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화. 감상에 젖다. (22/31)


22화. 감상에 젖다.
2023.05.15.


은채는 책망하듯 거울을 노려보았다. 흥건하게 맺힌 물이 핏기 하나 없는 얼굴선을 따라서 흐르다가 턱 끝에서 뚝뚝 떨어져 내렸다. 그 물은 아이보리 색상의 스웨터에 스며들어 얼룩처럼 자국이 남았다.

얼마간 자신의 모습을 한심하게 보고 있었을까.

은채는 지친 얼굴로 벽면에 툭, 기대었다. 손을 씻느라 세면대에 내려놓았던 핸드폰을 움켜쥐고 측면 버튼을 눌러 화면을 켰다.

오늘이 무슨 요일인지, 주말은 며칠 뒤인지 따위를 계산하고 살았던 적도 없는데 문득 눈길이 날짜에 꽂혔다.

한참이나 그것을 응시하던 그녀의 몸이 벽을 타고 주르륵 미끄러져 내렸다. 이윽고 바닥에 웅크린 채 괴로운 숨을 토했다.

이틀 뒤가 엄마의 기일이었다.

이맘때면 이유 없는 고독함이 몰려왔는데. 이번엔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지독한 결핍에서 벗어나게 되어 기뻐해야 할지. 아니면 그것조차 잊을 만큼 다른 데 정신이 팔린 것을 자책해야 할지.

은채는 작은 몸을 미약하게 진동하다가, 천천히 무릎을 세워 일어섰다. 익숙한 듯, 덤덤한 얼굴을 하고 세수를 마저 했다.

감상에 젖는 것을 경계하는 것은 그녀의 오래 묵은 습관이었다.

* * *

합주 연습이 늦게 끝난 것은 유감이었다.

은채는 비올라 연주가 뒤늦게 잘 풀리는 바람에 욕심을 버릴 수가 없었다. 출출하다며 그만하겠다는 이들에게 뇌물로 샌드위치까지 사 주면서 붙잡아 놓았다.

그녀는 그렇게 해서라도 자신의 부족함을 어떻게든 채우고 싶었다. 연습이 끝나고 나왔을 때, 벌써 석양이 지고 있는 하늘을 보고서는 아차 싶었다.

십 분을 기다리는 거도 웬만한 인내심이 아니고선 지루한데. 권기주는 어림잡아 네 시간은 기다린 게 된다.

아트홀의 계단을 내려가는 은채의 두 다리가 전에 없이 조급했다. 눈으로는 바쁘게 주변을 훑었는데, 정작 그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그녀는 발을 구르는 속도를 점차 늦추었다. 건조한 바람이 부는 길 위에 우두커니 서서, 원형의 연못 주변에 조성된 휴게 공간을 쳐다보았다.

그는 그곳 벤치에 앉아 있었다. 느슨하게 깍지 낀 손을 허벅지 위에 두고, 눈을 감은 얼굴이 언뜻 잠이 든 것도 같았다.

연못을 중심으로 네 갈래의 길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출몰한 이들이 권기주를 보며 쑥덕거리는 게 보였다.

톤 다운된 네이비 색상의 캐시미어 코트와 정장 바지, 윤기가 흐르는 구두. 화려한 동시에 묵직한 느낌이 어느 모로 보아도 대학생으로는 볼 수 없는 탓일까.

은채는 비올라 케이스의 손잡이 부분을 꾹, 눌러 잡았다.

춥지도 않나.

불쑥 시비조로 중얼거린 그녀는 마지못해 터벅터벅 걸어갔다. 연못 위로 앙상한 나뭇가지들이 걸을 때마다 푸른 잎을 달았고, 버석하게 마른 귀에는 청량한 녹음이 희미하게 들려왔다.

과거의 기억이 예고도 없이 떠올라 버린 것이다.

그해 여름은 유독 무더웠다. 그녀가 개도 안 걸린다는 여름 감기에 걸려 버린 지독히도 운이 없는 여름이기도 했다.

‘진짜 치사하게 이럴 거예요?’

은채가 시도 때도 없이 흐르는 콧물을 닦아 내느라 빨갛게 헐어버린 코를 하고서 불만조로 물었다. 강의가 끝나는 시간에 맞추어 아트홀 앞 벤치로 온 기주의 손에는 아이스크림이 들려 있었다. 그것도 그녀가 제일 좋아하는 민트초코 맛 아이스크림이.

‘내가 애도 아니고, 감기 걸렸다고 아이스크림도 못 먹게 하는 건 너무하잖아요.’

그녀의 불만이 하늘을 찌르자 그는 못 이기는 척 주는 듯했다.

‘줄게요.’

그 말에 반짝, 눈을 빛내며 손을 뻗을 때만 해도 은채는 그렇게 생각했다. 아이스크림을 든 팔이 갑자기 허공으로 늘어나는 것을 보면서도 순진하게 그렇게 믿었다.

