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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화. 약점. (31/31)


31화. 약점.
2023.06.15.


“적을 만들면 좋아요?”

목덜미를 휘감는 나른한 여자의 목소리에 기주가 돌아보았다. 비치웨어를 입은 은채가 가운을 걸치며 쳐다보고 있었다.

“억울하네. 욕먹은 건 내 쪽인데.”

얼굴은 억울함보다는 재미 쪽에 더 가까운데. 그걸 차치하고라도 권기주는 원래가 악랄한 구석이 있었다.

은채는 처음 만났을 때 자신의 심기를 상하게 했던 그가 떠올랐다. 확실히 어디를 어떻게 건드려야 반응하는지 본능으로 알고 있다. 그녀도 피해자 중 하나였고. 그나마 다행인 부분은 고의성이 없을 때도 간혹 있다는 거다. 물론 한승윤에게는 다분히 고의적이었지만.

가운의 허리끈을 묶던 은채는 문득 시선을 느꼈다. 그가 눈을 내리뜨고 보고 있었다.

“진짜 여기 계속 있을 거예요?”

그렇게 묻자마자 그는 보란 듯 소매 커프스 링크를 해체한 후 테이블에 놓았다. 그런 다음에는 손목시계도 풀어 그 옆에 놓았고. 대답은 그 후였다.

“네.”

기주의 새카만 눈은 미동 없이 음전한데 기묘하게도 뜨거웠다.

“신경 쓰여요?”

소매를 가볍게 걷어 올리면서 그가 무정하게 물었다. 은채는 잠자코 기주를 응시했다.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

“별로.”

그녀는 스스로 입을 열어 내뱉은 대답인데도 마치 영화의 대사를 들은 기분이 들었다. 언뜻 권기주가 피식, 하고 웃는 소리를 들어서일까.

은채는 아랑곳하지 않는 척 발코니 문을 열었다. 멀어지는 그의 발소리에도 의연하게 다리를 뻗었다.

가운을 벗어 선베드에 내려놓고 온수 풀장 안으로 발을 담갔다. 장난을 치듯 발장구를 치다가 이윽고 완전히 물속으로 들어갔다.

물의 온도는 체온보다 높은 정도였다. 물에 몸이 휘감기는 느낌을 만끽하며 은채는 선선히 헤엄을 쳤다.

내친김에 하늘을 바라보며 배영도 해 보았다. 먹빛 하늘을 수놓은 은은한 별 무리를 따라가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다 문득, 제 속내는 고요히 빛나는 별이 아니라 먹빛 하늘을 닮은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집과 학교. 쳇바퀴 같은 일상에서 권기주와 단둘이 있을 기회를 잡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질 게 뻔한 사격 내기를 제안한 것은 교묘한 눈속임이었다.

그런 식으로 그가 일을 벌이도록 부추긴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거기에 못 이기는 척 넘어가고 싶은 게 추악한 본심이었다.

권기주는, 알까.

은채의 몸이 일순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다리를 세워 잘 닿지도 않는 바닥 면을 지탱하며 수면 위로 고개를 디밀었다.

“푸하.”

물이 흥건한 얼굴을 손으로 박박 쓸어내리며 무심코 고개를 돌리던 은채의 시야에 익숙한 실루엣이 보였다. 적응하느라 잠시 깜빡거리던 눈이 이내 커졌다.

선베드에 그가 있었다. 눈으로 보고도 놀라웠다. 지겹도록 입던 블랙슈트가 아닌 사복을 입은 권기주가. 씻고 나온 건지 젖어 있는 검은 머리에 아이보리 색상의 니트는 극명하게 대조를 이루었다.

“언제부터 있었어요?”

“……가라앉을 때부터?”

기주가 두루뭉술하게 대꾸하며 오렌지 주스가 담긴 유리컵을 들고 빨대를 물었다. 눈은 그녀에게 고정한 채였다. 주스는 순식간에 절반이 줄어들었다.

은채가 풀장 밖으로 나오자 그의 눈길도 움직였다. 그녀의 머리카락, 얼굴, 몸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선베드에 둔 가운을 애타게 응시하던 은채는 문득 머리 위에 그늘이 드리워졌다는 것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일어선 권기주가 커다란 타월을 펼쳐 어깨에 걸쳐 주었다.

은채는 따뜻한 물속에 있다가 추운 바깥 공기에 노출되어 파랗게 질린 입술을 사리 물었다.

세부였던가.

어린애처럼 물속으로 잠수했었는데. 그게 바깥에서 숨을 쉬고 사는 것과 별반 다를 게 없다고 느꼈었다. 오히려 더 편안했던 거 같기도 하고. 덕분에 꽤 오래 버텼을까.

갑자기 권기주가 물속에 새하얀 섬광과 함께 뛰어들었다. 그러고는 시체 낚아채듯 붙잡고 수면 위로 건져 올렸다.

