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13. 살아남기 어려워서요 (13/47)


013. 살아남기 어려워서요
2023.02.13.


달칵.

등 뒤에서 묵직한 나무 문의 잠금쇠가 걸리는 소리가 신호라도 된 듯 줄리라 불린 어린 시녀의 눈빛 역시 돌변했다.

철없이 툴툴거리며 셀린에게 대들던 때와 달리 믿을 수 없을 만큼 단단해진 표정은 그녀를 마치 다른 사람처럼 보이게 했다.


“찾아냈어요.”

헤일리는 줄리의 말에 대답 없이 얼굴을 구겼다.

그건 화가 났다기보다는 성가셔하는 쪽에 가까운 표정이었다.


“누구지?”

“짐작하시던 대로예요.”

“셀린은 항상 북부의 추위를 지긋지긋해 했지.”

안타깝다는 듯 혀를 차고 있었지만, 헤일리의 표정 그 어디에도 동정하는 빛은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빨리 움직일 줄이야.”

헤일리가 의심스러워하는 건 당연했다.

비앙카 황녀가 도착한 지 채 하루가 지나기도 전이었다.

그런데, 벌써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퍼트리는 자가 나왔다고?


“셀린이 정확하게 뭐라고 했지?”

“황적에서 지워진 사람을 감히, 테르미나라고 칭하다니 전부 황실 모독으로 끌려가고 싶은 거야?”

줄리는 셀린이 말한 그대로 읊었다.


“황적에서 지워졌다고?”

“들은 바 없습니다.”

버림받은 황녀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황적에서 빠졌다는 소식은 접한 바 없다.

헛소문이라기엔 시녀들을 윽박지르던 셀린의 태도가 묘하게 확신에 차 있었다.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면 좋을까.

셀린의 말이 사실이라면, 자신도 알지 못하는 ‘고급정보’를 셀린에게 건네는 윗선이 있다는 뜻이었다.

생각보다 일이 커진다.

이건 셀린만 처리해서 될 일도 아니었고, 독단적으로 처리할 일도 아니었다.


“공작님은?”

“본성을 빠져나가신 것으로 압니다.”

줄리의 말에 금방이라도 달려나갈 것 같이 굴던 헤일리는 낭패 어린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하필이면.”

“빙벽에서 마물이 넘어왔답니다.”

“이 시기에?”

“그래서 공작님이 확인차 가셨어요.”

하필이면.

이 시기에.

그 외엔 달리 표현할 말이 없었다.

하필이면 공작부인이 입성하는 날, 연이어 두 번이나 말썽이다.

웨이브가 시작되려면 아직도 먼, 이 시기에.

쉬지 않고 일이 터지는 것이 어째 불안하다.

마물이 들끓는다고 소문난 북부이지만 단 한 번도 이런 적은 없었다.

심지어 공작이 하루에 두 번이나 달려가도록 하는 일은.

아직 겨울의 초입.

마물이 움직이기엔 일러도 너무 이른 계절이었다.

모든 것이 갑자기 급박하게 엉켜 돌아가는 느낌이다.


“왜 갑자기…….”

그건 혼잣말이었다.


“뭘 근심하세요. 일어날 일은 언제고 반드시 일어나는걸요.”

헤일리는 또랑또랑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근심한다고 벌어질 일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벌어진 일이 해결되는 것도 아니고요.”

이번에도 줄리는 어깨를 으쓱이며 웃었다.

헤일리 아머가 제일 싫어하는 건 저런 대책 없는 소리를 방책이랍시고 떠드는 거였다.

하지만, 이 순간만큼은 줄리의 말이 꽤 그럴싸해 보였다.

그래서…….


“윽!”

줄리의 머리채를 잡아채 고개를 뒤로 꺾는 것과 동시에 오금을 발로 걷어차 무릎을 꿇렸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줄리는 반항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유순해진 표정으로 헤일리를 올려다봤을 따름이었다.

순하게 늘어뜨린 눈썹이며, 살짝 발갛게 달아오른 눈매가 줄리를 가엽게 보이게 했다.

눈물이 그렁그렁해서도 줄리는 결코 눈물을 떨구지는 않았다.

헤일리는 허리를 굽혀 그 모습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줄리.”

“네.”

줄리는 숨을 헐떡이면서도 공손한 목소리를 내려 몹시 애썼다.


“제법이구나.”

무표정하게 줄리를 살피던 헤일리가 짤막한 칭찬과 함께 웃음을 터트렸다.

내내 싱글거리던 줄리의 얼굴이 희게 굳은 건 그때였다.

