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 부인, 제게 기대세요
(7/47)
07. 부인, 제게 기대세요
(7/47)
07. 부인, 제게 기대세요
2023.01.23.
제러미의 말에 이자르의 한쪽 눈썹이 슬쩍 솟았다.
그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진 건 순간이었다.
“죽이지 못해 죄송하다라…….”
두툼하고 곧은 이자르의 손가락이 따닥, 따닥 규칙적으로 팔걸이를 두드리는 소리가 지독히 선명했다.
“꼭, 죽어야만 하는 죄를 지었다는 말 같이 들리는데?”
말투는 느른했으나, 이자르는 다음 말을 재촉하고 있었다.
적어도 그의 흥미는 제대로 끈 모양이었다.
제러미는 한결 나직해진 목소리를 내었다.
“일국의 황태자로 모국의 치부를 읊기는 정말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래도 짐에겐 설명하셔야겠지.”
“예, 그것이 응당 도리일 것입니다.”
제러미는 공손히 말끝을 늘였다.
여전히 이자르의 태도는 싸늘했다.
하지만, 제러미는 알고 있었다.
비앙카를 죽이지 못해 죄송하다는 사죄를 전했을 때, 찰나에 이자르의 시선에 희미한 경멸이 섞였다는 것을.
이자르, 카르탄의 젊은 황제는 말쑥한 생김만큼이나 그 성격이 예민하고 까다로운 자였다.
지금도 그가 걸친 것은 눈처럼 새하얀 카르탄식 예복이었다.
테르미나와 카르탄을 오가려면 반드시 험준한 산맥을 넘나들어야 했는데, 이자르는 그곳을 지나왔다는 게 믿기지 않는 모습이었다.
구김 하나 가지 않은 예복은 방금 다려입은 듯 반듯했으며, 빗어 넘긴 흑단 같은 검은 머리칼은 한 올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극도로 완벽함을 추구하는 사람.
그것이 이자르였다.
제러미는 그가 비앙카를 원하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제국 제일미.
어떤 정신 나간 얼간이는 감히 건국시조인 제국 초대황제와 비앙카를 견주기도 했다.
초대 황제의 재림이라나……?
여신이 강림한 것 같은 완벽한 분을 닮은 거라곤 눈과 머리색 뿐인 저 잡종을.
하나, 아무것도 모르고 저 소문을 들었다면 어떨까?
더없이 탐이 나겠지.
그런데, 그 완벽함이 사라진다면?
제러미는 흥분이 끓는 것을 느끼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이자르께서도 아실 겁니다. 비앙카를 품으셨던 사브리나 황후께서는 원래…….”
“알고 있습니다.”
“쉽지 않은 결혼을 감행하셨던 만큼, 황제 폐하께선 사브리나 황후를 정말 아끼셨지요.”
이자르는 계속해보라는 듯 턱을 까딱였다.
제러미는 앞에 놓인 찻잔을 들어 두어 모금을 삼켰다.
그러고도 한참을 머뭇거린 후에야 제러미는 다시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그 후에 비앙카가 태어났습니다.”
“그런데요?”
뭐라도 있을 것 같이 뜸을 들인 것치고는 별 것 없는 소리에 이자르는 쉽게 흥미를 잃었다.
희미하게 남아 있던 호기심은 전부 휘발되고 남은 건 짜증인 듯 말투가 자못 차가웠다.
하지만, 제러미는 그런 이자르의 모습에 웃어주었다.
“6개월 만에, 아주 건강하게 말입니다.”
노여워하던 이자르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6개월 만에?”
“예, 폐하.”
제러미는 실수로라도 그와 눈이 마주치는 일이 없도록 시선을 제 발 끝에 묶었다.
“태어난 아이가 건강하였다고?”
테르미나의 에클리프 황제가 사브리나 홀쉬르의 미모에 반해 약탈혼을 자행했다는 것을 모르는 이는 이 대륙에 없다.
홀쉬르 남작이 진작에 죽었다거나 하는 것은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저 남편을 여읜 지 채 1년도 되지 않은 미망인이자, 홀쉬르의 새 가주가 황제의 절절한 구애를 받았다는 것이 초미의 관심사였다.
‘저는 홀쉬르 남작가의 가주가 되기로 했습니다. 폐하.’
‘그대의 자애를 홀쉬르가 아니라 테르미나를 위해 쓰면 어떻겠느냐?’
