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6. 더 일찍 죽이지 못해 죄송합니다 (6/47)


06. 더 일찍 죽이지 못해 죄송합니다
2023.01.20.



“이제, 좀 놓아주시면…….”

한참이 지났지만, 비앙카는 질리언에게 안긴 그대로였다.

길어지는 포옹에 이미 비앙카의 투명한 피부는 목덜미까지 새빨개졌다.

애매하게 허공에 떠 있던 손으로 슬쩍 그를 떠밀 듯 두드렸지만, 질리언은 비앙카를 내려주는대신 걸음을 옮겼다.


“지, 질리언!”

허공에 들린 발끝이 흔들리는 느낌에 비앙카가 자지러지는 듯한 목소리를 내었다.

몸을 비틀었지만, 질리언은 가볍게 한 손으로 추슬러 오히려 바짝 끌어안았다.

폭 안기는 느낌에 놀랄 틈도 없이 질리언이 망토를 풀러 비앙카를 감쌌다.


“읍!”

요만한 틈도 없이 비앙카를 감싼 질리언은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마치 강보에 싸인 아이 같은 모습에 비앙카는 부끄럽다 못해 기절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질리언의 뒤로 도열한 기사만 백여 명이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이런 꼴로 안겨서 이동하다니.


“내려주세요!”

“부끄러우세요?”

“어서, 내려주세요.”

비앙카는 이를 악물고 작게 소리쳤다.

사박.

쌓인 눈이 짓밟히는 소리와 함께 허공에 뜬 비앙카의 발끝이 다시 한번 흔들렸다.

내려달라는 요청을 깔끔히 무시한 질리언이 다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질리언!”

비앙카는 정말 울음이 터질 것 같았다.

말뿐인 황녀로 살아오며 온갖 박대를 당했다지만 이런 식의 수치는 처음이었다.

내내 점잖고, 당혹스러우리만치 다정히 다가오던 이가 어째서 이런 고집을 부…….

후웅.

비앙카는 뺨을 훑는 바람에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깨달았다.

북부, 바로 발로크의 땅이었다.

황가로부터 완전히 독립적인 발로크의 영역.

어쩐지, 그간 테르미나의 황녀인 자신에게 너무 잘해주는 게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아아…….”

그런 건가.

가슴 한구석이 선뜩해지는 기분과 함께 순식간에 눈물이 그렁해졌다.

그 순간 절대 멈출 것 같지 않던 질리언의 움직임이 멎었다.


“북부의 추위는 수도의 복식으로 감당할만한 것이 아니죠. 눈이 이미 무릎까지 찼습니다. 그런 얄팍한 구두로는 걸을 수 없습니다.”

“무슨…….”

“부인을 망신 주려는 못된 장난이 아니라는 뜻이랍니다.”

버릇 같던 미소는 한 줌도 남아 있지 않는 얼굴을 한 질리언은 진지했다.

능글맞은 소리로 입을 틀어막던 것과는 사뭇 다른 모습은 위압적이었지만 그래서 더욱 믿음직스러웠다.

찰랑거리며 금방이라도 흘러넘칠 것 같던 눈물이 서서히 마르기 시작했다.

질리언은 그 모습을 눈도 깜빡이지 않고 지켜보았다.

이윽고 창백하게 질렸던 얼굴에 희미한 생기가 돌아오자, 그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사박.

다시 한번 발끝이 달랑이며 흔들렸지만, 비앙카는 조금 전처럼 수치스럽지 않았다.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워프직전 그에게 건넸던 자신의 말이 이명처럼 떠오르며 속이 울렁였다.


‘저를 부인이라고 생각하신다면 조금 더…… 편하게 생각해주세요.’

“…….”

비앙카는 가슴 앞에 모아쥐었던 손을 뻗어 가만히 그의 재킷을 움켜쥐었다.

바람에 드러난 손끝이 시리다 못해 에는 듯 아렸다.

하지만, 비앙카는 고집스럽게 그의 라펠을 움켜쥐었다.

질리언은 내리깐 시선으로 힐끗 바라보았을 뿐, 굳이 비앙카를 말리지 않았다.

언뜻 그가 웃었던 것도 같았다.

사박.

사박.

긴 걸음으로 눈을 헤치는 소리가 선명했다.


 
굳이 마차에서 내리도록 했기에 다른 이동 수단이 있는 건가 생각했지만, 질리언이 안내한 곳은 또 다른 마차였다.


