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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화. 의혹. (27/31)


27화. 의혹.
2023.06.01.


‘도서관에 고양이 산대.’

합주 연습을 하다 말고 핸드폰으로 찍은 고양이 사진을 보여 주며 누군가 말했다. 거리에서 헤맨 지 꽤 된 모양인지 털이 꼬질꼬질한데도 커다란 눈과 날렵한 코, 귀여운 입이 못 견딜 만큼 귀여웠다.

그러니 은채가 연습이 끝나자마자 도서관으로 달려온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문제는 도서관 주변의 화단이란 화단은 죄다 뒤졌는데도 털끝 하나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은채는 실망을 감추지 못한 채 벤치에 풀썩, 걸터앉았다. 기껏 친구에게 빌려온 두 개의 짜 먹는 간식이 쓸모없어졌다는 생각에 속상한데, 핸드폰이 눈치 없이 진동했다. 엄지로 가볍게 슬라이드를 해서 열자, 간결하고 명료한 내용이 보였다.

「어디예요.」

기주의 메시지에 은채는 답장을 하기 위해 망설임 없이 키패드를 톡톡 두드렸다.

「도서관이요. 주차장으로 갈게요.」

전송 버튼을 누르고 화면을 끄기도 전에 화면에서 1이 사라졌다.

바로 읽었다는 뜻인데. 그녀가 생각지도 못한 반응 속도에 놀랄 새도 없었다. 바로 답장이 온 탓이다.

「거기서 기다려요.」

그 메시지를 읽는데, 이상하게 자음과 모음이 따로 노는 기분이 들었다. 그 바람에 잠시간 내용을 곱씹던 은채가 이내 핸드폰을 가방에 넣던 때였다. 어디선가 희미한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반가운 마음에 좌우를 살피던 그녀의 눈에 화단 사이로 빼꼼히 고개를 내민 고양이가 보였다. 도무지 다 자랐다고 볼 수 없을 만큼 자그마했다.

마음이 급한 나머지 은채가 큰 동작으로 다가서자, 고양이가 풀숲 사이로 몸을 감추며 한껏 경계 태세를 갖추었다.

“아. 미안, 미안해.”

고양이는 알아듣지도 못할 테지만, 은채는 연신 사과를 하며 자세를 낮추었다. 그러고는 침착하게 고양이 줄 간식의 절개선을 갈랐다.

냄새를 맡은 고양이가 용기를 내어 다시 한 걸음 다가왔다. 학교에 있으면서 제법 사람 손을 탔는지 바로 코앞까지 다가오게 되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머리를 쓰다듬는 거까지 성공한 은채는 감격한 얼굴로 웃다가 이내 표정을 굳혔다. 금세 도서관까지 온 권기주와 눈이 마주쳐 버렸다.

그는 무얼 하는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눈매를 가늘게 좁히다가 이내 난감한 얼굴을 했다. 더는 다가오지도 않았다.

매번 거침이 없던 남자였는데.

왜 저러지, 하고 의문이 들려던 찰나였다. 그가 시야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잠시 어리둥절한 얼굴로 있던 은채의 귀에 그의 목소리가 이명처럼 들려왔다.

‘아, 고양이 알러지가 있어요.’

설마 했는데. 진짜였나.

미묘한 기분에 사로잡혀 있던 은채가 일순 어깨를 움츠렸다. 그새 간식을 다 핥아먹은 고양이의 혀가 손가락을 쓸고 지나간 탓이다. 기특하다는 듯 고양이를 보던 은채는 본격적으로 간식을 짜 올렸다.

구둣발 소리가 가까워져 온 것은 그때였다. 머리 위에서 시커먼 그림자가 드리우자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권기주가 태연히 굽어보고 있었다. 은채가 혼란에 빠진 사이 간식을 다 먹은 고양이가 사뿐사뿐 다리를 뻗어, 기주의 정장 바지에 머리를 비볐다.

역시 알러지는 거짓말인가? 하는 찰나 그가 서슴없이 무릎을 굽히더니 옆에서 같이 쭈그려 앉았다. 고양이는 여전히 그에게 애교를 부려 대고 있었다.

조공을 바친 건 정작 그녀였는데. 은채는 서운한 마음에 고양이에게 손을 뻗어 보았으나 관심을 끌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반면 관심을 독차지한 그는 망설임도 없이 고양이의 이마를 검지 끝으로 밀었다. 고양이는 밀려나지 않으려고 버텼다. 흡사 창과 방패 같았다.

순간 웃음이 나온 은채는 곧장 당혹감에 빠졌다.

권기주와 함께 있는데도 즐겁다니.

“내일 또 올래요?”

그렇게 묻고는 그가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흔들어 보였다. 총 여섯 개 입의 알러지 약이었는데 한 칸이 비어 있었다.

그러니까 여기에 오겠다고 약을 사 먹고 온 것이다.

은채가 어이없는 얼굴로 그를 쳐다보자, 그가 중얼거렸다.

“나 괴롭히는 걸 이렇게 좋아하는 줄은 몰랐어요.”

