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 집에 돌아오신 것을 환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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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 집에 돌아오신 것을 환영해요.
2023.01.16.
찰랑거리는 은발에 무척 잘 어울리는 싸늘하게 가라앉은 황금안과 날렵하게 솟은 콧날.
길고 늘씬한 몸매에 우아한 움직임.
발로크 공작은 단숨에 시선을 강탈하는 이지적인 미남이었다.
그뿐인가 테르미나의 드래곤이라는 위명을 제하고도 그는 충분히 고결해 보였다.
그런데, 지금 그런 남자가…….
“어, 어떻게 그런 말씀을!”
“구애는 중요한 일이랍니다.”
해쓱해진 비앙카가 낮게 부르짖었다.
눈물이 쏙 들어갈 만큼 낯부끄러운 소리를 해놓고선, 정작 발로크 공작의 얼굴엔 옅은 홍조조차 없었다.
“알려주시겠어요, 부인? 마차 안에서도 결국 답을 해주시지 않아 못내 궁금합니다.”
심지어 진지하기 짝이 없는 말투에는 집요함이 가득했다.
대답하지 않고선 벗어나지 못하리라는 확신에 가까운 예감이 들었다.
“그, 그런 건.”
“그런 건?”
원죄를 타고난 생.
비앙카에게 애정은 감히 바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걸 어떻게 고르기까지 할 수 있겠나.
다른 누구도 아닌, 비앙카 테르미나가 말이다.
비앙카는 살짝 억울한 기분이 되어 작게 외쳤다.
“그런 게 있을 리가요!”
“잘 생각해보세요. 분명 있을 거랍니다.”
“공작님.”
“질리언.”
비앙카는 이 순간마저 고집스럽게 이름을 강요하는 발로크 공작을 바라보다 어깨를 푹 늘어뜨렸다.
상대는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정말 전설처럼 드래곤의 후손이라 그런 것인지, 그도 아니면 인간을 훨씬 상회하는 능력 때문인지 사고법이 달랐다.
예의 바르고 다정한 듯하나 의외의 부분에서 이질적이다.
“사랑받아본 적조차 없는 저인데, 어떻게 취향이 생기겠어요?”
사실을 읊는 입안이 온통 쓰다.
“사랑받은 기억이 없는 것과 취향은 조금 다른 문제이죠.”
“…….”
“없다면, 지금부터 생각해서 알려주세요.”
‘알려주면?’이라고 묻지 않았다.
기함할 만큼 새빨간 소리를 점잖게 할 테니까.
비앙카는 공작에 대한 평가를 하나 더 추가했다.
수상하고 영리할뿐더러 몹시 능글맞은 남자다.
입안으로 작게 한숨을 내쉴 때였다.
창문 안쪽으로 쑥, 들어온 질리언의 검지가 비앙카의 젖은 눈가를 쓸었다.
“우는 얼굴도 예뻤지만, 울지 않는 쪽이 조금 더 예쁜 것 같아요.”
여지없이 능글맞은 말투였지만, 눈가를 쓰는 손은 마치 ‘이 정도는 괜찮지요?’라고 묻는 듯, 느릿하고 상냥했다.
순식간에 얼굴이 달아올라서도 비앙카는 질리언의 손을 쳐내지 않았다.
낯부끄러운 소리는 참기 힘들었지만, 그 뒤에 숨겨진 다른 말을 들은 것 같아서.
‘울지 말아요.’
“이제 그럼 출발할까요? 어서, 집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몸을 물리는 그는 여전히 유들거리는 표정이었으나 비앙카는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맙습니다.”
두서없는 인사는 그래서였다.
“……별말씀을.”
놀란 듯 눈을 살짝 크게 떴다 이내 버릇처럼 웃는 남자는 비앙카의 감사에 부정하지 않았다.
마차 창문이 꾹, 닫히자 허리를 세운 질리언이 고개를 돌렸다.
비앙카를 향해 보여주었던 다정한 미소는 말끔하게 휘발된 채였다.
우는 비앙카를 달래려 행렬을 멈추자마자 달려든 시선이 제법 거슬렸다.
도개교 너머 양쪽 도르래에 스물, 성벽 포문마다 넷씩.
도합 백여 명의 궁수가 시위를 팽팽히 당기고 있었다.
화살촉이 향하는 곳은.
“…….”
질리언은 느릿하게 시선을 굴려 자신의 왼쪽 가슴을 바라보다 짧게 웃었다.
정신이 나가도 제대로 나갔군.
살기라 하기엔 같잖고 공포라 하기엔 건방졌다.
“어떻게 할까요?”
길어지는 질리언의 시선에 그의 부관인 크레타가 소리도 없이 등 뒤로 다가와 물었다.
“둬.”
말끝에 질리언이 서늘한 한마디를 덧붙였다.
“지금은.”
“그럼…….”
