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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남자 취향은 어떠실까요? (3/47)


03. 남자 취향은 어떠실까요?
2023.01.09.


세로로 길게 쭉 찢어진 동공을 품은 황금빛 눈동자.

무섭도록 화려하고 아름다운 얼굴에 박힌 저건 사람의 눈이 아니었다.

한밤에 사냥을 나서는 맹수의 눈이 바로 저렇지 않을까.

목표물을 노리는 번뜩이는 흉흉한 시선이 작살 같다.

겁먹은 티를 내지 않으려 했으나, 자신을 바라보는 시린 금안에 황제는 말을 더듬고 말았다.


“바, 발로크 공작.”

“예, 폐하.”

“그대가 여긴 어쩐 일인가?”

황제의 질문에 발로크 공작이 허리를 굽혀 보였다.


“부르시니 왔답니다.”

그의 대답과 자세는 정중했으며 옅게 지은 미소는 확실히 사교적이었다.

그런데도, 시종일관 떨어지지 않는 황금빛 시선 때문일까.

등골이 오싹한 감각이 떨치지 않는다.

머리를 조아린 공작을 앞에 두고도 겁을 먹었다는 사실에 살짝 오기가 난 황제가 다시 입을 뗐다.


“내가 부른 건 시종…….”

“오라 부르시지 않았습니까?”

저벅.

황제의 말을 가볍게 자른 젊은 공작이 허리를 펴고 한 걸음을 길게 떼었다.

멀지도 않은 거리가 훌쩍 가까워지는 만큼 에클리프를 짓누르는 압박감도 한층 더 거대해졌다.


“하나, 부르신 분을 아무리 기다려도 와주시지 않기에 찾아뵈었답니다.”

“그…….”

무례를 무릅쓰고.

덧붙인 뒷말이 속삭임인 듯했으나 에클리프에게 들릴 만큼 큰 것이 다분히 고의적이었다.

‘무례’라는 단어에 괜히 가슴이 철렁한 황제는 얼른 황녀부터 찾았다.


“황녀를 보지 못했나?”

그의 죄를 사해줄 아름다운 황녀.

마지막 남은 희망이자, 확실한 구원이 될 그의 소중한 비앙카.

성년이 되기 전부터 제 언니들을 제치고 협상테이블에 이름이 오르내릴 정도였다.

심지어 성년식에서 축복을 건네야 할 대주교는 비앙카를 보더니 얼빠진 표정으로 ‘오랜 세월을 기다려온 분’이라며 헛소리까지 했었다.

대주교까지 홀리는 미모라니.

정말 굉장하지 않나.

그런 비앙카를 발로크에 보낸 것이다.

그러니 뭐라 반응이 있을 법도 한데…….

에클리프는 한층 미소가 짙어진 젊은 공작을 향해 다시 물었다.


“황녀를 만났나?”

“만났습니다.”

비앙카를 봤는데도 이렇게 태연하다고?

질척한 탐욕이나 집착 따위는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 발로크 공작의 산뜻한 모습에 에클리프는 가슴이 철렁했다.


“어떤가? 마음에 드나? 자랑 같지만 막내 황녀는 죽은 황후를 쏙 빼닮아 굉장한 미인이지. 열다섯부터 그 아이에게 들어온 청혼서가 수레를 열 대 채우고도 남는다네.”

“그렇습니까.”

“굉장한 일이지. 이 테르미나의 귀족이라면 청혼서를 보내지 않은 이가 없으니 말이야.”

어쩐지 심드렁한 태도에 속이 탄 황제는 자신을 내리깐 눈으로 보는 젊은 공작에게 한발 다가섰다.


“그런 아이를 내가 발로크에 내어준걸세.”

“그 말씀은 앞으로 황녀께선 이 황실과 더는 연이 없다는 뜻으로 생각해도 되겠습니까?”

“물론이지! 물론이야. 공작이 혼인 서약서에 사인하기만 하면, 막내 황녀는 자네의 부인이 되어 발로크의 일원이 될 것이야. 이미 황적에서도 말끔히 지워뒀네.”

“……벌써.”

“그렇지. 성의 아니겠나?”

에클리프의 말에 발로크 공작이 문득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청량한 웃음소리와 활짝 피어난 표정.

누가 봐도 기쁨이 확연히 묻어나는 표정에 벌벌거리던 에클리프의 떨림이 잦아들기 시작했다.

살았다.

살았어!

누군가가 그의 귀에 대고 환호성을 질렀다.

테르미나의 드래곤이 그의 제물을 흡족히 받았다!

하긴, 비앙카지 않나.

제국 제일미라 불리는 그의 막내딸을 누가 거부할 것인가.

긴장한 마음이 풀리자 황제는 굉장히 피곤한 기분이 들었다.

공작을 돌려보내고 한숨 잘까……?

다소 태평한 생각을 하며 황제가 공작에게 가볍게 손을 내저었다.


“갈 길이 멀 테지. 주저 말고 어서 돌아가 보,”

“그런데 폐하 이상하지요. 불미스러운 일을 잊자며 주선하신 성혼이 아닙니까?”

