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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여기 발로크가 있습니다, 폐하. (2/47)


02. 여기 발로크가 있습니다, 폐하.
2023.01.06.



“폐하께서 조금 늦으시는 모양입니다.”

맙소사.

공작도 몰랐던 건가.

두근거리던 심박이 일순 고요히 가라앉으며 흥분이 사그라들었다.


“아닙니다. 공작.”

맞잡은 두 손이 차갑게 얼었다.


“오지 않으실 겁니다.”

분풀이하라고 제물까지 바쳤는데 올 리가 없지.


“오지 않으십니까?”

“아마도요.”

그의 기분을 살피듯 작게 말을 덧붙이던 비앙카가 문득 쓰게 웃었다.


“…….”

제물이라는 걸 깨닫고도 습관처럼 눈치를 봐버렸다.

이제 곧 분노한 공작의 손에 처리될 텐데, 쓸데없이.


‘어미를 잡아먹고 태어난 것이 감히, 내 앞에서 입을 열다니!’

‘천박한 것. 여기가 어디라고 네가 말을 섞어?’

존재 자체가 죄라 평생 말을 가려야 했던 더러운 습관이 끝까지 사람을 비참하게 한다.

어쩐지 표정 관리가 잘되지 않아, 비앙카는 황급히 고개를 떨구었다.

저벅.

대리석 바닥이 울리는 묵직한 소리와 함께 시야에 까만 구두코가 들어섰다.


“버림받으신 겁니까?”

반사적으로 고개를 치켜들었던 비앙카는 공작과 눈이 마주치자 잠깐 굳었다.

내리깐 속눈썹 아래 언뜻 비춘 금빛 눈동자가 걱정스레 일렁였다.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약한 소리를 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처음 받아보는 따스한 시선에 그만 입이 제멋대로 움직여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공작. 긍정도 어렵겠습니다. 애초에,”

“애초에?”

뒤늦게 수습해보려 말을 꺼내 보았지만 되묻는 공작의 표정이 상냥했기에 꽉 다물려야 했던 입술이 또, 달싹거려버렸다.


“버림받았다고 할만한 사이를 허락받지 못해서…….”

응석 부리듯 속삭이는 목소리가 남의 것인 양 낯설다.

황급히 입을 틀어막았으나, 연이은 실수에 비앙카는 머리가 날아가버릴 것 같았다.

한평생 버겁게 받아온 모욕과 조롱에도 단 한번도 흔들려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곧 끝이라 생각해서일까.

그도 아니면 난생처음인 타인의 온기 때문일까.

견고하게 세운 벽이 흐무러지며 자꾸 날것 그대로의 속내가 튀어 나간다.

저를 죽일 남자가 건네는 얄팍한 다정에 흔들리는 꼴이라니.


“죄…….”

“좋네요.”

죄송합니다.

못 들은 것으로 해주세요.

짤막한 사과는 꺼내기도 전, 공작의 웃음소리에 막혀버렸다.


“마음에 들어요. 황녀님.”

저벅.

또 다시 길게 한 걸음.

거리를 좁힌 발로크 공작이 고개를 기울여 시선을 맞대왔다.

곧장 와닿는 황금빛 눈동자가 마치 태양같이 빛났다.

그래서일까.

그의 시선이 스치는 곳마다 따끈해지는 기분이다.


“제가 처음이겠네요.”

알 수 없는 소리와 함께 발로크 공작은 코트 안주머니에서 곱게 접힌 서류를 꺼내 사인을 했다.

스윽.

비앙카는 이해할 수 없는 대화보다 공작이 꺼낸 서류가 더 신경쓰였다.

저게 뭘까.

황금빛 종이는 황족에게만 허락된 것으로 비앙카도 익히 아는 것이었다.

그런 것을 공작은 확인도 하지 않고 사인에 이어 인장까지 눌러 찍었다.

꾹, 공작이 누르는 대로 붉은 밀랍이 밀려나며 발로크의 문양을 담아냈다.

쿵쿵쿵.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초조하다.


“그게, 무엇인가요?”

결국 비앙카는 초조함에 굴복하고 입을 열었다.

공작은 비앙카의 질문에 힐끗 시선을 들어 올렸다.

내리깐 속눈썹 아래 황금빛 눈동자가 어째, 즐거워 보인다.


“원하시던 것.”

“원하…….”

그의 말을 따라 하던 비앙카는 공작이 들어 보이는 종이를 확인하고 입을 틀어막았다.

성혼증서였다.

주관자는 황제, 신부는 비앙카 테르미나 신랑은 질리언 발로크.

한 적 없는 사인과 찍은 적 없는 직인이 서류에 떡하니 자리 잡은 게 보였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공작이 사인을 했다.