“굳이 부인께서 봐야 할 이유가 있겠나?”
크레타는 더 묻지 않고 깊게 부복하며 물러섰다.
공작가의 행렬은 질리언이 말 머리를 돌리는 것을 신호로 다시 움직였다.
그러나, 크레타는 제자리에 우뚝 선 그대로였다.
행렬이 까만 점이 되어 기어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 * *
비앙카는 문득 화드득 놀라며 몸을 일으켰다.
“…….”
뭔가 섬뜩한 소리를 들었던 것도 같았으나, 마차 안은 여전히 고요했다.
소름이 잔뜩 돋은 팔뚝을 슬슬 문지르던 그때,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부인?”
“무, 흠흠. 무슨 일이세요?”
낮게 잠긴 목소리.
비앙카는 그제야, 자신이 졸다 깨어났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이제 워프를 통과하려고 합니다.”
문밖에서 울리는 정중한 말투에 ‘네’라고 대답하며 흐트러진 머리칼을 정리하던 비앙카는 문득, 묘한 표정을 지었다.
워프는 편리했으나, 구토와 현기증 그리고 이명을 유발했다.
워프진을 상용화한 후로 꾸준히 보완했기에 지금은 많이 좋아졌으나 그래도 아직 더러 부작용에 시달리는 사람은 존재했다.
그래서, 워프전 고지는 말하자면 상례화된 것이었다.
특별할 것 없는 알림.
하지만 비앙카에겐 특별했다.
일상적인 매너에 일일이 감격하는 게 웃겨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각하기 전 손이 먼저 마차 창문을 활짝 열고 그를 불러버렸다.
“공작각, 지, 질리언님!”
“부인?”
잠긴 목이라 그를 부르는 소리는 그리 크지도 않았다.
하지만, 말이 투레질하는 소리와 기사들의 갑옷이 스치는 금속성 소음 속에서도 질리언은 곧장 비앙카의 부름에 반응해주었다.
눈앞에서 빛나는 금안.
비앙카는 순식간에 말에서 내려 다가온 질리언을 멍하게 바라보았다.
지는 해를 받은 그는 붉게 물들어 조금은 따스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온통 무채색인 듯 했던 남자는 석양빛 아래 화려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무섭도록 화려하고 아름다웠다.
홀린 듯 바라보며 ‘고맙습니다’라고 말하던 비앙카의 눈이 일순 커졌다.
“벌써 워프진이라니……?”
“조금 서둘렀답니다.”
거짓말.
새빨간 거짓말.
워프진은 조금 서둘러서 갈 수 있는 거리가 아니었다.
무게, 거리 그리고 횟수 그 어떤 것에도 구애받지 않은 워프진은 확실히 대단했으나, 역으로 적에게 쉽게 안마당을 내어줄 수 있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그래서 워프진은 도시 안에 설치가 금지되어 있다.
일반 도시는 마차로 한 시간 거리, 마물이 있는 북부 쪽의 워프는 하루 거리에 설치할 수 있게 법령이 제정되어 있다.
그런데, 조금 빨리 달려 반나절 만에 워프진에 도착할 수 있을 리가 있나.
“하…….”
비앙카는 이것이 자신이 ‘테르미나의 황녀’라서 라는 걸 깨달았다.
죽어서도 살아서도 그를 옭아맬, 황가의 명분.
아니 명분도 과하다.
자신은 공작의 트집거리가 될 테니까, 그래서 이렇게 서둘러 왔으리라.
어쩐지 쓴물이 왈칵 올라오는 기분이었다.
“시간을 반으로 단축하느라 기사들과 말이 무척 고생했을 거예요.”
“하루빨리 집으로 모시고 싶어 마음이 급했답니다.”
질리언은 여전히 다정했으나, 비앙카는 그의 미소에 마음 한구석이 묵직해지는 기분이었다.
“저를 부인이라고 생각하신다면 조금 더…… 편하게 생각해주세요.”
조금 더 믿어주세요.
나를 버린 황가에 절대 돌아가지 않을 테니까.
“결혼 첫날부터 부인을 고생시키고 싶지 않았던 제 마음도 생각해주시는 건 어떠세요?”
어렵사리 내비친 비앙카의 진심은 생각지도 못한 말에 막혀버렸다.
아주 완벽하게.
간단히 비앙카의 입을 막은 공작은 부관에게 워프를 발동시킬 것을 명령했다.
“돌아가지.”
“네, 각하. 워프 게이트가 곧 열린다. 모두 준비해!”
공작의 부관이 기사단을 정렬시키며 진을 발동하자 사방이 환해지며 잠깐 발밑이 붕 뜨는 느낌이 났다.
아찔함은 잠깐이었고 눈부심이 사라지는 것과 동시에 비앙카는 북부령에 도착해 있었다.
마차 문을 열자 폐부를 얼릴 것 같은 추위가 비앙카를 덮쳤다.