기주는 손을 뻗어 왔다. 피할 새도 없이 그의 손가락이 뺨에 닿았다가 떨어져 나갔다. 그는 손끝을 가볍게 비벼서 고양이 털을 날려 보내며 말했다.

“진작 알려 줄 걸 그랬나.”

그는 정말이지 눈치가 비상했다. 여기로 오겠다는 내용의 메시지를 받았을 때, 솔직히 시험해 보고 싶은 마음이 없지 않았다.

“진짜 약점이라도 알려 주면 큰일 나겠는데.”

알려 달라고 하면 알려 줄까. 그런 건 알려 줄 리 없겠지, 하고 속으로 뇌까리던 은채의 시야에서 고양이가 사라졌다. 배도 불렀겠다, 놀기도 놀았겠다, 이제 자신의 집이 있는 화단으로 돌아간 모양이었다.

은채는 무릎을 세워 일어섰다.

“우리도 그만 가요.”

말이 끝나기도 전에 기주가 먼저 비올라 케이스를 집어 들었다. 은채는 이제 오기를 부려서 비올라를 사수하려 들지 않았다.

제 것인 양 비올라 케이스를 짊어지고 걷는 권기주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저 걸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그의 에스코트를 받았고 차에 탔으며, 집의 정원을 함께 가로질렀다. 교대를 위해 모인 것인지 경호 팀이 정원에 집합해 있었다.

현관 앞까지 에스코트를 마친 권기주가 묵례를 했다. 은채는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계단 위에서 계단 아래의 그를 내려다보았다.

“권 팀장님.”

그가 눈을 들고 시선을 맞춰 왔다. 뒤이어 경호 팀의 이목 또한 집중되는 것을 느꼈으나 은채는 아랑곳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내 방으로 와요.”

부연 설명이 철저하게 배제된 말을 남기고 그녀는 돌아섰다. 명령 아닌 명령을 받은 기주는 작은 체구가 현관 안으로 사라질 때까지 응시한 끝에 목덜미를 잡고 가볍게 문질렀다. 뒤에 모인 경호 팀의 술렁임 따위는 들리지도 않는다는 듯이.

* * *

“누군 집 안까지 드나들고, 누군 집 지키는 개처럼 밖에서만 대기하고.”

특색 없이 새카만 정장을 입은 경호 팀이 우르르 숙소로 들어오면서 누군가 말을 했다.

그 말은 겉으로 표출만 하지 않았을 뿐 이미 불만을 품은 다른 이들의 마음속 불씨에 불을 붙였다. 경호 팀 사이에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눈빛을 주고받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이윽고 누군가 대놓고 빈정거렸다.

“실장도 송은채 씨까지 구워삶진 못했는데 말이야. 들어간 지 삼십 분은 됐지?”

그 말에 누군가 손목시계를 일별하며 호들갑스럽게 대꾸했다.

“넘은 거 같은데요?”

“이런 게 인물값 한다는 건가?”

“그러게요, 팀장 복귀했을 때만 해도 둘이 분위기 살벌했는데.”

내부에서 승진한 사람도 아니고, 느닷없이 권기주가 팀장으로 왔을 때 말들이 많았다. 그나마 2년 전부터 근무한 이들의 입을 통해 그의 출중한 능력을 확인했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내부 분열이 일어났을 수도 있었다.

경호 팀으로서는 그나마 통쾌한 점이 송은채의 태도였다.

처음부터 권기주에게 호의적인 걸 넘어 아주 끼고 도는 송명환 회장과 달리 그녀는 간담이 서늘할 만큼 차가웠다. 어느 때보다 경계했고. 원래도 경호 팀에 비협조적이고 데면데면한 여자였지만 권기주에게는 특별히 더 쌀쌀맞았다고나 할까.

그게 바로 엊그제 일처럼 생생한데, 경호 팀으로서는 송은채에게 배신감마저 느꼈다.

“어이, 최희철. 너 권 팀장이랑 2년 전에도 같이 일했었다며. 뭐 아는 거 없냐?”

모두의 이목이 최희철에게 집중됐다. 정작 당사자는 질문이 성가시다는 듯 안경을 벗어 던지며 인상을 찌푸렸지만.

“뭐가 궁금한데.”

“둘이, 전엔 어땠냐고. 그렇고 그랬냐고.”

음흉한 표정으로 질문을 하며 낄낄거리는 놈을 희철은 한심하게 쳐다보았다. 상대할 가치도 없지만 권기주에게나 송은채에게나 이런 지저분한 소문이 따라붙어 봤자 좋을 게 없었다. 분란만 야기할 뿐. 희철은 내키지 않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송은채 씨는 원래 경호 팀에 유감이 많아.”

“그래? 권 팀장이랑도?”

희철은 안경 닦이로 안경을 닦으며 대꾸했다.

“아마 송은채 씨 경호를 맡았던 놈들 중 권 팀장님하고 역대급으로 사이가 안 좋았을걸.”

“뭐? 근데 지금은 방으로까지 부르는 게 말이 되냐?”

“끝까지 좀 듣지?”