그 둘의 이야기는 음유시인의 입을 타고 대륙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험준한 산맥에 가로막힌 동부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었다.
이자르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말은!”
제러미는 잔뜩 분노한 젊은 황제의 고함에 머리를 깊게 숙였다.
“부황은 아시겠으나 혈통을 그리 따지는 편이 아니십니다.”
사브리나 황후를 보셔서 아시겠지만.
괴로운 듯 작게 덧붙이는 말은 다분히 의도적이었다.
“작년 남부 시찰을 다니러 간 사이 폐하께서 방문하셨던 걸로 압니다. 제가 자리를 지켰더라면…….”
“아니, 아니, 아니 잠깐.”
이자르는 당혹과 혼란 그리고 모멸과 분노에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마구 말을 더듬었다.
그는 본성의 가장 화려한 태양홀을 몇 번이고 빙빙 돌며 거친 숨을 다스리려 애썼다.
그러길 얼마나 지났을까.
다급한 걸음으로 제러미의 앞에 다다른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잠깐, 잠깐. 그러니까……. 이해했다.”
“예, 폐하.”
“그런데 이해되지 않는 게 있어. 그녀를 죽이지 못한 것과 발로크 공작에게 보낸 건 무슨 관계지?”
걸려들었다.
제러미는 빙긋 웃었다.
이번에는 그 웃음을 감추지 않았다.
오히려 그에게 기쁘다는 듯, 활짝 핀 표정을 고스란히 드러낸 채였다.
“부황과 발로크간의 불화로 전대 공작이 처형됐습니다.”
“저런.”
“하나, 그 짐승을 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라 상심한 짐승을 달랠 제물이 필요했지요.”
이자르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길지 않은 설명이나 모든 것을 이해한 표정이었다.
“다만 테르미나도 짐작하지 못한 건, 그 짐승이 비앙카를 살려 데려간 거랍니다.”
“하지만, 비앙카 황녀라면 그럴 만도 하지 않나……?”
발로크 공작의 행동이 이해된다는 듯 이자르의 말투는 퍽 덤덤했다.
아마도 비앙카가 제국 제일미라는 사실을 떠올린 모양이었다.
제러미는 작게 코웃음 쳤다.
이런 머저리.
인간 같지 않도록 빼어난 발로크에게 고작 비앙카 따위가 눈에 찰 리가 있나.
티 없이 표정을 구겼던 제러미는, 문득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이자르는 발로크를 본 적이 없던가?
제러미는 그에게 친절히 설명해주기로 했다.
“발로크는 비앙카의 출생에 관한 일을 모른답니다. 폐하.”
“……!”
“테르미나의 수치라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부황께서 그 일을 문제 삼지 않으시니 유야무야 넘어갔지만…….”
말을 흐리는 제러미를 향해, 이자르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어쨌거나 황녀는 테르미나이고, 황족살해는 반역죄지.”
이렇게까지 짚어줘도 알아듣질 못하다니.
테르미나의 핏줄인 줄 알고 그 잡종을 살려 데려간 거지, 발로크가 황족살해 따위를 겁낼 리가 있나.
전설을 모르는 이자르로서는 당연한 추측이었지만, 제러미는 착각하는 이자르를 한심하게 여겼다.
하지만 구태여 짚어 설명하진 않았다.
귀찮기도 했지만 굳이 설명해주지 않아도 뒤에서 벌어진 테르미나 황실의 치정이 꽤 재미있었는지, 그의 표정은 많이 눅진해져 있었으니까.
희미한 미소가 그 증거였다.
제러미는 깊게 고개를 숙여, 정중한 인사를 건네었다.
“상황이 꽤 급박해, 그 어떤 언질도 드리지 못했던 점 정말 죄송합니다.”
“그 또한 이해한다.”
분위기가 처음보다 많이 부드러워졌다.
그러나 이게 끝은 아니었다.
“우리가 나누어야 할 이야기는 이뿐만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황태자의 생각은 어떤가?”
“물론입니다. 폐하. 테르미나는 도의를 아는 곳이랍니다.”
“하하. 카르탄은 무도하지 않으니 너무 긴장하지 말라.”
이자르의 웃음소리가 청량했다.
새파란 눈동자는 활짝 벌어진 동공에 까맣게 보일 지경이었다.
그 눈을 해서도 앓는 소리 한번 없이 머리를 감싸 쥐는 모습에 질리언은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비앙카의 눈에 초점은 없었다.
“부인, 제게 기대세요.”