머리를 잡히고, 걷어차일 때도 눈 하나 까딱하지 않던 줄리는 헤일리의 미소에 말까지 더듬었다.


“왜, 왜 그러세요. 무섭게.”

“널 공작부인의 전담 시녀로 임명하마.”

“맙소사.”

사납게 찍어누르듯 하던 기세도 말끔히 가시고, 옴짝달싹도 못 하게 머리를 그러쥐었던 손도 푼 지 오래였다.

하지만 줄리는 헤일리를 올려다보던 그대로 뻣뻣하게 굳어 꿈쩍도 하지 않았다.


“저를……? 저를 공작부인의 전담 시녀로 두시겠다고요? 그, 그 말씀은…….”

말을 하다 말고 줄리는 제 입을 틀어막았다.

맙소사.

손아귀 안에서 감탄인지 탄식인지 모를 소리가 쉬지 않고 터져 나왔다.

줄리는 살짝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굴었다.

하지만, 기사에게 ‘레이디’를 호위하는 건 굉장한 명예임을 생각하면 줄리의 반응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다.

그래서 헤일리는 바보같이 구는 줄리를 구박하는 대신, 손을 내밀어 줄리를 일으켜주었다.


“와…….진짜 이건…….”

“잘할 수 있겠지?”

“그럼요!”

줄리는 가볍게 주먹을 쥐어 왼쪽 가슴에 가져다 대 보였다.

넘치는 긍지로 살짝 달아오른 뺨을 한 줄리는 몹시 기뻐 보였다.


“아머경. 아시다시피 저는 몸 쓰는 건 자신이 있거든요?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아요. 전담 시녀 일 같은 건 금방 익히, 악!”

빡.

뭔가 깨지는 소리와 함께 신나게 떠들던 줄리가 머리를 움켜쥐고 쓰러졌다.


“아윽! 아 진짜!”

“시녀장님.”

“……네?”

손가락 사이로 헤일리를 훔쳐보던 줄리는 입을 헤, 벌리고 바보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시녀장님.”

“아…….”

그제야 줄리는 자신이 맞은 이유를 깨달았다.

공작부인의 전담 시녀 자리를 차지해 기쁘고 들떠, 감히 헤일리 아머를 기사라 칭하는 바보짓을 했다.

들떴다고 앞뒤 구분 못 하고 입을 놀리다니.

이래서야 비밀리에 저택에 잠입한 이유가 없지 않나.


“죄송합니다. 아머, 아니 시녀장님.”

줄리는 목까지 벌겋게 달아올라 고개를 푹 숙였다.


“말조심해요. 줄리.”

“죄송합니다. 시녀장님, 앞으로는 잘 하겠습니, 잘할게요.”

“실수하면 바로 잘라버릴 거야. 두 번은 없어.”

“물론입니다. 시녀장님. 명심하겠습니다.”

“이만 가봐. 보고는 저녁에 따로 듣지.”

“네, 시녀장님.”

전방을 응시하며 쏘아지듯 달리는 줄리의 뒷모습에, 헤일리는 절로 한숨이 터졌다.

대체 어떤 시녀가 발목까지 오는 치마를 입고 저렇게 달릴 수 있나.

가르칠 게 한둘이 아니라 절로 눈앞이 캄캄해졌다.

하지만, 헤일리는 알고 있었다.

공작부인의 전담 시녀로 줄리만한 적임자도 없었다.

헤일리는 공작이 함께 입성하지 못한다는 소리에 꼿꼿하게 허리를 세우던 공작부인의 모습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을 경계하듯 차갑게 시중을 물리치던 모습도.


“…….”

생각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만 서도 헤일리도 억울했다.

자신은 평생을 기사로 살아왔다.

황녀를 발로크의 안주인으로 맞이하겠다는 질리언의 말에 시녀장이 된 게 아닌가.


‘내성을 책임질 자가 필요하다.’

그렇게 크레타와 자신이 차출된 참이다.

꼬박 한 달이 넘게 공을 들였지만, 아무래도 평생 몸에 밴 자세며 억양이 쉽게 바뀌진 않았다.

아직도 자신은 ‘어서 오세요.’ 보다는 ‘어서 오십시오.’라는 말투가 더 자연스럽다.

상냥하게 말하려고 애썼지만, 헤일리는 자신의 말에 미묘한 표정을 짓던 비앙카를 보고 말았다.

희미한 반응이었지만, 헤일리 아머는 뛰어난 기사였다.

찰나에 그녀의 표정에 떠올랐던 감정을 죄다 읽어버린 후였다.

