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2. 그래서 일은 어떻게 됐지?
(12/47)
012. 그래서 일은 어떻게 됐지?
(12/47)
012. 그래서 일은 어떻게 됐지?
2023.02.10.
“이만 주무세요. 아직 새벽이에요.”
정수리로 떨어지는 나직한 미성에 비앙카는 작게 숨을 몰아쉬었다.
이미 그것만도 충분히 버거웠는데.
등허리를 따라 느릿하게 움직이는 그의 손을 느끼는 순간 비앙카는 숨 쉬는 것도 잊을 만큼 긴장하고 말았다.
맙소사.
물주머니를 끼고 있다 익어버릴 걸 그랬지.
아니, 익어버렸나.
그의 손이 우묵한 등골을 따라 움직일 때마다 척추를 타고 생전 처음인 열감이 솟는다.
다정한 목소리, 부드러운 손짓.
‘오늘은 유독 추운 날이에요.’
그가 어째서 이러는질 알아 비앙카는 신음하지 않으려 필사적으로 애썼다.
하지만, 난생처음인 감각이 도저히 참아지지 않는다.
그래서 몸을 웅크린 건데 비앙카는 깜빡한 게 있었다.
안긴 채 허리를 굽히면 그의 가슴에 파고들게 된다는 것을 말이다.
“……!”
이마가 그에게 닿는 느낌에 화들짝 놀라, 몸을 물리려 했지만 질리언이 비앙카의 목덜미를 움켜쥐는 것이 먼저였다.
커다란 손아귀가 목덜미를 슬쩍 쥐고는 엄지로 우묵한 곳을 부드럽게 문지르는 것은 기분이 좋았지만 한편으로는 야릇했다.
머리끝까지 쭈뼛해지는 소름에 바르르 떨자 그가 추워서라고 생각한 듯 바짝 끌어당겨 안았다.
그의 가슴에 볼이 꾹 눌리도록.
맞닿은 뺨으로 건강한 심박과 딱 좋은 온기가 넘어왔다.
“잘 자요.”
작게 벌어진 비앙카의 입술이 다물린 건 바로 그때였다.
이건, 도저히 거부할 수 없었다.
“잘 자요, 질리언.”
그에게 닿은 부분에서 열이 솟아 전신이 화끈거리는 기분이었다.
도저히 잘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러나 밀어낼 수는 없었다.
‘잘 자요’
처음 들어본 잠자리 인사가 너무도 다정해 어쩐지 눈가로 열이 쏠렸던 탓이었다.
비앙카는 질리언의 가슴에 조금 더 이마를 꾹, 붙였다.
눈가의 열이 식을 때까지만.
누구에게인지 모를 속삭임이 입안에서 사그라들었다.
* * *
긴장한 듯 곧게 서 있던 척추가 오래지 않아 부드럽게 늘어졌다.
질리언은 비앙카가 잠든 것을 확인하자마자 손을 뻗어 치워뒀던 물주머니를 끌어다 이불 안에 넣어주었다.
묵직한 물주머니가 뿜어내는 열기가 꽤나 후끈했다.
하지만, 그의 가슴에 맞닿은 비앙카의 온기만큼은 아니었다.
목덜미 뒤로 작은 물주머니를 넣어주던 질리언은 문득, 비앙카의 머리칼을 세심히 쓸어보았다.
잔뜩 달궈져 있어서 몰랐는데, 이제 보니 머리칼에 물기가 느껴진다.
손끝에 느껴지는 습윤한 느낌에 질리언은 반듯한 아미를 구겼다.
북부에서 젖은 머리칼이라니 가당키나 하나.
질리언은 옅게 한숨을 내쉬었다.
경계하는 비앙카를 배려하는 것도 좋지만, 아무래도 헤일리에게 제대로 된 시중을 들라고 명령해야 할 모양이었다.
이런 식이라면 비앙카는 언젠가 얼어버릴지도 모른다.
“그렇게 두고 보지 않겠지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잔뜩 심사가 비틀려 질리언은 꽤 사나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그에게 안겨 무방비하게 늘어진 비앙카의 모습이, 마치 그를 받아들인 것 같아 기묘한 충족감이 든다.
굳은 입매는 허물어진 지 오래였다.
질리언은 잠든 비앙카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부드럽게 감긴 눈매와 편안하게 풀린 입꼬리.
희미하게 드리운 홍조 덕분일까.
잠든 비앙카는 살짝 미소를 짓는 듯 어여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예뻐라.
질리언은 입꼬리를 늘려 빙긋 웃었다.
비앙카가 허락한다며 이대로 영원히 품에 넣어놓고 한없이 재우고 싶을 만큼 예쁜 모습이었다.
