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크고 단단한 손아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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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 크고 단단한 손아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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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 크고 단단한 손아귀
2023.01.13.
두 눈이 동그래진 그녀에게 공작이 다시 한번 물었다.
“응?”
부드럽게 접힌 눈꼬리.
눅진하게 빛나는 황금빛 눈동자.
머릿속을 진탕 놓는 나직한 미성.
그 모든 것이 끔찍하리만치 자극적이라 비앙카는 한층 가까이 다가오는 공작을 보고도 아무 소리도 내지 못했다.
아니, 입도 벙긋할 수 없었다.
고개를 기울인 공작이 너무 가까워 숨을 조금이라도 크게 쉬면 닿을 것 같았으니까.
입술이 스칠 것 같아!
비앙카는 가여우리만치 바짝 굳어 숨도 쉬지 못했다.
“이런.”
그 모습을 망막에 새기기라도 할 듯 뚫어지게 바라보던 공작이 짧게 혀를 찼다.
“조금 천천히 갈까요?”
여전히 그의 말은 이해가 어려웠지만, 비앙카는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대답을 해도 곤경에 처할 이런 교활한 질문은 사교계에서 잔뼈가 굵은 그녀로서도 처음이었다.
“그래요, 그럼.”
산뜻한 대답과 함께 발로크 공작이 물러서자, 막혔던 숨이 트였다.
폐부에 스미는 청량한 공기가 미치게 달아 비앙카는 연신 숨을 들이켜기 바빴다.
그래서 비앙카는 맞은 편의 공작이 어떤 시선을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지 알아채지 못했다.
한 팔 거리 만큼 물러선 그가 코앞에서 그녀를 내려다보던 것보다 훨씬 집요하고 진득한 시선을 드리우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정오도 훌쩍 지난 시간.
발치에 드리운 그림자가 살금살금 길어지자 일라이저 후작은 초조한 기분에 갑판을 떠나지 못했다.
아침 일찍 출발했으면, 아니 오전에만 출발했어도 이미 도착하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된 건지 데보라도 비앙카도 소식이 없다.
“대체, 무슨 일이야.”
물은 가득 차올라 뱃전을 사납게 때리고 있었다.
철썩거리는 소리와 끼룩거리는 바다새 소리.
사방은 평화로운데 오직 일라이저 후작만이 이유 모를 불안감에 심장이 갉히고 있었다.
그러길 얼마나 지났을까.
“일라이저 후작님.”
하염없이 해안만 응시하던 후작은 갑자기 등 뒤에서 나타난 인영에 소스라치듯 놀라고 말았다.
바다 가운데 떠 있는 배 위에, 태연히 오른 낯선 이라니.
심지어 일라이저 후작은 그가 말을 걸기 전까지 사람이 있는지도 몰랐었다!
“누, 누구냐!”
“비앙카 황녀님을 기다리고 계시는 중이시지요?”
호위 기사를 소리쳐 부르려던 일라이저 후작의 입이 꽉, 다물렸다.
후작은 눈만 내놓고 전신을 까만 천과 옷으로 감싼 괴한을 보며 낭패감을 감추지 못했다.
다 알고 온 놈이다.
이 배가 어째서 떴는지 전부 아는 놈.
어설프게 숨겨봐야 불리해질 뿐이었다.
대체 어디서 이야기가 샜을까.
황제는 어떻게 알아냈을까.
이제 와 생각해봐야 늦었지만.
일라이저 후작은 이를 우드득 소리 나게 갈고는 입을 뗐다.
“누가 보낸 놈이지?”
누군지 뻔히 알며 질문한 건, 시간을 끌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간판 위에 있는 건 일라이저 후작과 괴한 둘뿐 사람이라곤 아무도 없었다.
“…….”
그제야 후작은 호위 기사를 떼어두고 바람을 쐬러 나온 것이 기억났다.
그래선 안됐었는데.
뒤늦게 후회를 곱씹고 있을 때, 마주 선 남자가 허리를 깊게 숙이며 인사를 전했다.
“소개가 늦었습니다. 각하. 저는 발로크 공작가 소속의 기사, 헬리엇이라고 합니다.”
“황제가 아니라고?”
일라이저 후작은 생각지 못한 이름에 바보처럼 굴어버렸다.
“네, 각하. 발로크 공작각하의 전언을 들고 찾아뵙습니다. 비앙카 황녀님은 오늘 북부의 레이디가 되어 북부령으로 떠나십니다. 이 배에 오를 일은 없으니 기다리시지 말라 전해드리라 하셨습니다.”
