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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화. 오늘 같이 있죠. (30/31)


30화. 오늘 같이 있죠.
2023.06.12.


“고삐를 세게 쥐었더니. 오랜만이라.”

은채는 잡힌 손을 확 빼며 황급하게 중얼거렸다. 서두른 만큼 제대로 문장을 완성하지 못하고 뚝뚝 끊어졌다. 꼭 궁색한 변명을 한 기분이 들어 당황스러웠다.

“경주, 할래요? 내기 걸면 재밌을 거 같은데.”

부러 태연하게 말했더니, 은채는 좀 안정이 되었다.

“승마 해 본 적 없어요.”

그의 대답에 은채는 진심으로 의외라는 얼굴을 했다.

“못 하는 것도 있어요?”

“다른 취미는 없나? 참고로 나 악기도 젬병이에요.”

은채는 잠깐 고심하는 듯하다 말했다.

“사격.”

기주가 정말이냐고 묻는 대신 설핏 눈썹을 들자, 은채는 말을 덧붙였다.

“재밌는데. 누가 여자는 그렇게 거친 취미 가지는 거 아니라고 노발대발하지만 않았어도 자주 했을 거예요. 몰래 자주 했지만.”

그 ‘누가’가 송명환 회장이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그 인간은 원체 여자의 덕목과 남자의 덕목을 나누기 좋아하는, 흔히들 말하는 꼰대니까.

“저런.”

기주는 아쉽다는 듯이 말했다.

“지금 바로 같이 해야겠는데.”

그렇게 말하면서 그가 은채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녀는 낯 간지럽게 뭘 그렇게 쳐다보느냐고 말하는 대신 앞장서 걸었다.

전에도 그랬지만, 그와 죽이 잘 맞는 건 청개구리 기질이 닮아서일 것이다.

* * *

표적지에 대고 가볍게 조준을 하던 기주의 잇새로 웃음이 실실 샜다. 이내 슬쩍, 한쪽 눈썹을 들며 옆을 보았다.

머리를 하나로 높이 올려 묶은 송은채의 옆얼굴이 보였다.

이마부터 콧날, 입술과 턱을 아우르는 유려한 선과 가냘픈 목덜미를 봐선 총질은커녕 총소리에도 놀라 기절할 것 같은데. 헤드셋과 보호안경, 방탄조끼를 착용한 모습은 그래도 제법 태가 났다.

손가락을 방아쇠에 걸고 손잡이를 움켜쥐고 조준하는 자세도 아마추어치고는 안정적이고.

시선을 느꼈는지 은채가 설핏 눈매를 좁히며 말했다.

“내기는 이긴 사람 마음이에요.”

그 조건을 걸고 이긴 덕에 한승윤의 따귀를 갈기고 온 여자답게 호기로워 보였다.

기주는 마지못해 장단 맞춰 주는 것처럼 고개를 설렁설렁 끄덕였다. 그것이 심히 거슬렸는지 은채가 곧장 눈총을 쏘았다. 그런다고 주눅 들 권기주가 아니었다. 그는 능숙하게 못 본 체하며 정면을 바라보았다.

일순 은채의 얼굴에 긴장감이 어렸다. 탕, 하고 격발 소리가 들린 탓이다. 그가 미묘하게 바뀐 분위기를 감지하고 쳐다보았을 때는 표정이 바뀌어 있었다. 긴장에서 흥분감으로.

말을 타고 질주할 때와 같은 모습이랄까.

기주가 흥미롭다는 듯 보는 동안 그녀는 망설임 없이 글록 19를 쥔 팔을 들었다. 숨을 참고서 표적지를 응시하다가 힘주어 방아쇠를 당겼다.

탕! 탕! 탕!

9점, 8점, 7점.

자세만 그럴싸하고 점수는 형편없을 것으로 짐작했는데. 기주는 기가 막히고 흥미롭다는 얼굴로 은채의 사격을 관람했다.