‘감기 다 나으면.’

기주의 팔은 만화처럼 늘어난 것이 아니었다. 아이스크림을 그녀가 가져갈 수 없는 높이에 둔 것이다. 은채는 크게 실망한 얼굴로 기주를 흘겨보았다. 앙칼진 눈초리에도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아이스크림을 먹으려고 했다.

‘초딩.’

은채는 안 어울리게 사탕이나 초콜릿 같은 단 걸 좋아하는 그의 취향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기주는 가볍게 웃음을 흘리고선 아이스크림을 한 입 크게 베어 물었다. 무슨 광고라도 찍는 것처럼 깔끔하게.

심보가 꼬인 마당에 갑자기 장난기에도 발동이 걸렸다. 은채는 그가 한 입 더 먹으려 할 때 아이스크림 밑동을 툭 쳤다. 그 바람에 기주의 입 주변에 아이스크림이 잔뜩 묻어 버렸다.

잘생긴 얼굴이 한순간 민트색으로 범벅이 된 것을 보며 은채는 배를 잡고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혀로 윗입술을 핥으며 어이없다는 듯 실소를 터뜨렸다.

별거 아닌 거에 웃던 우리가 있었구나.

옛 기억을 갈무리하며 그의 앞에 당도하자, 푸른 잎사귀가 우수수 떨어지고 귓가에는 싸늘한 바람 소리만이 들이쳤다.

은채는 턱을 세운 채 시선을 내리떴다. 인기척을 느꼈는지 그가 감은 눈을 천천히 떴다.

시선을 마주친 채로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그녀가 굳은 입술을 억지로 달싹였다.

“차는요.”

용건은 그것밖에 없다는 듯 그 말 이후에는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잠깐 정적이 흘렀다.

기주는 느릿하게 몸을 일으켜 세웠다.

“여기서 기다려요. 가져올 테니까.”

그 말을 한 뒤에 그는 주차장 방향으로 긴 다리를 뻗었다. 저벅저벅 걷는 발소리에 타박타박, 하는 작은 발소리가 겹쳐졌다. 청개구리 같은 송은채가 무거운 비올라 케이스를 들고 굳이 따라나선 것이다.

고개를 돌려 보는 듯하던 기주는 이내 무심히 정면을 바라보며 걸었다. 은채도 묵묵히 발을 옮기고, 또 옮겼다. 그렇다고 해서 목적지까지 같은 것은 아니었다. 갈림길 앞에서 그는 주차장으로, 은채는 차량이 지나다니는 길목으로 향했다. 꼭 남남처럼.

잠시 뒤, 기주는 차를 끌고 왔다. 은채는 그 잠깐 사이 추웠는지 귀가 빨개진 채 길목에 서 있었다.

기주는 쯧, 하고 혀를 차며 브레이크를 짓밟았다. 차가 정차하자, 은채는 그의 도움을 기다리지 않고 뒷좌석 문을 열었다. 그런 뒤에는 낑낑거리며 비올라 케이스를 구석으로 밀어 넣었다.

팔꿈치를 창가에 얹고 그 손에 턱을 괸 채 기주는 그녀가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작은 손으로 비올라를 야무지게도 챙기고는, 만족한다는 얼굴로 그 옆에 탄다.

고집하고는.

기주는 소리 없이 웃고는 핸들을 고쳐 잡았다. 아득바득 혼자서 하겠다는 걸 보면서 사람 참 안 변한다는 생각을 했다.

차량 출입구를 통과해서 도로에 진입하면서 그는 흘러가듯 말했다.

“졸업 연주회라고 했던가.”

은채가 그건 왜 묻냐는 듯 그를 쳐다보았다. 아니, 백미러에 비친 고요한 눈을 바라보았다는 것이 더 알맞은 표현이었다.

그녀는 인상을 썼다. 세로 길이가 짧은 백미러를 통해서는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탓이었다.

“언제예요, 그거.”

“……그건 왜요?”

“거기 초대받는 거 꽤 의미 있다면서요.”

그걸 또 어디서 들었을까. 하기야, 그는 요즘 저 때문에 덩달아 아트홀에 자주 드나들었다. 졸업을 앞둔 이들의 대화를 들었을 테고. 요즘 누굴 초대할지 말지가 자주 대화의 주제가 되는 것도 사실이다.

그건 그렇고, 그걸 왜 궁금해할까.

은채는 그에 대한 반발심을 팔짱을 끼는 것으로 드러내면서, 여유롭게 말했다.

“그럼 알겠네요. 내가 초대할 사람이 누구일지.”

“……한승윤인가.”

그 이름을 입에 올리는 기주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배어 있었다. 단순히 착각이라고 하기에는 묘하게 거슬렸다.

“초대하지 말지.”

그 말에 은채는 소리 내어 콧방귀를 흘렸다.

“왜 그래야 하는데요?”

질문을 하면서 동시에 너한테 그럴 수 있는 자격을 부여한 적 없어, 라고 말하는 눈빛으로 응시했다.

