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1. 버림받은 황녀 (1/47)


01. 버림받은 황녀
2023.01.02.



“반역자를 처형하라!”

신록이 푸르른 계절, 더없이 화창하고 아름다웠던 날 기어이 황제는 미쳐버렸다.


“뭐 하나! 당장 근위대를 불러! 즉결 처형이다!”

“맙소사.”

고개를 떨군 이들이 경악에 질려 수군거렸다.

죄명은 반역이었으나, 동의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저 평생, 발로크 공작을 질시하던 황제가 질투에 미쳐버렸다고 생각했을 뿐.

하지만 미친 짓도 작작 해야지.

상대는 발로크 공작이었다.

무력, 권력, 재력 그 무엇으로도 그 누구에게도 눌리지 않는 발로크.

최북단, 빙벽 너머의 마물을 상대할 수 있는 유일한 자.

그런 그가 기묘한 복종을 자처했기에 이 제국이, 황좌가 건재할 수 있었다는 것을 정말 잊었나?


“근위대! 근위대! 검을 가져와라!”

미쳐 날뛰는 황제의 억지를 받아주는 발로크 공작의 모습은 언제나처럼 같았으나, 오늘은 무언가 이상했다.

황제가 선을 넘었는데, 공작이 그마저도 넘기고 있었다.

이해 안 되는 일방적인 관계의 추가 쏠리다 못해 망가지기 일보 직전이다.


“폐하, 재고해주십시오.”

보다 못한 워론 후작이 드물게 나섰다.


“워론, 짐의 앞에서 지금 반역자를 비호하는 것인가?”

“폐하. 그가 아니면 누가 빙벽을 지키……. 크헉!”

워론 후작은 말을 채 맺지도 못하고 황제가 휘두른 칼에 맞아 쓰러졌다.


“반역에 동조하는 자는 지금 나서라, 짐이 발로크 공작과 함께 처결할 것이다.”

뚝. 뚝.

붉게 젖은 칼을 휘두르며 고함치는 황제는 광기에 잠식되어 있었다.

이대로라면 정말 파국이다.

사람들은 말이 통하지 않는 황제 대신 공작에게 사정했다.


“공작님, 잠깐 몸을 피하셨다가 폐하께서 진정이 되면…….”

그러나 이쪽도 말이 통하지 않기는 똑같았다.

사정하는 이를 내리깐 눈으로 바라보던 발로크 공작은 손가락을 입술 위에 세웠다.


“……쉿.”

발로크 공작은 자신을 걱정하는 이들을 죄 물리치고 기어이 황제에게 목을 내주었다.

미쳐 돌아가는 날이었다.

그러나 그중 가장 이상한 것은 공작이 처형 전 남긴 말이었다.


“드디어.”

발로크 공작은 제대로 된 재판 한번 받지 못하고 ‘살해’당하는 와중에도 웃고 있었다!

희미하게 미소를 짓는 그의 표정 그 어디에도 억울함이나 분노, 배신감 따위는 없었다.

오히려 산뜻했으며 조금은 기뻐 보이기까지 했다.

그랬기에 죽음을 맞이하는 발로크 공작이 짓는 미소는 처연하다기보다 아름다웠다.

가뜩이나 아름다운 얼굴에 스민 미소는 몹시 강렬했다.

한평생 발로크를 질시하던 황제조차 공작을 넋 놓고 바라볼 만큼.

그러나 미소는 한여름 눈처럼 단번에 휘발했고, 정신을 차린 황제는 기어이 ‘무조건’적으로 황실에 충실하던 발로크 공작을 처형했다.

* * *


“미쳤어. 미쳤지. 미쳤었다고!”

머리칼을 쥐어뜯으며 마구 소리를 지르던 황제가 문득 고개를 번쩍 치켜들더니 비앙카를 찾았다.


“비앙카!”

“네.”

“이게 가능한 일이냐?”

비앙카는 대답하는 대신 눈을 내리깔며 시선을 비꼈다.


“아무렴 내가 그랬을 리가 없잖아.”

사랑하는 황후를 잡아먹고 태어난 그녀에게 대답이 허락된 적은 없었다.


“제정신으로 했을 리가 없지. 아무렴. 응? 누가 내게 사술을 씌운 게 분명해. 대체 어떤 놈이 그랬을까?”

극도로 불안해 연신 짜증을 퍼부을 곳을 찾는 지금이라면.


“아아. 이 일을 어쩌면 좋지? 이제 곧 수확제야. 수확이 끝나면 겨울이 올 거라고!”

더더욱.

