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6화. 둘이 잘 어울리던데. (26/31)


26화. 둘이 잘 어울리던데.
2023.05.29.


온실 속의 화초. 승윤이 처음 타인의 입을 통해 들은 송은채에 대한 서술이었다. 그 외에도 그녀를 서술하는 것들은 죄다 조롱거리였다.

덕분에 승윤이 얼굴도 본 적 없는 약혼녀에 대해 얼마나 갑갑한 삶일까를 넘어 얼마나 한심한 여자일까, 하고 얕잡아 보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송은채와의 기 싸움에서 무난하게 승리를 거머쥐고, 무사안일한 결혼 생활을 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는데.

그녀는 예상외로 치밀하고 냉철했다.

승윤은 기가 막혀 실소를 흘리면서 담배를 뻑뻑 피워 댔다. 중간중간 술을 마셔서 당혹감도 억눌렀다.

테라스에서 그리 청승 떠는 모습을 김소희는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샤워 후 덜 마른 몸을 가운으로 여미면서 다가가 껴안았다.

“오빠, 여기 금연이야.”

승윤은 걱정이 담긴 소희의 눈길을 성가신 듯 피했다. 그걸 또 김소희는 퍽 안타까워했다.

“무슨 일 있어? 컨디션 안 좋아 보이는데.”

곧장 대답하려던 승윤은 잠깐 망설였다. 이걸 얘한테 상의할 문제는 아니라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하나 남은 담배를 꺼내어 물면서 다시 생각해 보니, 그게 무슨 상관이냐는 생각이 들었다.

주변 지인들에게 상담하는 것은 그야말로 동네방네 제 입으로 소문을 내는 격이고. 양가에 털어놓는 것은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라는 격이고. 그러니까 한 마디로 진퇴양난이었다.

이런 마당에 승윤은 김소희의 감정까지 돌볼 여유가 없었다. 그러고 싶지도 않고.

“약혼녀한테 남자가 있어. 아니, 원래 있던 건가.”

한승윤의 우수에 젖은 모습도 섹시하다고 생각하고 있던 소희의 안색이 굳어졌다. 집안 문제거나 사업상의 문제라고만 짐작했던 탓이다.

“……대학로에서 봤던 그 남자?”

소희는 그게 왜? 왜 신경 써? 라고 추궁하고 싶어 목이 근질거렸다. 다행히 감쪽같은 연기력으로 그 추악한 충동을 감추었다. 승윤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자, 소희는 가볍게 웃으면서 말했다.

“둘이 잘 어울리던데?”

그 말이 심기를 건드렸는지 승윤은 자신의 어깨를 감싼 소희의 팔을 떼어 내며 중얼거렸다.

“어울리긴, 개뿔.”

소희는 웃는 입꼬리가 미세하게 경련했다.

“근데, 그 여자가 약혼녀라고 왜 말 안 했어?”

승윤은 그제야 소희의 눈치를 슬쩍 보았다. 소희는 그 순간 자신이 승윤에게 아예 안중에도 없는 건 아니었다고 안도했다.

그럼 그렇지. 중요한 건 그 여자가 아니라 나야.

소희는 그렇게 확신하며 아양을 떨었다.

“이번에 우리 미술관에 같이 왔을 때 내가 얼마나 놀랐는데. 언질이라도 해 주지 그랬어.”

“모르는 게 약이라고 생각했지. 미안, 미안.”

승윤이 재빠르게 소희의 어깨에 팔을 둘러서 안으며 머리를 비볐다. 곧장 몸을 낮추는 승윤의 반응을 소희는 잠시나마 만끽했다.

“치, 됐거든?”

“아, 왜 그래. 나한텐 너뿐인 거 알면서.”

“그럼 뽀뽀.”