“어째서……?”

“일반 마차로는 눈길을 헤치기엔 적당하지 않답니다.”

혼잣말 같은 작은 소리를 질리언이 들은 모양이었다.

그는 마차에 준비되어 있던 두툼한 털이 달린 담요로 비앙카를 덮어주었다.


“북부의 마차는 원래 바퀴 폭이 꽤 넓지요.”

두 손으로 거리를 가늠하듯 벌려준 간격이 두 뼘이 훌쩍 넘었다.

마차 바퀴 폭이 저렇게 넓다고?

소리 내 말하진 않았지만 경악하는 것이 표정에 드러났던 모양인지, 질리언이 짧게 웃었다.


“눈이 쏟아지기 시작하면 사람 키를 훌쩍 넘기는 건 일도 아닌 곳이, 바로 발로크 영지입니다.”

“네.”

“그런 눈밭에 빠지지 않고 달려야 하니, 자연히 바퀴 폭이 넓어지고 말았습니다.”

질리언은 상냥한 목소리로 설명을 이어갔다.


“이곳에서는 당연하지만, 수도에서 이런 마차를 끌었다가는 이목을 끌게 마련이라 보통 워프진에서 마차를 바꾸어 탄답니다.”

비앙카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현명한 선택이었다.

그런 광폭 바퀴로 황도를 달렸다간 이목을 끄는 정도가 아닐 것이다.

아마 부황은 어떻게 해서든 괴상한 마차의 모습을 트집 잡았을 게 뻔했다.

기꺼이, 영구 동토의 땅에서 버텨주는 이들이 베풀어 주는 은혜도 잊고.


‘본래 사람들은 먼 곳의 위험보다는 제 눈앞의 평화를 맹신하기 마련이니까.’

“……아.”

‘깡그리 잊고 마는 거야. 이 평화가 어떻게 만들어진 건지.’

귀를 울리는 이명에 비앙카는 빠르게 눈을 깜빡였다.

한동안 들리지 않아서 방심했다.

손을 맞잡은 비앙카는 손톱에 힘을 주었다.

살갗을 파고드는 아릿한 느낌이 점점 선명해지며, 멀어졌던 감각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부인?”

흐려진 시선이 선명해지고, 청각이 살아났다.


“부인?”

“아, 네?”

질리언이 코앞에 있어 깜짝 놀랐지만, 비앙카는 최대한 태연하게 대답하려 애썼다.


“갑자기,”

“현기증이 좀 났어요.”

이런 일은 익숙했다.

어린 시절부터 시작된 환청이었다.

뭘 모르던 시절에는 제가 보고 들었던 것을 죄 시녀에게 말했다가 미쳤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어린아이들은 관심을 끌려고 거짓말을 하기도 하지요.’

7살 무렵 비앙카에게 배정된 예법 선생의 오만한 말 한마디에 미친 게 아니라 거짓말쟁이로 끝이 나긴 했지만.


“현기증이요?”

“네.”

비앙카는 질리언의 질문에 얌전히 대답하고 얼굴을 감싸쥐었다.

한번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면 보통 너덧 마디씩 울리곤 했다.

‘말’은 비앙카의 노력과 상관없었다.

그것이 원할 때면 어느 때곤 장소를 가리지 않고 들렸다.

심지어 말이 들릴 때면 몸이 통제를 벗어나 늘어져 버리는 통에 다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명은 언제나 비앙카를 곤란하게 했으나, 오늘만큼은 아니었다.

어째서, 하필이면!

울컥 원망이 차오르는 와중에도 비앙카는 본능적으로 머리를 감싸 쥐며 웅크리려 했다.

질리언이 끌어당겨 안지 않았다면.

어깨가 감싸는 손길에 놀란 비앙카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번쩍 들었다.


“부인, 제게 기대세요.”

질리언이 자신을 끌어당기고 있었다.

맞닿은 황금빛 눈동자가 마치 햇살인 듯 따스하게 느껴졌다.

비앙카는 느릿하게 눈을 끔뻑였다.

이게, 감각이 풀려서인지 실제인지 잘 구분이 되지 않았다.

아직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비앙카는 방심하기에 이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자신은 이명만 듣는 게 아니었다.

가끔, 자신이 아닌 자신의 모습으로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고 무언가를 바라보며 감정을 느끼기도 했다.

환상인 듯했지만, 그 순간만큼은 완벽한 현실이었다.

손 끝에 닿는 감각, 코끝을 스치는 향기, 귀를 울리는 음성.