아쉽게도 명중은 없는 건가, 하던 순간이었다. 3초 정도 숨을 고른 은채가 쏜 마지막 한 발이 10점에 명중했다.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그녀는 글록 19를 사뿐히 내려놓고 기주를 쳐다보았다. 이래도 무시할 수 있겠냐는 듯이.

“잘하네.”

그가 한쪽 어깨를 들썩이며 말했다. 분명히 칭찬의 표현인데, 이상하게 묘한 어조로 들렸다. 귀가 뜨거웠다.

“긴장되는데요.”

그만. 은채는 그렇게 말하고 싶은 심정으로 홱 눈을 돌렸다. 귀의 비정상적인 온도에 애꿎은 헤드셋을 탓하며 손으로 툭툭, 쳤다.

그러는 사이 권기주가 표적지를 앞에 두고 자세를 잡았다. 유능한 사격 선생님의 개인 코칭을 받아 왔던 은채의 눈에도 자세는 정석이었다.

그것뿐만 아니라 고작 자세 한번 잡았다고 살기가 느껴졌다. 안 그래도 늘 음험한 기운이 도사리는 얼굴인데 총까지 쥐고 있어서일까. 그녀는 알 수 없는 압도감에 마른침을 삼켰다.

그래도 경호원을 상대로 사격에서 이길 생각을 한 건 과욕이었을까.

은채가 뒤늦게 현실을 자각하는 사이 총성이 들려왔다. 그가 방아쇠를 당긴 것이다. 비교 불가인 실력일까 우려 반, 얼마나 능숙할까 하는 호기심 반이 섞인 은채의 눈이 곧장 표적지로 향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그의 사격은 멈추지 않았다.

탕, 탕, 탕, 탕!

신중함 따위는 느껴지지 않는 엄청난 속도였다. 그런데도 점수는 10점, 10점, 10점, 10점…….

내친김에 권기주까지 이길 욕심이었던 은채는 아연실색한 얼굴로 쳐다만 보았다.

그 사이 총알이 떨어졌는지 기주는 리볼버에 탄환을 척척 장전했다. 그런 뒤에 곧장 해머를 당기고 쏘고, 당기고 쏘고.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가 없는 경이로운 실력이었다.

실제 경찰이 사용하는 리볼버를 저렇게 능수능란하게 다룬다는 게 정말 기함할 일이었다.

그를 빤히 노려보자, 중간에 1초에서 3초 정도 텀을 두고 쏘았다. 딱 그때만 절묘하게 9점과 8점이 나왔다. 고의로 잘못 쏜 게 분명했다. 이건 그냥 지는 것보다 더한 치욕이었다.

은채는 결국 자신에게 턴이 왔는데도 미련 없이 헤드셋과 귀마개를 벗어 던지는 선택을 했다.

“뭐예요?”

억울하다는 듯이 눈을 내리뜨고 빤히 보는 권기주가 이렇게 여우 같을 수가.

“이런 말도 안 되는 실력이면서 어쩜 그렇게 뻔뻔하게…….”

“방금 8점이었는데.”

그걸 변명이라고. 은채는 기가 막힌 얼굴로 노려보았다.

“봐준 거 다 티 났거든요?”

터무니없는 변명이 속을 더 쓰리게 하는 줄도 모르고. 방탄조끼를 벗으며 자리를 뜨는 은채를 그는 조용히 뒤따랐다.

하필 사격장의 사장은 눈치가 없었다.

“사격선수입니까? 와, 장난 아닙니다.”

그러게요. 사격선수를 하지 왜 경호원을 했을까요. 그렇게 쏘아붙이고 싶은 마음을 내리누르며 걷는 은채에게 사장이 말했다.

“손님도 대단하십니다. 반동 잡기 진짜 어렵거든요. 그걸 이렇게 훌륭하게 해내는 여성분은 처음 봤습니다.”

예전 같았으면 칭찬에 들떴을 테지만, 처참히 패배한 지금의 은채는 어색한 웃음으로 답할 수밖에 없었다.

