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8. 떨어지고 싶지 않아 (8/47)


08. 떨어지고 싶지 않아
2023.01.27.



“부인.”

“…….”

“부인, 도착했답니다. 괜찮으면 눈떠보시겠습니까?”

귓가를 간지럽히는 부드러운 미성에 비앙카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더니, 이내 커다란 눈망울이 드러났다.


“이제 일어나시겠어요? 공작성에 도착했답니다.”

무슨 소리지?


“도착……?”

한참만에야 질리언의 말을 이해한 비앙카는 작게 신음했다.


“아…….”

잠들었다고?


“안고 가도 되긴 하지만, 분명히 신경 쓸 것 같아서.”

질리언은 목 뒤로 손을 넣어 비앙카를 일으키며 덧붙였다.

몸을 덮고 있던 담요가 흘러내리자 순간 오싹한 기분에 비앙카는 무심결에 질리언에게 몸을 붙였다.

흠칫.

몸에 닿아오는 작고 가냘픈 몸체에 몸을 굳힌 것도 잠깐, 질리언은 이내 자연스럽게 담요로 비앙카를 싸주었다.

품에 넣어 줄 수도 있지만, 아무래도 비앙카는 원하지 않을 것 같았다.

왜냐하면.


“공작성에 도착했답니다. 그대에게 인사를 올리려 모두가 나와 있지요.”

“공작성?”

잠이 덜 깨 멍하게 풀려 있던 비앙카의 눈에 초점이 돌아왔다.

질리언은 짧게 웃으며 마차 문을 열었다.

문이 열자마자 숨이 멎을 것 같은 찬 바람이 몰아쳤지만, 비앙카는 움츠리는 대신 그가 내민 손을 잡고 마차에서 차분히 내렸다.

잠이 든 것도 당황스러운데, 눈을 뜨자마자 사용인의 인사를 받아야 하는 상황이라니!

내색하지 않아서 그렇지 비앙카는 꽤 긴장한 상태였다.

황녀로 살며 사교계에서 단련이 되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꼴사납게 달달 떠는 모습을 보여 주었을지도 모른다.

가까스로 허리를 곧게 세우고 질리언의 옆에 서자 기다렸다는 듯 누군가가 다가왔다.


“다녀오셨습니까. 공작님.”

“음, 부인 이쪽은 헤일리, 공작성을 관리하고 있답니다.”

“반가워요.”

“시녀장을 맡은 헤일리 아머입니다.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마님.”

싹싹하진 않았지만, 적당히 격식 있고 친근한 말투에 비앙카는 살짝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겨우 인사말 한마디로 누군가를 평가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하지만 비앙카는 갈색머리칼을 야무지게 틀어올린 이 말끔한 인상의 시녀장이 제법 마음에 들었다.

눈을 힐끔거리지도 않고, 은근히 비소를 짓지도 않는다.

자세는 곧고 발음은 분명했으며 움직임은 절도 있었다.

이런 사람은 황성에서도 보지 못했…….


“아!”

순간 비앙카는 중요한 것을 깨달았다.

이곳은 황성이 아니었다.

자신을 조롱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이곳은 발로크의 땅.

원수의 딸인 자신에게 호의적일 이유 역시 없다.


“마님. 제가 침실로 안내해드려도 되겠습니까?”

이어지는 헤일리의 말에 비앙카는 안색을 굳혔다.

옆에 질리언이 뻔히 있는데 시녀장이 나서 ‘침실’을 안내하겠다고?


“됐…….”

“그렇게 하시죠. 부인.”

헤일리의 말을 거절하려는 비앙카를 막아선 건 질리언이었다.

어째서라는 말이 혀끝까지 차올랐지만, 비앙카는 꾹 눌러 삼켰다.

이미 워프진에서 겪어보지 않았나?


‘부인을 망신 주려는 못된 장난이 아니라는 뜻이랍니다.’

“함께 가주시기 힘드신 건가요?”

그래서 비앙카는 조심스럽게 그의 설명을 청했다.

설마하니 대놓고 물을 줄은 몰랐던 걸까.

놀란 듯 멈칫하던 것도 잠깐, 질리언이 눈이 보이지 않을 만큼 환하게 미소지었다.


“네, 아무래도 곧 불려갈 것 같거든요.”

이상한 대답에 대한 설명을 요구할 필요는 없었다.


“공작님! 7성채 외벽에서 마물이 발견되었습니다!”

