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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 내가 감히 (9/47)


09. 내가 감히
2023.01.30.


죽어야 한다면 지금이 아닐까.

비앙카는 지극히 진심이었다.


“마음에 들지 않으신다면 곧장 명하시는 대로 다시 준비하겠습니다.”

황녀일 때도 누려보지 못한 극진한 대우와 눈이 멀 것 같은 호화로운 침실.

속을 알 수 없지만, 다정하기 짝이 없던 공작의 태도.

끝을 예감했던 날의 마무리가 너무도 근사했다.

마치, 자신이 몹시 귀한 사람인 듯.

사랑받는 듯한 착각이 모질게 들 정도로 모든 것이 믿을 수 없을 만큼 완벽했다.

비앙카는 크게 숨을 들이켰다.

틈틈이, 그리고 확실하게 자신의 처지를 되새기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사람의 마음이란 건 생각보다 하잘것없었다.

뻔히 아는데도.

정말로, 진짜로 확실히 알고 있는데도.

평생 갈구해오던 모든 온기를 맛보자 다짐 따위는, 이성 같은 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다.

비앙카는 자신의 답을 기다리는 헤일리를 바라보다 버석한 소리를 내었다.


“이미 충분해.”

이대로는 조금 위험했다.


“식사는 되었으니 준비할 필요 없어. 목욕물이 준비되었다고 했나?”

“네, 마님.”

“그럼, 곧장 목욕하도록 하지.”

담담한 목소리를 냈다고 생각했는데, 기어이 말끝이 흔들리고 말았다.

울컥 차오른 감정 때문이었다.

얼른 삭이지 않으면, 곤란해지고 말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혼자 있어야 해!

절박한 심정으로 비앙카는 재빨리 덧붙였다.


“시중은 되었으니 물러가봐도 좋아.”

이렇게까지 말할 생각은 없었는데, 어서 혼자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조급해져 그만 말투가 고압적으로 되고 말았다.

아차 하는 생각에 돌아봤지만, 헤일리의 표정은 변화가 없었다.

은은한 미소도 공손한 태도도 여전했을 뿐더러,


“그럼, 환복을 도와드려도 될까요?”

오히려 말투가 한층 더 조심스러워졌다.

그 모습에 어쩐지 눈물이 날 거 같았다.


“아니. 사양하겠어요.”

바짝 신경을 썼던 덕에 말투는 평소처럼 돌아왔지만, 헤일리를 돌려보내고 혼자가 되어도 여전히 심박은 진정이 안 되었다.

두근두근두근.

금방이라도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하아.”

비앙카는 붉게 물든 뺨을 가리듯 손으로 감싸 쥐었다.


 


“그럼, 곧장 댁으로 모실까요?”

데보라는 시녀의 말에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머리가 울리고 온몸이 쑤셨다.

기본적인 처치는 해두었다고는 하나, 건성이었다.

고작 몸을 일으키는 정도로 머리에 매둔 붕대가 반쯤 흘러내렸다.

처치가 제대로 되었을 리 만무했으니 온몸이 아우성을 치더라도 빨리 후작저로 돌아가는 편이 이로웠다.

황녀의 전속 시녀인 자신을 이렇게 대하다니.

믿을 수 없는 홀대라니 기가 찼지만, 데보라는 익숙하게 한숨을 삼켰다.

죄를 타고난 황녀의 시녀를 자처했을 때 이미 각오한 일이었고 숱하게 겪지도 않았겠나.

이젠 이골이 났는데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러니까 지금 시간이……?”

“막, 자정을 넘겼습니다.”

“하…….”

정수리를 비추는 달빛에 혹시나 했건만.

그러니까 자신은 자정이 넘도록 황의도 없이 빈 휴게실에서 방치되어 있었다.

해도 정말 너무 하잖아.

속으로 툴툴거린 데보라는 몸을 일으키다 표정 없이 자신을 지켜보는 시녀에게 물었다.


“황녀님께서는요?”

“떠나셨습니다.”

생각보다 머리를 심하게 다친 모양이었다.

소리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데보라는 욱신거리는 머리를 손으로 짚으며, 다시 물었다.


“지금 누가 황녀님의 시중을 들고 있나요?”

“황녀님께서는 떠나셨습니다.”

“……비앙카 황녀님 이야기 하는 거 맞습니까?”

말이 왜 이렇게 헛도는 걸까.

짜증스럽게 대꾸한 데보라가 막, 소파에서 몸을 일으켜 세웠을 때였다.