“무, 무엇이 이상하던가?”

“‘발로크’의 레이디가 되실 황녀께선 시녀나 호위도 없이 혼자 오셨답니다.”

“그, 그건…….”

“게다가 조금 전 북부령까지 어떻게 이동하실지 여쭙다 듣게 되었는데 북부까지 대동할 의전도 없으시더군요. 그런데 이미 황적에선 지워졌다라…….”

황제는 공작 말 한마디 한마디에 가슴 깊은 곳이 푹, 푹 찔리는 기분이었다.

결혼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저 황녀 하나의 목숨값으로 발로크의 목줄을 다시 죌 수 있다면 괜찮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눈앞의 발로크는 젊은 혈기도 짓누른 채 차분하게 하나하나 이성적으로 짚어내고 있다.

이제는 전대가 된 사일러스 발로크도 사람 같지 않게 냉철하다고 했는데 눈앞의 질리언 발로크는 그보다 더하다.

제 아비를 죽인 원수의 딸을 신부로 삼았다고?

심지어 그 대우가 마땅찮다고 지적한다고?

이건 대체…….


“이걸 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길쭉한 손가락으로 턱을 살살 긁은 공작이 미소를 싹 지운 얼굴로 속삭였다.


“꼭 비앙카 황녀님께 불행한 일이 닥칠 거로 생각한 것 같이 보입니다.”

“그럴 리, 그럴 리 있나!”

날카로운 시선에 절로 배 속이 뜨끔하다.

속내를 들켰다는 생각에 잔뜩 당황해 체통도 잊고 그만 목청을 잔뜩 돋우고 말았다.


“황녀를 완전히 내어준다는 의미였네, 좋은 시녀도 실력 있는 기사도 북부에 있을 테니 북부의 사람으로 곁을 채우라고 말이야. 비앙카는 이제 북부의 레이디잖나.”

구구절절 설명하려니 얼굴이 화끈하다.


“북부의 레이디.”

“그렇지! 그래서 황적에서도 지워둔 걸세.”

“그렇다면 본성은 그냥 두기로 할까요? 북부의 레이디라는 말씀이 퍽, 마음에 들었거든요.”

“……뭐? 본성을 어쩐다고……?”

그러고 보니 눈앞의 젊은 공작에게 짓눌러 깜빡했다.

조금 전, 로즈베나 궁에서 굉음이 울렸던 것을.

하늘을 어둑하게 물들이던 거대한 흙먼지.


“잠깐, 설마 조금 전 그 소리가.”

“폐하께서 무너뜨린 것에 비하면 정말 약소하지 않습니까?”

“공작!”

붉게 달아올라 빽, 내지른 황제의 목소리 끝이 볼품없이 떨렸다.


“두고두고, 기억하시지요.”

“…….”

“궁 하나쯤 반파하는 건 일도 아닌 ‘발로크’가 무엇과 싸우는지를요.”

벌어진 황제의 잇새로는 아무 소리도 새어 나오지 않았다.


“빙벽 너머 것들은 협상도 통하지 않는답니다. 어여쁜 황녀님 같은 건 갈가리 찢어 먹어 버릴 테지요. 아차, 이제 남은 황녀도 없으시던가요?”

젊은 발로크 공작은 웃는 얼굴로 그에게 잔혹한 경고를 남기고 있었다.


“발로크의 안주인은 하나면 족하니, 다음 기회랄 것도 없을 테고요.”

말을 마친 공작은 허리를 숙여 인사를 보내곤 돌아섰다.

발로크 공작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자 황제는 내내 참고 있던 숨을 터트렸다.


“허억.”

칼날처럼 찢어진 동공을 품고 번뜩이던 금안.


‘갈가리 찢어 먹어 버릴 테지요.’

나긋한 공작의 속삭임에 순간 날카로운 이를 번뜩이는 짐승 앞에 내동댕이쳐진 기분이었다.


“허억, 헉.”

식은땀이 뚝뚝, 떨어지며 발치 앞을 짙게 물들이고 있었다.

여전히 본궁은 텅 비어 아무도 없었다.


 


‘이제 그럼 시녀들을 불러주시겠습니까?’

‘어떤 시녀요?’

‘북부로 따라갈 부인의 전담 시녀 말입니다. 워프를 이용한다 해도 마차로도 움직여야 할 거리가 있어 서두르는 편이 좋겠습니다.’

‘설마, 북부로 가자시던 말씀이 바로 오늘을 뜻하는 거였나요? 저는 오늘이……, 아.’

말을 하다 말고 입을 틀어막았던가.

기억을 더듬던 비앙카는 비참함을 참을 수 없어 손을 들어 얼굴을 덮어버렸다.

공작은 청혼서를 받고 왔으나 비앙카는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비앙카가 공작의 손에 죽을 거라 생각한 황제가 아무것도 언질을 주지 않은 탓이었다.

당연히 북부로 향할 그 어떤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았다.

버려졌다는 건 알았지만, 이렇게 치밀하게 준비된 죽음이라니.