소희가 새침한 얼굴로 요구하자, 승윤은 당장에 이마와 콧등, 입술에 자잘한 키스를 하며 몸을 붙여 왔다. 남자의 몸이 빠르게 반응하자, 소희는 역시 사랑이라고 생각하며 승윤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그 기분에 도취해 넌지시 질문을 던졌다.

“근데, 남자도 있는 여자랑 굳이 결혼해야 해?”

허겁지겁 가운을 헤집으면서 승윤이 대꾸했다.

“누누이 말하지만, 정략결혼이야. 나는 아무 힘이 없다고.”

승윤이 저도 답답하다는 듯, 자길 좀 이해해 달라는 듯이 절실하게 눈을 맞춰 왔다. 소희는 못 이기는 척 그를 껴안았다.

송은채, 그 여자의 잔상을 지워 내려고 애쓰면서.

* * *

은채는 쇼스타코비치의 왈츠 2번을 연주하면서 감상에 젖었다. 쇼스타코비치의 곡이 주는 신랄함과 돌발성에서 통쾌함을 느꼈다.

그녀의 환경은 예측 불허를 허용하지 않지만, 음악을 통해서라면 잠시나마 취할 수 있었다. 아무도 모르는 반항을 하는 기분이랄까. 그래서 그녀는 유독 쇼스타코비치의 곡을 연주하기를 좋아했다.

이윽고 모든 악기의 소리가 잦아들었다. 만족스러운 것은 그녀만이 아니었는지 모두의 표정이 밝았다. 잠시 휴식 시간을 갖자는 누군가의 제안에 하나둘 동의를 했다. 은채 역시 마찬가지였다.

연습실 문을 열고 앞다투어 나가는 이들 사이로 기다란 실루엣이 보였다. 그 실루엣은 마지막 차례로 모습을 드러낸 은채에게 저벅저벅 다가왔다. 비올라 케이스는 어디에 두고 나왔냐고 묻는 눈을 보며 그녀는 괜히 무심하게 말했다.

“연습 끝난 거 아니에요.”

그 말을 한 뒤에 은채는 무작정 걸었다. 등 뒤로 남자의 구둣발 소리가 따라왔다.

묵묵히 걷기를 몇 분.

이윽고 교내 간이 매점에 도착했다. 은채는 작은 크기의 컵라면과 삼각 김밥을 골라 품에 안았다. 입이 두 개이니 두 개씩 살까 고민을 잠깐 했으나, 괜히 멋쩍고 민망한 기분이 들어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결국 하나씩 계산을 한 후에 빈 테이블을 찾아 앉았다. 시트지가 벗겨진 테이블은 같은 색상의 의자와 겸비해서 조금 촌스러운 인상이었다.

은채는 몇 분을 기다린 후 컵라면 뚜껑을 열었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사이로 잘 익은 면발이 보였다.

기주가 테이블에 컵라면을 놓은 것은 은채가 젓가락을 분리하는 순간이었다. 양손에 젓가락 한 짝씩을 나누어 쥐고서 그녀가 눈을 들었다.

그가 학교까지 동행한 적은 수도 없이 많았는데. 교내 매점에서 마주 앉아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기주는 아랑곳하지 않고 의자에 앉으면서 질문을 했다.

“이런 것도 먹을 줄 알아요?”

그가 한 손에 쥔 삼각 김밥을 흔들어 보였다. 아닌 게 아니라, 은채는 전문가의 영양을 중시한 식단에 맞추어 엄선된 식재료로 요리된 음식만 먹어 왔다.

그것을 그에게서 지적받으니, 은채는 묘하게 발끈했다.

“못 먹을 것도 없죠.”

그녀는 젓가락으로 면발을 한가득 집어 들어 입 안에 넣고 씹으면서 말했다. 방학 기간에다가 시간도 때를 지나서, 둘만 있는 게 약간 어색했다. 누가 본다면 얼핏 주머니 사정이 각박한 또래 연인 같아 보일지도 모른다.

재밌기도 하고, 어이없기도 하고.