“비앙카가, 아니 황녀님께서 북부령으로 가신다고?”
“네, 그렇습니다. 지금쯤…….”
말을 하다 말고 고개를 들어 해 위치를 가늠한 남자가 산뜻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두어 시간 전에 출발하셨을 겁니다. 대략 네 시간 후에는 워프진에 오르실 테고요. 늦어도 오늘 자정전 공작성에 들어가실 테지요.”
“그럴 리가! 다른 누구도 아닌, 발로크 공작이 비앙카를 데리고 북부령으로 향한다는 게 말이 되나?”
“황제 폐하께서 성혼을 주선하셨답니다.”
“허울 좋은 핑계라는 걸 누가 모르나! 비앙카를 제물 삼아 내빼려는 수작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모두를 위한 감사한 제안이지요.”
맙소사.
후작은 능글거리며 한마디도 지지 않는 흑의 차림의 기사의 말에 기가 차다 못해 목덜미가 뻣뻣하게 굳는 기분이었다.
“네놈 말대로라면 비앙카는 떠났을 텐데 굳이 내게 와서 소식을 전하는 이유는?”
“각하께서 여기에 계시다 불똥에 맞기라도 하면 황녀님께서 속상하실 테니까요.”
“내가 무슨…….”
흑의를 걸친 기사는 일라이저 후작의 말에 눈꼬리를 곱게 접어 보였다.
“알고 계십니까? 후작 각하께서 이 배를 띄웠기에 황녀님은 북부령으로 향하셔야 했답니다.”
“무슨 말이지?”
“공작가에서도 아는 이 배를, 더 절박한 누군가가 과연 몰랐겠습니까?”
나긋한 질문에 일라이저 후작은 얼굴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아아. 비앙카.
“후작 각하의 절박한 애정이 황녀님의 족쇄가 되었답니다.”
“내가 얼마나 신중하게…….”
“후작 각하께선 신중하셨겠으나 그분께선 필사적이셨으니까요.”
제물이 달아나게 둬서야 되겠습니까?
빙글거리는 것 같은 혼잣말에 후작의 눈이 매섭게 치뜨였다.
“감히!”
핏발이 선 녹안이 꽤 사납게 번들거렸으나 딱 그뿐이었다.
‘비앙카’라는 이름이 거론되는 순간 후작은 목줄이 매인 것처럼 옴짝달싹 못 한지 오래였다.
기사는 그 사실을 아는 것처럼 시종일관 여유로웠다.
“이만 배를 돌리시지요. 괜히 황제가 꼬투리를 잡으면 곤란해지는 건 황녀님일 테니까요.”
“……맙소사.”
온몸을 벌벌 떨던 후작은 볼썽사납게 갑판에 주저앉고 말았다.
“맙소사, 맙소사. 그가 알고 있었다고.”
난산 끝에 죽은 그의 여동생, 사브리나가 남긴 작은 아기는 태어나면서부터 아비인 황제로부터 지독히 미움을 받았다.
유부녀인 사브리나에게 한눈에 반해 약탈혼까지 자행한 황제가 아니었나.
그런 사브리나가 출산 중 죽어버렸으니, 황제에게 비앙카는 끔찍이 사랑하는 황후를 앗아간 원수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비앙카의 일생은 지켜보기 딱할 만큼 참혹했다.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지 않았을까.
말도 안 되는 생각이 절로 들 만큼.
일평생이 그토록 끔찍했기에 후작은 비앙카가 성년이 되기를 몹시 기다렸다.
성년을 넘기면 어떻게 해서든 비앙카를 ‘결혼’이라는 이름으로 황제의 손아귀에서 빼내 올 생각뿐이었다.
그런데, 황제가 비앙카를 산 제물로 쓸 줄이야.
“아아, 안 돼, 안 돼.”
가여운 것이 스러지는 것을 손 놓고 볼 수 없어 직접 나섰건만.
“난 어쩌면 좋나.”
도움이 되는 게 아니라 짐이 되고 말았다니.
후작은 깊이 상심했다.
“영지로 돌아가 봉문하십시오. 이후에 그 어떤 일이 벌어져도 후작 각하께서 황녀님의 약점이 되지 않게.”
후작은 기사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 * *
“우리는 북부로 돌아간다.”
질리언의 말에 도열해 있던 기사들이 일사불란하게 말 위로 올랐다.
수십 명의 기사가 말 위에 오르며 경 갑옷이 스치는 소리가 일었다.
“공작께서 북부령으로 떠나신다. 성문을 개방하라.”
