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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1. 몸이 델 것 같아요 (11/47)


011. 몸이 델 것 같아요
2023.02.06.


두근두근.

심박이 무섭게 솟으며 모든 감각이 차단되던 순간이었다.

잊었어?

생각보다 사람은 쉽게 죽어.

누군가가 그의 귓가에 대고 비웃었다.

두근두근두근.

머릿속이 하얘지고, 심박이 무섭도록 솟았다.

아무리 귀를 기울여도 고막을 울리는 것은 놀란 자신의 심박뿐, 질리언은 아무것도 들을 수가 없었다.


“비앙카.”

고개를 든 질리언은 늘어진 여자를 꽉 안았다.

그의 얼굴은 비앙카보다 더 하얗게 질려 있었다.

눈을 깜빡이지도 않은 채 질리언은 비앙카를 바라보았다.

두 팔에 든 여자는 너무 가벼워 이렇게 하지 않으면, 품 안에 있다는 것이 실감 나지 않았다.


“어째서…….”

“공작각하?”

질리언은 자신을 부르는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느릿하게 고개를 돌렸다.

질리언의 고함에 놀라 달려왔던 크레타는 서로의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소름이 돋았다.

길게 찢어진 황금빛 눈동자.

표정 없는 아름다운 얼굴.

온기 없이 싸늘하게 깔리는 시선.

모두가 익히 크레타가 아는 그의 주인의 모습이었다.

그런데…….

크레타는 잘게 숨을 뿜었다.

마치 똬리를 튼 거대한 짐승을 마주한 듯한 이 느낌은 뭘까.

금방이라도 그가 웅크린 몸을 펴 자신을 갈가리 찢을 것 같다.

크레타는 머릿속을 빠르게 물들이는 어둑한 상상을 털어내며 질리언을 불렀다.


“공, 공작님.”

마치 죽은 새끼를 품은 짐승처럼 몸을 웅크린 질리언의 모습은 위태롭기만했다.

하지만, 이대로 두었다가는…….

크레타의 시선이 질리언의 품에 늘어진 황녀를 빠르게 스치고 떨어졌다.


“……의원을 부를까요?”

“의원?”

잘 빚은 석상처럼 꿈쩍도 하지 않던 질리언이 눈을 깜빡였다.

크레타는 조심스럽게 한발을 더 내디뎠다.


“숨소리가 너무 희미하십니다.”

“숨소리가 들린다고?”

질리언은 미간을 찌푸리며 작게 중얼거렸다.

고작, 그 정도였다.

그런데 순간 목을 조르는 것 같던 무시무시한 압박감이 일시에 걷혔다.

일시에 몸에 더운 피가 도는 기분에, 크레타는 잘게 진저리를 치며 입을 뗐다.


“공작님. 어서 의원을 부르는 편이 좋겠습니다.”

여전히 질리언의 눈동자는 길게 찢어진 그대로였다.

하지만, 조금 전과는 확연히 다르다.

그의 시선은 지금 분명히 이곳에 있었다.

조금 전 상황이 무엇인지, 어떻게 일어난 건지 하나도 모르지만, 크레타는 확신했다.

황녀가 이대로 숨이 끊어진다면 이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무시무시한 일이 벌어질 거라는 걸.

크레타는 느릿하게 무릎을 꿇으며 등 뒤에 따라붙은 헤일리에게 속삭였다.


“헤일리, 의원을 불러줘.”

그리고 그보다 더 느리게, 두 팔을 질리언에게 내밀었다.


“공작님, 황녀님을 제가 옮겨드려도 될까요? 침대에 뉘어드리는 것이 좋겠습니다.”

“안 돼.”

크레타는 말없이 힘이 바짝 오른 질리언의 두 팔을 바라보았다.

날씬한 생김과 달리 질리언은 힘이 굉장히 셌다.

인간을 가볍게 상회하는 악력은 뜻하지 않게 의자 팔걸이를 종종 으스러뜨렸다.

그런 힘을 가냘픈 황녀의 뼈대가 버틸 수 있을까.


“그럼……. 헤일리에게 옮기라고 할까요?”

“안 돼.”

크레타는 황녀를 가슴에 박아버릴 듯 힘껏 끌어안는 질리언의 모습에 빠르게 뒤로 물러섰다.

질리언은 불안정한 상태였다.

자칫 불상사가 생길까봐 황녀를 건네받으려 한 것인데 그것이 오히려 질리언을 자극한 모양이었다.

이대로라면 정말 황녀가 수수깡처럼 똑, 부러질지도 모른다.


“안고 계세요.”

“…….”

“이불을 가져다드릴 테니, 부디 잘 안고 계세요.”

항복하듯 두 손을 들어 보이며 크레타는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살살.”