은채는 생소한 이 상황이 싫지는 않았다. 그 바람에 실없는 장난을 치는 듯한 응수를 했다.

“나 라면이랑 삼각 김밥 좋아해요. 그러는 권기주 씨야말로 싫어하나 봐요?”

은채의 우쭐한 표정을 보면서 기주는 나무젓가락을 분리했다.

“네.”

간단하게 대꾸한 후에 기주는 컵라면을 한 손에 들었다. 싫다는 사람치고는 너무나 익숙한 자세였다.

“냄새만 맡아도 역겨워서요.”

“…….”

“질리도록 먹었거든.”

그는 그러면서 많은 양의 면발을 묻히지도 않고 깔끔하게 입에 넣고 씹었다. 날렵한 턱을 느른히 들썩이면서.

은채는 일순 넋이 나갔다.

질리도록 먹었다, 는 표현은 꽤 긴 세월 이어졌을 궁핍한 생활을 함축하고 있었다.

그 말에 그녀는 갑자기 한 대 맞은 것 같은 당혹감을 느꼈다.

“어릴 때.”

딱딱하게 굳은 은채를 슬쩍 보면서 그가 말을 덧붙였다. 뭘 그렇게 심각한 표정을 하느냐는 듯이 입꼬리를 올리기도 했다.

은채는 머뭇거리는 입술을 뗐다.

“……본인 얘기하는 거 안 좋아했잖아요.”

“…….”

“물어봐도 피하고.”

“…….”

“그게 아무리 사소한 거라도.”

은채는 그가 원체 진지함이 없다고만 생각해 왔다. 뭘 물어봐도 어떻게든 빠져나가는 바람에 추궁하는 기분이 들어 짜증만 났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했다.

그랬는데.

기주가 젓가락으로 컵라면을 휘저으며 무심히 대답했다.

“……그랬나.”

그 말을 한 뒤에는 지루하다는 듯 젓가락을 툭, 내려놓고 눈을 들었다.

“그럼 지금이라도 물어봐요. 궁금했던 거.”

예상치 못한 순간에 시선이 마주치고, 상상도 못 했던 제안까지 들은 은채는 오히려 외면했다.

아직 먹을 생각이 없던 삼각 김밥을 들고 포장을 뜯기 시작했다. 마음만큼 쉽게 뜯기지 않자, 억지로 쥐어뜯는 바람에 김까지 훌러덩 벗겨져 맨밥만 덩그러니 남았다.

기주는 당황해서 얼굴까지 붉어진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했다.

“싫어하는 음식은 말했고.”

“…….”

“좋아하는 음식은 젤리, 초콜릿, 사탕.”

이내 그가 제 몫의 삼각 김밥의 포장을 능숙하게 벗기고, 은채의 앞에 놓았다. 대신 그녀의 손에서 처참한 몰골로 있는 삼각 김밥을 가져갔다.

“취미는 킥복싱, 주짓수.”

“…….”

“특기는 리버싱, 해킹.”

“…….”

“……더 해요?”

그가 의자에 몸을 늘어뜨리며 묻다가 문득 떠올랐다는 듯이 말을 덧붙였다.

“아, 고양이 알러지가 있어요.”

줄곧 반응이 없던 은채의 동공이 움직였다. 갑각류 알러지로 고생한 기억 때문에 몸이 먼저 반응한 것이다.

“이건 반응이 좀 있네.”

뒤이어 붙는 말에 은채는 그 순간에 하필 연애를 하던 친구들의 한탄이 떠올랐다. 남자는 상대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한다고. 뭐든 비슷하다고 맞장구를 치는 것 정도는 우습다고.

“목이 붓거나 생명이 위독해지는 건 아니에요. 기침만 좀 하는 정도.”

이것은 그 흔한 수작질일까. 아니면 순수한 정보 전달일까.

은채는 갑자기 떠오른 의문에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 * *

고개를 젖힌 은채의 찡그린 얼굴로 햇살이 부서져 내렸다. 팔을 들어 가려보아도 손 틈새로 들어왔다.

