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5화. 아무것도 하지 마. (25/31)


25화. 아무것도 하지 마.
2023.05.25.


은채는 아득한 정신 속에서 헤매었다.

계절은 현재와 같은 겨울이지만 피부로 느껴지는 습도와 건조함에서 확연한 차이가 있었다. 놀이기구를 탄 것처럼 어딘가로 떨어지는 추락감과 함께 심장에서 오한을 느꼈다. 은채는 그때, 이것이 꿈속임을 눈치챘다.

어디선가 옥신각신하는 소리와 함께 그녀는 꿈속의 자신과 혼연일체가 되었다. 그녀는 단정하게 교복을 입고 거실에 앉아 있었다. 극도의 불안감으로 몸이 경직되는 것을 느낀 순간, 벼락같은 고함이 귓전을 때렸다.

‘입 다물지 못해!’

송명환 회장의 목소리였다. 은채는 소리를 따라 고개를 휙, 돌렸다. 꿈속임을 증명하듯, 뿌연 시야에 굳게 닫힌 안방 문이 들어왔다.

‘어떻게…… 어떻게 변명조차 안 해요?’

그리운 모친의 목소리였다. 애처로운 흐느낌에 가까웠다.

은채가 본능적으로 몸을 일으키는 순간, 앞길이 막혔다. 줄곧 거실 한 가운데를 지키고 서 있던 회장의 비서가 곧장 막아선 탓이다.

그녀가 날이 선 눈을 들어 노려보아도 비서는 한 점의 위협도 느끼지 않는 평온한 얼굴로 시선을 마주했다. 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느낄 수 있었다. 움직이지 말라는 경고를.

은채는 움직이지 못했다. 어릴 때부터 통제를 받아온 탓에 몸에 밴 습관이었다.

바보같이.

‘어딜 가!’

높아진 모친의 음성이 끝에는 쩍쩍 갈라졌다.

‘이거 놔! 안 놔?!’

송명환 회장의 입에서 쇳소리가 났다. 위협적이었다.

그 순간 벌떡 몸을 일으켜 세운 은채가 막아서는 비서를 있는 힘껏 밀치고 달려갔다. 안방 문을 벌컥 열어젖히자, 아찔한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송명환 회장이 두툼한 손을 들어 병색이 완연한 모친의 뺨을 내려치기 직전이었다.

은채는 꿈인 줄 알면서도 주체할 수 없는 분노로 몸이 발발 떨렸다.

‘……봐.’

잘 안 들렸는지 송명환 회장이 눈썹을 구겼다.

‘손만 대 봐. 죽여 버릴 거야!’

은채가 몸을 크게 들썩거리며 앞으로 튀어 나가려는 순간, 뒤에서 나타난 비서가 어깨를 잡아챘다.

송명환 회장은 콧방귀를 뀌면서 데리고 나가라고 턱짓을 했다. 비서는 두 손으로 은채를 짐짝처럼 끌고 나갔다.

‘이거 놔. 놓으란 말이야!’

‘이러다 지각하겠습니다.’

질질 끌려서 나가던 은채는 헛숨을 흘렸다. 지금 지각이 문제냐고 묻는 눈빛으로 쏘아보는데, 비서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대로 끌려나가 몸이 차에 실렸다.

그 직후에 잠깐 암전이 되었다. 꿈속에서는 시간의 흐름도 빨랐다.

다시 시야에 거실이 눈에 들어왔다. 창문 너머 이글이글한 노을이 보였다. 하교를 한 듯했다. 거실을 가로지르던 중에 은채는 문득 도망가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곧장 안방 문을 열었을 때, 은채는 몸에서 피가 다 빠져나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모친이 바닥에 쓰러진 채 움직임이 없었다.

깊은 절망감만을 안은 채 다시 암전이 되었다. 또다시 달라진 습도를 느꼈다. 은채는 자신이 꿈에서 깨어났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도 절망감은 그대로였다.

눈을 깜빡였다. 눈물로 번진 시야에 낯선 천장이 들어왔다. 그 안으로 흐릿한 실루엣이 불쑥 침투했다.

“……엄마?”

무의식적으로 말을 뱉은 입안이 썼다. 차츰 또렷해진 시야에 담긴 이는 모친이 아니었다.

“……권기주……?”

그였다. 은채는 쓰게 웃었다. 고여 있던 눈물이 울컥울컥 범람하더니, 기어코 관자놀이를 타고 주르륵 흘렀다.

은채는 그대로 다시 혼절하듯 잠이 들었다.

* * *

기주는 침대맡에 우두커니 서서 눈물로 얼룩진 은채의 얼굴을 응시했다. 뼈가 도드라진 어깨를 이불로 덮어 주고는 소리도 없이 방을 나왔다.

거실과 연결된 테라스에 맨발로 들어가 섰다. 찬 공기가 아직 젖은 몸에 닿자 으슬으슬 한기가 들었다.

그것을 벗 삼아 기주는 습관적으로 손가락을 입술로 가져갔다. 담배 연기를 머금듯이 숨을 들이마셨다가 뱉은 후에 팔을 내렸다.