미치도록 생생한 오감은 비앙카를 번번이 함락시켰다.

그래서 비앙카는 목소리가 들리면,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을 의심하며 침묵했다.


“쉬이, 괜찮아요.”

‘쉬이, 괜찮아.’

질리언의 목소리 위로 목소리가 겹쳤다.

마치 하나인 듯 겹쳐진 두 목소리가 허밍처럼 부드럽다.

비앙카는 눈을 질끈 감았다.

아까 머리를 감싸 쥐었던가.

어디까지가 실재였는지 잘 구분이 되지 않았다.


“강행군이었습니다. 힘든 것이 당연합니다.”

“…….”

“괜찮아요. 이대로 한숨 주무세요.”

눈을 뜨면 집일 거예요.

질리언의 목소리가 희미해지다 끝내 들리지 않게 되었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약속과 다르지 않나?”

“일이 그렇게 되었습니다.”

황태자, 제러미는 불쾌함을 감추지 못하는 이자르에게 퍽 미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일이 그렇게 되었다? 말을 쉽게 하는 버릇이 있군.”

“이자르님, 이건 정말 그렇게밖에 설명이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재수가 없으려니!

고개를 깊이 숙여 사죄하는 제러미의 속내는 엉망이었다.

테르미나의 짐승이 난동을 부리고 나간 지 채 반나절이 되지도 않아 이자르가 도착했다.

동부의 험준한 산맥 너머 위치한 카르탄을 지배하는 자, 이자르는 어지간해서 테르미나를 방문하는 일이 없었다.

그런데 무슨 바람이 불어서!

하필이면.

짜증에 절로 어금니가 까득 갈리지만, 지금 성난 이자르를 상대해야 하는 건 오로지 그의 몫이었다.

황제는 이자르가 왔다는 말에, 곧장 제러미를 불러들였다.


‘네가 이자르님을 만나야겠구나. 비앙카를 발로크에 보내자고 한 건 네 생각이었잖니.’

‘하지만, 폐하. 이건……!’

‘네가 벌인 일, 네가 책임지는 것이 맞지 않겠니?’

확실히 그랬다.

하지만, 황제는 잊고 있었나?

그 역시 비앙카를 발로크에 보내는 것에 찬성했었다는 걸 말이다.

이자르와의 약속을 기억했다면.

그것이 문제가 될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면, 반대했어야지!

제 살길 찾아 날름 비앙카를 보내버리곤 이제 와 모르는 척하다니!

생각하니 부아가 치민다.

절로 이가 갈리지만, 이 테르미나의 주인은 바로 황제, 에클리프 테르미나였다.

테르미나 제국의 모든 것의 주인.

제러미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황태자였지, 황제가 아니었고 황제는 그다지 혈연에 연연하는 편이 아니었다.

굳이, 자신의 피를 물려받은 자신이 아니라도 입맛대로 부릴 수만 있다면 황제는 다음 대의 황제가 누가 되건 간에 신경 쓰지 않는다는 의미였다.

지금까지야 황제의 미움을 산 비앙카를 적절히 이용해 입지를 다졌다지만, 이제 더는 그럴 수가 없다.

이젠 그도 오직 살아남는 것에만 온 신경을 써야 할 때였다.


“그럼 어디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일 설명해보겠나?”

이죽이는 이자르의 목소리에 제러미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맞추었다.

그의 심정이야 이해한다.

작년 여름, 직접 테르미나를 찾아 비앙카가 성년이 되거든 카르탄의 황후로 보내달라 황제에게 말하지 않았던가.

그때, 그에게 받은 황금이 사람 키만 한 궤짝으로 열이었다.

황금 한 궤짝은 성 하나를 가뿐히 살 수 있는 어마어마한 가치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 것이 열 궤짝이었다.

이자르는 오랜 친우에게 건네는 작은 선물이라고 했지만, 그건 분명히 비앙카의 몸값이었다.

후하다 못해 넘치는 몸값에 일국의 황제가 직접 전한 청혼이었다.

그런데, 돈을 받아놓고 정작 비앙카를 빼돌린 셈이 아닌가?

이자르가 화를 내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그러나 순순히 인정했다간 황금 열 궤짝을 돌려주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을 터다.

마른 침을 꿀꺽 삼킨 제러미는 천천히 입을 떼었다.


“폐하. 비앙카를 일찍 죽이지 못해 그저 죄송할 따름입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