를 못 견디는데. 지금은 정신을 바짝 들게 할 만큼 차가운 물이 필요했다.

은채는 두 손에 물을 가득 담아 얼굴에 연거푸 뿌렸다. 그런 뒤에 고개를 들었을 때는 얼굴의 광대 부근이며 코며, 군데군데 빨갛게 물이 들어 있었다.

그녀의 시선이 방황하듯 얼굴을 살폈다. 입술이 평소보다 부어 있었다. 권기주가 강하게 빨아 댄 탓이었다.

은채는 물기가 남아 있는 손으로 입술을 박박 문질렀다. 그런데 감각이 잊히기는커녕 오히려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가 안으로 파고들 때. 여린 살을 깨물 때.

심장은 의지를 배반하고 멀미라도 앓는 것처럼 울렁거렸었다.

은채는 힘이 빠진 몸을 지탱하기 위해 손바닥으로 세면대를 감싸듯이 짚었다. 허망한 눈으로 방금 마구 문지른 탓에 더욱 붉어진 입술을 노려보았다.

비올라는, 거짓말을 못 한다.

한 몸처럼 챙기다 진짜 한 몸이 되기라도 했을까.

16838057973932.jpg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