웬일로 날이 좋다는 생각을 무심히 흘려보낸 은채는 고개를 숙여 제 손으로 옮긴 어린 식물을 보았다.

식물을 옮겨심기 위해서 적당한 자리를 모색해 모종삽으로 흙을 파내고, 다시 덮어 두고. 고작 그거 좀 했다고 이마에 땀이 맺혔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품에 안고 날랐던 블루투스 스피커에서는 쇼팽의 녹턴이 흐르고 있었다.

생전에 모친은 쇼팽을 좋아했다. 당시 은채는 한창 베토벤에 빠져 있었기에 그런 모친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나무처럼 한결같이.

풀잎처럼 경쾌하게.

꽃처럼 향기로운.

모친은 입버릇처럼 그렇게 살라고 말하곤 했었다. 녹턴의 선율을 타고 그 목소리가 아직도 생생하게 들리는 것 같다.

은채는 모종삽을 제 위치에 걸어 두고, 맨손으로 흙을 꾹꾹 누르기 시작했다.

참 지독히도 닮은 구석이 없었다.

모친은 죽는 순간까지 낭만적이었지만 혼자 남은 그녀에게 삶이란 그저 처절한 생존기에 불과했다.

얼마나 한참을 누르고 눌렀을까.

“하아, 하아.”

입 밖으로 가쁜 숨을 몰아쉬며 은채가 벌떡 일어섰다.

가만히 온실을 둘러보았다.

확실히 권기주가 눈썰미는 있었다. 철거되기 전과 제법 비슷했다. 단시간에 복원한 것이라고 믿기 힘들 만큼.

그렇지만 완벽하게 이 전으로 돌아갈 순 없다.

이마의 땀을 손등으로 훔치며 은채는 그렇게 생각을 했다.

태양처럼 뜨겁게.

바람처럼 자유로이.

바다처럼 격정적으로.

그렇게 살겠노라고.

은채는 어딘가 후련한 얼굴로 온실을 나와 집으로 걸어갔다. 현관문을 열고 거실로 올라서는데 반대편에 송명환 회장의 서재 문이 삐걱, 하고 열렸다. 이내 문틈으로 권기주가 걸어 나왔다.

눈이 마주치자, 그는 가벼운 묵례로 인사를 해 왔다. 은채도 눈으로 인사를 받고는 계단 쪽으로 향하는데 기주가 그 자리에 선 채로 쳐다보고 있었다.

은채는 가던 길을 멈추고 뭐 할 말이라도 있냐고 묻는 눈으로 그를 보았다.

“넘어졌어요?”

느닷없는 질문을 하고서 권기주가 집요하게 응시했다.

영문을 모르는 은채가 고개를 갸웃하며 머뭇거렸다. 기주는 얼굴을 옆으로 기울이며 대답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인을 주었다. 재촉 같지도 않은 재촉에 괜히 마음이 급해진 은채가 입술을 축이며 대답했다.

“아니요. 왜요?”

맥락 없는 권기주의 머릿속이 궁금한 나머지 무심코 되물은 은채는 바로 후회했다. 희미하게 미소를 짓는 그를 목격하는 바람에.

“묻었길래. 흙.”

은채는 반사적으로 두 손을 등 뒤로 감추었다. 온실을 돌려받자마자 뻔질나게 드나들고 있다고 광고를 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이윽고 웃음기 밴 권기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학교 가야죠.”

“…….”

“준비하고 내려와요.”

기주가 계단 위를 턱짓하며 말하고는 몸을 돌려세우다 말고, 힐긋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깨끗이 씻고.”

마치 말썽꾸러기 어린아이에게 주의를 주는 듯한 말투였다. 은채는 기가 막혀 당장 돌아보았으나 그는 이미 현관으로 가버린 후였다.

16853589332273.jpg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