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4화. 같이. (24/31)


24화. 같이.
2023.05.22.


송명환 회장은 괘씸하다는 눈으로 계단 위를 잠시간 바라보다가 몸을 돌렸다. 혹시라도 회장이 은채를 잡으러 올라갈까 노심초사한 얼굴로 서 있던 함안 댁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회장은 그에게 너도 들어가 쉬라고 말하며 방으로 들어갔다. 묵례하던 기주는 문이 닫히자, 이마에 주름을 만들며 눈을 들었다.

이 넓은 저택에서 송은채가 몸을 숨길 곳은 온실 아니면 제 방뿐인데, 온실은 철거가 되었으니.

기주는 계단을 턱, 턱, 턱 올라갔다. 뒤에서는 함안 댁이 어떻게 좀 해 보라며 응원 아닌 응원을 하는 소리가 따라왔다.

2층 거실에 올라선 기주는 찬찬히 사위를 훑었다. 죽은 듯 조용했다.

저벅저벅.

그가 발소리를 내면서 은채의 방문 앞까지 걸어갔다. 노크를 하기 위해 팔을 굽힐 때부터 알았다. 아무도 없다는 것을.

똑똑.

당연하게도 기척은 들리지 않았다. 기주는 허공에 둔 빈손을 움켜쥐고서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폐허처럼 망가진 온실 안에서 숨이 꺼져 갈 듯 괴로워하던 송은채의 얼굴이, 하필 뇌리를 스쳤다.

기주는 몸을 돌려세웠다. 계단을 한 칸씩 밟고 내려가다가, 이내 박차고 뛰어 내려갔다.

그녀의 꼿꼿이 세운 등. 곧은 걸음걸이. 텅 빈, 눈동자.

그런 것들이 머릿속을 무차별적으로 헤집었다.

기주는 대문을 열었다. 마침 집 앞에 차를 대고 운전석에서 내리던 광일이 무어라고 말을 하는데, 그는 그대로 지나쳤다. 열려 있는 운전석에 타서 문을 닫았다.

아릿한 두통이 머리를 짓누르고 있었다.

* * *

선산은 비에 잠겼다. 은채가 끊임없이 내리는 비를 맞으면서 모친의 묘 앞에 선 것은 한 시간 남짓. 그동안 머리는 물론이고 입고 있던 옷까지 완전히 물에 젖었다. 공허한 눈이 주위를 하염없이 훑었다.

국화꽃 한 다발이 놓인 묘, 빗물이 흐르는 비석.

은채는 그 앞으로 천천히 무너져 내렸다. 스스로 진흙에 무릎을 빠트리고, 그대로 엎어졌다. 습관처럼 곧게 세우던 등을 말고, 소리 없이 흐느꼈다.

그리움. 원망. 죄의식.

외면해 왔던 그 감정들에 짓눌린 것 같다고, 은채는 생각했다.

그러다 고개를 들었을 때, 운무에 휩싸인 채 올라오는 실루엣을 발견했다.

이 추운 산에 블랙슈트만 입고. 젖은 흙에 로퍼가 푹푹 박히는데도, 태연하게 발을 빼내어 올라오고 또 올라온다.

그와 눈이 마주쳤을 때, 은채는 망막이 시렸다. 곧게 뻗어 들어온 시선이 동공에 박힌 것 같은 느낌이었다.

기주는 그 반응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뚜벅뚜벅 걸어왔다. 그러고는 검은색 장우산을 펼쳐서 그녀의 머리 위로 받쳐 들었다.

비에 흠뻑 젖은 그의 몸에서 물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은채는 문득, 진창에 처박히는 것보다 더 깊은 수렁으로 빠지는 기분이 들었다.

우산에 빗물이 투둑투둑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면서, 그녀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필요 없다고, 너나 쓰라고, 우산을 든 그의 손을 밀쳐 낸 은채는 추위에 굳은 몸을 삐걱거리며 걸었다.