사격장 건물 밖으로 나서자 곧장 찬바람이 불어왔다. 얼굴이며 목에 오른 열기를 싸늘하게 훑고 지나가 주었다.

“내기는요.”

우뚝 발을 멈춰 세운 은채가 이내 돌아보며 지그시 노려보았다. 승리감에 취해 있지도, 그렇다고 겸손하지도 않은 덤덤한 얼굴이었다.

여기서 더 하면 그건 추태다. 은채는 그것을 상기하며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말해요.”

“…….”

“결혼하지 마라, 미뤄라 빼고 다.”

2년 전이었다면 딱 그걸 요구해 주길 바랐을 테지만 지금은 아니다. 왕자의 키스를 받고 깨어나는 공주 같은 건 동화에서나 가능한 일이라는 걸 은채는 이제 알고 있었다.

순응하되 복종은 하지 않는 것.

은채는 그게 현실적으로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원하는 건 말해도 되는데 알아서 기어라?”

“…….”

“오늘 같이 있죠, 그럼. 불평 없이.”

생각지도 못한 요구에 은채는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표정이 구겨졌다.

“표정이 왜 그래요”

“…….”

“설마 내가 이런 기회를 그냥 날릴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가 무심하게 물으며 웃었다. 그것은 조소도 아니고 빈정거림도 아니었다. 굳이 따지자면 여상했다.

이 막무가내가 불쾌해야 정상인데. 왜 반가운 걸까.

“난 한승윤 씨 리조트에서 머물 계획이에요.”

“그러니까, 거기서.”

그가 비죽 웃으며 한 손을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은채가 눈만 크게 뜨고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자, 기주가 저벅저벅 다가왔다. 그러더니 상체를 낮추어 가까이 얼굴을 붙여 왔다. 은채의 동공이 일순 흔들렸다. 그 찰나를 놓치지 않고 그가 달래듯이 말했다.

“나 다른 말 안 했어요. 그냥 같이 있자고 했지.”

* * *

승윤은 펌핑 용기를 부술 듯이 쾅쾅 눌러 손바닥에 흥건한 핸드워시로 손을 박박 문질렀다.

그러다 손등을 긁었는지 외마디 비명을 내질렀다. 팔을 굽혀 보니 손등의 거품 사이로 길쭉하게 손톱자국이 나 있다. 그걸 보고 일순 화기가 치밀어 올랐는지 승윤은 핸드워시를 잡아 던지며 욕설을 내뱉었다.

“노인네들이 악수 못 하고 죽은 귀신이 붙었나.”

승윤은 입지를 굳히기 위한 부친의 사교 활동에 진절머리가 났다. 의원이랍시고 어울리는 인간들은 어차피 필요에 따라서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 박쥐처럼 오가는 것들이고. 겉으로는 호방해 보이지만 음흉한 송명환 회장은 말할 것도 없었다.

손으로 세면대를 지탱하며 거울을 노려보는 승윤의 눈은 오직 짜증으로 가득했다.

부부는 일심동체가 아닌가. 남편은 두 집안을 위해서 성심성의껏 들러리를 서 주고 있는데 부인이란 여자는 대체 어디로 내뺐을까.

아무리 산산조각이 난……. 아니, 처음부터 있지도 않았던 신뢰라지만. 승윤은 해도 해도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차근차근 생각해 보았는데. 송은채는 지금 충동적인 일탈 중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게 아니면 한낱 경호원과 눈이 맞을 수는 없다.

그래. 자존심이 상했던 거지. 부족할 게 없는 여자가 딱 하나, 제 뜻대로 할 수 없는 게 결혼이었을 텐데. 그 상대에게서 무시를 받았으니 급발진할 만했다.

그것은 순전히 자신의 실책이라고, 승윤은 인정했다. 얌전한 고양인 줄 알았더니 발톱을 감춘 사자였다. 아무것도 모르고 그 발을 냅다 밟아 버렸으니.