내내 멀뚱히 바라만 보던 시녀가 소리도 없이 다가와 데보라를 능숙하게 부축했다.

후작가의 영애로 살며 데보라 역시 숱하게 시녀의 도움을 받긴 했으나, 맹세코 이런 부축은 처음이었다.

겨드랑이 밑으로 들어온 손 끝에 그리 힘이 느껴지지 않는데 마치 온몸이 포박이라도 당한 듯 단단히 붙들린 기분이라니……?

어쩐지 등골이 오싹해지며 흐릿하던 정신이 바짝 조여진다.


“고맙습니다만 부축은 …….”

“비앙카 황녀님께서는 발로크 공작님과 함께 궁을 떠나셨답니다.”

또각.

등을 지그시 누르는 힘에 데보라는 저도 모르게 시녀와 함께 한 걸음을 떼고 말았다.


“이게 무슨……!”

귀로 들리는 이야기도 통제를 벗어난 몸뚱이도 당혹스럽긴 마찬가지였다.


“로즈베나 궁은 그전에 무너졌지요.”

또각.

대리석 바닥을 두드리는 구두 굽 소리가 섬뜩했다.


“궁이 무너, 무너졌다니 그게 무슨…….”

그러고 싶지 않은데 데보라는 바보같이 말을 더듬고 말았다.

자신이 들은 말이 너무 충격적이었던 탓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도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데보라의 기억은 로즈베나 궁 1층을 달리던 그쯤에서 끊겨 있었다.

그때 데보라는 필사적이었다.

발로크 공작에게 비앙카를 보내는 이유는 뻔했다.

말이 화친혼이었지, 저건 비앙카를 제물 삼아 황제가 도망치려는 속셈이었다.

그 더럽고 치졸한 속내쯤이야 굳이 헤아려볼 필요도 없었다.

제 딸임에도 늘 잡아먹지 못해 안달인 악질이었으니까.

죽으라고 보낸 것을 모를쏘냐.

그것만 해도 가슴이 찢어지는 기분인데, 사실 데보라와 일라이저 후작을 필사적으로 움직여야 했던 이유는 따로 있었다.

비앙카는 일평생 협박을 당했다.

‘일라이저 후작’이라는 목줄을 차고 말이다.


‘반역의 증거는 있었니?’

달아나자며 조르는 제게 비앙카가 그 말을 하는 순간 데보라는 익숙한 절망감을 느꼈다.

이번에도 역시 협박을 당한 게 분명했다.

아마 아버지가 띄운 배도 발각되었으리라.

마련해둔 방법이 모두 수포가 되었으니, 비앙카를 구해낼 방법이 없었다.

우는 자신을 두고 돌아서던 비앙카는 그 어떤 때보다 아름다웠다.

정신없이 울던 데보라가 정신을 차린 건 그때였다.

평소 화장도 하지 않는 비앙카가 정성으로 자신을 치장한 이유를 깨달아서.

일라이저 후작가를 위해 필사적으로 발로크 공작의 마음을 얻으려 했음을 알아서.

그래서 뒤늦게 달리기 시작했다.

저 가여운 피붙이를 어떻게든 살려보려고.


‘누가 좀……! 누가 황녀님을!’

도와줘!

채 내뱉지 못한 말과 함께 데보라는 기억이 끝나 있었다.

뒤통수가 욱신욱신했다.

또각.


“북부의 레이디가 되실 분을 감히 업신여긴 이곳을 그냥 둘 수야 있나요.”

말투는 사근사근하고 행동에 절도는 있었다.

하나 데보라는 이것이 보통 시녀가 아니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황실 예법이 완벽하지만, 이것은 시녀의 것과 달랐다.

이건…….


“당신 기사인가?”

데보라의 말에 옅은 웃음소리가 울렸다.


“발로크?”

“몸은 어떠십니까?”

부정은 돌아오지 않았다.

정체가 탄로 났다고 생각해서인지, 기사는 시녀 행세도 집어치운 듯 움직임에 한층 더 거침없어졌다.

보폭이 단숨에 두 배로 넓어지고 몸에 힘이 들어가 더욱 행동이 가벼워졌다.


“영애께서는 구조되신 거랍니다. 폭발에 휘말려 의식을 잃고 계시다 우연히 발견되었지요. 한 오 년쯤 요양해도 아무도 의심하지 않을 만큼 위중한 부상을 입었지만 ‘운이 좋아’ 후유증이 남지 않은 상처를 입었답니다.”