공교롭게도 그때 차가 정지 신호에 걸렸다. 브레이크를 밟아서 차를 멈춰 세운 뒤에 기주가 눈을 들었다. 백미러를 통해서 시선이 부딪혔다. 은채는 피하지 않고 눈길을 받았다.

침묵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무시와 인정과 체념.

곧게 뻗어 오는 그의 시선에서 그것들이 다 섞여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문득 그 침묵을 깨 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그 키스 말이에요.”

그가 계속하라는 듯 목을 삐딱하게 세웠다.

“옛날 같지 않더라고요.”

“…….”

“재미없었어.”

그 말을 한 직후에 신호가 초록색으로 바뀌었다. 액셀러레이터를 짓밟은 소리가 먼저 들린 후에 그의 시선이 정면으로 향했다.

은채는 손을 뻗어서 창문을 여는 버튼을 눌렀다.

제 유치함과 졸렬함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 * *

팀장님, 하고 부르는 곤란한 목소리에 기주는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아트홀에서 송은채를 픽업해서 집 앞에 내려주던 무렵이었다. 송명환 회장의 호출을 받고 청담동 일식집으로 곧장 이동을 했었다.

둘이서 사케를 세 병 정도 마셨고. 대리 기사를 불러 따로 가겠다고 해도 회장이 차 한 대로 가자는 바람에 실랑이가 벌어졌고.

뭐 그런 시시한 과정은 각설하고, 만취까진 아니더라도 송 회장은 꽤 취한 상태였다. 회장의 전담 운전기사는 감히 깨울 엄두도 못 내고 저만 바라보고 있었다.

슬쩍 상체를 틀어서 뒤를 보니, 송명환 회장은 곯아떨어져 있었다.

“회장님은 제가 부축할 테니까, 주차만 수고해 주시죠.”

그렇게 말하며 기주는 안전벨트를 풀고 조수석 문을 열고 내렸다. 코트 안 재킷의 단추를 풀면서 뒷좌석의 문을 열었다. 목을 젖힌 채로 곤히 잠든 송명환 회장의 어깨를 가볍게 흔들었다.

“회장님, 집 앞입니다.”

송명환 회장이 게슴츠레 눈을 뜨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비몽사몽 간에도 품위는 챙기는 양반이었다.

기주는 차에서 내린 회장을 부축하려고 했지만, 송명환 회장이 손사래를 치며 거절했다. 그 대신 그의 어깨를 친근하게 감싸 쥐며 말을 했다.

“내가 자네 수고하는 거 다 아네.”

송명환 회장은 곽현섭을 처리한 일을 ‘수고’라는 단어로 간단하게 축약했다. 불필요한 건 소리, 소문 없이 처리하는 것 따위는 회장에겐 흔한 일에 불과하다는 증거인 셈이었다.

“과찬이십니다.”

“앞으로도 이렇게만 해. 이렇게만.”

그가 묵례로 대답을 대신하자, 송명환 회장은 흐뭇한 얼굴로 계단을 향해 다리를 뻗었다. 기주가 곧장 부축하려 하자 손을 들어 제지했다.

“됐네. 자네도 들어가 쉬어야지.”

말대로, 송명환 회장은 비틀거리지 않고 걸어갔다. 기주는 그 뒤로 느긋하게 다리를 뻗었다.

대문을 열고 들어가자, 고요에 휩싸인 저택이 보였다. 그의 시선은 벽을 더듬고 올라가 2층에서 멈추었다.

창문이 빈틈없이 닫혀 있었다. 커튼까지 쳐 놓았는지 내부가 보이지 않았다. 조명을 켜 놓았다는 것만이 간신히 보였다.

송명환 회장은 본채의 현관문을 열기 직전에 문득 돌아보았다.

“아, 권 팀장.”

기주는 시선을 내리고, 척추를 곧게 세우는 것으로 대답을 했다.

“어쩌다 이 길로 들었는지 몰라도 말이야.”

그 말에 기주의 눈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어둠에 가려지지 않았더라면 송명환 회장도 눈치를 챘을 만큼 확연했다.

회장은 주먹 쥔 손으로 제 가슴팍을 두어 번 때리면서 자신 있게 말했다.

“내가 확실히 보상하지.”

그 말을 하며 송명환 회장은 호쾌하게 웃었다. 곽현섭이 무슨 일을 벌이기 전에 움직여서 재앙을 미연에 방지한 것이 어지간히 마음에 들었나 보다. 확실히 회장은 기분파였다.

기주가 묵례로 인사치레를 하자, 인사는 되었다는 듯이 손을 내저으면서 현관문을 열고 들어갔다.

탁, 하고 문이 닫힌 뒤에는 정적이 찾아왔다.

기주는 정적 속에 우두커니 서서 닫힌 문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어쩌다 이 길로 들었긴.

이윽고 불한당처럼 입매를 비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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