비앙카만의 것으로는 아무 효력이 없던 종잇조각이 그의 사인에 완벽한 효력을 발휘하게 된 것이다.

지금 그는 이것이 무슨 의미인지 제대로 알고 한 건가?


“저, 정말로 사인하셨다고요?”

“네.”

“어째서요?”

‘어떻게든 그와의 혼담을 성사시키려무나. 일라이언 후작의 배가 가라앉으면 죽은 네 어미가 얼마나 슬퍼하겠니?’

도망친 황제를 대신해 죽지 않아도 된다거나, 일라이언 후작가를 구하게 되어 정말 기쁜 것과는 별개로 비앙카는 이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

원수의 딸이다.

제대로 된 사죄도 없이 딸을 결혼의 상대로 밀어 넣었는데, 그걸 받아준다고?


“발로크 공작, 이건 중요한 문제예요. 나는 내가 무언지 알아요. 황제를 대신 테르미나의,”

“알아주시는 겁니까? 부인.”

“부인……!”

할 말이 많았는데 비앙카는 굳어버린 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가 자신을 부르는 말이 너무도 충격적이었던 탓이었다.


“부인……?”

믿기지 않아 곱씹는 말에 공작은 작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저도 서약을 했으니 ‘부인’으로 불러드리는 게 맞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공작.”

“공작이라는 말은 너무 거리감이 느껴지네요. 질리언이라고 불러주세요, 부인.”

“그…….”

“남편이나 여보도 좋아요.”

“질리언님.”

“질리언.”

고집스러운 실랑이 끝에 비앙카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질리언.”

곱씹듯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에 공작이 빙긋 미소 지었다.


“네, 부인. 자, 그럼 이만 집으로 돌아갈까요?”

“집이라고요?”

“이곳은 더 이상 그대의 집이 아니지 않습니까?”

‘버림받으신 겁니까?’

그 순간, 비앙카는 또 다른 공작의 목소리가 울리는 착각이 일었다.


“부인은 북부령의 안주인이 되셨으니 이제 그대의 집은 빙벽을 두른 북부이지요.”

말끝에 공작이 에스코트를 청하듯 손을 내밀었다.

부드럽게 휘어지는 눈매 사이로 보이는 금안이 순간 믿을 수 없게도 달콤하게 빛났다.

마치 사랑스러운 것을 보는 듯한 공작의 표정에, 비앙카는 잠깐 숨이 달리는 기분이었다.

맙소사.

저게, 사람을 꾀기 위해 지은 표정이라면 너무 굉장하다.

그들의 사이가 어떤 건지 뻔히 아는데도 마음이 동했으니까.

아니, 그와의 결혼 말고는 남은 선택지가 없는 데도 찰나에 몹시 기뻐 그를 따라나서고 싶어졌으니까.


“모셔도 될까요?”

비앙카는 제게 시선을 꽂아둔 공작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데려가 주세요.”

“물론이지요. 그 말만을 기다리고 있었답니다. 부인.”

손끝을 힘있게 감싸 쥐는 감촉에 비앙카는 눈을 질끈 감았다.

끔찍해야 하는데, 그의 손이 믿을 수 없을 만큼 따뜻했다.


 
초조한 듯 서성거리는 황제의 모습 그 어디에도 위엄 따위는 없었다.

황제, 에클리프는 머리를 감싸 쥐고 신음했다.

대체 어쩌다가 일이 이렇게 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다만 한 가지 명확한 건, 사일러스 발로크와 에클리프 데 테르미나는 공존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 하늘 아래 가장 지고한 자임에도 단지 그와 동시대에 태어났다는 이유로 숱하게 비교당하지 않았던가.


“감히!”

자신을 모자란 뭣쯤으로 보던 시선.

더없이 훌륭한 발로크를 수족으로 부리는 행운아라 함부로 찧어대던 입방아.

순간순간, 에클리프는 이 테르미나의 황제가 자신이 아닌 꼭 사일러스 발로크 같다는 생각이 들며 견딜 수 없는 모멸감이 들었다.

에클리프는 씩씩거리던 그대로 몸을 젖혀 의자에 기댔다.

눈을 감자 이 모든 사달이 시작되었던 바로 그날이 마치, 실재인 양 생생하게 떠오른다.


‘곧 추수가 시작되겠군?’

정기회의를 마무리하다 창밖의 풍경이 눈에 들어온 건 우연이었다.

따갑지만 열기가 한풀 꺾인 햇살과 어느새 훌쩍 높아진 하늘.

테르미나의 짧은 여름이 지나가고 있었다.

북반구에 있는 테르미나 제국은 9월 중순이면 모든 경작과 수확이 끝난다.