기주는 몸의 중심이 뒤로 쏠리면서 두어 걸음 물러나는가 싶더니, 이내 그 자리에 삐딱하게 섰다. 타박타박 걸어서 잘도 멀어지는 그녀를 보면서 목덜미를 잡았다. 그러면서 고개를 뒤로 젖히는가 싶더니 다른 손에 든 우산을 툭, 하고 내던졌다.

그 소리에 은채가 멈칫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진흙탕에 처박힌 우산 안으로 비가 들이치고 있었다.

아, 하고 그녀가 탄식을 뱉었다.

기주는 태연하게 발을 뗐다. 그새 벌어진 거리를 거침없이 좁혀오면서 말했다.

“같이 맞아, 그럼.”

그의 길고 단단한 팔이 은채의 어깨를 감쌌다. 뭐 하는 짓이냐고 따져 물을 힘도 그녀는 없었다.

비가 오면 오는 대로 같이 맞아 주는 그가 시야에 아득하게 담겼다.

* * *

샤워를 마치고 나온 은채는 욕실 문턱을 소심하게 밟은 채로 어색하게 고개를 떨궜다. 분명 셔츠인데, 길이는 원피스만큼 길고 품은 지나치게 컸다. 권기주 특유의 향이 짙게 밴, 그의 셔츠였다.

달칵, 하고 문이 닫히는 소리에 기주가 핸드폰을 귀에 붙인 채로 흘깃 돌아보았다.

“학교 아트홀에서 찾았습니다.”

말을 하는 그의 새카만 눈동자가 은채의 젖은 머리카락에서 셔츠 아래로, 드러난 무릎으로, 아직 물기가 남은 발등까지 차례대로 떨어져 내렸다.

“……연습을 하시겠다고. 네. 그렇게.”

은채가 자신의 발가락에 힘이 들어갔다는 것을 알아차릴 무렵, 통화가 끝났는지 그가 귀에서 핸드폰을 떼어 소파로 툭 던졌다.

던져지는 핸드폰을 눈으로 좇은 것을 시작으로, 그녀는 엉거주춤하게 선 채로 오피스텔 내부를 대강 훑어보았다.

그의 집인 듯한데. 자주 드나드는 편은 아닌지 바닥에 윤기마저 흘렀다.

기주가 휘적휘적 가는 방향을 따라 눈을 옮기자, 비닐도 뜯지 않은 인터폰이 눈에 들어왔다. 그 외에도 사용감이 느껴지지 않는 가구며, 전자제품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왜 여기로 왔을까.

은채는 그새 말라버린 목구멍으로 침을 삼키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젖은 재킷이 잘 벗어지지 않는지 어깨를 비틀더니, 단번에 벗었다. 셔츠도 물에 젖어 몸에 척척하게 들러붙어 있었다. 근육으로 잘 짜인 속살이 훤히 비쳤다. 은채는 순간 아랫배가 저릿저릿했다.

곧이어 그가 셔츠의 단추를 풀며 다이닝 룸으로 걸어갔다. 젖은 정장 바지가 바닥에 질질 끌렸다. 덕분에 그가 지나간 자리에는 물기가 남았다.

은채가 젖은 바닥을 응시하는 사이 기주는 냉장고 문을 열었다.

일렬로 정리된 생수병과 탄산수병을 한 번 훑어보더니, 생수병 하나를 꺼내 뚜껑을 돌려 땄다. 입구에 곧장 입을 대려다 말고 은채를 흘깃, 보았다. 먹을 거냐고 묻는 대신 팔을 반쯤 뻗었다. 그녀가 고개를 젓자 더 권하지 않았다.

은채는 시선을 더 들어 목을 뒤로 꺾은 채 물을 삼키는 그를 쳐다봤다. 정확히는 도드라진 목울대가 위아래로 들썩거리는 것에 시선을 빼앗겼다. 오래 지속된 것은 아니었다. 생수가 단숨에 동이 난 탓이었다.

주시당하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기주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한 손으로 우그러뜨린 페트병을 쓰레기통에 던져 넣으면서 이동을 했다. 시야 밖으로 완전히 사라졌다가, 이내 수건을 들고 돌아왔다.