물을 토하느라 정신없는 와중에 권기주가 뭐라고 했었더라.

“그때 기억나요?”

그는 당장 얼어 죽을 거 같은 꼴로 태평하게 질문을 하는 은채를 어이없는 눈으로 쳐다봤다.

“세부에서요. 죽으려면 권기주 씨가 없을 때 시도해야 성공할 거라고 했던 거.”

“……그건.”

“사실 그때 나, 그냥 잠수하고 있었던 거였는데.”

그 말에 그는 처음으로 말문이 막힌 거 같았다. 그것도 모르고 과민 반응했던 것이 떠올랐는지 혀로 입술을 축였다.

그 과민반응이 못 견디게 좋았었는데.

“근데 그거, 지금도 유효해요?”

“내가 없을 리가 없잖아요.”

“나도 한때는 그런 줄 알았죠.”

은채의 쓸쓸한 숨소리는 쓰고, 짙었다. 기주는 그런 그녀를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의 눈에서는 짜증도, 냉정도, 혼란도 찾을 수가 없었다. 이러니 권기주에 대해서는 알 듯하다가도 다시 미궁으로 빠지는 거다.

은채는 괜한 기대를 했다는 듯 웃으면서 말했다.

“걱정 마요. 죽긴 왜 죽어, 내가. 누구 좋으라고.”

“……믿지 않겠지만.”

“그래요. 믿지 않아요. 왜냐면요. 권기주 씨는 날 속속들이 알고 있는데 난 권기주 씨에 대해서 아는 게 없어요. 갑자기 사라졌을 때 대체 뭐 하는 짓이냐고, 당장 돌아오라고, 돌아와서 싹싹 빌라고. 그렇게 추태라도 부리고 싶었는데.”

응축된 감정이 실소가 되어 은채의 잇새로 흘렀다.

“어디 사는지, 누구랑 사는지, 가족은 있는지, 친한 친구는 누군지. 정말 아무것도…… 아무것도 없었어요. 아는 게.”

“…….”

“나를 원한다는 지금도, 여전히.”

질책도 원망도 아니었다. 그저 달라진 것은 없는 현실을 말하고 있을 뿐. 그녀는 일체 파동 없는 그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어떻게 하면 믿을래요.”

권기주가 입을 벌리고 내뱉은 말은 의외였다. 고작 그 한 마디에 감동이라도 했는지 명치가 일렁였다.

“저번에 숨긴 권기주 씨 약점요. 그거 알려 주면 고려해 볼게요.”

은채는 손에 쥔 권력을 분별력 없이 휘두르는 아이처럼 엄포를 놓았다. 사실 그런 건 이제 궁금하지 않았다. 더는 중요하지도 않았다.

그의 얼굴이 미묘하게 굳는 것을 보면서 농담이니까 표정 좀 풀라고 하려던 은채는 멈칫했다.

“……알지 않나.”

이번에는 좀 짜증이 난다는 듯 기주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무언가를 절제하는 듯 새카만 눈이 위험하게 일렁였다.

음울한 목소리를 내는 그의 목울대가 들썩거렸다. 무지막지한 둘레의 흉곽이 크게 부풀어 올랐다가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일촉즉발의 욕정.

은채가 그것을 눈치챔과 동시에 그가 허겁지겁 손을 뻗어 왔다. 두 뺨과 함께 뒤통수를 잡아채는 손이 기이할 정도로 뜨거웠다.

기주가 그녀를 집어삼키듯이 입술을 파고들었다. 속절없이 그와 맞붙은 은채의 턱이 덜커덕 내려앉았다. 허물어지는 몸을 가누기 위해 기주의 단단한 어깨를 잡자, 그가 거칠게 숨을 삼키는 것이 느껴졌다.

그것도 잠시.

이내 기주는 사납고 집요하게 입술을 핥고 빨아 댔다. 그 격렬함은 고통 같기도 하고 해방감 같기도 했다.

그 기묘함에 몸을 굳히고 있던 은채의 눈꺼풀이 경련했다. 뻣뻣하게 붙잡고 있던 그의 어깨를 천천히 껴안았다. 그저 벌리고만 있던 입술로 기주의 입술을 지그시 문질렀다.

몽글몽글한 감각에 눈앞이 흐려졌다.

상처가 두려워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

결국 부서지더라도 기꺼이.

* * *

침대 가장자리에 몸을 웅크리고 잠들었던 은채가 힘겹게 눈을 떴다. 창문 너머 하늘은 푸르스름했다. 그녀는, 혼자였다.

목을 세워 주변을 한번 둘러보고는 도로 베개에 얼굴을 푹, 파묻었다. 느리게 눈을 끔뻑이다가 다시 잠이 들었다.

아침이 되어서야 은채는 기상을 했다. 간단하게 샤워를 한 후에 옷을 갈아입고 조식을 먹으러 내려갔다.

