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내기.
(29/31)
29화. 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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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화. 내기.
2023.06.08.
대응해야겠다는 생각조차 일순 사라질 정도로 예리한 눈이었다.
분명 악의는 없을진대, 이광일은 고조되는 긴장감에 마른침을 삼켜야 했다.
“틀렸잖아요, 순서가.”
그가 다짜고짜 내뱉은 말에 이광일은 얼이 빠졌다.
“……뭐?”
말귀를 못 알아먹네, 하고 말하듯이 권기주가 한쪽 눈썹을 설핏 구겼다. 그러더니 책상 위에 걸쳐 놓은 두 다리를 차례로 내렸다. 몸은 나태하게 몸을 의자에 기대고 두 손은 허벅지 위로 깍지를 끼웠다. 바라보는 방향도 컴퓨터에서 이광일로 바뀌었다.
광일은 순간 눈이 부시다는 생각을 했다. 창문을 등진 기주의 몸으로 쏟아지는 햇빛이 꼭 후광처럼 느껴진 탓이다.
“송은채를 제어해야 회장도 잘 구슬리지.”
아직도 모르겠냐는 듯이 기주가 고개를 틱, 기울였다. 마치 두서없는 질문을 마구잡이로 해대는 미취학 아동을 상대하는 듯한 태도였다.
이거 묘하게 기분이 나쁜데, 그렇다고 지적을 하기는 모호했다. 심지어 송명환 회장의 환심을 이만큼이나 산 데는 송은채를 제대로 컨트롤한 것이 도움이 된 것도 사실이니.
“그리고…….”
거침이 없던 기주의 입술이 웬일로 닫혔다. 이광일은 놈이 뒤늦게라도 상명하복에 신경을 쓴다고 판단을 했다. 그 바람에 마음이 급해졌다. 뒤늦게라도 위신을 세워 주려는 기주의 인심을 놓칠 수는 없었다.
“그 여자 팔자가 사나워서 불쌍하긴 하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없으니까.”
권기주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대신 시퍼런 핏줄이 곤두선 관자놀이가 꿈틀거렸다. 기주가 하고 싶은 말을 다 했는지 일어나서 나가는 이광일을 주시했다. 탁, 하고 문이 닫히자 그는 이를 바득, 갈았다.
적정 거리 유지?
추잡하게 붙어먹고 싶은 충동을 이만큼 억누르는 게 쉬운 줄 아나.
기주는 뒷머리를 툭, 하고 헤드에 갖다 박으며 눈을 내리감았다.
* * *
긴장한 얼굴로 안경을 고쳐 올린 한승윤은 눈을 한 곳에 고정했다.
분명 하찮을 정도로 힘없는 여잔데…….
격한 굴곡이 있는 몸매에 살살 잘 웃는 여자가 아니면 본 체도 않던 승윤은 은채를 만날 때마다 이상한 압박감을 받아왔는데, 이번에는 그 정도를 넘어섰다.
여자가 백마의 고삐를 가볍게 쥔 채 광활한 대지 위를 걸어오고 있었다.
얼룩 없는 새하얀 드레스셔츠에 코르셋을 연상케 하는 검은색 가죽 베스트, 군살 없는 다리를 매끈하게 감싼 하얀색 승마 바지. 특별히 자기주장 강한 곳 없이 유려하게 떨어지는 우아한 몸 선이었다.
얼마간 눈을 떼지 못하고 바라보았을까.
느닷없이 바람이 불었다. 강한 바람에 그녀가 황급하게 승마 모자를 단단히 붙잡는 것이 보였다. 터무니없이 작은 머리에 맞는 모자가 있다는 게 신기했다.
그녀의 묶은 머리가 바람결에 흩날렸다. 그것은 강렬한 햇빛을 받고 언뜻 찬란하게 빛을 흩뿌리는 거 같았다. 잠깐 눈이 멀었다는 착각이 들었으니까.
아예 넋까지 빼놓고 그 자태를 감상하던 한승윤의 얼굴이 일순 회색빛으로 번졌다. 은채와 눈이 마주쳐 버렸다.
송명환 회장이 제주 리조트에 방문하겠다고 했을 때, 솔직히 기분이 더러웠다. 말은 그럴싸하게 포장해도 무슨 구멍가게 둘러보듯 하던 눈빛을 읽었을 때는 수치심도 들었다.
디원 그룹이 굴지의 기업이라고 은근히 우월감을 느끼는 거겠지.
시종일관 무표정으로 그 옆에 서 있던 은채도 못마땅한 건 마찬가지였다.
이런 게 자격지심이라는 걸까.