그러고는 거실 가운데 서서 빤히 쳐다보는 게 아닌가. 가까이 오라는 듯이.

은채는 가만히 서서 그런 기주를 마주 바라보았다.

대치 상태로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기주가 저벅저벅 다가왔다. 그녀는 숨을 삼킬 뿐 물러서지 않았다. 물러설 곳도 없었지만.

그는 맨발로 현관 바닥을 밟고 서서 수건으로 은채의 머리카락과 얼굴을 닦았다. 그 손길이 너무 서툴렀다. 어색하고. 그렇지만 조심스러웠다.

닦아 주기 쉽도록 고개를 숙인 채 묵묵히 있던 그녀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여기.”

은채가 나지막하게 꺼낸 목소리에 그의 움직임이 단박에 멎었다.

“권기주 씨 집이에요?”

질문을 받은 기주는 잠깐 침묵했다. 은채는 재촉 대신 고개를 들었다. 눈을 내리뜬 그의 동공이 일순 더욱 짙어지는 듯했다.

“……불편해요?”

그렇게 되물으면서도 기주는 손을 움직였다. 길고 단단한 손가락을 머리카락 깊숙이 넣어 부드럽게 문질렀다. 괜찮다고 말하듯이.

누가 볼까. 들키진 않을까.

은채는 그것들을 무의식적으로 의식하느라 딱딱하게 응축되었던 감정이 으스러지는 것을 느꼈다.

뭐가 이렇게 여유로울까. 어딘가에 근거는 있겠지, 싶다가도 역시 대책이 없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한승윤이 알아요.”

은채는 승윤이 무엇을 알고 있다는 건지 구태여 설명을 덧붙이지 않았다. 기주는 대충 알만 하다는 듯 한쪽 입매를 비틀었다.

“나란히 비 맞고 집에 들어가는 건 수상하고.”

“…….”

“뒤도 안 밟혔고.”

가까이서 들리는 목소리에 은채는 이상하게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만큼이나 열기를 머금은 남자의 눈을 도무지 감내할 수가 없어 말하는 입술과 턱에 시선을 죽어라 고정했다.

이윽고 그가 손길을 거두었다. 발소리가 멀어지더니, 이내 생활 소음이 들려왔다. 은채는 목을 세워서 쳐다보았다. 그가 물을 받은 냄비를 불에 올리고 젖은 소매를 걷고는 치킨 스톡을 꺼냈다. 팔에 핏줄이 투두둑 불거져 나왔다.

순간, 은채는 눈시울이 뜨거워서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기주는 끓는 물에 무언가를 넣었다. 그녀는 그 모습을 눈도 깜빡이지 않고 응시했다.

그러기를 한참이었다.

그가 두 손으로 아일랜드 식탁을 움켜쥐며 고개를 떨궜다. 얼핏 나지막한 한숨도 들린 것 같았다.

곧 그가 뜨거운 김이 올라오는 접시를 아일랜드 식탁에 내려놓았다.

“와서 먹어요.”

은채는 천천히 식탁으로 다가갔다. 그가 만든 것은 치킨 스튜였다. 눈시울이 뜨거운 걸 넘어서 아득했다. 선뜻 손을 대지 못하고 막막함에 목구멍이 아팠다.

기주는 그 망설임을 거부로 해석했는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불안하면 가죠.”

그 말을 한 뒤에 자리를 뜨려던 그의 몸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돌아서려는 기주의 젖은 소매를 은채가 붙잡은 것이다.

싫다.

은채는 거칠어진 숨을 고르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송 회장이 있는 곳은 어디든 가기 싫은 마음에 심장이 격동했다.

곧이어 그가 고개를 돌려 내려다보는 것이 느껴졌다. 얼핏 그의 눈꼬리가 붉게 물든 것이 보였다.

은채는 그런 생각이 불쑥 들어 입술을 앙다물었다.