양송이 수프와 스크램블드에그, 베이컨 몇 조각과 크루아상 하나를 담은 간소한 접시를 테이블에 놓고 의자에 앉았다.

어쩐지 개운한 아침이라는 생각을 하며 포크를 들었을 때였다. 부르지도 않은 불청객이 맞은편에 소리 내 앉았다.

식사 예절도 없다니.

은채는 물로 목을 축이는 것으로 언짢은 심정을 드러냈다.

“얼굴 좋네.”

한승윤이 팔걸이에 양팔을 얹은 채 조롱하듯 말했다. 은채는 개의치 않고 수프를 떠서 입에 넣고, 빵과 베이컨을 한 입씩 베어 먹었다.

승윤은 소리 내지 않고 오물오물 음식을 먹는 그녀를 기가 찬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이 상황에도 여자는 그 꼿꼿한 품위를 잃지 않는다.

대단하다고 해야 할지, 철면피라고 해야 할지.

“예비 남편 리조트에서 외간 남자랑 밤을 보낸 소감이 어때요.”

“나쁘지 않네요.”

“들킨 김에 대놓고 붙어먹기라도 하겠다는 겁니까?”

은채는 못 할 것도 없다는 듯이 빤히 보았다.

“알려지길 바라요? 그럼 본인 얼굴 먹칠일 텐데.”

승윤은 답답하다는 듯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호소하듯 말했다.

“그 경호원 새끼가 곧 유부녀 될 여잘 왜 좋아하겠어. 머리가 있으면 생각이란 걸 좀 해요.”

“젊은 여자가 곧 유부남 될 남잘 좋아하는 이유도 뭐, 비슷하겠죠.”

한 마디도 지는 법이 없지. 승윤은 입안에 면도날이라도 품은 게 아닌지 의심스러운 눈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꿋꿋이 식사를 이어가던 은채가 잠깐 포크질을 멈추고 승윤에게 눈길을 주었다.

“그리고 우리 같은 사람들, 집안 배경 아니면 아무도 거들떠보지도 않아요.”

아직 불혹도 안 된 여자가 냉혹한 현실을 이토록 첨예하게 이야기하다니. 승윤은 당혹스럽고 어이없는 눈으로 응시했다.

은채는 음식이 입에 맞느냐는 웨이트리스의 질문에 미소까지 보이며 그렇다고 대답을 했다.

이쯤 되자 승윤은 그녀의 뇌 구조가 궁금한 지경에 이르렀다. 반대로 사리 분별을 못 하는 건지, 잘하는 건지 모호한 여자를 보고 있자니 입맛은 떨어졌다.

결국 승윤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녀를 혼자 내버려 두고 식당을 휘적휘적 가로지르다가 문득 걱정이 들었다.

지금도 무슨 약이라도 잘못 먹은 것처럼 저러는데, 나중에는 완전히 미쳐서 사랑의 도피라도 하겠다고 하면…….

승윤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서둘러 자리를 떴다.

* * *

제주에서 돌아온 송명환 회장의 발길이 웬일로 온실로 향했다. 철거하라는 명령을 한 뒤로는 첫 방문인 셈이었다. 제거하고 싶은 숙적이라도 보는 눈빛으로 온실을 훑어보는 얼굴에 노기가 가득했다.

강혜란과 사별한 지 벌써 몇 해나 되었는데 아직도 흔적이 남았다는 게 회장은 지긋지긋했다. 필요에 따라 호적에 올려 둔 송은채가 온실을 그 여자 대신으로 끼고도는 통에 철거 결정조차 쉽지 않았다. 죽어서도 질기고 질긴 여자.

인상을 팍 구기며 돌아서려던 송명환 회장이 문득 고개를 틀었다. 물 조리개를 들고 밖으로 나오던 함안댁과 눈이 마주쳤다. 함안댁은 뱀 앞에 선 것처럼 안색이 희게 질렸다. 손에 든 물 조리개를 황급히 뒤로 감추었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황 여사가 내 집에서 일을 오래도 했지.”

“회, 회장님…….”

“노망이라도 났나? 왜 하지 말란 짓을 해.”

“저는 그저…….”

“다물어!”

송명환 회장의 벼락같은 호통 소리에 함안댁은 찍소리도 못 내고 입을 닫았다.

온실을 복구하는 대신 관리는 일절 해 주지 말라는 회장의 지시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함안댁은 몰래몰래 하면 된다고 안일하게 생각했지만, 결국 그것이 화근이었다. 송명환 회장이 누구인가. 하나부터 열까지 통제하려는 지독한 성격의 소유자가 아닌가. 눈을 가리고 하는 아웅이 오래갈 리 없었다.

“권 팀장.”

뒤에 서 있던 기주는 물 조리개를 든 함안댁의 주름진 손이 후들후들 떨리는 것 쳐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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