한승윤은 어느 틈엔가 코앞까지 다가와 선 그녀를 복잡한 눈빛으로 내려다보았다. 여자는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는 열등감을 느끼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아마 부친인 한지창 의원이 유력한 대선 후보가 아니었더라면, 송은채와 얽힐 일은 절대로 없었을 것이다. 완전무결한 인생을 사는 여자와 접점이란 게 있을 리 만무하니까.
승윤은 착잡한 얼굴로 한쪽 뺨을 쓸어내렸다.
차라리 따로 남자라도 둔 게 잘된 일인가.
결국 송은채도 별수 없이 평범한 인간이라고. 나와 별로 다를 게 없다고. 안심해야만 하는데 이상하게 마음은 갈수록 삐뚤어졌다.
“악기 말고 할 줄 아는 게 있었네요?”
그저 입만 열었다 하면 빈정거리지. 유치한 말싸움에 동참할 의사가 없는 은채는 바로 맞대응을 하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정적인 활동부터 역동적인 활동까지 두루 섭렵했다. 뛰어난 습득력을 높이 산 모친의 적극적인 권유 덕분이었다.
승마도 그중 하나였을 뿐이다.
은채는 말의 등허리를 쓰다듬으며 친밀감을 높이는 데 열중하며 말했다.
“한승윤 씨보단 많을걸요.”
그것은 지극히 사실일 뿐 우쭐함이나 허세와는 거리가 멀었다.
듣는 한승윤의 표정은 곧장 재수가 없다는 듯이 바뀌었으나 그녀는 구태여 해명하지 않았다. 무엇이든 본인의 위신과 체면을 최우선에 두는 남자에게 수용이나 소통을 바라는 것은 지나친 사치였다.
“참 잘나셨어.”
승윤이 갑자기 몸을 비트는 말의 고삐를 세게 거머쥐어 제압하며 빈정거렸다.
“근데, 나 승마 특기생인데.”
그 말에 은채는 내심 놀랐다. 그런 사람이 말 다루는 솜씨가 차마 눈 뜨고 봐줄 수 없을 지경이라는 점에서.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다가 망신당하기 딱 좋겠죠.”
그런 줄도 모르고 한승윤은 오만한 얼굴을 했다. 말이 고개를 흔들며 제어에서 벗어나려 하자 험악하게 인상을 쓰기도 했다.
말을 그렇게 강압적으로 다루지 말라고 하려던 은채는 이내 그만두었다. 어차피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을 거고, 그럴 바에는 차라리 다른 방법으로 저지하는 편이 나았다.
“그럼 내기할래요?”
그녀의 갑작스러운 제안에 한승윤이 쳐다보았다. 지금 진심이냐는, 조금쯤 어이없는 표정이었다.
그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고 은채는 백마 위로 단번에 올라가 안장에 앉았다. 그러고는 어딘가를 턱짓하며 말했다.
“저기 돌아서 오는 거로.”
그녀가 가리킨 곳에는 나무 한 그루가 우뚝 솟아 있었다. 드넓은 초원이라 그 존재감이 유독 컸다. 그리 먼 거리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짧은 거리도 아니었다.
처음엔 거절하려던 한승윤은 이내 마음을 바꿨다. 현격한 실력 차이를 보여 주고 저 도도한 콧대를 눌러 주겠다는 포부가 꿈틀거린 탓이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한승윤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말에 올라앉으며 대답했다.
“좋아. 뭐로?”
“지는 사람이 딱밤 맞기.”
“유치하기는.”
“그럼 이긴 사람이 결정하죠. 깔끔하게. 어때요?”
“자신 있어요? 난 내기 걸리면 지는 법이 없는데.”
한 마디, 한 마디가 주먹을 부르는 남자였다. 은채는 제발 잠깐이라도 그 입을 다물 수 없겠느냐고 경고하고 싶은 기색이 얼굴에 역력했다.
다행히 그간 단련된 인내심을 가까스로 연장해 참아 내고는, 발로 말의 아랫배를 살짝 찼다. 백마는 그녀와 처음 호흡을 맞추었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착실하게 앞을 향해 걸어갔다.
곧장 뒤로 따라붙은 한승윤은 살살 약을 올렸다.
“여자가 날 어떻게 이기려고. 핸디캡이라도 줘요?”
은채는 무시로 일관했다. 그러는 사이 한승윤을 보좌하던 리조트 관리자가 어딘가로 무전을 보내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그러자 누군가 깃발을 들고 출발선 옆으로 와 섰다.
출발선 앞에서 백마를 멈춰 세운 은채는 차분한 얼굴이었다. 반면에 한승윤은 시작도 전에 승리를 거둔 사람처럼 거만했다.
“지금이라도 안 늦었어. 핸디캡 줄까요?”
은채가 안정적으로 자세를 낮추면서 대꾸했다.
“입만 살았단 말 자주 듣죠?”