“이거, 그쪽 솜씨인가 보지?”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데보라는 바닥을 두드리던 구두 굽 소리가 말끔히 사라진 것을 깨닫고는 소리 없이 웃음을 터트렸다.

살다 살다 이런 괴물은 처음이었다.

하긴, 발로크 공작도 인간이 아니라 했던가.

빙벽 너머 마물을 단신으로 처리한댔지.

지끈거리는 머리는 걸음을 걸으며 데보라는 자신의 상태가 생각보다 훨씬 안 좋다는 것을 깨달았다.

대체 어떻게 한 건진 모르겠는데 곧, 의식이 끊어질 거라는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언니는?”

“떠나셨습니다.”

“무사, 한 거지? 살아 있지?”

머리 속이 흐릿해지며 걸음을 걷는 건지, 시녀에게 끌려가는 건지 감이 오지 않았다.


“팔다리 멀쩡하고, 잘, 살아 있……는 거지?”

“북부의 레이디께 누가 감히 위해를 가하려고요?”

“그거야 당연히…….”

바닥이 확 올라오는 느낌과 함께 띄엄띄엄 이어지던 데보라의 목소리가 뚝 끊겼다.

사방이 소름 끼치게 적막해진 가운데 쓰러진 데보라를 가볍게 안아 든 ‘시녀’가 조금 전과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가뿐한 걸음으로 빠르게 움직였다.

흡사 달리는 것 같은 속도였다.

그녀가 걸음을 멈춘 것은 본성의 인기척이 느껴지는 곳이었다.

들고 있던 데보라를 내려 업듯이 걸치고는 앓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누구, 헉헉, 누구 없어요?”

“……누구십니까?”

“데, 데보라님께서 돌아가시겠다고! 헉.”

“데보라님?”

경계하는 듯 하던 기사들이 익숙한 이름에 하나둘 달려왔다.

데보라 일라이언은 오늘 황궁에서 그 누구보다 유명해졌었다.

예고 없이 무너진 성에서 운 좋게 살아난, 비앙카 황녀의 전 시녀로.

공작저로 떠난 주인인 비앙카가 데려가 주지 않았으니 그녀는 원래라면 다른 황족의 시녀로 보내져야 했지만, 상태가 위중했기에 황실은 그녀를 방출하기로 했다.

기사들은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쓰러지려는 시녀를 도와 데보라를 일라이저 후작저의 마차에 태웠다.

모든 것은 순조로웠다.

원래라면 훌륭한 ‘인질’인 데보라의 퇴궁은 이렇게 간단하게 처리될 게 아니었다.

하지만, 머리를 심하게 다쳐 회복 후에도 예후가 그리 좋지 못할 거 같다는 황의의 소견이 결정적이었다.

상태가 성치 못한 데보라는 아무런 가치가 없었다.

오히려, 일라이저 후작의 원한만 사게 될 터였다.

그렇게 결정된 퇴궁이었다.

오늘 일로 황실은 이래저래 손해가 막심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어린 시녀의 말에 기사들이 조심히 다녀오시라는 말을 덧붙이며 작은 출입구를 열어주었다.

간이 도개교도 진작에 내려져 일라이저 후작가의 마차가 황성을 빠져나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따각. 따각.

말 편자가 잘 닦인 도로를 때리는 소리가 요란했다.


 
훈김이 피어오르던 물이 차게 식을 때까지 욕조에 앉아 있었더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비앙카는 달달 떨며 옷을 걸치기 시작했다.

몸을 혹사하는 걸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오늘은 달리 방법이 없었다.

기대 같은 건 오래전 접었다고 믿었다.

그런데, 다정한 공작과 자신을 지극히 모시는 공작가의 모습에 들뜨기 시작한 마음이 잘 잡히지 않았다.

온몸이 얼 것 같은 찬물에 앉아 있으려니, 흥분이 차분하게 가라앉으며 잊고 있던 자신의 처지가 떠오른다.

원수의 딸.

황실의 족쇄.


“…….”

비앙카는 욕조에서 나와 파리하게 질린 손으로 젖은 머리를 털었다.

춥다 못해 온몸이 얼어버린 기분이었다.

따끈한 초콜릿 한잔과 두툼한 로브가 너무 절실했다.

비앙카가 벌벌 떨며, 막 설렁줄을 당기려던 순간이었다.

노한 황제의 고함이 벼락처럼 머리를 울렸다.


‘사람을 죽이고 태어난 네가 감히!’

갈 길을 잃은 하얀 손이 허공에서 툭,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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