질리언은 두 눈이 동그래져 자신을 바라보는 비앙카에게 자신의 귀를 톡톡 두드렸다.


“귀가, 조금 밝은 편입니다.”

이런 걸 조금이라고 할 수 있나?

조금 전까지 아무 소리도 안 들렸는데.

심지어 기사는 아직 보이지도 않았다.

달려오며 소리를 질렀다는 뜻이었다.

와.

비앙카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사람을 훨씬 상회하는 발로크의 능력은 익히 들어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을 듣는 것과 직접 보는 것은 큰 차이가 있었다.


“조심히 다녀오세요.”

비앙카는 질리언에게서 한걸음 떨어졌다.

급박한 상황이 분명했다.

그런데도 질리언은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짧은 시간이긴 하나, 비앙카가 보아온 질리언은 영리하고 세심한 남자였다.


‘함께 가주시기 힘드신 건가요?’

말 속에 담긴 불안감을 그는 알아차렸으리라.

마물이 나왔다는데 지금 그런 어리광을 부릴 때가 아니었다.

비앙카는 또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사박.

눈을 딛는 소리와 함께 얄팍한 구두가 금세 축축하게 젖어 들기 시작했다.


“저는 시녀장과 함께 들어가겠습니다. 어서 다녀오세요. 상황이 급한 거 아닌가요?”

“급한 건 아닙니다.”

“하지만 가보셔야 하는 거 맞죠?”

질리언은 대답하지 않았다.

비앙카는 그런 그를 향해 손을 흔들어주었다.


“다녀오세요.”

 

 


“대체 무슨 일이길래 블랫이 본성에 기사를 보낸 거지?”

비앙카가 시야를 벗어나자마자 질리언은 기사와 함께 말을 타고 달리기 시작했다.

모양을 내기 위해 걸친 갑갑한 조끼와 나풀거리는 크라바트, 그리고 프록코트는 는 말을 타기 전 잽싸게 벗어버렸다.

지금 질리언이 걸친 건 얄팍한 셔츠 한 장이 전부였다.

몸에 꼭 맞게 맞춘 질 좋은 셔츠는 보기에는 근사했으나 전투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마음 같아서야 이 매끌거리기만 하는 것도 벗어던졌으면 좋겠지만, 질리언은 자신의 등 뒤에 누가 있는지를 상기하며 버텼다.


“7성채에서 감지된 움직임은 총 네 곳입니다.”

“저런.”

마물은 보통 무리를 지어 움직인다.

시력이 나쁜 녀석들은 근거리의 움직임에 반응하기 때문에, 동족의 움직임마저 자극으로 인식하고 무작정 쫓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네 곳이라니?

7성채의 수비를 담당한 블랫 단장이 놀랄만했다.


“무리에서 낙오된 것들은 아니고?”

“네 무리입니다.”

“블랫이 놀랄만하군.”

“웨이브일까요?”

심각한 표정을 짓는 기사의 모습에 질리언이 하하, 하고 시원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즐거워죽겠다는 듯, 활짝 벌어진 붉은 입술.

활처럼 휘어진 눈매 사이로 빛나는 황금안.

질리언의 옆에서 말을 달리던 기사는 순간, 제 주인의 아름다운 모습에 잠깐 말을 잃었다.


“걱정 말아. 여긴 발로크의 땅이야. 마물은 발로크의 땅을 감히 헤집지 못해.”

“무, 물론입니다. 공작님.”

오만한 선언에 기사는 홀린 듯이 마구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가는 허세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발로크령에 사는 이들은 전부 알고 있었다.

마물들은 발로크를 해하지 못한다.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공작의 모습에 두려움을 느낀 건지, 마물들은 공작만은 건드리지 않았다.

그랬기에 웨이브가 시작되면, 선봉에 서는 것은 언제나 공작이었다.

믿기지 않는 압도적인 힘으로 마물을 쓸어내고, 언제나 난전의 한가운데 서길 자처하는 진짜 ‘주인’

발로크의 기사들은 그런 공작을 진심으로 섬겼다.

그렇게 지켜진 발로크령은 역사 이래, 단 한 번도 성채를 내준 적 없었다.

이 빙벽 앞에 발로크가 자리를 잡은 이후로.

그 사실을 깨닫자 기사는 울렁이던 속이 빠르게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겁먹을 필요는 없었다.

이곳은 발로크령.