죽이지 말고.


 


“죽어버렸으면 좋았을 텐데.”

“예?”

“……비앙카 말이야.”

산뜻한 제러미의 목소리에 프랜츠 백작의 이마는 순식간에 식은땀으로 축축해졌다.

방금, 들어서는 안 되는 소리를 들어버렸다.


“준비했던 일이 다 어그러져서 여간 짜증 나는 게 아니야.”

핼쑥하게 질린 프랜츠 백작을 바라보던 제러미는 이내 손에 든 서류로 시선을 돌렸다.

팔락, 팔락.

예상했지만, 그것을 확인하는 건 또 다른 문제였다.

기분이 걷잡을 수 없이 곤두박질쳤다.


“아아……. 정말이지.”

제러미는 이를 빠득 갈았다.

한창 준비 중이던 북부의 광산개발과 국경지대 사업이 모두 백지화되었다.

전부 비앙카 때문이었다.

죽었어야 했는데.

제러미는 두통이 이는 이마를 손가락으로 지그시 누르며 치미는 고통을 삭였다.


“저건 언제 죽는 거야?”

“히익!”

맞은 편에 앉은 백작이 다 죽어가는 소리를 내며 벌벌 떨었다.

제러미는 허옇게 뜬 백작의 모습에 입을 비틀어 못되게 웃어 보였다.


“왜?”

프랜츠 백작과 준비 중이던 사업은 전부 비앙카의 ‘죽음’을 전제로 시작했다.

그것을 뻔히 아는 작자가 이제 와 저런 무해한 표정이라니?

제러미의 희박하던 이성이 뚝, 끊긴 건 바로 그때였다.

잔뜩 겁에 질린 백작의 얼굴 위로 순진무구한 표정의 비앙카가 겹쳐 보였다.

이 모든 일을 벌여놓고선,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제가 의도한 게 아니라는 듯 말간 얼굴을 한 비앙카가 말이다.


“이제 와 생각해보니 큰일이다 싶어?”

손에 쥔 서류를 흔들어 보이며 제러미가 사납게 미간을 구겼다.


“백작. 북부의 광산이 죄다 날아갔어. 이건 정말 큰 일이야.”

비앙카가 죽지 않고 북부로 향하는 통에, 짐승을 눈앞에서 놓치고 말았다.

덕분에 그 목에 ‘황족 시해’라는 족쇄를 달아 긁어내려던 것들이 전부 날아갔다.

프랜츠 백작의 보고에 따르면, 북부 관할령에 걸쳐진 광산은 수십 개였다.

대부분 금과 마정석으로 매장량이 짧게는 30년, 길게는 채굴 기간이 짐작도 가지 않을 만큼 훌륭한 것들이었다.

이자르와 협상이 잘되지 않을 경우, 제러미는 보상금을 북부에서 채굴해서 메울 심산이었다.

그런데 비앙카가 황녀로 죽어주지 않아 모든 것이 비틀리고 말았다.

하나같이 속이 아릴 만큼 아까웠지만, 그중 가장 뼈아픈 것은 이자르에 건네야 할 보상금을 생으로 메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는데, 죽지도 않는다.

제러미는 진심으로 애통해했다.


“그것의 목숨값으로 북부령의 광산에 징수령을 내릴 작정이었지. 그런데 고것이 살아 있으니 이 방법은 날아갔고 난 당장 황금 열 궤짝이 필요해. 백작 이걸 어쩌면 좋지?”

“화, 황태자 전하.”

“난 백작이 보내준 조사자료만 믿고 있었기에 이만저만 낭패가 아니야.”

“아아…….”

“나를 곤경에 빠뜨리다니. 이건 그러니까, 반역이 아닐까 하는데.”

프랜츠 백작은 순식간에 싸늘해진 표정으로 저를 추궁하는 황태자의 모습에 절망했다.

죽지 않은 비앙카 황녀를 대신할 희생양은 아무래도 자신인 모양이었다.


“제, 제발 살려주십시오.”

프랜츠 백작은 두 손을 모아 빌었다.

어린 시절 비앙카가 제러미에게 자비를 구하던 바로 그 자세였다.

* * *

질리언은 주문처럼 쉬지 않고 중얼거렸다.


“비앙카.”

사람은 쉽게 죽는다.

주어진 수명도 찰나에 불과한데, 그나마도 채우지 못하는 게 사람이었다.

질리언은 목숨이 얼마나 쉽게 스러지는지 잘 알고 있었다.

차게 식어 신체 활동이 거의 멈추다시피 한 비앙카를 두고 의원은 저체온증이라고 진단했다.

‘왜’라고 물을 필요는 없었다.

이곳은 일 년 내내 얼어 있는 곳이었다.