이어, 본성의 시종장이 발로크 공작을 환송하기 위해 나서서 상황을 지휘하기 시작했다.
그의 말에 굳게 닫혀 있던 황성의 모든 문이 일시에 열리고, 외성의 맨 마지막 관문인 도개교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쿠르르르, 무쇠로 만든 쇠사슬을 푸는 도르래 소리가 으르렁거리는 천둥소리 같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 도개교가 해자를 가로지르며 놓이고 황성은 다시 고요해졌다.
사방이 소름 끼치게 적막하다.
로즈베나 궁이 무너지고 난 후 황성은 계속 이런 상태였다.
그 누구 하나 그 일을 언급하지도, 소란이 일지도 않고 침묵할 뿐이었다.
마차 창문 너머의 상황을 살피던 비앙카는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황성 하나가 무너졌는데 아무도 이 일을 이야기하지 않는다고?
비앙카는 이 침묵이 무엇인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굴복.
공포에 눌려 절로 입을 다문 것이다.
황성에 모든 것은 황제의 의지를 벗어나는 것이 없다.
심지어 이 침묵조차도.
평생 자신을 옭아매며 호령하던 이의 이토록 비굴한 모습이라니.
우습기도 하고 허탈하기도 하지만, 가장 큰 건 자괴감이다.
‘감히!’
늘 자신을 사람 취급도 해주지 않던 비정한 이도 사실은 그저 사람일 뿐이었다니.
온갖 감정이 함부로 뒤엉켜 가슴을 마구 두드린다.
“후.”
자꾸만 거칠어지는 숨을 고르려 비앙카가 한숨을 내쉴 때였다.
“아아, 정말이지 장관이군.”
질리언의 목소리가 들렸다.
“시종장의 한마디에 곧장 도개교까지 내려가는군. 황성에서 바라보는 황도라니.”
“보다 편히 모시고 싶은 마음일 뿐입니다. 공작님.”
그가 또 다른 무력 응징을 내릴까 봐 겁에 떨던 시종장은 생각지 못한 말에 화색을 감추지 못했다.
“보다 편하게……?”
“그렇습니다. 공작님.”
“입성할 때, 도개교가 내려오기까지 한 시간이 걸렸지.”
그땐, 자네가 없었나 보군?
뒷말은 혼잣말인 듯 나직했으나 주변에 들리기엔 무리가 없는 크기였다.
조금 부드러워졌던 분위기가 질리언의 지적에 다시 바짝 굳어버렸다.
마차 창문 틈새로 보이는 시종장의 얼굴은 가여우리만치 희게 질려 있었다.
“단번에 열리는 이 문이.”
“그…….”
“한 시간이나 걸렸어.”
늘 비앙카에게 고압적으로 굴던 시종장이 질리언의 앞에서 제대로 말을 하지 못하고 쩔쩔매는 모습이 아주 볼만했다.
그런데, 어째서였을까.
그 순간 비앙카는 왈칵 눈물이 터지고 말았다.
평생 자신을 그토록 핍박하던 이들이 저런 비루한 것이었다니.
고작, 저런 것들에게 일평생을 쥐여살았다니.
울고 싶지 않았는데 어쩐지 억울함에 울음이 그쳐지지 않는다.
뚝뚝, 굵은 눈물이 마치 폭우처럼 쏟아져내렸다.
소리를 한껏 죽여 울기를 한참.
똑똑, 마차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자 질리언이 있었다.
“부인, 무슨 일이십니까?”
“아무것도 아니에요.”
설명하기 힘든 감정이었다.
말하고 싶지 않기도 했고.
질리언은 영리하고도 다정한 남자였다.
그는 캐물어야 할 때와 기다려야 할 때를 잘 알고 있었다.
얼버무리는 게 분명한 말에도 가만히 고개를 끄덕인 공작이 문득, 허리를 굽혀 마차 창문에 몸을 바짝 붙여왔다.
“그럼, 그만하시는 편이 좋겠습니다.”
“네. 네. 이제 그만 할…….”
“우는 모습이 생각보다 예뻐 진정이 잘 안 됩니다.”
뭐?
“무, 무슨! 공작, 그런 소리를 하시다니요!”
“질리언이라 부르시라니까요.”
“지금 그런 이야기가 아니잖아요.”
“그런 이야기이면 뭐가 바뀔까요? 전 테르미나의 드래곤이라 불리는 짐승인데. 짝에게 구애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말인데 남자 취향은 혹시 어떠십니까?
그칠 것 같지 않던 눈물이 그 순간 뚝, 멎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