비가 갠 뒤의 흐린 하늘을 무심히 응시했다.

그러면서 조금쯤 시간이 흘렀나. 뒤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기주가 어깨를 틀어서 돌아본 자리에는 은채가 서 있었다.

키스를 얌전히 받아 주었다는 것에 대해 잠깐 정신이 나갔었다는 변명을 횡설수설 늘어놓으려는 건지. 태연하게 평정심을 유지하려는 건지.

기주는 그녀가 둘 중 어떤 대응을 할지 가늠할 수 없었다. 그럴 만도 한 게, 은채의 얼굴에는 혼란함과 침착함이 적절하게 버무려져 있었다.

서로의 시선이 치열하게 얽혀드는데, 먼저 피한 것은 은채였다. 그녀는 소파에 건조되어 개켜진 자신의 옷가지를 집어 들면서 말했다.

“가죠, 이제.”

그 말을 하고는 다시 방으로 걸어갔다. 흘러내리는 이불을 추어올리면서.

기주는 눈알을 굴려서 그녀의 움직임을 따라갔다. 은채가 방으로 들어가자 그녀 대신 문짝을 뚫을 듯이 고정했다.

잠시 후 은채가 나왔다. 그녀가 옷매무새를 고치면서 곧장 현관문으로 향하고 있었다.

기주는 거실과 테라스의 경계선인 문턱을 밟고 올라서면서 입을 열었다.

“여기서 자고 갈래요?”

느닷없는 제안에 빠르게 움직이던 은채가 멈추어 섰다.

“그럴듯한 핑계는 내가 만들어 낼 테니까, 뭐든.”

은채는 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

“착각하나 본데…….”

그녀의 말허리를 기주가 가차 없이 잘랐다.

“그 집에 가기 싫잖아.”

그 말에 은채의 입이 닫혔다. 아니라는 대답은 씨알도 안 먹힐 거짓이고, 그렇다고 순순히 대답하면 그의 제안을 받아들여야 하니까.

기주는 저벅저벅 걸으면서 그녀의 침묵을 깨뜨렸다.

“당장 견딜 수 없으면 여기 있어요.”

은채는 그가 바로 뒤까지 접근했음을 느끼자마자 몸을 돌려세웠다.

“나더러 권기주 씨랑 살라는 말이에요?”

“난 주로 별채에서.”

그가 말을 하다 말고 멈추었다가, 다시 이었다.

“……나랑 산다고 생각할 줄은 몰랐는데.”

은채는 자신의 실수를 예감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그게 아니라…….”

은채는 말을 하려다 말고 포기했다.

“그만 가요. 신경 쓰지 말고.”

* * *

은채는 신발을 벗고 거실로 올라서다가, 코를 찌르는 한약재 냄새에 설핏 인상을 찌푸렸다. 건강을 챙기는 송명환 회장의 유난이야 하루, 이틀 일은 아니나 모친의 기일이 하루도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은채는 발끝으로 실내용 슬리퍼를 낚아채어 신고는, 일부러 정면만을 응시하며 걸었다. 인기척을 진작부터 느꼈던 송명환 회장이 그 모습을 힐긋 보더니 입을 열어 지적했다.

“버르장머리하고는.”

은채는 서늘하게 눈을 내리떴다. 회장은 밤을 깎고 있었다. 소쿠리에는 밤껍질이 없고 물대접이 깨끗한 것을 보아 이제 깎기 시작한 것으로 보였다.

그녀가 침묵으로 일관하자 거실에는 서걱서걱, 투박한 칼날이 밤과 껍질 사이를 가르는 소리만이 유일했다.

인사하는 시늉이라도 해서 이 상황을 단번에 종식할 수도 있지만, 내키지 않는지 은채는 요지부동이었다.

이윽고 송명환 회장이 깎은 밤을 물에 넣고 씻으며 느긋하게 말했다.

“너그러운 아빠 되기 힘들다. 응?”

그렇게 말하며 회장이 유쾌하게 웃었다. 은채는 자신의 팔뚝에 돋아난 소름을 문지르며 휙 몸을 돌렸다. 계단을 쉬지 않고 올라왔을 때는 숨이 턱 끝까지 차 있었다.

급하게 숨을 고르면서 방으로 들어온 그녀는 그대로 침대에 쓰러지듯 누웠다. 천장에 매달린 드림 캐쳐를 응시하면서 차츰 안정을 되찾았다.

너그러운, 아빠.

도무지 송명환 회장과 어울리지 않는 수식어였다. 괴리감이 너무 커 토악질마저 날 정도였다.

착각의 방식이 날이 갈수록 독창적이어서 어이가 없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손등으로 이마를 문지르며 일어난 은채는 테라스로 통하는 문을 활짝 열었다. 싸늘한 바람이 곧장 안으로 들이쳤다. 단전에서부터 끓어오른 화기가 바람에 휩쓸려 가라앉는 기분이 들었다.