빙벽이 뿜어내는 가공할만한 냉기는 그 어떤 것도 얼려버렸다.

위험한 고비는 넘겼다.

의원은 비앙카가 깊게 잠든 것이라고 했지만, 질리언은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손끝에 덜렁 들리던 가벼운 몸.

차게 식어버린 피부.

질리언은 자신을 남기고 진작에 죽어버렸던 이를 알고 있었다.


‘난, 곧 죽어.’

‘두 번 다시 보지 못하겠지.’

덤덤하게 작별 인사를 건네던 순간의 희미하던 웃음이 각인되어버린 것도 모르겠지.

홀로 남겨져 겁쟁이가 되어버린 것도 결코 모르겠지.

질리언은 짙은 숨을 뿜으며 머리를 감싸 쥐었다.

혼자 둬서는 안 됐는데.

이루 말할 수 없는 자괴감에 빠진 그를 위로하는 것은 귓가를 울리는 희미하지만 규칙적인 숨소리였다.


“비앙카.”

질리언은 다시 한번 소리 내 중얼거렸다.

그때였다.


“……네?”

금방이라도 꺼질 듯 연약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에 질리언은 튕기듯 일어나 비앙카에게 다가갔다.


“비앙카.”

비앙카는 아직 정신이 들지 않은 듯 눈을 느릿하게 끔뻑이기만 했다.

크게 벌어진 까만 동공에, 질리언은 가슴속이 선뜩해지는 기분이었지만 그는 침착하게 굴었다.


“부인, 정신이 드세요?”

“제가 잠이 깊이 들었나 봐요.”

돌아오는 소리를 듣지 못했어요.

눈을 끔뻑이던 비앙카가 살짝 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깊이…….”

태평한 말에 질리언은 쓴 물이 올라오는 기분이었지만, 이내 다정하게 속삭였다.


“더 주무세요. 아직, 아침은 멀었어요.”

여태 비앙카가 눈을 뜨길 바라며 안달복달하던 모습은 싹 지운 채 미소 짓는 그는 짐짓 여유로워 보였다.

그러나 비앙카의 뺨에 붙은 머리칼을 떼어주는 질리언의 손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더 자요. 왜 일어나신 거예요?”

“좀 뜨거워서.”

비앙카의 말에 질리언은 뜨거운 물을 가득 채운 물주머니를 가득 둘러둔 것을 떠올렸다.

체온을 올리기 위해 처방이었다.


“오늘은 유독 추운 날이에요.”

“정말 뜨거워요.”

숨이 막히는 기분이에요.

살살 달래는 말에 비앙카가 울상을 지으며 손을 뻗어 그를 살짝 움켜쥐었다.

손등에 닿는 희고 가는 손가락은 뜨거웠다.


“몸이 델 것 같아요.”

할딱거리는 숨소리가 퍽 가여웠다.

마음 같아서야 당장 물주머니를 빼주고 싶었으나, 그래도 될지 질리언은 확신이 들지 않았다.

의원을 부르는 게 가장 확실한데, 그랬다간…….


‘눈치 보겠지.’

분명.

질리언은 비앙카가 자기 자신을 무어라 생각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황궁에서 버림받았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부터 스스로를 포기한 듯, 구는데 모를 수가 없었다.


‘제물’

그런 상황에서 한차례 소동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제발.”

그러나 저 목소리엔 버틸 수가 없었다.

이건 불가항력이었다.

애원하는 비앙카의 목소리에 작게 한숨을 내쉰 질리언은 빠르게 물주머니를 치워주었다.

겨드랑이에서 하나.

목덜미에서 하나.

툭툭.

묵직한 물주머니가 그의 발치에 차곡히 쌓였다.

하나씩 빠질 때마다 비앙카는 살 것 같다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숨 막히게 둘러싼 뜨거운 물주머니가 모두 치워지고 옆자리에 질리언이 눕자 비앙카는 그야말로 목 졸린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물주머니가 낫겠어요?”

질리언은 비앙카의 목 뒤로 팔을 넣어 몹시 자연스럽게 품에 쓸어 넣었다.

뻣뻣하게 굳은 몸을 모르는 척, 몸을 바짝 붙이고


“이만 주무세요. 아직 새벽이에요.”

다정한 목소리로 어르며 질리언은 부드럽게 비앙카의 마른 등을 쓸어주었다.

물주머니가 달군 여린 몸은 뜨끈했다.

그래서일까, 어쩐지 그도 덩달아 후끈 달아오르는 기분이었다.

홧홧하게 달아오르는 기분에 잠깐 숨을 고르던 질리언은 문득, 비앙카가 한 말이 떠올랐다.


‘몸이 델 것 같아요.’

아아…….

그래.

가슴에 불이 나는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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