발로크 공작 처형 후 황제는 내내 이 상태였다.
겨울이 오면, 웅크려 있던 무서운 것들이 빙벽을 타 넘어온다.

사람들은 그것을 마물이라 불렀고, 마물을 상대할 수 있는 건 테르미나의 드래곤이라 불리는 발로크가 유일했다.


“이대로라면 테르미나 제국은 끝이야!”

미쳐 있던 황제가 이제야 정신이 들었던 거다.

돌이킬 수 없는 지금에서야.

발광하는 황제에겐 들리지 않게 비앙카가 나직이 한숨을 내쉴 때였다.

불려온 뒤로 비앙카와 마찬가지로 내내 침묵하던 황태자가 입을 열었다.


“이쯤 하면 충분하실 것 같네요, 이만 진정하세요.”

“진정이라니! 이게 어디 보통 일이더냐!”

황태자는 황제의 역정에도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해결할 방안이 있으니, 진정하시라고요.”

오히려 바르던 자세를 무너뜨려 방만하게 의자에 몸을 기대며 웃기까지 했다.


“이번 대의 발로크 공작은 아직 약혼녀도 없다고 하더군요.”

“……뭐?”

“그리고 저것을 남들은 제국 제일미라 부른다지요.”

황태자의 손가락이 비앙카를 가리켰다.


“저것에게 죄를 씻을 기회를 주시는 건 어떠세요?”

어미를 잡아먹고 태어난 죄가 이렇게나마 갚겠네요. 아버지.

나직이 덧붙이는 뒷말이 삭풍보다 차가워 비앙카는 눈을 질끈 감았다.

황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 *

그 다음날 공작령으로 황실의 청혼서를 품은 전령이 출발했다.


한달 뒤.


“크, 큰일이 났어요!”

울먹이는 소리와 함께 데보라가 구르듯 달려와 비앙카의 앞에 섰다.


“뛰면 안 돼. 데보라.”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중요해. 데보라. 넌 입궁하는지가 언젠데 아직도 그러니? 그러다가 큰일 나.”

태연한 목소리에 넋을 놓고 있던 데보라가 ‘이젠 나도 없는데’라고 작게 덧붙인 소리에 정신을 차린 듯 소리를 빽 하고 질렀다.


“전하!”

그거로 모자라, 데보라는 비앙카 황녀를 잡아끌기까지 했다.


“공작이 왔대요!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까. 도망가요. 응?”

“안 돼.”

“언니!”

제 말을 듣는 체도 하지 않자 데보라는 시녀가 아니라 ‘이종사촌’으로 굴 모양인지 언니라고 소리쳤다.

작게 한숨을 쉰 비앙카가 데보라를 향해 엄한 목소리를 내었다.


“전하라고 해야지. 데보라.”

“몰라 그런 거! 빨리, 나랑 같이 가잔 말이야.”

“불가능하다는 거 알잖아.”

“불가능하긴! 아빠가 다 준비해두었다니까. 언닌 그냥 모르는 척 배에 오르기만 하면 돼. 응?”


“데보라 일라이언. 그 제안은 거절한 거로 기억하는데?”

“왜! 왜 거절하는데! 내가 뭣 하러 시녀까지 됐는데!”

앙칼진 목소리와 달리 데보라는 어느새 두 눈이 빨개져 울먹이고 있었다.


“난 가지 않아. 내가 사라지면 날 빼돌린 배후로 반드시 일라이언 후작가가 지목당할 거야.”

“증거도 없는데 어떻게 우리 후작가를 처벌한다고!”

순진한 데보라의 말에 비앙카는 일순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이 황실을 아직도 그렇게 모르다니.


“반역의 증거는 있었어?”

“뭐?”

물기 가득한 데보라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린다.


“건국 이래 자처해서 목줄을 차던 테르미나의 드래곤은 죄가 있었느냐고.”

“그……그건.”

“테르미나의 드래곤도 쳐내는데, 후작가쯤이야. 정신차려, 데보라 일라이언.”

싸늘한 비앙카의 경고에 데보라는 결국 눈물을 떨구었다.


“그럼, 그럼. 뻔히 죽으러 가는 걸 아는데 손 놓고 보기만 하라고?”

“데보라. 말조심해. 마지막으로 충고하는 거야.”

비앙카는 허리를 살짝 굽혀 자신보다 키가 작은 데보라에게 시선을 맞댔다.

데보라를 바라보는 엄숙한 푸른 눈동자는 심해처럼 어둡고 고집스러운 빛을 발하고 있었다.