자신이 하는 말에 시선은 두지만, 시선 끝에 자신이 있지는 않았다.
마치 그 너머 아득한 어디를 바라보는 듯 표정이 아련했다.
“쉬이, 괜찮아요.”
비앙카는 현기증이라고 말했지만, 이런 게 고작 현기증일 리가 있나.
쓴 물이 치받는 기분이었으나 질리언은 자신이 낼 수 있는 가장 상냥한 목소리로 비앙카를 구슬렸다.
“강행군이었습니다. 힘든 것이 당연합니다.”
“…….”
“괜찮아요. 이대로 한숨 주무세요.”
뻣뻣하게 버티던 몸이 어느 순간 물안개처럼 허물어졌다.
질리언은 그 순간, 비앙카를 놓치지 않고 끌어안았다.
성인 여자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가벼운 무게감.
처음만큼 놀라진 않았지만 이건, 아무래도 적응되지 않을 것 같았다.
나직한 한숨을 조심스럽게 터트린 질리언이 비앙카를 덮은 두툼한 담요를 꼼꼼하게 여며주고 마차 의자에 기댔다.
“현기증이라고……?”
나직한 혼잣말이 무척 씁쓸했다.
접견실에 덩그러니 혼자 들어설 때 황제에게 버림받은 것을 눈치챘다.
하지만, 화려하진 않아도 꼼꼼한 치장에 소문과 달리 그래도 제법 황녀다운 생활을 했겠거니 생각했다.
그런데, 워프진에서 내리는 비앙카를 안아 든 순간 발밑이 꺼지는 기분이 들었다.
비앙카는 보이는 것보다, 훨씬 더 말라 있었다.
두 손아귀를 살짝 벗어나는 가는 허리.
힘을 조금만 세게 주어도 갈비뼈가 곧장 바스러질 것 같았다.
헝겊 인형처럼 덜렁 들리던 무게감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사람이 이렇게 마를 수가 있는 건가?
필시 건강에 문제가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 사람을 데리고 수도에서 북부령까지 하루도 안 걸려 주파하는 강행군을 했으니, 탈이 날 거라는 생각도 했다.
하나, 이 추위에 시간을 끄는 것보다는 차라리 돌아가 피로를 푸는 편이 낫겠다 믿었고 후폭풍을 감내하리라 했다.
전부 짐작했던 바였다.
그런데 이렇게까지 기분이 가라앉는 건…….
질리언은 시선을 내려 안고 있던 비앙카를 조심스럽게 추슬렀다.
도와달라는 소리를 하는 대신 방어하듯 몸을 웅크리던 모습이 몹시 자연스러웠지.
평생, 그 누구의 도움을 받지 못한 사람처럼.
‘폐하는 오지 않으실 거예요.’
버림받았음을 깨달은 순간에도 비앙카는 고요했다.
체념했기 때문이었다.
그 누구의 보호도 기대할 수 없어서.
완벽히 혼자라서.
질리언은 미동도 없이 깊게 잠든 비앙카를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푸르게 질린 안색과 희미하기 짝이 없는 숨소리가 금방이라도 꺼질 듯 아스라했다.
어느덧 공작성에 다다랐지만, 질리언은 비앙카를 깨울 수가 없었다.
지쳐있는 비앙카에게 이것이 얼마나 달콤한 휴식인지 알아서.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불현듯 잠든 비앙카의 얼굴 위로 또 다른 모습이 겹쳐졌다.
‘어째서 그랬어.’
파리하게 질린 얼굴로 마지막 숨을 뿜으며 울던 그 날의…….
뻔히 지난 기억인 걸 알면서도 질리언은 소름이 확 끼쳤다.
아닌데.
분명 아닌 걸 아는데도.
꼭 제 품에 안긴 비앙카 숨이 차근히 꺼지고 있는 것만 같았다.
“부인?”
소리 내 불러보았지만, 비앙카의 감긴 눈은 뜨이지 않았다.
질리언은 견딜 수 없이 무서워졌다.
“비앙카!”
“…….”
“부인!”
그의 목소리에 절박함이 서리던 순간, 굳게 닫힌 비앙카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크지도 않은 움직임이었다.
하지만, 질리언을 구원하기엔 부족함이 없었다.
눈물을 머금었던 푸른 눈동자도, 호선을 그리던 예쁜 입술도 더는 떠오르지 않았다.
“부인.”
비앙카를 부르는 질리언의 목소리가 더없이 다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