“좋은 꿈 꾸세요.”
한참 만에 질리언은 비앙카의 이마에 입맞춤을 남기고 몸을 일으켰다.
멀어지는 온기가 아쉬웠던지 작게 뒤척이는 모습이 너무 사랑스러워 품에서 놓고 싶지 않았으나, 질리언은 격렬한 충동을 꾹 참고 침대에서 빠져나왔다.
“공작님.”
아까부터 문밖에서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기사가 그를 부르고 있었다.
이 밤, 그를 찾아온 용건이야 듣지 않아도 충분했다.
“공작님! 마물이…….”
알고 있다니까.
짜증스럽게 중얼거린 질리언은 혹시라도 비앙카를 깨울세라 침대 휘장을 내리고 빠른 걸음으로 침실을 빠져나왔다.
“쉿.”
“쉿.”
엉겁결에 그를 따라 손가락을 세운 기사에게 질리언이 경장을 걸치며 물었다.
“7성채인가?”
“아닙니다. 빙벽 근처입니다.”
“빙벽? 웨이브인가?”
“아닙니다. 웨이브라 보기엔 절대적으로 부족합니다. 하지만 이 시기엔…….”
질리언의 걸음이 달리듯 빨라진 건 바로 그 순간이었다.
“빙벽 너머 마물이 기어 나오긴 이르지.”
“그래서 지금은 어떤데?”
밤 시중을 드는 시녀들이 모여 작게 소곤거렸다.
언제 있을지 모르는 새벽 호출을 기다리며 잡담을 나누는 건 늘 있는 일이지만, 오늘은 조금 달랐다.
다들 잠을 쫓기 위해 의무적으로 입을 여는 게 아니었다.
“왜 또 무슨 일 있어?”
“공작 각하께서 침실에서 나오시지 않는다잖아.”
“어머어머?”
속삭이는 시녀들의 눈이 별처럼 반짝였다.
그도 그럴 게 질리언 발로크와 비앙카 테르미나였다.
관심이 쏠리지 않는 것이 이상한 일이었다.
제국 제일미인 비앙카 황녀와 인간이 아니라는 소문이 도는 아름다운 발로크 공작.
그림으로 그린 듯한 둘의 조합에 흥분하는 건 당연했다.
하나, 지금 시녀들을 들뜨게 하는 건 다른 이유였다.
‘테르미나를 얻은 발로크가 비로소 오랜 속박에서 해방되리라.’
테르미나 황녀와 젊은 발로크 공작의 결혼은 오래전부터 전해져오는 전설을 충족시켰다!
심지어, 이번 결혼은 사일러스 발로크의 목숨값으로 황가에서 황녀를 바친 모양새가 아니었나.
둘의 결합은 발로크가 테르미나를 얻었다고 보기에 충분했다.
발로크는 테르미나의 일이라면 뭐가 됐건 복종하듯 응했고 테르미나는 발로크의 무조건적인 헌신을 기껍게 즐겼다.
이 기형적인 관계는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니라 유구한 역사였다.
그러나 그 어떤 억지를 부리는 테르미나도 딱하나, 절대 하지 않는 것이 있었다.
바로 발로크를 짝으로 삼는 것.
실제로 발로크를 열망했던 테르미나가 없던 것도 아니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바로 선대 황녀만 해도 전 공작인 사일러스 발로크에 그렇게나 목을 맸었다.
황제에게 울며불며 매달리는 것은 기본이고, 황적에서 파내도 좋다 자신 명의의 모든 광산을 반납하겠다.
온갖 조건을 다 달았으나 황제는 승낙해주지 않았다.
오히려, 선황녀를 제국에서 가장 먼 왕국으로 시집을 보내버렸다.
말은 화친혼이라고 했으나, 상대는 제국과 교류가 거의 없는 소왕국이었다.
배로만 한 달이 넘게 걸리는 먼먼 곳.
드러내놓고 반대하지는 않았으나, 그 어떤 테르미나도 발로크와 이루어지지 못했다.
사람들은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테르미나는 이 기형적인 관계를 포기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그 누구보다 강대한 힘을 가진 발로크는 그 어떤 대가도 없이 테르미나를 향해 한결같고도 헌신적인 충성을 보여왔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발로크가 테르미나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주변국에 큰 위협이 되었다.
일반인은 절대 죽이지 못하는 마물을 홀로 막아내는 충성심 깊은 공작.
그런 이가 버티고 있는 곳에 감히 전쟁을 선포할 정신 나간 나라가 있을 리가 있나.
발로크는 테르미나에게 화수분이나 마찬가지였다.
감정에 휘둘려 모험을 하기에 발로크는 너무도 매력적이었다.