“폐하는 나와 공작의 결혼을 주선할 거야. 지난날의 오해와 우려스러웠던 일을 잊고 화합을 다지자는 의미로 말이야.”

어쩐지 혀끝이 쓰고 뻣뻣했으나 비앙카는 끝까지 태연한 어조로 말을 마칠 수 있었다.


“이 결혼으로 제국은 불미스러운 일을 씻게 될 거야. 테르미나를 수호하는 드래곤의 반려라니. 이 얼마나 영광된 일이니.”

“거짓말쟁이야! 거짓말쟁이!”

데보라는 펑펑 울었다.


“희생양이지 이따위 게 무슨 영광이야! 언니는 억울하지도 않아? 무섭지도 않으냐고!”

굵은 눈물이 뚝뚝, 마치 빗방울처럼 떨어져 내린다.

잠깐 사이 얼굴이 흠뻑 젖도록 우는 데보라를 바라보던 비앙카가 천천히 두 팔을 벌렸다.

안될 일에 발버둥 치는 데보라는 멍청해 보였으나, 자신을 위해 펑펑 우는 모습만은 외면할 수 없을 만큼 사랑스러웠다.


“이리 와. 한번 안아줘. 그거면 돼.”

“가지 마, 비앙카 언니. 가지 마.”

품에 안겨든 데보라가 훌쩍이며 애원했지만, 비앙카는 데보라를 안은 손에 힘을 더할 뿐 더 아무 말도 해주지 않았다.

시종이 폐하의 부름이라며 그녀를 데리러 올 때까지.

정말 한마디도.


“언니! 언니! 가지 마!”

펑펑 우는 데보라를 떼어두고 시종을 따라나서는 비앙카도 마음은 영 편치 않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데보라에게 한 말은 그냥 말뿐인 위협이 아니었다.

간밤 황제에게 들은 생생한 협박이었다.


‘일라이언 후작이 요새 새로운 취미가 생긴 모양이지? 베리얼 해역에 배를 띄웠다더구나.’

‘배는 조심해야지. 바다는 변덕스러워서 아차하는 순간 배를 집어삼키거든.’

데보라는 달아날 방법을 마련해두었다고 자신만만했지만, 이미 황제는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자신을 딸처럼 품어주던 삼촌 일라이언 후작에게까지 불똥이 튀어선 안 될 일이었다.

구제받을 길은 없다.

죽어야 한다면, 자신 하나로 충분하다.

그러니 비앙카는 오늘 반드시 공작과의 결혼을 성사시킬 예정이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울렁이는 마음을 가라앉힌 비앙카는 말쑥해진 얼굴로 시종에게 턱짓을 했다.


“고하고 문을 열어주시게.”

활짝 열린 문 사이로 보이는 접견실 안에는 첫눈에 시선을 앗는 희게 빛나는 남자가 있었다.

그는 목을 꺾어 올려봐야 할 만큼 키가 컸을 뿐 아니라 믿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

이지적으로 빛나는 금안, 활강하듯 쭉 뻗은 콧날과 날렵한 턱선.

이마 위로 부드럽게 흘러내린 은발까지.

그는 몹시 공들여 조형한 조각상보다 아름다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살짝 하늘로 뻗은 긴 눈꼬리 때문일까, 그도 아니면 내리깐 눈썹 때문일까.

자세는 반듯하나 묘하게 퇴폐적인 느낌이 난다.

태양과 같은 금안을 차게 빛내는, 양가적인 느낌을 두른 남자.

누구냐고 물을 필요는 없었다.

비앙카는 이전에 이와 꼭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이를 알고 있었다.


“발로크 공작?”

“황녀님을 뵙습니다.”

그런데 인사를 나누고 나서 보니 접견실에 그와 자신 말고는 아무도 없다.

설마, 자신이 너무 이르게 와버린 걸까?


“혹시…….”

황제는 어디 계시느냐 묻기도 전, 두꺼운 문이 닫혔다.

쿵.

등 뒤로 울리는 묵직한 소리와 함께 순간, 데보라의 고함이 머릿속에서 울렸다.


‘희생양이지 이따위 게 무슨 영광이야!’

“……!”

그 순간 비앙카는 깨달았다.

제물이구나.

비유가 아닌 정말로, 테르미나 드래곤의 화를 받아낼 제물말이다.


“비앙카 황녀님?”

고개를 든 비앙카는 작게 신음했다.


“아…….”

자신을 찢어발길지도 모르는데 빙긋 미소 짓는 남자의 웃음이 미치게 달다.

잠깐이나마 정신이 아득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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