그 말에 승윤은 피식 웃었다. 여자의 당돌함이 근거 없다고 생각한 탓이다.
이윽고 심판 아닌 심판이 깃발을 높이 들어 올렸다. 그 순간 말들이 모래바람을 일으키며 질주하기 시작했다.
얼굴을 때리는 시원한 바람과 쏜살같이 지나가는 초원의 풍경들을 느끼며 은채는 자유를 떠올렸다.
잊고 있었는데, 그녀는 이 순간을 좋아했다. 갑갑한 것들을 바람과 함께 훌훌 날려 보내고, 저는 앞만 보며 달려가는 이 순간을.
속도가 빨라 아무도 볼 수 없는 틈을 타서 은채는 해사하게 미소 지었다.
백마와 한 몸이 된 그녀는 나무를 돌고 난 다음에는 더욱 속도가 붙었다. 결승선이 코앞이었고, 앞에 한승윤은 없었다.
여유롭게 결승선을 통과한 후 백마를 멈춰 세운 은채가 뒤를 돌아보았다.
패배자, 한승윤이 오만상을 쓰며 말에서 내려 걸어왔다. 말 위에서 내려다보던 그녀는 승윤이 근처까지 도착해서야 말에서 내려섰다.
결과를 인정할 수 없다는 듯 험악하게 인상을 구기며 입을 떼던 한승윤은 이내 굳어 버렸다. 눈앞에 무언가가 지나간 것 같은데. 뺨이 얼얼했다.
짝, 하는 마찰음이 크게 들렸던 것도 같고.
한승윤은 화끈거리는 오른쪽 뺨을 자신의 손으로 감싸며 얼이 빠졌다.
그렇다. 정말 믿기지 않으나 그녀에게 뺨을 맞은 것이다. 그것도 풀스윙보다 더 기분 나쁜 반 스윙으로.
승윤이 넋 나간 얼굴로 쳐다보자, 그녀는 더할 나위 없이 상큼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시 할래요? 정강이도 까 보고 싶은데.”
“이게 지금, 무슨…….”
볼품없이 말까지 더듬고 말았다는 생각에 한승윤은 더 말을 잇지 못했다. 그저 얼굴만 시시각각으로 붉으락푸르락했다.
급기야는 수치심에 몸까지 부들부들 떨다가 이윽고 장갑을 휙휙 벗어 바닥에 내던지고 자리를 떴다. 사색이 되어 따라붙는 리조트 관리자에게 따라오지 말라고 소리를 치기도 했다. 그 뒤에는 거친 욕설을 중얼거린 것도 같고.
애석하게도 은채는 미안한 감정이 들지 않았다.
약속 장소에서 다른 여자와 침대 위를 뒹구느라 서슴없이 지각했을 때. 따로 여자가 있는 것을 고백하며 순응을 강요받았을 때.
그때 했어야 할 행동이 조금 늦었을 뿐이다.
씩씩거리며 멀어진 승윤의 모습을 뒤로하고 은채는 다시 말에 올랐다.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이동했다. 빠른 속력 때문에 놓친 풀냄새가 맡아졌다. 고개를 젖히고 숨을 크게 마셔 보았다. 마치 자연과 하나 된 기분이 들었다.
얼마쯤 홀로 시간을 보냈을까.
다시 출발선으로 돌아온 은채는 머리를 옥죄는 승마 모자부터 벗었다. 가볍게 고개를 흔들자 머리카락도 풀어졌다. 아마 달릴 때 머리끈이 끊어진 모양이었다.
치렁치렁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쓸어 넘긴 후에 말에서 내리려는데, 커다란 손이 불쑥 튀어나왔다. 손가락이 길고 뼈마디가 굵었다.
누구인지 짐작하고 눈을 들자, 역시 권기주였다.
언제부터 와 있었던 걸까. 무엇을 보지 못했고 무엇을 목격했을까. 은채는 아무것도 읽어 낼 수 없는 기주의 매끄러운 얼굴을 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와중에 기다리고 있는 손에서 무안함을 느낄 수 없었다. 타고 나기를 태연한 걸까, 아니면 거절당해 본 적 없는 자의 무던함일까. 고민하는 게 무의미했다. 아마 둘 다 해당 될 테니.
은채는 쳐다만 보던 그의 손을 이내 잡고 도움을 받으며 말에서 내렸다. 그녀는 거부하지 않았고, 권기주도 하고 싶은 일을 했다. 그러니 그 이후에는 맞잡은 손이 떨어져야 맞는 일인데.
은채의 얼굴이 당혹감으로 굳어졌다. 기주가 잡은 손을 뒤집은 탓이다. 드러난 그녀의 손바닥은 한눈에 봐도 아파 보일 만큼 붉었다.
“뭐죠. 이건.”
낮은 목소리가 정수리를 짓눌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