손가락으로 그러쥔 그의 셔츠가 따듯하게 느껴졌다.

왜. 왜 또 권기주가.

그 순간에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런 은채의 말간 눈과 시선이 마주친 순간 기주의 팔뚝에 힘줄이 곤두섰다.

그녀의 눈은 언제나 원망과 불신으로 똘똘 뭉쳐 있었는데. 그것들이 무슨 이유에선지 자취를 감추고 드러난 동공은 어이가 없게도 깨끗했다.

슬쩍 눈을 내리자, 주저주저하면서도 소매 끝을 절박하게 붙잡고 있는 손이 보였다. 볼품없이 희게 질려선 보잘것없는 힘으로.

그걸 보는데, 기주는 머리끝이 지끈거렸다.

“뭐 하자고.”

그가 잠긴 목소리로 읊조리자, 은채의 한쪽 어깨가 안으로 말렸다. 소매 끝을 붙잡은 팔은 미세하게 진동하고 있었다.

그녀의 텅 빈 눈이 아스라이 일렁이더니, 이윽고 기주의 소매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그 순간 그는 제 몸 안에서 피가 폭발적으로 맥동하는 것을 느꼈다.

“나는.”

입을 떼면서 기주는 자신의 소매를 움켜쥔 은채의 손을 잡고 뚝 떼어 냈다. 일순 흔들렸다가 이내 잠잠해지는 그녀의 눈에 시선을 고정했다.

“기회를 줬어요.”

“…….”

그가 낮게 중얼거린 말을 미처 듣지 못한 은채가 설핏 눈썹을 찌푸리다가, 이내 동공이 크게 뜨였다. 기주가 무지막지한 힘으로 그녀를 아일랜드 식탁 위로 끌어 올린 탓이다.

식기가 뒤로 와르르 밀렸다. 은채는 자세를 잡기 위해 주춤거리고. 그 찰나도 허용할 수 없다는 듯 기주가 그녀의 턱을 들어 입술을 맞붙였다. 불덩이처럼 뜨거운 입술이 은채의 차게 얼어붙은 입술을 거칠게 비벼 댔다.

“흐으읍……!”

은채는 머리끝이 쭈뼛쭈뼛 설 정도의 흥분감에 휩싸였다. 물에 빠진 사람처럼 팔을 허우적거리자 친절하게도 기주가 그 팔을 붙들어 자신의 목에 두르게 도왔다. 강인한 목덜미에 무작정 매달리게.

은채는 그의 몸이 불가사의한 열기를 뿜으며 잘게 떨리는 것을 피부로 느낀 순간 울컥, 하고 눈물이 차올랐다.

기주는 그녀의 다리를 손으로 움켜쥐었다. 움켜쥐면 움켜쥐는 대로 짓눌리는 허벅지를 끌어다 제 몸에 더욱 붙였다.

아.

기주가 문득 입술을 떼어 내며 탄식을 뱉었다. 뜨겁게 달아오른 이마를 그녀의 목덜미에 묻고 가쁜 숨을 쉬었다.

은채는 그의 젖은 머리칼을 손가락 사이사이로 감싸며 눈을 질끈 감았다. 이대로 시간이 멈추었으면 좋겠다는 미친 생각이 강렬하게 들었다. 그의 씨근덕거리는 거친 숨소리가 귓속을 가득 채우는 지금, 머릿속이 마구 뒤엉켰다.

가까스로 목을 세운 기주는 흥분감으로 번들거리는 눈으로 그녀를 굽어다 보았다.

선산에서 속절없이 무너지는 것을 발견했을 때부터였나. 아니면 다른 남잘 원한다고 말할 때였을까. 그것도 아니면 재회했을 때인가.

욕구의 시작이 언제였는지를 가늠해 보던 기주는 이윽고 중단했다.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그녀는 기묘하게 발발 떨고 있다. 그것을 목격한 순간에 간신히 유지하고 있던 무언가의 퓨즈가 툭 끊어지는 것을 느꼈지만, 동시에 그녀의 몸이 툭 쓰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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