은채는 문득 테라스 난간 안으로 가지를 뻗고 있는 나무를 바라보았다. 두 팔로 껴안아도 품에 다 안을 수 없을 만큼 통이 큰 나무인데, 그 나무에서 제일 연약한 가지가 테라스로 넘어 들어왔다.

겨울이라서 가려 줄 잎도 다 떨어져 더욱 앙상한 가지를 매만지며, 그녀는 알 수 없는 동병상련을 느끼고 씁쓸하게 웃었다.

혹독한 겨울을 지나고 나면 보잘것없는 가지를 숨겨 줄 봄이 올 테니까, 조금만 참으라고.

그렇게 위로하며 나무를 쓸어 만지던 은채는 문득 난간 아래에서 시선을 느끼고 눈을 내렸다. 나무에 기댄 채로 한 손을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은 권기주가 목을 젖히고 쳐다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쳐도 당황하는 기색이 없다. 그 뻔뻔한 눈을 은채는 가만히 바라보았다.

몹시도 맑은 날씨가 현실감이 없었는데, 거기에서 권기주는 이질감이 없었다. 그늘진 자리에서 간간이 닿는 빛만으로도 독보적인 존재감이었다. 한점의 햇빛이 왼쪽 눈 근처에서 넘실거리자, 그 눈을 가볍게 찡그릴 뿐이었다.

은채는 문득, 정말로 봄이 머지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떨어지겠다.”

곧은 입매를 달싹거리며 그가 말했다. 은채는 어이가 없었다. 난간의 높이는 그녀의 허리를 훌쩍 넘길 정도였다. 실수로 떨어지는 일은 정말이지 기우인 셈이었다. 작정하고 뛰어넘지 않는 이상.

무언의 반박을 느꼈을 텐데도 기주는 태연하게 한 손을 들어 내려오란 듯이 까딱였다.

은채는 가지를 만진 손을 탁탁, 털며 방문을 열었다. 그에 대한 반발심이 자취를 감추었다고 깨달은 것은 계단을 내려가면서였다.

1층 거실에 발을 딛고 선 은채는 소파 쪽을 곁눈질했다. 송명환 회장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테이블도 말끔히 치워져 있고.

은채는 마음 놓고 현관으로 가서 신발을 신고 나왔다. 권기주는 어느새 저만치 앞서 걷고 있었다.

따라잡아야겠다는 마음은 없었는데, 은채의 발걸음은 평소보다 조급했다. 잔디 위에 일정한 거리를 두고 박혀 있는 돌을 빠르게 박차며 걸어갔다.

가는 방향을 보았을 때부터 짐작은 했지만, 역시 온실이었다.

그는 온실의 문을 열어 놓고서 문지기처럼 서서 턱짓을 했다. 은채는 선뜻 안으로 들어서지 못하고 처마 밑에 엉거주춤 서 있었다. 그 바람에 처마에 고여 있던 빗물이 툭, 떨어지며 회색 스웨터에 자국을 남겼다.

손끝으로 그 자국을 쓰윽쓰윽 문지르던 은채는 이내 포기하고 온실 안으로 다리를 뻗었다.

흙먼지가 묻은 온실 문턱을 넘어 들어간 순간, 은채는 벌어지는 입을 단속해야 한다는 생각조차 잊었다.

온실이 복원되어 있었다.

돌이킬 수 없을 것 같았는데. 체념할 수밖에 없었는데.

은채는 믿기지 않아 몇 번이고 사위를 훑어보았다. 식물의 종류와 개수는 턱없이 부족했으나 시중에서 구할 수 있는 것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구색 맞춘 용품들도 눈에 띄었다. 온도와 습도도 식물이 살 수 있도록 조정되었고.

“어, 어떻게…….”

울컥, 하고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억누르느라 은채는 말을 잇지 않았다. 떨리는 목을 가다듬고 다시 입을 열었을 때는 제법 침착했다.

“……시키지도 않은 일을 했네요.”

은채의 음성은 의지를 배반한 채 떨리고 있었다. 그녀로서는 회장의 반응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송명환 회장이 오랜 시간 눈엣가시로 여기던 온실이었다. 미관을 핑계로 싹 밀어 버린 것은 제가 가진 권력을 과시한 것인데.

당장은 회장이 승인을 했다 한들, 언제 변덕을 부릴지 모를 일이다. 송명환 회장은 뒤끝이 상당히 길었다.

그건 권기주가 누구보다 잘 알 텐데. 알 만한 사람이 왜.

은채는 복잡해지려는 머릿속을 환기하기 위해 몸을 돌려세웠다.

“뭘 주면 물어올지 잘 생각하라면서요.”

“…….”

“주는 게 없으면 아무것도 하지 마요.”

은채는 기주를 뒤로한 채 밖으로 나왔다. 그의 집에서 숨을 할딱이며 했던 키스가 불현듯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간 성벽처럼 쌓아 올린 미움이, 흔들렸다.

때마침 불어온 칼바람에 뺨이 얼얼했다.

극명한 온도 차에 그녀는 순간 넋이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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