단 한번도 황제에게 부성을 기대해보지 않았다.

그런데.

그런데 이건.


“너무했잖아.”

끝내 악문 잇새로 연약한 원망이 새어버렸다.

그렇게 한참이나 흘렸는데도 아직도 이렇게 울컥울컥 치받다니.

비앙카는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눈이 화끈거리고 부은 것이 느껴진다.

아까 한참이나 울었던 탓이었다.

그때, 발로크 공작은 그런 자신이 진정할 때까지 한참이나 기다려주었다.

섣부른 위로 대신 그는 가만히 지켜봐 주었다.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헐떡이며 눈물을 쏟아 낼 때가 되어서야 그는 다가섰다.


‘손수건은 미처 준비하지 못했답니다.’

그러고는 망설임 없이 크라바트를 풀어 조심스럽게 젖은 뺨을 훔쳐주었다.

가만가만 뺨을 쓰는 손길이 어찌나 상냥하던지, 눈물이 멈추긴커녕 더 났다.

남도.

하다 못해 남도.

아버지를 살해한 원수의 딸인 나 같은 것에게도.

이런 다정함을 건네는데.

후둑후둑 떨어지는 눈물을 따라, 황제와 황태자를 향한 짙은 원망이 눈을 가리고 머릿속을 헤집었다.


‘하물며 공작도 나를 사람으로 대해주는데…….’

‘사랑이겠지요.’

발로크 공작이 했다고는 믿을 수 없는 능글맞은 소리에 복받치던 눈물이 뚝 멎었다.


‘감히, 내 부인의 눈에서 눈물을 빼다니 괘씸하군요.’

‘두 번 다시 부인을 함부로 대하지 못하게 본보기를 보여야겠습니다. 성 하나면 확실한 경고가 되지 않을까요?’

눈살을 찌푸리며 속삭이는 소리엔 웃음기가 다분했다.

그래서 반쯤 흘려들었던 게 사실이었다.

‘되고 말고요.’라는 대답은 당연히 빈말이었다.

그런데 공작은 정말로 궁을 무너뜨려버렸다!


‘로즈베나 궁을 받아 간다. 불필요한 사상자가 나지 않게 주변을 정리해둬.’

휘하 기사에게 명령을 내리고 사라진 지 꼭 30분 만의 일이었다.

쾅!!!

온몸으로 느껴지는 진동과 마차 창문 밖으로 보이는 희붐한 세상.

흙먼지가 가라앉아 시야가 확보되자 조금 전까지 멀쩡했던 로즈베나 궁은 완벽하게 완파되어있었다.


‘이제 조금 후련하실까요?’

그제야 비앙카는 공작이 했던 말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가 남긴 말은 위로도 농담도 아니었다.

흙먼지가 가라앉은 후 다시 마주한 공작은 놀란 비앙카에게 이제 집으로 돌아가자며 웃어 보였다.


‘가기 전에 폐하껜 인사를 드리고 오는 편이 좋겠군요.’

‘금방 오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그러니까 금방 오겠다던 그 말 역시, 진담일 테다.


“시원한 차를 준비해주겠니?”

몸을 곧게 세운 비앙카가 시녀를 불렀다.

궁 하나쯤 무너뜨리는 건 일도 아닌 사람이지만, 확실히 더운 날씨다.

바쁘게 다녔으니 더울 테지.

차 준비는 눈 깜짝할 사이에 끝났다.

하지만, 시녀는 차를 내오는 대신 살짝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시럽이 부족한데 잠깐 가지러 다녀와도 될까요?”

“그러렴.”

비앙카의 허락에 시녀가 자리를 비우고 얼마나 지났을까.

마차 안은 산뜻한 차향으로 가득 찼다.

코끝을 스치는 향을 음미하던 비앙카는 뒤늦게 공작의 차 취향을 간과한 것을 깨달았다.

똑똑.

때마침 시녀가 돌아온 모양인지 단정한 노크 소리가 울렸다.


“들어오렴.”

비앙카는 시선을 먼데 둔 그대로 입을 열었다.


“공작님께선 어떤 차를 즐기시니? 다음부터는,”

“딱히 즐기는 건 없습니다.”

당연히 시녀일 거라 생각했던 비앙카는 갑작스러운 공작의 목소리에 잔뜩 당황했다.


“공작님?”

“다녀왔습니다.”

비앙카의 놀란 표정을 즐기듯 공작이 짧게 웃으며 마차에 올랐다.

크다고는 하나 마차는 마차였다.

장신인 그에겐 좁았을 텐데, 여유롭다 못해 우아하기까지한 공작의 움직임에 비앙카는 잠깐,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차를 한 모금 마신 공작이 습관처럼 웃었다.


“취향 이야기가 나온 김에 하나 여쭐 수 있을까요? 저도 부인의 취향이 궁금해서요.”

“어떤……?”

허리를 숙여, 훅 다가온 공작이 귓가에 속삭였다.


“남자 취향은 어떠실까요?”

귓바퀴를 스치는 서늘한 날숨이 끔찍하게 자극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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