평범한 시녀답지 않은 반응에 그녀는 확실히 놀라워했으며 여느 귀부인과 다른 깔끔한 명령으로 자신을 밀어냈다.

순간, 정체를 들킨 건가 하는 생각이 들 만큼 단호한 말투에 두 번 묻지도 못하고 물러났다.

이런 식으로는 제대로 된 시중이 불가능하다.

줄리 같이 조그맣고 어리며 대책 없는 쪽이 때로는 마음을 얻기 나을 때도 있는 법이니까.

게다가 줄리는 그 나이대에선 발군의 실력을 뽐내는 기사였다.

유사시엔 호위로서도 손색이 없으니, 공작부인의 전담 시녀로는 줄리만한 이를 찾기도 힘들었다.

문득 헤일리는 창문에 비친 제모습을 살펴보았다.

기사단에서 매번 왜소하다는 소리를 달고 살았는데, 본성에 들어온 후 키가 굉장히 크다는 소리를 쉬지 않고 듣고 있다.

혹시, 이 키도 문제였을까……?

자신의 어깨에 간신히 미치는 줄리를 떠올리던 헤일리가 문득 조그맣게 한숨을 쉬었다.


“하…….”

공작부인께서 보시기엔 위압적이겠지.

아니, 위협적이겠지.


“흐음.”

어쩐지 조금 의기소침해지는 기분이다.

그건 헤일리 아머가 평생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이상한 기분이었다.


 


“…….”

잠잘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해가 이렇게 환해지도록 푹 자버렸다.

자괴감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중 가장 난처한 건 이렇게 늘어지게 자고서도 몸을 가눌 수 없을 만큼 무겁다는 점이었다.

비앙카는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고작 눈을 굴리는 정도로 시야가 엉망으로 일그러졌다.

세상이 빙빙 도는 것 같기도 하고, 파도가 치는 배 위에 버티고 있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으으…….”

소리 내고 싶지 않았는데 참을 수 없는 어지러움에 신음이 새버렸다.


“어머? 정신이 드세요?”

눈을 질끈 감고 어지러움이 가시길 기다리고 있는데, 어디선가 귀여운 목소리가 울렸다.

실금처럼 눈을 떠 주변을 살피자, 금발 머리의 소녀가 보였다.


“누…….”

누구라고 물어야 했는데 목이 푹 쉬어 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목이 왜 이러지?

그뿐만이 아니었다.

눈을 뜨자 마치 머리가 쪼개지는 것만 같다.

견디기 힘든 고통에 머리를 감싸 쥐려 했는데, 어떻게 된 일인지 손이 꿈쩍도 하지 않는다.

누군가 묵직한 추를 달아놓기라도 한 듯 늘어진 손이 마치 남의 것 같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당황한 비앙카가 쉰 소리를 뿜던 그때, 곁에 있던 소녀가 다가왔다.


“물을 먹여드릴게요. 그럼, 목이 트이실 거예요.”

잠깐 기다리자 목 뒤로 손을 넣어 자신을 일으킨 소녀가 베개를 가져와 받쳐주었다.

비앙카는 그저 가만히 있기만 하면 됐다.

작은 티스푼으로 입안에 물을 흘려 넣어주자, 말라붙은 살점이 푹신하게 젖으며 이내 부드럽게 풀렸다.

혀끝에서 까끌까끌한 입천장을 지나, 고목같이 말라붙은 목구멍까지.

몇 번이나 물을 들이켠 후에야 비앙카는 제대로 소리를 낼 수 있게 되었다.


“누구…….”

“안녕하세요, 공작부인. 저는 줄리라고 해요. 앞으로 전담 시녀가 되어 부인을 모실 예정이에요.”

전담 시녀?

눈앞의 소녀는 기껏 해봐야 열여섯이나 되었을까.

성년도 안된 앳된 얼굴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어린 영애가 시녀 일을 한다고?

말을 하는 건 아직 버거웠지만 비앙카는 해야 했다.

성년이 되기 전, 일을 하는 건 불법이다.


“아직, 일하기엔 어려 보이는데.”

“부인, 전 어리지 않아요. 벌써 열일곱인걸요.”

“열일곱이면 어려. 성년도 안되었으니 일을 하는 게 아니라 보호를 받아야 해.”

“아니에요. 부인. 북부의 성년은 열다섯이랍니다.”

“어째서지?”

비앙카의 말에 줄리가 빙긋 웃었다.


“스무 살에 검을 잡으면 살아남기 어려워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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