희철이 짜증스럽게 눈썹을 치켜들자, 관중은 금세 고분고분해졌다.

“아, 그래그래. 들을 테니까 어서 말해.”

“권 팀장님이 송은채 씨 생명의 은인이야.”

“뭐?!”

“필리핀에서 송은채 씨가 피습당할 때 권 팀장님이 몸을 날려서 구했거든. 그 몸에 난 자상 중에 하나는 송은채 씨가 남겼다고 봐야지.”

“이야, 완전 영화네. 영화!”

“그 뒤론 꽤 사이가 좋아졌지, 아마.”

“근데 왜 돌아왔을 땐 그렇게 못 잡아먹어 안달이었냐? 오히려 좋아해야 되는 거 아닌가.”

그 말에 희철은 침묵했다. 권기주는 갑작스럽게 퇴사했다. 특별한 사유 없이 개인적인 일이라고만 했고. 인수인계나 후임을 구할 때까지 여유를 두지도 않았다.

그때 송은채는 어땠나.

처음에는 당혹감을 내비쳤으나 이내 평정을 되찾았다. 아니, 그런 줄로만 알았다. 그녀는 전보다 더 메마른 눈으로 사람들을 대했다.

“오랜만에 봐서 어색했겠지! 지금 사이 괜찮은 거 보면 몰라?”

둘의 스토리에 과몰입한 누군가가 분통을 터뜨렸다.

“맞습니다! 때린 놈은 잊어도, 구해 준 놈은 못 잊죠!”

경호 팀에게 그것만큼 적절한 비유는 없었다. 모두가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동의를 표했다.

“근데 설마 사적인 마음 있는 건 아니겠지?”

처음 불만을 표출한 이가 다시 한번 의혹을 제기하자, 숙소가 정적에 휩싸였다. 둘의 스토리가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바람에 그런 쪽으로 의심이 안 가는 건 아니지만.

만에 하나 그런 일이 생긴다면 송명환 회장이 어떻게 대응할지 진작부터 걱정이었다.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들어 돈독한 둘 사이를 망칠 수도 있었다.

누군가 제 일처럼 손사래를 쳤다.

“에이, 설마. 결혼도 앞당겼잖아. 괜히 이상한 소문날라, 그만합시다!”

“그래, 그래. 일 크게 만들지 말고.”

그렇게 정리가 되는 분위기였다. 비어 있는 줄 알았던 방 안에서 발소리가 들리고, 방문이 삐거덕 열리기 전까지는.

“결론이 그렇게 난 건 좋은데.”

그 열린 문틈으로 나온 이는 다름 아닌 광일이었다. 오랜만에 휴무를 맞아 숙소에서 쉬고 있었는지, 부스스한 자태였다. 탈의한 상반신은 위협적으로 꿈틀거렸다.

예고도 없이 등장한 광일을 발견한 이들의 얼굴이 사색이 되기까지는 순식간이었다.

저벅저벅.

문지방을 넘어선 광일이 거실로 나왔다.

“여기선 입을 함부로 놀리지 말라고 했지.”

원래도 상당한 저음인 광일의 음성은 지독히도 낮았다. 사태 파악은커녕 얼이 빠져 있던 경호 팀은 그제야 허겁지겁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시, 실수했습니다!”

광일은 한 손으로 목덜미를 움켜쥐고 고개를 반대편으로 꺾었다. 뼈 소리가 우드득, 하고 거실에 울려 퍼졌다.

“쓸데없는 잡담, 앞으로 삼가.”

“예, 알겠습니다!”

잔뜩 기합이 들어간 경호 팀을 내버려 두고 광일은 돌아섰다. 있는 대로 무게를 잡긴 했으나 방 안에서부터 당황했었다. 착잡한 얼굴을 손으로 쓸어내려도 도무지 진정이 되지 않았다.

오며 가며 보는 게 전부인 놈들이 망상을 펼치고 있었다. 다행히 저들끼리 의혹을 거두긴 했으나 앞으로 자칫 처신을 잘못했다간 소문이 퍼져 송명환 회장의 귀에까지 들어갈 수 있었다.

* * *

노크 소리가 들린 것은 카디건 단추를 잠그던 도중이었다. 책상 위에 올려놓은 선물 포장된 정사각형 박스를 응시하던 은채의 눈길이 문으로 향했다.

다짜고짜 방으로 오라고 명령하긴 했지만 이렇게나 빨리 올 줄은 몰랐는데. 생전 처음 나쁜 짓을 앞둔 거처럼 맥박이 빠르게 뛰었다. 집안에서 철저히 금지하던 불량 식품을 처음 사 먹던 날과 같은 두근거림이었다.

은채는 마른침을 삼키며 방문으로 다가갔다. 태연한 척 안색을 정돈하고 문을 열었다.

그래. 거기까진 좋았다.

좋았는데.

“옷은 왜 벗은 거예요?”

코트와 재킷은 어디 두고 왔는지, 권기주가 셔츠만 입고 있었다. 느슨하게 풀어낸 타이 너머에는 단추도 풀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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