승윤은 아랫입술을 잘근 씹으며 머리를 굴렸다. 악화가 된 관계를 이대로 계속 끌고 갈 순 없으니 한번 머리를 숙여야 한다. 그렇지만 다시 따귀를 맞는 일은 허용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더 철저해질 테니까.

타월로 손을 닦으며 욕실을 나온 승윤이 나갈 채비를 하고 문을 열었다. 문 앞에 대기하고 있던 정 비서가 곧장 다가와 나직하게 말했다.

“송은채 씨는 1602호에 체크인하셨습니다.”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인 승윤은 복도를 뚜벅뚜벅 걸었다. 그동안 송은채의 페이스에 휘말려 망각했는데, 화난 여자 다루는 법이야 차고 넘쳤다.

이윽고 승윤은 여유롭게 엘리베이터에 올라타, 1602호가 있는 층이 적힌 버튼을 눌렀다. 그런 다음에는 따라 타려고 하는 정 비서를 대강 손짓으로 물렸다.

1602호에서 꽤 오래 머물 것 같으니.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웃던 승윤의 귀에 띵, 하는 알림음이 들렸다. 엘리베이터가 목적지에 도착한 것이다.

옷매무새를 만지며 승윤은 복도를 걸었다. 제가 있던 층과 하나 다른 점이 없는 복도인데 지나치게 고요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개의치 않고 1602호 앞에 선 승윤은 망설임 없이 벨을 눌렀다. 잠깐의 정적과 함께 문은 열렸다.

준비해 왔던 대사를 읊으려던 승윤의 안색이 싸늘하게 굳었다.

“……네가 왜……?”

예상에 없던 얼굴을 마주한 승윤은 이내 사정없이 얼굴을 찌푸렸다.

“유감이네.”

권기주가 전혀 유감이 아닌 얼굴을 하고 말을 했다. 그 바람에 승윤은 피가 거꾸로 솟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화가 나서 툭 불거져 나온 눈을 굴려 안을 보려고 하는데, 전봇대처럼 서 있는 놈 때문에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이것들이 이제 아주 미친 거지?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흥분한 승윤이 문을 밀치고 안으로 진입하려는데, 그는 비킬 생각이 없는지 바위처럼 버티고 서 있었다. 그것뿐만 아니라 도리어 기다란 검지를 입술에 붙이며 쉿, 하고 경고까지 했다.

그 어떤 사람에게서도 이런 취급을 받아 본 적이 없었던 승윤은 어이가 없는 나머지 넋이 나갔다.

권기주는 점잖게 몸을 돌려세우면서 문을 툭, 하고 밀어 닫았다.

“그럼 실례.”

문이 닫히기 직전 들려온 권기주의 낮은 목소리는 소름이 돋을 만큼 차분했다. 탁, 하고 문이 닫히는 소리에 정신이 돌아온 승윤이 욕지기를 하며 벨을 눌렀다.

딩동, 딩동, 딩동.

반 미친 사람처럼 벨을 눌러 댔으나 안에서는 반응이 없었다. 승윤이 분을 이기지 못하고 주먹으로 문을 쾅쾅 찍어도 마찬가지였다.

“하?”

승윤의 입이 절로 벌어졌다.

가만. 저 새끼가 옷을 어떻게 입고 있었더라? 머리는 젖어 있었던가?

황급하게 떠올려 보려고 해도 워낙에 흥분했던지라, 생각이 나질 않았다. 기억의 부재는 상상만 더 부추겼다.

샤워를 한 남자와 여자, 침대, 주고받는 애틋한 눈빛…….

머리를 채우는 것은 온갖 추잡한 상상들뿐이었다.

승윤의 올라간 입꼬리가 경련하더니 이내 헛웃음을 흘리며 몸을 삐딱하게 기울였다. 굳게 닫힌 문을 응시하는 눈에는 핏발마저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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