견디기 힘든 추위에 바들바들 떨며 마차 밖으로 몸을 내밀던 비앙카는 부드럽게 몸이 감싸이는 느낌과 함께 어느샌가 질리언의 품에 안겨 있었다.
“무슨……!”
화들짝 놀란 비앙카가 반사적으로 그를 밀어내려 막 손을 올렸을 때였다.
“집에 돌아오신 것을 환영해요. 부인.”
귓바퀴를 스치는 다정한 음색에 고개를 든 비앙카는 작게 신음하고 있었다.
내리뜬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질리언은 미소 짓고 있었다.
자신이 그에게 어떤 의미인지 다 아는데도 차마, 밀어낼 수도 없을 만큼 어여쁘게.
“이, 미친 짐승이!”
근위대장이 전한 소식에 에클리프 황제는 얼굴을 잔뜩 구겼다.
“갑자기 공작이 왜?”
에클리프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자신이 내민 제물을 흡족히 받아든 발로크가 건넨 경고를 말이다.
이 세상 누구보다 발로크를 잘 아는 것은 바로 자신이었다.
발로크는 잔혹했으나, 점잖았다.
제가 한 약속을 반드시 지키는 짐승이었다.
그런데 돌아간다던 그가 수하를 보내 갑자기 도개교를 박살 내고, 궁수를 몰살시켰을 리가……?
에클리프의 번들거리는 시선에 독이 바짝 올랐다 사그라들었다.
“그에게 무슨 짓을 저질렀지?”
“평소 그대로의 경계를 했을 뿐입니다.”
“경계? 무슨 경계?”
“행렬을 멈추고.”
“멈추고?”
근위대장에게선 아무런 말이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에클리프는 참을성 있게 기다려주었다.
“멈추고 그가 공격을 명령했나?”
“……황녀님께서 우는 모습이 관찰되었고, 공작이 본성을 응시했습니다.”
“그래서?”
“궁수들이 경계, 윽!”
근위대장을 발로 힘껏 걷어찬 에클리프가 씩씩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정신이야!!”
뭔가 일이 있을 줄 알았지만, 이런 머저리 같은 짓을 저질렀을 줄이야.
요약하자면 공작이 쳐다보니 지레 놀라 궁수들을 시켜 공격 준비를 시켰다는 거 아닌가.
“다독거려 돌려보낸 짐승을 뭐 하러 도발해!”
걷어차인 이마가 길게 찢어져 얼굴을 붉게 물들인 근위대장은 이를 악물 뿐 달리 말이 없었다.
“…….”
그 모습을 내려다보던 에클리프가 허리를 숙여 근위대장의 뒷머리를 쥐어 제게 시선을 맞췄다.
“아니, 아니야. 그게 다가 아니야. 그렇지?”
“…….”
“말해봐. 헤르펜 대장. 짐은 이번 일을 이해하기 힘들어. 제 아비가 죽어도 겨우 경고 따위로 만족한 짐승이야. 그런 것을 굳이 자네가 도발하다니?”
핏물이 뚝, 뚝 떨어지는 가운데 고집스러운 시선이 얽히길 한참.
에클리프는 흔들리는 근위대장의 시선에서 무언가를 발견한 듯 불현듯 광소를 터트렸다.
어깨를 떨어가며, 눈물이 맺히도록.
“맙소사.”
“…….”
“겁이 났던 거야?”
자리에서 일어난 에클리프는 황제의 체통 따윈 잊어버린 듯 킬킬거리며 부산하게 움직였다.
그것이 얼마나 지났을까.
웃다 지친 에클리프가 무너지듯 의자에 주저앉으며 눈물이 흥건한 눈꼬리를 훔쳤다.
“클라크 헤르펜. 그 전설이 겁이 났던 거지? 그렇지? ‘테르미나를 얻은 발로크가 비로소 오랜 속박에서 해방되리라.’”
“…….”
“저런. 부정하지 않아!”
새빨간 입을 크게 벌려 웃는 황제는 잔뜩 신이 난 목소리로 외쳤다.
“가여운 하르펜. 그럼 내가 자네를 안심시켜줘야겠군 그래? 자네는 비앙카가 언제 태어났는지 아는가? 사브리나가 황후가 된 지 여섯 달만이야, 여섯 달.”
갑작스러운 이야기에 근위대장은 눈만 끔뻑였다.
“모르겠나? 그건 전남편인 홀쉬르 남작이 죽은 지 딱 열 달 만이었다고!”
“헉!”
목 졸린 소리를 내는 근위대장을 보며 키들거리는 황제의 두 눈은 광기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이제 안심이 되는가? 애초에 발로크는 테르미나를 가지지 못했어.”
아아, 가여운 짐승 같으니라고.
경고를 건네던 의기양양한 꼬락서니가 아주 볼만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