그 말은 10월부터는 완연한 겨울이라는 의미였다.

10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테르미나는 긴긴 겨울을 보내게 된다.

빙벽에 맞닿은 북부령보다야 덜하다지만, 매서운 추위다.

아무리 겪어도 절대 익숙해지지 않는다.

숨죽여 지내야 할 반년이 벌써부터 끔찍하다.

오지 않은 추위에 진저리를 내던 에클리프는 문득, 길고 지루한 겨울날을 밝힐 작은 유희가 생각났다.

연회였다.

막내 황녀가 올봄 성년이 되었으니, 짝을 찾을 때도 되었고.

어둡고 추운 겨울을 지낼 이들에게 즐거운 한때가 되어주리라.

겸사겸사 이유가 충분했다.


‘11월에 성대한 연회를 열지. 마침, 황녀도 성년이 되었으니 이 기회에 좋은 짝을 찾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기나긴 겨울을 설렘과 추억으로 버티게 해줄 산뜻한 황제의 제안에 모두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그럼, 좋은 날을 잡아서 짐이…….’

기분 좋게 말을 이어가던 중 갑자기 사일러스 발로크가 반기를 들었다.


‘충심으로 아뢰니 재고하십시오. 황제 폐하.’

언제나처럼 깍듯한 말투에 정중하기 짝이 없는 표정이었다.


‘11월이면 이미 혹한이 시작된 후입니다. 빙벽 너머 마물들이 활개를 칠 시기이기도 하지요. 그 시기에 연회를 주관하시면 빈축을 사게 됩니다.’

서늘한 눈빛과 당당한 어조.

이런 식으로 정당한 ‘이유’를 들던 발로크 공작 때문에 그는 늘 ‘어리석은’ 황제라는 조롱을 들어야 했다.

저런 게 충심이라고?

평생에 걸쳐 차곡차곡 눌러둔 화가 터진 건 바로 그때였다.


‘건방진! 짐이 설마 제국의 겨울이 어떤지 모르고 한 소리겠는가! 공작이 감히 짐의 의견에 반기를 드는 것이냐!’

“하…….”

돌이키면 무엇하겠나.

에클리프는 손을 들어 얼굴을 마구 문질렀다.

이미 사일러스는 이 세상에 없다.

남은 건 사일러스 발로크를 소름이 끼치게 빼 박은 질리언 발로크뿐이고, 지금 그가 이 황실에 와 있었다.


“시종장!”

또 다른 발로크.

질리언을 떠올리자 초조함이 극에 달한 에클리프가 밖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시종장! 황녀는 어찌 되었나!”

발로크 일행을 맞으려 황궁의 도개교가 내려간 것이 벌써 한 시간도 전의 일이었다.

그를 접견실로 안내하고, 차를 내어주고 하며 시간을 소요했다 치더라도 지금쯤이면 황녀를 만나고도 남아야 했다.

황녀를 만났다면 뭐라고 소식이 있을 텐데 어째서 이렇게 조용한 걸까?

설마, 이 쓸모없는 것이 치장이니 뭐니 부산 떠느라 늦장을 부리기라도 한 건가?

늘어나는 질문 하나에 짜증이 차곡차곡 쌓인다.


“시종장!”

오늘따라 시종장도 늦장이다.

기다리다 못한 에클리프가 막, 집무실 문을 열었을 때였다.

쾅!

지축이 흔들리는 듯한 거대한 소음과 함께, 발끝 아래 진동이 울렸다.


“무……무슨?”

경악에 크게 벌어진 에클리프의 눈에 접견실이 있는 비앙카의 로즈베나 궁 쪽에서 피어난 회색 구름이 보였다.

자욱하게 퍼지는 뭉게구름을 보자 일순 소름이 쭉 끼치며 절로 이가 딱딱 맞부딪혔다.


“시, 시, 시종장!”

안간힘을 모아 다시 한번 시종장을 불렀지만, 이번에도 에클리프에게 달려오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제야 에클리프는 깨달았다.

원래라면 집무실 앞을 지키고 있던 기사도 온 간데없었을 뿐만 아니라 그가 있는 본궁에 인기척이라곤 없다는 것을.


“누구……없느냐?”

텅 빈 복도에 대고 묻는 건 무척 소름끼치는 일이었지만, 에클리프는 입을 다물 수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아까부터 등 뒤에서 느껴지는 압박감에 기어이 고개를 돌리고 말 것 같았다.

본능이 속삭이고 있었다.


‘절대 뒤돌아봐선 안 돼.’

“누구 없느냐.”

에클리프가 다시 입을 열었을 때였다.


“여기 발로크가 있습니다. 폐하.”

낯설지만, 너무도 익숙한 미성이 등 뒤에서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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