단 한번도 마물에게 성채를 내준 적 없던 그곳.

공작이 있는 한, 그리고 그를 따르는 발로크의 기사들이 있는 한 언제까지나 안전할 이곳은 그가 숨이 다할 때까지 지킬 곳이니까.

문득 차오르는 벅찬 기분에 들떴던 기사는 그래서 질리언의 표정을 세세히 살피지 못했다.

마물 이야기를 듣고도 단 한 번도 긴장한 기색이 없이 평온했다는 것을 말이다.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아 질리언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서 있던 비앙카는 옆에서 울리는 단정한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이제, 침실로 안내해드려도 괜찮으실까요?”

“아?”

이런.

잠깐이라고 생각했는데, 헤일리의 머리 위로 하얗게 눈이 쌓여 있었다.

대체 얼마나 넋 놓고 있었던 거지?


“따뜻한 목욕물을 준비해 놓았답니다. 먼 길 오시느라 많이 힘드셨지요?”

비앙카가 난처해하는 것을 눈치챈 듯, 헤일리가 먼저 화제를 바꾸었다.

심지어 유능한 시녀장이 할법한 말이라 자연스럽기까지 했다.


“고생은 무슨.”

“수도에서 발로크 령까지는 보통 이틀 정도 걸린답니다.”

헐거워진 담요를 요령 있게 여미며 헤일리가 한 걸음 앞서 비앙카를 안내했다.

비앙카조차 한참 걷고 나서야 깨닫고만, 부드러운 재촉이었다.


“이틀이라고?”

“네, 워프는 몸에 무리가 가니까요. 워프진까지 각각 거리가 반나절이기도 하고요.”

비앙카는 잠깐, 헤일리의 말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오늘 오전에 황성에서 출발했는데……?”

“그러니, 무리하셨다는 말을 드리는 거랍니다. 이제 막 자정이 되었거든요.”

맙소사.

시간을 읊는 헤일리의 말에 비앙카가 핼쑥하게 질렸다.

워프진에서 공작성까지의 거리가 그렇게 먼 줄 미처 몰랐다.


“시간이 늦었으니, 오늘은 가볍게 목욕을 도와드리고 내일 향유 마사지를 준비해드릴까 하는데 어떠실까요?”

“그래요.”

늦은 시간에 도착했으니 한시라도 빨리 쉬고 싶을 심정을 배려한 말일 터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비앙카는 그 말이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그에게 안겨서, 대체 몇 시간을 잔 거지?

왜 하필이면 그때 목소리가 들렸담.

이제 와 해봤자 늦은 후회지만, 비앙카는 자책이 멈춰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두 다리는 부지런히 움직여 비앙카는 본채의 거대한 홀을 지나 2층을 오르고 있었다.


“제가 조금 부축해드려도 될까요?”

“괜찮아요.”

“발로크 공작성은 마물 웨이브를 대비해 방어에 치중한 형태로 지어져 있답니다. 성안에서 전투를 치를 수 있기 때문에 층고가 높지요.”

말끝에 헤일리가 정중하게 손을 내밀었다.


“본성의 계단은 마물이 쉽게 타고 오르지 못하도록 계단폭이 좁게 설계되어 있답니다. 마물의 발은 크고 뭉툭하거든요.”

아아.

비앙카는 헤일리의 자상한 설명에 손을 내밀어 맞잡았다.

헤일리와 달리 비앙카는 황성에서 입고 있던 길고 넓게 부풀린 드레스를 입고 있는 채였다.

본래 이런 드레스를 입을 때면 두 명의 시녀가 걸음을 돕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하나는 끌리는 드레스 자락을 뒤에서, 하나는 발끝이 보이지 않을 주인을 부축하는 것이다.

그냥 계단을 올라도 위험할 텐데, 특별히 계단 수도 많고 폭도 좁은 곳이라면 반드시 부축이 필요할 것이다.

고집부리다 계단을 구르는 것만큼 멍청한 짓도 없다.


“구두도 죄 바꿔야겠군요.”

“여독이 풀리실 때쯤 디자이너를 부르겠습니다.”

지극히 공손한 말투로 비앙카에게 답을 한 헤일리는 어느샌가 다다른 3층의 어떤 방문을 열어주었다.

기름을 먹여 광을 낸 커다란 나무 문이 양쪽으로 활짝 열리는 순간, 비앙카는 생각했다.

죽어야 한다면 바로 지금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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