역대 황제들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황가의 일원을 유폐시키듯 먼 곳으로 보내버리는 한이 있어도 절대, 발로크와 이어지는 것만은 막아왔다.
그런데 이번 대의 황제가 금기 아닌 금기를 깨버렸다.
테르미나의 명이라면 목숨까지 선선히 내놓는 발로크를 죽여서, 발로크의 목숨값으로 테르미나를 치렀다.
유구한 역사 이래 단 한 번도 허락되지 않던 금기가 파훼 된 것이다.
전설을 아는 이라면, 제국민이라면 흥분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지 말고 좀 더 이야기해줘.”
잦아드는 것 같던 이야기가 한 시녀의 채근에 의원 옆에서 잔심부름을 도왔던 시녀에게로 이목이 쏠렸다.
“넌 그 자리에 있었잖아. 뭐든 이야기 좀 해줘 봐. 궁금해 죽겠단 말이야.”
모두의 시선을 받은 시녀가 멋쩍은 표정으로 뺨을 긁었다.
그녀가 침실에 머문 것은 잠깐이었고, 잔심부름에 바빠 이불에 둘둘 싸인 황녀를 안고 있는 공작의 모습을 본 게 전부였다.
그나마도 이미 다 이야기했다.
“없어. 아까 말한 게 다야.”
시녀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아, 뭘까. 결혼했으니 뭔가 일이 일어나는 게 아니었어? 전설대로…….”
“일은 무슨 일! 조용히 하지 못해!”
갑작스러운 호통에 소곤거리던 시녀들이 깜짝 놀라 파드득 떨었다.
그 결에 수 놓느라 들고 있던 색실이 떨어져 굴렀다.
돌돌 굴러간 색실 뭉치가 멈춘 곳은 반질거리는 구두 앞이었다.
“세, 셀린?”
색실을 주워들던 엘리자벳의 눈이 동그래졌다.
“누가 이렇게 겁이 없어?”
매섭게 화를 내기에 시녀장님이라고 생각하고 찔끔했건만, 셀린은 정말 생각지 못한 인물이었다.
“네가 여긴…….”
“지금 그게 문제야? 어디서 함부로 전설이니 뭐니 이런 소리를 입에 올려?”
“어?”
“황적에서 지워진 사람을 감히, 테르미나라고 칭하다니 전부 황실 모독으로 끌려가고 싶은 거야?”
황녀님은 황녀님이지 황적에 파였다는 건 또 무슨 소리일까.
갑자기 이게 무슨 말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감히 주인의 이야기를 속닥거린 죄가 있어 시녀들은 찔끔해 입을 꾹 다물었다.
“다들 입 조심해. 황실과 함부로 엮었다가는 큰일 날 줄 알아.”
“황실과 엮은 게 아니라, 황녀님이잖아?”
“뭐라고?”
“황적에 파내면, 폐하의 자식이 아닌 게 돼?”
“줄리!”
셀린의 말에 반박하듯 대꾸한 건 가장 어린 시녀였다.
이제 막 열일곱이 되었다고 했던가.
들어온 지 한 달이 채 되지 않은 신입이었다.
“네가 지금……!”
눈을 치켜뜬 셀린이 줄리에게 막 한 걸음 다가섰을 때였다.
“무슨 소란이지?”
소란을 들은 듯 시녀장이 들어섰다.
큰일이었다.
새로 온 시녀장은 얼핏 온화해 보였으나, 실수에 가차 없는 사람이었다.
밤 시중을 위해 모여 있는 시녀들이 자수를 놓으며 대기하는 게 아니라 감히 주인의 이야기를 떠들다 목청을 높였다는 것을 알게 되면…….
다들 긴장에 마른침을 꿀꺽 삼키던 그때였다.
줄리가 손을 번쩍 들었다.
“시녀장님.”
“자수가 흡족하지 않아 주의를 준다는 게, 그만 목청이 커졌어요. 소란을 일으켜 죄송해요.”
셀린이 줄리의 말을 자르듯 나섰다.
“……주의하렴.”
“죄송합니다.”
생각보다 쉽게 새벽의 소동이 묻히나 싶어 모두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그때였다.
헤일리가 줄리를 보며 머리를 갸웃했다.
“줄리, 이제보니 치마가 좀 짧구나. 긴 것을 내어줄 테니 당장 갈아입으렴.”
“네, 시녀장님.”
헤일리가 줄리를 데리고 나와 시녀장실에 들어섬과 동시에 온화하던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
“그래서, 일은 어떻게 됐지?”
어린 줄리를 바라보는 헤일리의 눈빛이 무기질처럼 번뜩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